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수상한 사건 1
* * *
정체 모를(?) 힘으로 신체는 싹 나았지만, 그렇다고 강도(??)에게 원룸이 엉망이 된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강도상해에 의한 보험료는 예정대로 지급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소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지갑엔 땡전 한 푼 없고, 부모님껜 혼자서 잘해보겠다면서 시골로 돌려보냈는데 뭘 어쩌겠는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아까운 적금을 깨기로 했다.
변변찮은 직장도 없이 알바만 하고 다닌 나였지만 모아둔 돈은 꽤 있었다.
급여가 쏠쏠한 꿀 알바를 다녀서가 아니다.
술 마시러 다닐 친구도 없고, 옷차림에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던 데다가, 게임 캐시템은 질러본 적도 없이 최소한의 의식주에만 소비했기에 자연히 쌓인 거다.
어찌 됐든 은행에서 돈 좀 꺼냈겠다, 전부터 생각해두었던 문제를 해결할 때가 왔다.
의식주에 있어서 첫 번째로 오는 중요한 일.
바로 옷 문제였다.
당연히 내 옷 얘기가 아니다.
21세기 현대에서 중세시대에서나 쓸법한 서양 갑옷을 입은 레반과 레테라의 이야기다.
사람이 적은 골목길을 골라서 다니다가 적당한 위치에 세워진 옷가게를 발견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옷가게로, 남녀 옷을 가리지 않고 파는 곳이었다.
쇼윈도에서 보이는 옷들을 살펴보니 튀지도 않고 무난하면서 그리 비싸 보이지도 않았다.
목표를 정한 난 두 사람을 데리고 빠르게 옷가게로 달려갔다.
“어서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반기던 여성 점원의 표정이 단숨에 얼어붙는다.
편의점 알바생과 마찬가지로 레반과 레테라의 파급적인 외모와 차림새에 시선을 뺏긴 것이다. 가게 안에 있던 다른 점원이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만 다니길 다행이었다.
그냥 대놓고 거리를 걸었다면 이러한 시선이 수십 배로 늘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써먹었던 변명을 다시 한 번 활용했다.
“외국인 배우 분들입니다. 사정이 생겨서 새 옷이 필요한데, 적당히 맞춰줄 수 있나요?”
“네? 아, 네…….”
멍하니 있던 여점원이 내 말에 정신 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으로 안내하는 여점원을 두고 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알겠지? 점원을 따라가서 옷만 입고 나오는 거야. 광신도의 의식도, 정신 나간 마법사의 함정도 없으니 소동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저희도 슬슬 이쪽 세상에 익숙해졌어요. 함부로 움직이거나 하진 않아요.”
과연 정말일까.
이들이 친 사고를 하나하나 떠올려본 나는 쉽사리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었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이 오히려 불안만 더 부추겼다.
그들을 게슴츠레 쳐다보던 난 혹시나 싶어 말을 꺼냈다.
“……내구도 실험해보겠다고 옷을 잡아 뜯지도 마라?”
“어? 안 되는 건가요?”
“안 돼! 여기 옷은 방어의 용도가 아니라 단순한 치장의 용도라고!”
이럴 줄 알았지.
미리 확인해둔 게 천만다행이다. 옷값을 물어내는 둥의 쓸데없는 지출을 예방할 수 있었으니까.
근데 어째 시간이 갈수록 맹수의 돌발 행동을 막는 조련사가 되어가는 기분이다만?
***
옷가게 점원으로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적당히 맞춰 달라는 손님의 요구다.
옷가게를 연 지 3년째 되는 이지혜라는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요구를 가장 싫어한다.
적당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그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며, 정말로 적당히 맞춰줘도 가장 만족하지 못하는 건 결국 손님 쪽이다.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끊임없는 리트라이.
속된 말로 ‘답정너’였다.
하도 이런 것에 시달리다 보니까 남자친구를 만날 때도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똑바로 표현하는 습관이 생긴 그녀였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적당히 맞춰 달라는 손님이 왔다.
평소라면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짜증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서비스업종의 비애였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뭐, 뭐야, 이 사람들?’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녀였다.
아무래도 매니저인 듯한 밋밋한 남자가 그들을 영화배우라고 소개하였지만, 그렇다고 이런 신비한 매력이 감도는 얼굴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소품일 테지만, 핏자국이 사실적으로 남아 있는 갑옷까지 어울리니 정말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오른쪽의 남자.
키는 180을 넘어 보이며 살짝 그을린 피부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갑옷 밖으로 드러난 팔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빼앗길 만큼 환상적인 근육이 두드러졌다.
사자와 같이 야성적으로 뻗은 황갈색 머리칼과 남자다우면서도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이 감도는 얼굴을 볼 때면 무심코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왼쪽의 여자.
키는 160 중반쯤 될 만큼 작았지만, 당당하고 주저함 없이 선 모습 때문에 전혀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백옥 같은 피부가 바로 이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고왔으며, 그럼에도 허약해 보이기는커녕 탄성 있는 근육 때문에 건강미마저 엿보였다.
하나로 묶은 은발은 꼬리처럼 흔들거리며, 묘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는 여우의 것처럼 영민함이 엿보였다.
이쪽 업계에 일하면서 이와 같은 인상의 손님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니저가 말한, 적당히 맞춰달라는 요청이 그녀의 직업 인생에 있어 중대한 도전인 것처럼 받아 들어졌다.
이런 사람들조차 제대로 코디하지 못해서야 어디 옷가게를 꾸려나가겠는가.
길을 다닐 때마다 백이면 백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만큼 멋지고 화려하게 꾸며주겠다며, 이지혜는 얼마 만인지 모를 프로의 정신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때였다. 매니저인 듯한 밋밋한 남자가 당장이라도 옷을 구하려 달려 나가려던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어째 의욕이 과해 보여서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건데……. 진짜로 ‘적당한’ 거면 됩니다. 어디에서나 흔하고 쉽게 볼 수 있는 옷차림이면 OK라고요. 배우들의 얼굴이 팔리면 안 되거든요. 이해해주시겠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절박한 빛이 서려 있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게 저들의 외모인데, 화려한 옷차림까지 더해졌다간 진짜로 자신이 피곤해진다고 말하는 듯이.
그 정도로 얼굴이 팔려선 안 될 중요한 배우들인 걸까.
저런 모습의 영화배우는 인터넷이나 TV 등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리송할 뿐이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저렇게 간곡하게 말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지혜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머릿속으로 다양한 옷가지들을 두 남녀와 대조해보았다.
화려하고 멋진 옷은 금지 당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막 입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흔하면서도 저들과 잘 어울리는 옷이 뭐가 있을까 하며 몇 번이나 뇌내에서 시뮬레이션 한다.
가게 직원을 시켜 몸 치수를 재기 위한 줄자를 가져오게 했다.
왠지 오랜만에 즐거운 코디의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후우…….”
나는 가게 입구에 가까운 벽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옆에는 레반과 레테라의 무기와 방어구가 쌓여 있었다. 옷을 입기에 방해가 되기에 벗어둔 것이었다.
그들이 새 옷을 갖추는 동안 내가 지키고 있기로 했다.
점원이 몸 치수를 재보려고 흰 줄을 가져다 대는데 “암살이냐?!”고 외치며 두 사람이 날뛰려는 해프닝도 잠시 있었지만, 내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으로 진정시켰다.
한바탕 혼이 난 두 사람은 순한 양이 되어 치수를 재는 점원들의 작업에 묵묵히 몸을 맡길 뿐이었다.
“와아, 무슨 근육이 이렇게나……. 피부인지 강철인지 모르겠어!”
“이, 이 각선미! 평소에 운동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레반과 레테라의 몸을 살펴본 점원들은 그들의 몸을 살피며 흠뻑 빠지거나, 혹은 시샘하거나 하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난 뿌듯하기도 하면서 묘하게 부끄러웠다.
편의점 때와 마찬가지로 흑역사 노트가 공개되는 기분이랄까. 이것도 빨리 익숙해져야 할 텐데.
곧 점원이 골라준 옷을 들고 피팅룸에 안내되는 모습이 보인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피팅룸에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주인과 떨어져서 불안해하는 강아지처럼 비춰졌다.
걱정 말고 냉큼 다녀오라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한가해진 나는 옆에 쌓인 장비들을 바라보았다.
게임에서처럼 인벤토리를 쓸 수 있다면 거기에 담아두고 다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사용할 수 없었다.
아예 존재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내가 사용법을 모르는 건지…….
일단 아이템 숏컷이 버젓이 존재하는 거로 봐선 인벤토리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하느냐, 인데…….’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불편하긴 하지만 저 장비들은 따로 들고 다녀야겠다.
그냥 들고 다니긴 힘드니 배낭이 필요할 것이다. 이 옷가게는 모자까지 팔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배낭은 없었다.
배낭을 파는 가게가 근처에 있을까 하며 가게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그러다 묘한 것에 시선이 밟혔다.
건너편에 늘어선 가게 중 왼쪽 끝. 또 다른 옷가게로 추정되는 가게가 있었다.
추정한다고 말한 이유는 간판을 제외하곤 내부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처참히 깨져나간 유리창. 그 안으로는 부서진 옷걸이, 옷가지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경찰이 다녀갔는지 노란색 테이프까지 주위에 쳐져 있었다.
나는 마침 옆으로 다가온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저 앞에 있는 옷가게는 어떻게 된 거죠?”
“아, 저거 말인가요? 며칠 전 밤에 강도가 들었다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상한 게 금품은 놔두고 옷가지만 몇 개 가지고 사라졌다는 거 있죠?”
“옷만 훔쳐요? 별 이상한 강도도 다 있네요.”
“그렇죠? 그래도 처음엔 금방 잡힐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네요. 하필 강도가 든 당일에 친 벼락 때문에 주변 방범 CCTV가 전부 망가져 있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응?”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하며 고개를 점원에게로 돌린다.
벼락 때문에 CCTV가 망가져서 범인을 찾기 힘들어? 이거 어디서 본 적 있는 전개인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걸 느끼며 점원에게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저어, 강도가 든 날이 언제인지 아나요?”
“그게…… 지난주 금요일 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지난주 금요일.
지금으로부터 딱 3일 전.
레반과 레테라가 컴퓨터 모니터 안에서 튀어나왔던 그날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친 벼락 때문에 주변은 정전됐었고, CCTV까지 맛이 갔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시간에 옷가게가 털렸다고? 그것도 하필 내 원룸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주륵.
등줄기에 식은땀이 타고 흐르는 건 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피팅룸 쪽을 돌아본다.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는 데 어려움을 겪는지 레반과 레테라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라면 나올 때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문제는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 두 사람이 나오면 여기서 기다려줄 것을 전해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했다.
이럼 적어도 나 찾겠다며 소동 일으키는 경우는 없겠지.
그렇게 가게를 나서고 강도에게 당했다던 건너편 옷가게를 향한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보다가 제 갈 길을 슥 하고 가버린다. 혹은 사진 한 장 찍어두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내 일은 아니라는 걸까. 나도 마음에 걸리는 점만 아니면 잠깐 관심을 주고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노란 테이프 가까이 섰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이 안으로 들어갈 순 없다. 아쉽지만 떨어져서 바라보는 수밖에.
그것만으로도 멀리서 바라봤을 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흐음…….”
그것을 바라본 나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부서진 건 쇼윈도뿐만이 아니었다. 유리와 유리 사이에 엷은 철제 기둥이 존재했다.
한 면을 통째로 유리로 하는 것이 아닌 창틀처럼 따로따로 유리를 끼워두는 형태였다. 확실히 유리값을 절약하기엔 좋은 형태다.
그런 철제 기둥이 지금 중간이 끊기고,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마냥 우그러져 있었다.
단순한 강도 사건이었다면 유리창만 깨면 그만이다. 그편이 더 쉽고 효율적이니까.
그런데 이 사건의 범인은 유리창만 깨는 게 아니라, 중간에 있는 철제 기둥마저 거슬린다는 듯 박살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인간이 저 철기둥을 우그러뜨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할까.
“이건 이미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기 보단…….”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저지른 일처럼 보이죠.”
“……!”
옆에서 들려오는 굵은 남성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나는 얼굴을 굳혔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당신은…….”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신요현 씨.”
바로 지척에 있는, 나보다 한 뺨 정도 더 큰 키를 가진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푸근한 인상이긴 하지만 왼쪽 뺨의 칼자국 때문인지 묘한 압박감을 주는 남자.
난 이 남자를 기억한다.
지난번 병원을 찾아왔던 설백호라는 형사였다.
“그런데 당신…… 병원에 입원 중 아니셨습니까?”
설 형사의 눈빛이 사냥감의 빈틈을 포착한 사냥꾼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