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아주 간단히 행해지는 지독한 행위 2
* * *
좁디좁은 내 원룸에 사람이 가득 차 있는 진귀한 풍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친구 하나 없어서 대학 식당에서도 혼자 밥 먹던 아싸가 낯선 이들을 방에 들일 정도로 용케 성장했구나.
그리고 지금 그 아싸 시절이 애가 탈만큼 그리워 미칠 지경이다.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듯 처참하게 어질러진 방 안.
부서진 현관문은 억지로 일으켜 세워 출입구를 가리는 용도로 써먹고 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건 쌍코피를 흘린 채 기절한 남자와 머리에 커다란 혹을 단 채 기절한 남자. 둘 다 줄넘기 줄로 손발을 묶고 눕혀놓았다.
생활공간 초토화로도 모자라 민간인 폭행납치라니!
마지막으로 내 양옆에는 사냥감을 물어온 개들마냥 잔뜩 흥분해 있는 남녀가 있었다.
“다음은 무엇을 할까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일단 5분만 좀 닥치고 있어…….”
이 참담한 현실을 마주 볼 수 없던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뭔데…….
대체 뭐냐고, 이놈들은…….
왜 상전 모시듯 내게 깍듯이 대하는 거냐고.
내가 기물파손과 폭행납치를 저지른 괴집단의 리더가 된 것 같잖아.
그 탓에 경찰에 신고하기 어렵게 됐다.
신고해봤자 저 괴물 같은 신체 능력으로 얌전히 붙잡혀 줄지도 의문이고, 나에 대한 태도 때문에 한통속이라고 오해받을 가능성도 높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현실도피를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눈만 돌린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상황을 바꾸려면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변화할 계기를 줘야 한다.
기나긴 인생 중 4분의 1도 살지 않은 애송이지만 그 정도의 순리는 알고 있었다.
마음의 정리를 마친 난 두 손을 내리고 불청객 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경직된 자세로 내 눈치를 살피듯 힐끔힐끔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내 반응을 보고 사고를 쳤다는 건 직감적으로 안 모양인데, 그것이 뭔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부모에게 혼날까봐 두려워하는 어린애 같은 모습은 조금 전 살기 어린 면모와 괴리가 컸다.
그래도 일단 적의 같은 건 없다는 사실에 살짝 안도할 수 있었다.
조금 냉정을 되찾은 난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두 사람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레반?”
“네, 그렇습니다!”
이름을 불리자 레반은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몸을 똑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이번엔 다소곳한 모습이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을 가진 레테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레테라라고?”
“네, 아버님.”
“아버님이라니?”
“당신이 저희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럼 아버님이 아니겠습니까?”
레테라의 말에 나는 더욱 기가 찼다.
이걸 믿어야 돼?
내가 만든 게임 캐릭터가 현실로 나왔다. 이런 소리를 진짜 믿어야 하는 거야?
그렇다고 조금 전처럼 몰래 카메라로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공을 들였다는 게 문제다.
지금까지 보였던 싸움이나, 그로 인해 벽과 바닥과 현관문 등이 작살난 거나, 영화 세트장처럼 잘 꾸민 무언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심지어 요즘 영화 촬영도 이런 식으로 안 한다. 차라리 CG를 쓰고 말지.
그래도 아직 의심을 풀 수 없던 난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너희들이 정말 내 게임 캐릭터가 맞다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지. 내가 너희들을 만들고 처음으로 한 일이 뭐지?”
레반과 레테라는 별 망설임 없이 바로 질문에 답했다.
“초반에 도망치라고 만들어놓은 튜토리얼 보스를 정면 승부로 박살내는 겁니다.”
“제 경우는 자신감이 붙었는지 거기서 한술 더 떠서 무기 빼고, 방어구 빼고, 맨주먹만 가지고 보스에게 도전해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농락하며 쓰러뜨렸죠.”
“………….”
정답이었다.
봉인된 탑이라 불리는 초반 시작 지역.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튜토리얼의 내용이었다.
그곳에는 ‘추악한 골렘’이라는 이름의 수문장이자 튜토리얼 보스가 존재했다. 그놈을 쓰러뜨려야만 탑을 탈출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게임 시작 당시 캐릭터가 지닌 장비가 너무나도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낡아 부러지기 직전의 단검과 신체 보호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닳아빠진 방어구. 막 게임을 시작한 초보가 그런 장비를 가지고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미로와 같은 탑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싸우기 위한 장비들을 찾아내야 했다.
그동안 추악한 골렘이 얌전히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장비를 갖출 때까지 기다려 줄 이유가 어디 있냐는 듯, 골렘은 미로를 돌아다니는 캐릭터를 끈질기게 쫓아와 죽이려 든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을 흉측한 형태의 괴물을 피해 달아날 때의 긴장감은 공포 게임 장르를 방불케 했다.
처음 이 게임을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에 질려 게임을 포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기가 생겨 계속해서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악착같은 조건 속에서 장비를 모으고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린 뒤, 탑을 탈출하여 맞이하는 따스한 햇살을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함과 달성감을 플레이어들에게 안겨주었다.
그것은 한 번 맛보면 게임을 끊을 수 없게 되는 지독한 함정이다. 내가 그동안 SoR만을 붙잡고 늘어지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고.
물론 그러한 경험도 한 번 뿐이지, 게임에 익숙해져서 새로 부캐를 판 고인물들에겐 빠른 진행을 방해하는 요소로 전락할 뿐이었다.
나 또한 그랬기에 레반을 만들었을 땐 도망치는 게 아니라 빠른 정면 승부로 골렘을 쓰러뜨리고 탈출했다.
레테라를 만들었을 땐 좀 더 색다른 자극을 원했기에 맨주먹, 맨몸으로 골렘을 때려잡는 짓도 저질렀었다.
하지만 이건 새로운 자극에 목마른 고인물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통과의례였다. 절대 내가 특이한 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런 고인물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플레이 방식을 말했다고 내 캐릭터라고 믿기엔 약간 설득력이 부족했다.
다른 플레이어는 하지 않고 나만 했을 것 같은 게임 속 행동이 뭐가 있었지?
“……내가 ‘신들의 도시’ 지역에 방문할 때마다 꼭 한 번씩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숨겨진 공간이 있나 하며 10cm 간격으로 벽에 곡괭이질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 말씀이십니까? 그 주변을 지키던 수호기사들이 작작 좀 하라면서 쫓아왔습죠.”
“아니면 하늘의 여왕의 노출도 높은 의상이 마음에 들었지 그녀를 만날 때마다 1분간 감상 타임을 갖는 거 말인가요? 망원경까지 꺼내서 관찰하니까 여왕님이 많이 부담스러워하던데요.”
“오케이. 거기까지.”
그들의 노골적인 대답을 듣던 나는 낯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저 게임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한 행동이 현실에 나타난 내 캐릭터의 입으로 들으니 상상도 못 할 데미지로 다가왔다.
신들의 도시는 입장 조건이 무척이나 까다로운 지역 중 하나였다.
도달하기도 어렵고, 도달하더라도 도시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제한 시간을 넘기면 텔레포트 마법으로 강제 추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추방되면 다시 입장할 때까지 다시 처음부터 까다로운 조건들을 맞춰야 한다.
그런 상황이기에 누구든 움직임에 낭비가 없게 하려고 애쓴다.
마치 성실함을 강요당한 샐러리맨처럼 제한 시간 내에 NPC를 만나 퀘스트를 처리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쓸데없이 벽에다 곡괭이질을 한다거나, 섹시한 여왕님 몸매 구경한다거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별종은 좀처럼 없었다.
나를 제외하곤 말이다.
‘게임은 즐기는 자가 승리자’라는 게 모토였으니까.
그래도 쪽팔린 감은 있으니 최대한 다른 유저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해온 개짓거리였는데, 이들은 직접 경험이라도 한듯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런 별종 짓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이제야 너희들에 대해 좀 신뢰가 가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둘 다 내 게임 캐릭터면서 왜 너희들끼리 죽자고 싸운 건데?”
플레이하는 건 한 캐릭터당 한 번이니까 이 둘이 게임 내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왜 다짜고짜 살의를 풀풀 날려가며 싸운단 말인가?
그 물음에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야…….”
“……눈앞에서 얼쩡대니까?”
뭔 개풀 뜯어먹는 논리야.
오지에서 살아가는 야만인도 그것보다는 문명적인 이유로 싸우겠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 게임 캐릭터라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있던 게임,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는 멸망해가는 세상에서의 모험을 그린 게임이다.
여느 아포칼립스 장르가 그러하듯,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엔 그만큼 미친놈들이 출몰하는 법이다.
SoR 또한 그랬다. 사방이 적이었고 괴물들이었다.
같은 유저끼리의 PK(Player Killing)도 지겨울 만큼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일단 낯선 무언가를 보면 공격하기에 바빴다.
왜?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SoR은 그런 게임이다.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이어진다.
적인 줄 알았던 상대가 NPC나 적대하지 않는 유저라면 서둘러 공격을 멈추고, 아니라면 닥치고 쓰러뜨린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레반과 레테라, 이 두 사람은 그 세계의 논리가 당연한 듯 몸에 배어있었다.
“……그래서 내가 우산을 들고 공격했을 때 반사적으로 죽이려 든 거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쿵!!
레테라가 방바닥에 세차게 머리를 찍었다.
피가 나는 걸 넘어서 머리뼈에 금이 가지 않을까 싶은 강렬한 기세에 놀라면서도 그녀 옆에 있는 레반을 돌아보았다.
내가 죽을 뻔했다는 소리를 듣고 빡이 돈 건지 살기 어린 표정으로 당장 레테라의 목을 칠 듯 대검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넌 어둠 속에서 뭔가 얼쩡거리기에 일단 공격해본 거고?”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럼 레테라가 없었다면 내가 공격받았을 거란 소리 아냐?”
“죄송합니다!!”
쿵!!
만약의 경우 이야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죄스러운지 레테라와 똑같이 머리를 박는 레반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다스리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시선을 돌려 박살난 모니터를 바라본다.
정말 이들이 저 속에서 나왔단 말인가?
이쯤 되면 이들이 쇼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기엔 이들이 보인 비현실적인 면모가 너무 강했다.
인정하긴 어려웠지만, 마냥 인정하지 않고 있으려니 이야기가 계속 헛돌 거 같은 기분이다.
“정말로 내 게임 캐릭터란 말이지…….”
그때 뭔가 찜찜함이 느껴졌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석고대죄 하듯 이마를 땅에 박고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본다.
레테라. 내가 세 번째로 만든 캐릭터다.
레반. 내가 두 번째로 만든 캐릭터다.
……그럼, 첫 번째는?
휘익!
목에 무리가 갈 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없다. 여기에 있는 건 나, 레테라, 레반, 그리고 기절한 두 이웃뿐이다.
애당초 좁은 원룸에 숨을 공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 있는 거지?
“레테라! 레반! 일단 너희들 얘기는 믿도록 하겠어. 그럼 한 가지 묻자. 너희들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거지?”
그 말에 레반이 먼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아버님이 오실 때까지 잠들어 있었는데 어느새 저 문을 부수고 안쪽에 있는 우물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습니다.”
레반이 가리킨 건 박살난 화장실의 문이었다.
역시 그때 화장실 문 부서지는 소리는 레반이 낸 거였나. 그런데 우물이라니…….
화장실 안쪽에 우물로 추정되는 물체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 녀석의 명예를 위해서 일단 입 다물고 있자.
“저는 아버님과 한참 보스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 시야가 까매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벼락이 치기 직전, 검은 골짜기의 불길한 짐승을 사냥하던 때를 말하는 모양이다.
잠들어 있었다는 레반과 달리 한참 감각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변화를 겪은 탓인지 그녀는 제법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위로 가는지 아래로 가는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없었어요. 단지 격류에 휩쓸린 것처럼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는 기분만 들었죠. 그러다…….”
레테라의 말이 이어지며 한쪽을 가리킨다.
그곳에 있는 건 부서진 책상. 본래라면 컴퓨터 모니터가 있을 위치였다.
“저곳에서부터 이쪽으로 날아와 벽에 부딪칠 뻔한 걸 가까스로 반응해 발로 차며 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레테라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자신이 움직인 경로를 그렸다.
그녀가 발로 찼다고 하는 벽은 깨진 창문과 부서진 화장실 문 사이에 있는 벽 모서리였다. 그 흔적인지 벽에는 레테라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각도는…….’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니터 화면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예리한 검에 의해 3분의 1이 날아간 모니터 화면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부서진 화장실 문, 벽에 남은 발자국, 그리고 깨진 창문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이 외부에서 침입한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했을 땐 당연히 깨진 창문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모니터를 통해 세상으로 나왔다면 저 창문의 의미가 달라진다.
타앗!
몸을 날리듯 창문으로 다가간 나는 깨진 유리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을 확인하고 싶은 나의 마음에 응해주는 듯 타이밍 좋게 번개가 치며 세상이 환해졌다.
번쩍!
우르르릉!
“……없어.”
내 예상과 달리 창문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주가 삭막한 분위기를 씻어낸다며 주변에 심어놓은 마른 나무 몇 그루만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외의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착각인 것일까. 역시 저들의 거짓말인 것일까.
하긴, 모니터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허황된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 있겠는가.
“……아니.”
나는 이내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했다.
무언가가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만은 틀림없었다.
방 안에 유리 파편은 거의 없는데 반해, 밖에는 큼지막한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창문은 안에서 밖으로 깨졌다.
무엇 때문에?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정말로 그 녀석도 현실로 나왔다고?’
SoR에서 내가 만든 첫 번째 캐릭터.
그런데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될 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어쩌면…….
“……역시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건가.”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물음을 던져보지만, 대답을 해줄 이는 보이지 않았다.
레반과 레테라, 두 사람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
한 그림자가 비를 맞으며 건물 그늘 사이에 서 있었다.
낯선 풍경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뒤에 보이는 세계는 자신이 알던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습관대로 무기를 쥐며 주변을 파악한다. 적으로 보이는 물체는 없었다. 그러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춘다.
깨진 창문. 아무래도 자신은 저곳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그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는 한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해했다.
저 남성이 누구인지도, 무엇을 찾는지도.
아아, 그다.
나를 태어나게 한 그다.
나와 함께 세상을 모험하던 그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나를 어둠 속에 홀로 내버려 둔 그다.
으득!
그림자는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이를 갈며 남성을 노려보았다.
건물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그의 눈앞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의 시선을 거부하듯 그림자는 더욱더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