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늑대 1
* * *
텅 빈 위드 소프트웨어의 건물을 찾아가서 뜻밖의 전투와 소량의 소득을 얻었다.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SoR 세계 최고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여신의 눈물 획득.
다음으로 가야 할 장소의 힌트처럼 보이는 사진 획득.
그리고 고생한 우리를, 특히 머리가 뜯길 뻔한 날 약 올리는 듯한 쪽지로 인해 분노를 획득했다.
이따위 짓거리 꾸민 놈 쥐어 패기로 마음을 굳힌 건 좋은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초대장이라고 뒷장에 적혀 있는 사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진을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게 찍었다는 것과 10층은 넘어 보이는 고층이라는 것, 건물 외벽이 유리로 되어있다는 게 전부다. 유리가 불투명하여 안쪽은 보이지도 않는다.
주변의 건물이 찍혀 있긴 하지만, 일부뿐이어서 이것 역시 단서로 삼기엔 부족하다.
이런 것을 가지고 어떻게 찾아내라는 것인가.
대도시인지, 지방도시인지, 이 나라 안에 있는 게 맞는 건지조차 모르겠는데.
결국 그곳에선 뾰족한 방법을 얻을 수 없어서 일단 원래 살던 성월시로 돌아왔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도 말했지만, 정말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신월시에 다녀온 다음날.
주거 공간 파괴로 인해 여관에서 하룻밤 묶었던 우리는 해가 뜨자마자 그곳을 나와 어느 곳을 향했다.
성월시 소망의 도서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웬만한 책은 다 구비되어 있었다.
난 이 도서관에 레벤과 레테라를 데려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결점, 이쪽 세계의 상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
그들이 이쪽 세상을 직접 체험하거나,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 외에 가장 빨리 학습할 수 있는 수단이 독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데려왔긴 했는데, 마음이 영 불안하다.
이 놈들을 도서관에 두고 가야 한다는 점이 특히.
“걱정 말아주세요, 오라버니.”
“저희가 얼마나 형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데, 불안해 할 요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X나게 많은데, 다 읊어주랴?”
그 자리에서 욕쟁이 할머니에 빙의될 뻔한 나였지만 참았다.
평일이지만 공부를 위해서인지 가족끼리 나들이인지,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도서관 앞에서 소란을 떠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렇게 도서관에 들어가고 미리 주의 받은 대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정숙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나는 전에 와본 경험을 살려 그들에게 도서관 이용법과 책들의 종류를 간략히 말해주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 녀석들, 한글을 읽을 줄 안다.
두 사람의 이세계적인 외모를 본다면 위화감 넘치는 일이겠지만 분명하게 한글을 때우고 있었다.
전에 말한 적 있지 않던가. 채팅창으로 나누는 유저들끼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글을 모른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인터페이스나 퀘스트 내용만 한글이었던 게 아니라, 그쪽 세계 전체에 한글이 신의 문자로서 전해지고 있다는 모양이다.
한글을 사용하는 판타지 세계라니.
그 사실을 알고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 따윈 느끼지 않았다.
이세계에 대한 로망이 하나 무너진 것 같아 아쉽기만 할 뿐이었다.
한글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집트 상형문자 같은 오묘하면서도 신비로운 언어체계를 접하는 걸 기대했다고, 나는!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자연스럽게 책꽂이에 꽂인 책을 펼쳐 살펴보고 있던 레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쓸데없는 생각을 알려주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레반과 레테라는 지금 역사서적 칸을 뒤적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쪽의 역사와 자신들의 역사를 비교해보며 차이점을 알아가려는 모양이다. 내가 봐도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그들을 바라보다 문뜩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가야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절대 누군가와 싸우거나 소동 일으키지 마! 알겠지?”
“네, 오라버니!”
“마음 놓고 다녀오십시오, 형님!”
두 사람은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허락하는 선에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고뭉치 녀석들이지만 이곳에 온지도 시간이 좀 지났으니 믿고 떠나도 되기……는 개뿔.
원래 일상 속에 작은 방심이 큰 사고로 이어지는 법이다.
만일의 위험을 대비해 나는 카운터에 앉은 사서에게 향했다.
“저기…….”
스무 살 중후반쯤은 되었을까.
안경을 쓰고 보브컷 머리를 한 여성이 내 목소리에 돌아본다.
나는 그 여성에게 내 휴대폰 번호를 적은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혹시 저기 있는 두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거나, 뭔가 위험하다고 느낄 때 이 번호로 연락해주세요.”
내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벌써 책을 골랐는지 테이블에 앉아 읽기 시작한 레반과 레테라의 모습이 있었다.
도서관 내부인데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꽤 위화감이 넘쳐 보인다.
사서는 잠시 그들을 바라본 뒤, 내가 건넨 종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마 내가 번호 따려고 별 짓을 다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억울하긴 해도 보험을 들어두는 게 중요했기에 여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알겠어요.”
어딘가 우쭐해진 여성을 바라보는 건 상당히 괴로운 기분이었다. 이쪽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으니 원…….
어쨌거나 사서가 종이를 챙기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이걸로 한시름 덜었다. 이제 다른 쪽에 신경을 쓸 수 있다.
“지금 버스 타면 강의에 안 늦겠네.”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생이다.
강의에 성실히 임하는 건 아니었지만, 졸업을 위해선 출석이라도 해야 했다.
***
“서양고전의 폭은 넓고 낯설지만 그 당시에 시대상과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가장 오래된 서양고전문학은 길가메시 서사시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 만들어진 신화지요.”
강의란 지루하다.
특히 별 꿈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졸업장이나 따자는 생각으로 대학을 다니는 학생에겐 말이다.
내가 이걸 왜 골랐나 의문이 드는 서양고전학.
수상신청 때 남는 적당한 자리가 이것 밖에 없어서 고른 기억이 얼핏 난다.
나이가 지긋하신 교수님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서양고전문학 이야기는 반쯤 수면제나 다름없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인간은 이미 눈이 반쯤 풀려 있다.
“북유럽 신화의 펜릴이라는 늑대는 제법 특이합니다. 로키의 아들인 펜릴은 훗날 신들의 왕 오딘을 죽인다는 예언 때문에 신들에게 속아 바위에 묶이게 되죠.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통해 펜릴의 증오를 산 오딘은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 때 펜릴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안 되겠다. 나도 한계다.
나는 졸음을 쫓을 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진을 꺼냈다.
뒷장에 초대장이라 적힌 건물 사진.
역시 다시 봐도 모르겠다.
무슨 특징이라도 있어야 찾아보든 말든 하는데, 간판 하나 없는 유리 건물 하나가 달랑 찍혀 있으니 원…….
“여기서 우리는 펜릴의 상징을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라는 권력자들의 속임수에 의해 억압받던 펜릴은 결국 억압을 벗어던지고 신들의 왕을 죽입니다. 마치 폭정에 고통 받던 민중이 들고 일어나 왕을 몰아내는 모습 같지 않습니까? 펜릴이 가진 상징은 여기에 있습니다. 민중에 의한 혁명. 혁명의 신인 것이죠.”
잘 생각해보자.
이게 미믹을 쓰러뜨린 이후의 연계 퀘스트라면 해결할 방법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무엇일까? 미믹을 쓰러뜨린 장소 근처인 걸까?
그곳에 갈 때도 올 때도 이런 건물은 보이지 않았는데…….
“반대로 그런 성질을 가진 펜릴이었기에 오딘의 아들 비다르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비다르의 신발은 가죽공들의 남은 가죽을 엮어 만든, 초라하지만 찢어지지 않는 신발. 낮은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민중을 상징했기 때문이죠. 신들의 왕조차 죽인 펜릴의 이빨도 이 신발만큼은 꿰뚫지 못하고, 결국 비다르에게 찢겨 죽은 겁니다.”
답답한 마음에 사진을 햇빛에 비춰보거나 지우개로 문질러 보거나 해본다.
결과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사진이 좀 튼튼하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다.
“펜릴이 비다르에게 죽은 건 또 다른 형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 권력자를 몰아냈으나, 결국 또 다른 권력자에 의해 밀려났다는 해석. 또는 권력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자 권력에 취해버린 혁명의 힘이 민중을 향했고, 민중이 다시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싸운다는 해석입니다.”
아, 큰일났다.
사진에 집중하고 있어도 교수님의 나른한 목소리가 뇌에 침투한다.
신화나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있어선 무척이나 흥미로운 소리를 하고 있는 같은데, 그 특유의 나른함이 모든 걸 상쇄시키고 졸음으로 인도하고 있다.
안 돼. 정신 차리고 사진에만 집중하자.
사진. 사진. 건물. 유리. 푸른 하늘. 펜릴. 유리에 비친 하늘. 혁명…….
“이러한 펜릴의 성질은 실제 늑대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늑대는 사나운 동물입니다. 개의 조상이지만 개와 같은 온순함은 전혀 없지요. 집단을 이루는 늑대 무리에서조차 우두머리를 향한 도전은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다. 신들의 왕조차 늑대를 길들이지 못하고 잡아먹혔는데 인간이라고 오죽할까요.”
건물. 유리. 늑대. 하늘. 늑대…….
응?
“늑대……?”
“네.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늑대라는 생물이죠. 늑대가 자신의 지배를 인정하는 건 결국 부모 되는 개체뿐인데, 신화에서 펜릴의 부모는…….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이 이야긴 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가 예정시간보다 길어졌다는 걸 알아챈 교수님이 말을 끝낸다.
이제까지 눈치 못 챈 이유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사실을 지적 못할 정도로 정신줄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교수님은 신경 쓰지 않고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교수님이 떠나고, 강의가 끝날 줄도 모르고 학생들이 미적거리는 강의실 안.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았다.
“늑대다…….”
사진을 뚫어져라 본 내가 중얼거린다.
교수님의 말 때문에 헛것을 본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늑대가 있었다. 사진 안에.
“늑대다!”
“허억!? 뭐야?”
“양치기 소년……?”
드디어 찾아낸 힌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내가 소리를 지르며 강의실을 뛰쳐나갔고, 그 소리에 졸고 있던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
“이런 데 쓰라고 구비된 확대경이 아닌데…….”
“제발 한 번만 쓰게 해주세요! 뭣 좀 확인하려는 거예요.”
이웃 학과를 방문한 나는 그곳 학생에게 고배율 확대경을 빌렸다.
전에 무거운 짐 옮기는 걸 우연히 도와주었던 학생이었기에 안면은 있었다.
본래는 식물 잎을 관찰하는 용도라는데, 잠시 사진의 한 부분만 확인하겠다고 부탁해서 확대경을 받아냈다.
확대경 밑에 예의 사진을 올려놓고, 어느 한 지점에 배율을 맞춘다.
내가 확인하려는 건 건물의 유리벽.
썬팅으로 인해 건물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거기에 거울처럼 희미하게 비춰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맞은편 건물의 모습이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구분할만한 게 하나 있다.
“……? 이게 뭐죠?”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이웃 학생이 물었다.
확대경에 비춰진 것은 그림이었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지만 늑대가 노인을 잡아먹고 있는 심상치 않은 그림. 내가 찾아낸 늑대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답해주었다.
“펜릴. 억압을 뿌리치고 왕을 잡아먹은 혁명의 신이죠.”
“…….”
“중2병 보는 듯이 보지마세요. 우리 교수님이 진짜 그렇게 설명한 걸 어쩌라고요.”
묘하게 따가운 학생의 시선에 그렇게 변명하며 휴대폰을 매만졌다.
휴대폰을 통해 접속한 인터넷을 통해 사진 속 그림의 정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확대경 속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떠오른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스카이피아(Skypiea). 최근에 새로 생긴 커피 프랜차이즈에요. 대표 로고로 쓰이는 게 이 펜릴 그림이고요.”
“아무리 그래도 늑대가 노인을 잡아먹는 걸 카페 로고로 쓰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X타벅스는 여자 괴물이 다리 벌리는 모습을 로고로 쓰는데요, 뭘.”
“그건 그렇네요.”
납득하는 학과생을 두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이걸로 단서는 찾았다.
스카이피아.
2년 전에 막 확장을 시작한 국내 커피 프렌차이즈. 때문에 외국 가맹점은 전혀 없고, 국내 가맹점도 그리 많다고 볼 수 없었다.
이 가맹점들을 중점으로 찾는다면 사진 속에 건물을 찾는 건 시간 문제였다.
조금 전 서양고전학을 끝으로 오늘 들을 강의는 전부 들었다. 어서 이 소식을 어서 레반과 레테라에게 알리러 가자.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대학교 정면을 나섰을 때였다.
[~~~♪]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평소라면 모르는 전화번호는 받지 않지만, 도서관에 들어둔 보험이 떠올라 얼른 받았다.
통화가 연결되자 들리는 건 아침에 만났던 사서의 목소리였다.
저, 저기. 아침에 전화번호 주고 가신 분 맞죠……?
불길한 느낌은 왜 이렇게 잘 들어맞는 걸까.
아침까지만 해도 내 전화번호는 그냥 무시할 듯 새침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지금은 매달리는 것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빠르게 하며 말했다.
“네. 접니다. 무슨 일 있나요?”
그…… 함께 오신 일행 분들이 어째…… 분위기가 안 좋다고 할까, 흉흉하다고 할까……! 보고만 있어도 무서워서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있거든요!
탄식.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여성의 설명만으로 무슨 일인지 대강 상황이 보인다.
이 녀석들이 또 뭔가로 마찰을 빚는데, 그것이 또 살기로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본인들 딴에는 주변에 피해 안 가게 억누른 살기더라도 그게 일반인에게 익숙하겠는가. 정체모를 감각에 무서워 도망치고 말지.
아파오는 이마를 누르며 사서에게 묻는다.
“그 바보 녀석들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나요?”
어어, 전술의 이순신과 일당백의 척준경, 전장에서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토론하고 있네요.
그걸로 왜 싸워, 미친놈들아.
왜 저승에서 쉬고 있는 성웅과 소드 마스터를 끌어내서 늬들끼리 싸우냐고.
좀 더 빨리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지름길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버스를 탄다고 해도 도서관까지 가려면 일곱 정거장을 거쳐야 한다.
할 수 없지. 일단 전화를 통해서 그들을 말리도록 하자.
“그 녀석들 바꿔주시겠어요? 제가 한 번 말려볼게요.”
네, 네에…….
사나운 두 짐승에게 다가가는 것이 껄끄러운지 사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그녀가 레반과 레테라에게 휴대폰을 전달할 때 동안 골목을 빠져나가려 속도를 높였다.
눈앞에 모퉁이를 돌면 곧 버스정류장이 나올 터였다.
“……!”
모퉁이를 돌자 그 너머에 있던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가까스로 부딪치기 직전에 멈춘 난 그 사람을 스쳐지나가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길이 급해서! ……컥!”
쿵!
난 분명 골목에 서 있던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무언가에 부딪쳤다.
사람 피하느라 신경 써서 전봇대에 부딪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꽤 쪽팔린 일이었겠지만, 이상하게 내가 느낀 감각은 딱딱함이 아닌 부드러움이었다.
“……응?”
앞을 바라본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금 스쳐지나갔던 사람이 있었다.
검은색 스키니진에 회색 후드 자켓. 후드로 머리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 조금 전 지나쳤던 그 사람이 맞았다.
지나쳤는데 어느새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사실은 쌍둥이가 있었다라는 결말도 아니었다.
좁은 골목에 있는 건 나와 마주보는 그 사람이 전부였다.
주륵….
묘한 불길함에 식은땀이 뒷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비상식의 냄새가 느껴진다.
“어, 어라?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보네.”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왔던 길을 통해서 골목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다리는 한 걸음을 채 내딛지도 못했다.
후드를 눌러 쓴 수수께끼의 인물은 어느새 내 뒤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움직이는 모습은 물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움직이든 가로막을 생각이 충만해 보이는 상대를 보며 나는 도주를 포기했다.
대신 상대에 대해 파악해보기 위해 말을 걸었다.
“누구야, 너?”
“…….”
그 자는 얼굴을 가린 후드를 올렸다.
늑대.
모자 그늘 밑에서 나를 바라보는 은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늑대를 떠올렸다.
사납고 야성적이며, 길들여지지 않은 그런 눈동자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기에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 너……!?”
경악으로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나를 향해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얼굴 맞대는 건 처음이던가? ……망할 아버지.”
내가 가장 처음으로 만든 캐릭터.
함께 SoR 세계를 여행했던 첫 번째 파트너.
그 녀석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