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마법의 가루 소동 2
* * *
“……!”
등골을 휘감는 불길한 감각에 꾸벅꾸벅 졸던 고개를 반사적으로 치켜들었다.
또다시 찾아온 서양고전학 시간.
수면제 보다 더 지독한 교수님의 나른한 목소리에 학생들은 전멸.
견학이라는 명목으로 데려온 레테라가 유일하게 흥미로운 표정으로 교수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아니, 방금 싸한 느낌이 들어서……. 레반 이 녀석, 잘하고 있는 거겠지?”
휴대폰을 열어 레반이 보내온 사진을 확인해본다. 아직까지는 큰 이변 없이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보내왔다.
그 중에서 사진 속 건물과 일치하는 게 없다는 약간의 불만이긴 해도, 레반은 맡은 일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싸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 녀석이 멍청하긴 하지만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몸을 불사르는 한이 있더라도 해낼 테니 문제없을 거예요.”
레테라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해왔지만, 내 생각은 반대였다.
“그 몸을 불사르게 되는 상황이 무서운 거라고.”
***
“형님. 이번 도박장 운영권과 술집 3곳의 경영권을 살모사파가 가져갔습니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 우리 밥줄 끊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군. 우리 불곰파가 언제부터 그딴 뱀대가리 놈들에게 야금야금 잡아먹히는 꼴이 됐어?”
스카이피아 커피 전문점 건너편 건물.
그곳 2층의 한 사무소.
창가 앞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고 있었다.
이곳은 겉으로는 용역 사무소인 척 하고 있지만, 실상은 신월시를 주무대로 암약하는 폭력 조직이었다.
경찰도 함부로 건들지 못할 정도의 세력을 과시했었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 일.
10년 전부터 뭔가 마가 낀 것처럼 사업이 하나둘 씩 말아먹기 시작하더니, 이젠 햇병아리 같은 신흥조직에게 원래 가지고 있던 사업들을 하나하나 빼앗기는 지경까지 왔다.
“신홍수 형ㄴ…… 아니, 신홍수 그 자식이 저쪽 조직에 넘어간 후부터 눈에 봬는 게 없어졌습니다. 노황동 쪽 녀석들이 병원에 실려 갔기에 확인해보니 신홍수 그놈이 부하들을 끌고 공격해왔다더군요.”
“그 개호로잡놈 새끼! 키워준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콰앙!!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치는 남자.
그 위에 있던 재떨이가 흔들리고, 담뱃재가 흩어지며 남자의 손에 묻었지만, 분노로 치를 떠는 남자는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불곰파의 보스, 우정석.
조직의 세가 기울긴 했어도 5년 전이었다면 고급스러운 호텔 의자에 앉아 부하의 얘기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살모사인지, 살무사인지 하는 놈들 때문에 이딴 초라한 사무소에 앉아 분노에 떨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중국 브로커와 마약 거래, 당장 진행시켜!”
“정말이십니까? 그쪽은 위험도가 높다고 거래를 꺼려하시지 않았습니까?”
“살모사파가 우리 조직의 위치를 노리는데 손 놓고 가만히 있을까! 일단 마약 유통으로 자금을 챙긴다! 그 뒤 사람을 모아 그놈들을 싹 밀어버리는 거다!”
“아, 알겠습니다.”
부하가 허리를 숙인 뒤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갔다.
그제야 속이 좀 진정된 우정석은 재로 더러워진 손을 털어내고 검지와 중지를 세운 채 옆으로 향했다.
평소대로라면 눈치 빠른 부하가 담배를 꺼내 끼워 주고 라이터 불까지 켜야 할 텐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우정석의 손은 빈 그대로였다.
“이놈은 또 어디 갔어!”
아무리 요즘 되는 일이 없다지만, 부하까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우정석은 또 다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때 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부하가 말했다.
“밖에서 수상한 놈이 이쪽 건물 사진을 찍고 있다면서, 잠깐 손 좀 봐주겠다고 나갔습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당장 찾아서 데려와! 내 옛날 성질 나오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부하는 기겁하며 우정석 옆에 놓인 골프채에 시선을 주었다.
보스가 골프를 치지 않은지 꽤 되었다. 그럼에도 골프채를 가지고 다닌다는 건 다른 용도가 있는 거겠지.
그 용도로 사용되기 싫던 부하는 허겁지겁 문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는 자신에게 불똥 튀게 만든 다른 동료 녀석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그는 활짝 열린 출입문 밖으로 나가면서, 그 앞에 있을 동료를 찾아 외쳤다.
“야! 빨리빨리 안 다닐래! 나까지 혼날 뻔……했……잖아…….”
그의 목소리를 점차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모기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되었다.
자신이 뭘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화등잔 만하게 뜬 그의 시선 끝에는 자신이 찾으려고 했던 동료, 그리고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쓴 덩치 큰 남자가 있었다.
“에이 씨. 곧 끝나는데 딴 놈이 튀어나왔네.”
레반은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뭐가 끝난다는 걸까.
남자가 보기엔 이미 레반의 손에 붙잡힌 다른 부하는 끝장나기 직전이었다.
양팔, 양다리가 절대 꺾여서 안 되는 방향으로 처참하게 뒤틀려 있었고, 턱은 빠졌는지 덜렁거렸으며, 그렇게 벌어진 입에 신발을 쑤셔 넣어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막았다.
거기에서 뭘 더 끝낸다는 것일까.
그것은 레반의 손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양 손으로 부하의 머리를 붙잡고, 엄지는 부하의 양 눈을 막 파고 들어가려는 상태에서 멈춰 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떨려오는 입술을 열며 물었다.
“지, 지금 뭐하려는…….”
“아, 이거? 이놈을 반죽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걸 원한 삼아서 날 쫓게 되면 귀찮잖아? 그러니 양쪽 눈을 뭉개놓으려고. 예전에 어떤 절벽가슴 여자가 제시한 방법이긴 한데, 뒷걱정 없이 살려주기엔 이게 제격인 것 같더라.”
뭐가 살려준다는 거지?
뒷세계의 잔혹한 조폭들도 차라리 숨통을 끊어줬으면 끊어줬지, 저렇게 처참한 형태로 살아가게 하는 미친 짓거리는 안 한다.
“너 이 새끼! 어느 조직 소속이냐?! 살모사가 보낸 거냐!?”
수상한 자를 손봐주러 갔다가 저 꼴이 된 부하를 보며 남자는 자신들이 습격 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레반은 뭔 소리냐는 듯 미간을 구겼다.
“또 조직이니, 소속이니……. 네놈들 외롭냐? 왜 자꾸 뭉치지 못해서 안달이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남자는 사무소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모두 내려와! 습격이다!!”
“한 놈만 족치고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기어코 우르르 몰려 와야겠냐, 이놈들아?”
불평하는 레반의 말에도 불구하고 2층 사무소 쪽에서 소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남자도 주머니 안에서 나이프를 꺼내며 레반을 겨누었다.
“거기 꼼짝만 새끼야! 확 담가주려니까!”
“오오?”
그러나 날 서린 나이프를 보고 레반이 내뱉은 건 경계가 아닌 감탄이었다.
작긴 해도 틀림없는 무기와 엉성하지만 분명한 살의.
이쪽 세상에 온 뒤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래. 책에서 읽은 적 있어. 법과 절서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이 세상에서 법 없이 살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레반은 이놈들이 그런 종류임을 확신했다.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나야 이쪽이 더 반갑지.”
이것저것 재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법과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고 폭력과 광기 밖에 없던 싸움터야말로 그의 홈그라운드였다.
레반은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듯 남자에게 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미 의식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른 채 움찍거리는 부하를 질질 끌면서 말이다.
“야, 야! 움직이지 말라니까!”
그 거침없는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남자 쪽이었다.
나이프를 향하며 위협해보지만 레반은 도통 멈출 줄 몰랐다.
결국 레반이 자신의 간격 안으로 들어오자 남자는 이를 악물고 나이프를 휘둘렀다.
“죽어, 개자ㅅ……!!!”
남자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레반이 나이프를 쥔 손을 붙잡고 그대로 남자의 얼굴로 밀어붙인 것이다.
퍼어어억!!!
그것만으로 승부는 났다.
남자는 스스로의 손에 의해 코뼈가 뭉개지고, 나이프의 날로 이마가 찢었다. 그보다 더한 충격은 머리 전체를 뒤흔드는 레반의 완력이었다.
주먹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남자의 손과 함께 그 머리를 붙잡는 것으로 레반은 그를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한손엔 처음에 자신과 요현을 모욕했던 부하.
다른 한손엔 기절한 남자를 붙잡고 레반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건물 출입문.
소란을 눈치 챈 건달들이 저마다 쇠파이프나 회칼 같은 무기를 들고 계단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레반이 끝에서 막아선다.
10명가량의 인원이 쏟아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 새끼 뭐야!”
“다 같이 조저!!”
“강한 몬스터가 세 마리 이상 모여 있으면 일단 싸움을 피하는 게 내가 있던 세계의 상식이지만…….”
성난 건달 무리를 보며 레반이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평온함에서 일부는 즐거움이 엿보였다.
“약한 놈들이, 그것도 좁은 장소에서 몰려오는 건 그냥 경험치로 삼아달라는 소리지.”
레반은 그대로 한쪽 팔을 휘둘렀다.
그에게 손과 머리를 붙잡힌 채 끌려오던 남자가 그대로 공중을 날았다.
“……!?”
“뭣……?!”
놀라 소리칠 여유도 없었다.
정면에 있던 건달이 온 몸으로 그 남자를 받아냈지만 거기에 실린 충격은 거의 줄지 않았다.
결국 10명가량의 무리들은 도미노처럼 일제히 뒤로 넘어갔다. 일어서려고 해도 몸에 퍼진 충격과 앞사람의 몸무게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의 위로 레반이 올라갔다.
“컥!!”
“꾸엑!!”
“으악!!”
레반은 쓰러진 건달들의 얼굴을 짓밟으며 느긋하게 계단을 올랐다.
그의 발에 짓밟힌 건달들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단 한 발자국을 견뎌내는 사람이 없자 레반은 김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이건 너무 약해서 경험치거리도 안 될 거 같은데……. 이 놈들의 우두머리는 기대해도 되려나?”
계단을 다 오른 레반은 사무소 문 앞에 멈춰 섰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레반의 측면으로 두꺼운 각목이 떨어져 내렸다.
빠악!!
작정하고 힘을 실은 각목이 부러져 내렸다. 분명 타격감은 있었다.
레반이 아니라 그가 아직 한손에 쥐고 있던 부하를 쳤다는 게 문제지만.
“허억?!”
각목을 휘두른 자가 놀라는 순간 두꺼운 손가락이 그의 이마로 다가왔다.
레반은 그대로 손가락을 퉁겼다.
빠아악!!!
손가락을 퉁겼을 뿐인데 그 소리는 각목이 낸 소리보다 더 컸다.
거기에 맞고 날아간 남자는 커다란 혹을 이마에 매단 채 간혈적으로 움찔거렸다.
그 남자를 처리하니 사무소 내부에 남은 자는 하나뿐이었다.
레반은 커다란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행해 시선을 던졌다. 똥폼 잡는 꼴이 저놈이 보스라는 걸 직감한다.
확실히 그는 불곰파의 보스인 우정석이었다.
과연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일까.
부하들이 모조리 전멸한 상황에서도 우정석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그가 만만치 않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넌 누구지? 무슨 목적이냐?”
“말(?)이란 건 보이지 않는 검이다. 스스로를 지킬 수도 있고, 스스로를 해할 수도 있지.”
“……?”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레반을 우정석은 눈썹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반은 말을 이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말은 가벼이 휘둘러선 안 되며, 거기에서 비롯되는 책임은 검을 휘두른 것과 같이 무겁다.”
레반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된 남자를 우정석에게 내밀었다.
레반에게 당하고, 조금 전 각목에까지 맞다 보니 이미 시체라고 해도 믿을 비주얼이었다.
“네 부하는 내 주인이자 큰형을 모욕하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응당한 책임을 져야겠지, 안 그런가? 어떻게 책임을 질 거지?”
우정석은 기가 찼다.
자신의 형님이라는 자를 모욕했다고 부하들을 전멸시키고 이렇게 자신에게 협박을 한단 말인가?
“네놈이 잘 모르나 본데. 난 불곰파의 보스로, 여기서 나에게 손대면…….”
콰아아아앙!!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레반은 발끝으로 우정석이 앉아 있는 책상을 차올리며 치워냈다.
그렇게 들어낸 우정석의 발목을 붙잡고 마치 빨래감을 다루듯 창문을 향해 휘두른다.
챙그랑!!
“커……헉!!”
창문이 깨져나가고, 그 충격과 유리조각 몇 개가 우정석의 몸에 박혔다.
그것으로 모자라 우정석은 레반에게 발목을 붙잡힌 채 창문 밖으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머리에 피가 쏠리며 저 아래에 바닥이 흔들거리는 게 보인다.
“네가 누군지 쥐뿔만큼도 관심 없다. 난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물었다.”
“큭……!!”
“여기는 2층. 별로 높지는 않지만 인간의 몸은 꽤나 연약하지.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진다면 살기는 힘들걸?”
마치 이렇게 하면 곤충이 죽을 거라고 말하는 듯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그 섬뜩한 공포에 이를 갈던 우정석은 겨우 입을 열었다.
“떨어뜨려 봐라.”
거기에서 나온 건 놀랍게도 레반을 도발하는 말이었다.
“나 우정석! 깡에 살고 죽으며, 뒷세계 밑바닥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견디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 겨우 이따위 협박에……!!”
우정석의 말은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붙잡힌 발목에서 해방감이 느껴지며 땅바닥이 급속도로 확장된다.
레반이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놓은 것이다.
아찔한 중력이 우정석을 집어삼킬 듯 끌어당기고, 시야가 땅바닥으로 가득 차는 순간 우정석의 지난 생이 파라노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뒷세계 밑바닥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해가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죽으면 이다지도 허무할 뿐인데.
콰직!!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정석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죽었다는 소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우정석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 그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온 레반이 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 탓에 발목 부위는 작살났지만 목숨은 구했다.
“아차. 별 지루한 소릴 지껄여서 그만 스킵 누르는 기분으로 죽일 뻔했네. 형님께 혼날만한 짓은 하면 안 되는데.”
“하, 하하, 하하…….”
1cm 차이를 두고 눈앞에서 멈춘 땅바닥을 바라보며 우정석은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바지에서 흘러나온 누런 액체가 그의 머리를 적셔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