소설리스트

네토라세 여친님-124화 (124/142)

〈 124화 〉 걸그룹

* * *

어찌어찌 쾌감에 기절한 듯 쓰러져 있던 유리를 깨운 다음 우린 대기실을 나와 곧장 숙소로 향했다.

인기가 어찌나 상당한지 숙소까지 경비가 붙어야할 정도로 팬들은 극심했다.

아무튼, 숙소에 도착하고 나는 몰래 그녀들이 머무는 곳에 몰래 들어갔다.

아이가 문을 열어주고 안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 사과의 말을 끊임없이 전하고 있는 유리가 보였다.

그녀의 앞에는 제아와 케이,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채이가 있었다.

"어서 와요! 언니 남자친구분!"

태생이 일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아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 때문에 시선이 내게 몰렸다.

"힉...! 강간범.....!"

방금전에 유리가 나서서 날 강간하거나 모질게 구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섹스한 것도 자기가 하고 싶으니까 여기서 해달라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해 준 것뿐이라고 해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이에게는 난 강간범으로 굳혀지게 되었다.

"다 욌네. 당신도 일단 앉아 봐요."

제아가 앉으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그녀들이 앉아있는 소파로 향하자 제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뭘 잘했다고 소파에 앉으려고 해요? 적어도 유리 언니 옆으로 가던가. 아니면 똑같이 무릎 꿇고 손들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해요."

"제, 제아야! 내가 하자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언니. 언니가 떼를 썼다고 해도 뭐가 달라져요? 사람을 죽이자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하면 이해해줘요? 아니잖아요?"

"그, 그래도."

성자님인데. 사랑하는 사람인데 무릎 꿇고 손까지 들게 만들 수는 없는데 저지른 게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딱히 문제없는데.

"괜찮아. 괜찮아."

나는 태연하게 그녀의 옆으로 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 성ㅈ......"

'남자친구.'

또 성자님이라고 말하려고 하자 황급히 째려보며 입 모양으로 남자친구라는 단어를 그렸다.

"히... 나, 남자친구... 남자... 친구... 히히."

그게 그리도 좋을까. 남자친구를 자꾸만 입에 담으며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참... 깨가 쏟아진다. 쏟아져."

그런 모습에 제아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건 알겠어. 알겠는데 지금은 자제해줘."

"응...? 자제?"

"맞아. 자제. 솔직히 두 사람 사이를 내가 갈라놓기는 싫거든? 근데 우리 지금 주가가 끝도 없이 상승하고 있는데 둘이 열애설이 터져봐.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연예인과 그 연예인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사랑이라. 재밌잖아?"

"응. 응."

유리는 밝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과연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까.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까?"

"싫어하는 사람이 많겠죠!"

유리 대신 아이가 대답하였다.

"아이 말이 맞아. 싫어하는 사람이 많겠지. 그리고 우리 그룹에 언니가 절반 이상을 먹여 살리고 있는데 나나 다른 애들도 아니고 언니가 그러면 우린 어쩌라는 거야?"

사건이 터지고 유리가 나간다면 이 걸그룹은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무명 아이돌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겠지.

"그러니까 한동안은 둘이 헤어져."

"뭐.....?"

"다시 말해줄까 언니? 둘이 헤어지라고."

"그게... 그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

헤어지라고 강요하자 유리는 처음으로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질 못하고 비틀거려 내가 붙잡아 주었다.

"아, 고마워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미소를 보였다.

"잠시만요."

그러다가 이내, 다시 얼굴을 굳히며 제아를 째려보았다.

"니가 먼데 헤어지라고 해? 사랑이 죄야?"

"하아. 언니. 죄는 아닌데 이게 언니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나나 케이, 아이, 채이랑 소속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밥줄인데 언니 때문에 끝난다는 거야.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 명이야. 그 수십 명을 위해서 잠시만 헤어져달라는 거잖아? 나중에 무르익으면 그때 그룹을 해체하고 물고 빨든 알아서 하면 되잖아?"

뭐, 유리만의 문제가 아니지.

이미 유리의 어깨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 잠깐 날 만나지 못한다는 건 죽어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어."

"언니!"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왜 희생해서까지 그래야 해? 연예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 말고 다른 사람들을......"

"그냥 넌 더 노력하지 않고 쉽게 내 인기에 업혀 가려는 것뿐이잖아? 그러면 나한테 제약을 먹일 게 아니라 안 들키고 잘 사귀게 응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이렇게 되나?

맞는 말 같긴 한데 내가 아는 연예계는 이런 논리가 성사되지 않는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유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지라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확답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언니. 언니는 연예인이야. 걸그룹 맴버고 리더라고."

"그래서?"

"연예인이란 직업 자체가 무언갈 많이 포기하고 그래야 하는......"

"포기하기 싫다니까?"

"언니.....!"

"싫다고!"

점점 두 사람의 말다툼이 격해지기 시작하였다.

이거 가만히 두면 뭔가 일이 커져도 상당히 커질 듯한 불길한 예감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면 너희들이 결정해."

말리려고 하려던 찰나.

"오늘 일을 계속 모르는 척하던지. 아니면 날 내보내던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해. 난 미련 없이 그 선택에 따라줄 테니까."

"에...? 어, 언니 나갈 거예요?!"

오돌오돌 떨며 두 언니가 말싸움하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채아가 눈가를 촉촉하게 물들이며 물었다.

"두 개 중에 골라."

"으, 으읏... 모, 모르는 척 할게요. 언니 나가지 마요오오!"

채아는 유리가 그룹을 나가는 게 정말 싫은지 눈물까지 보이면서 도도도. 유리의 품에 안겼다.

유리는 그런 채아를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안 나가는 게 좋아."

이상하게도 케이는 유리가 아닌 내게 시선을 가져다 준 상태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저도요! 안 나가면 좋겠어요!"

아이는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였는지 밝게 대답하였다.

"너는?"

유리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제아에게 향했다.

제아의 고운 미간은 왈칵 일그러진 상태였고,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다수결로 이미 확정 났잖아? 그리고 나도 언니가 안 나갔으면 좋겠어."

"내가 나가면 인기가 식을까 봐?"

"그,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고... 있는데. 하아... 유리 언니."

"응."

"헤어지는 건 절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돼."

"헤어질 바에는 오랫동안 함께한 우리들을 버린다는 거야?"

"어."

"조금... 실망스러워. 언니."

"미안해."

나라도 오랫동안 함께 땀을 흘렸던 동료가 여자 때문에 피해를 주며 나간다고 하면 분노를 넘어 허탈함이 강할 것이다.

그걸 지금 제아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고.

이거 미안해지는데.

"그래... 알았어. 알아서 해. 그 대신에 들키면 진짜 내가 미쳐서 언니를 어떻게 할지 몰라. 알았지?"

"응! 물론이지!"

"그래... 그래... 대답은 쉽지. 정말."

제아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거실에는 나와 유리, 케이와 아이, 채이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행이네."

"네...! 성... 아니, 네... 흐."

소중한 애들과 떨어지지 않아서 좋고, 마찬가지로 나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며 남자친구 행세까지 해주니 입꼬리가 귀에 걸려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 갈게. 애들이랑 얘기 좀 나눠봐."

"버, 벌써 가시게요?"

"10시야. 10시."

"아... 그, 그러네요. 배웅해 드릴게요!"

"괜찮아. 누가 볼라."

"그, 그래도....."

혼자 가도 상관없는데 유리는 포기하지 않고 현관까지 따라나왔다.

"아, 그리고 계속 날 성자님이라고 부르려고 하던데."

"죄송해요... 성자님이라고 부르는 게 익숙해져서 그만."

"죄송할 것까지야 없는데 음... 호칭을 바꿔야지. 그냥 훈이라고 불러."

"네엣...?! 그, 그럴 수는!"

사랑교에서는 내 여자친구님이자 교조인 지영이만 날 훈이라고 친근하게 부를 뿐이었다.

다른 여자들이나 다른 남자들이 날 그렇게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는 유리는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동안은 그녀를 포함한 걸그룹을 지키는 경호원 행세를 할 텐데 언제까지고 성자님이라 부르려다가 말 수는 없는 노릇.

애초에 내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법도 없고, 불렀다가 큰 문제가 닥칠 일도 없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한 번 불러봐. 훈이라고."

"으, 으읏.....!"

늘 섹스만 할 뿐이지 사랑이나 그런 감정을 일방적으로만 줬던 유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휙 쳐들었다.

"후, 후후... 훈... 아."

"응. 유리야."

"하으으."

유리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훈아. 훈아. 훈아."

계속 내 이름을 입에 담으며 급기야 내 품에 안겨서는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그녀의 허리와 머리에 손을 얹으며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어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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