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튜토리얼의 끝 1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위드 소프트웨어 10층. 그곳이 건물 최상층이었다.
여기에 있는 방이라곤 사장실로 쓰는 용도의 공간 단 하나 뿐이다.
그곳에서 나는 멍한 목소리로 율에게 말하였다.
“……야.”
“왜?”
“보통 손님이 오면 귀빈실이라던가 그런 곳으로 안내하지 않냐?”
“그딴 게 어디 있겠어.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가 없는데.”
“그래서 사장실로 안내한 거냐?”
“그렇지.”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여기 진짜 사장실 맞지?”
“맞다니까.”
보통 사장실이라고 하면 무엇을 떠오르는가?
과장 좀 보태서 웅단 깔린 바닥, 화려한 커튼, 비싸 보이는 도자기 등의 장식, 한쪽에는 손님용으로 마련된 푹신한 소파와 원목 테이블.
돈이 많으면 과시하고 싶어진다고, 한 회사의 수장 쯤 되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꾸미지 않겠는가?
그런데 율이 안내한 사장실은 그러한 환상을 산산이 깨부쉈다.
텅 비었다.
그냥 삭막한 정도가 아니라 인테리어 공사자체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바닥도 천장도 콘크리트 특유의 척박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별 다른 장식도 없고, 방이라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바닥 타일이나 벽지조차 없다.
있는 거라곤 중앙에 사장용 의자가 전부였다..
한쪽 면은 전부 창문으로 이루어졌지만, 커튼 하나 없이 다이렉트로 들어오는 햇빛은 방의 공허함만 더 강조하는 것 같았다.
“이건 뭐 감옥도 아니고…….”
설령 감옥이라도 이것보단 훨씬 생활감이 넘칠 것이다.
이딴 게 사장실이라고?
청렴결백에 무소유의 원칙을 가진 스님도, 자기 방 꾸미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구두쇠도 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광경 앞에 무릎을 꿇을 거란 것에 내 지갑 속 돈을 걸겠다.
레반과 레테라도 나와 비슷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상식 밖 상황에 익숙한 그들이라도 이런 공간에서 생활하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레반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율을 바라보았다.
“역시 기분 나쁜 놈이야…….”
“칭찬으로 알아들을게.”
율은 싱긋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때 레테라가 뭔가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뭔가 있네요.”
레테라의 말에 이 공허한 방에서 유일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사장 의자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나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방 한 구석에 의외로 생활감이 넘치는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캐릭터 인형, 여러 종류의 패션잡지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고, 빈 접시엔 먹다가 흘린 듯한 빵 부스러기 같은 게 보인다.
썩 정결해 보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풍겨오는 생활감이 방 안에 감도는 공허함을 밀어내서 오히려 반가운 느낌이었다.
공허함을 이겨내려고 발악한 듯한 흔적 같기도 해서 안쓰러움과 대견한 기분마저 들었다.
현대 미술도 아니고, 방 한 구석에 놓여 있을 뿐인 책상 따위에 감동 비슷한 걸 느끼고 있는 나에게 율이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 비서 책상이야. 아까 손님을 데리고 올라간다고 했으니 옆방에서 커피를 타는 중이겠지.”
그 말대로 책상 옆에 있는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그 문이 열리며 커피잔을 올린 쟁반을 안은 있는 여성이 걸어 나왔다.
어수선한 책상의 이미지와 다르게 정갈하게 잘 차려 입은 여인이었다.
오피스 레이디라 할 수 있는 회사원 복장에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 세련된 곡선을 그리는 안경과 무표정한 얼굴이 차갑고 도도한 도시여자를 연상시킨다.
사장이라는 놈이 후줄근한 츄리닝을 하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비서다운 느낌이었다.
“소개할게. 내 비서야. 이름은 오서연.”
꾸벅.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서연이라는 여성이 고개를 숙이자 나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불곰파 조직원들이 꼬신답시고 따라갔다던 여자가 이 사람일까.
확실히 미인이라 할 수 있는 외모이긴 하지만, 레아나 레테라 같은 여성을 자주 접한 탓인지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그 정체가 신경 쓰일 뿐이다.
건물부터 사장까지 비상식의 끝판왕이건만, 비서는 멀쩡할 것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는 서둘러 레반과 레테라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때?”
너희들이 보기엔 오서연이라는 비서가 어떤지 묻는 물음이었다.
내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두 사람도 얼굴을 가까이하며 내게 속삭였다.
“전 좀 푸짐한 여자가 좋습니다.”
“몸매도 얼굴도 제가 더 나아요.”
“그거 말고, 이 망할 새끼들아. 율처럼 뭔가 있는 거 같냐고.”
위험성에 대해 물었더니 외모 감별이나 하고 있는 이 망할 것들을 한 대 때려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다시 한 번 오서연을 살펴보던 그들은 별 문제없다는 듯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평범한 인간입니다.”
“한 대 툭 치면 쓰러질 거 같은 인간이네요.”
율과 같은 위험성은 없다는 건가.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기묘하게 다가왔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 게임 속 캐릭터를 현실로 불러낸 장본인과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일한단 말인가?
그런 의문을 받고 오서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사람 머릿수대로 커피를 타온 쟁반을 율에게 내밀고 있는 중이었다.
커피를 하나 집어둔 눈이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맛없어. 너 진짜 커피 타는 실력 안 느는구나?”
평가는 신랄했다.
빠직하고 쟁반을 쥔 여성의 손에서 소리가 들린 건 환청이었을까?
오서연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이번엔 확실하게 커피와 설탕 비율을 맞췄는데요?”
“그 둘만 맞으면 안 된다니까. 물의 양까지 해서 황급 비율을 이뤄야 한다고. 안 되겠다. 건너편 카페에서 커피 좀 사와야지.”
커피를 싹 비웠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지, 빈 잔을 쟁반에 올려놓으며 율이 문으로 향했다.
우리와 오서연을 방치해둔 채 말이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너희끼리 노가리라도 까고 있어.”
“뭐? 야!”
뭐라고 말하기 전에 율은 문을 열고 사라져버렸다.
참으로 제멋대로의 인간이었다. 인간인지 조차 의문이었지만.
율이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이 방 안에 남는다.
안 그래도 주의를 딴 데로 돌릴 만큼의 장식물이 없는 공허한 방이기에 어색함은 더 크게 다가왔다.
“……커피 드시겠어요?”
“아. 조금 전에 마시고 와서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
조금 전에 그 말로 대화가 끊겼다.
젠장. 그냥 받아서 마셔야 했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야 했나?
사람 만날 일이 적은 아싸는 이럴 때 서러운 법이다.
오서연은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역시 저 생활감 넘치는 책상은 그녀의 것인 모양이다.
어지럽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책상과 그저 딱딱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별로 매칭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위급상황이 아닌 이상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건 서툴렀지만, 그래도 뭔가는 알아내겠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음……. 오서연 씨는 비서 일을 한지 얼마나 되셨나요?”
“올해로 3년째이긴 하네요.”
“이상한 게임 회사인데 용케 여기서 일하시네요.”
“저도 처음 일했을 때 뭐 이딴 곳이 다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녀는 내 질문에 꺼려하는 기색 없이 잘 대답해주었다.
율의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한 번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어떤 사람인지 물어도 될까요?”
“좋은 사람이에요. 직원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주세요.”
그녀의 대답에 영혼이 없는 게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TV프로에 나온 외국인이 한국과 김치 좋아한다고 말하는 급에 정형화된 대답이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차치하더라도 직원에게 잘해준다는 건 또 뭔데? 당사자의 말대로라면 이 게임 회사를 몽땅 혼자서 운영하고 있던 거 같은데.
이 여자, 뭔가 감추고 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녀의 표정과 몸짓에도 어딘지 모를 딱딱하고 어색함이 느껴졌다.
좀 더 편하게 그녀의 얘기를 이끌어낼 방법이 뭐 없을까.
거기서 나는 여기가 모양새가 이상하긴 해도 게임 회사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이런 곳이긴 하지만 게임 회사에 취직했다는 건 어느 정도 게임이 관심 있다는 거겠지?
“SoR은 플레이 해보셨나요?”
“사장님의 추천으로 플레이 했었어요. 처음엔 너무 어려웠지만 익숙해지니까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임이 또 없더라고요.”
이번 건 반응이 좋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은 감상까지 돌아온 걸 보면 정말로 즐겁게 플레이 한 모양이다.
드디어 공통된 취미를 발견해 상대에게 친숙함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캐릭터 레벨도 드디어 100까지 올리나 싶었는데, 그 미친 새ㄲ…… 사장님이 서버실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잠깐만요. 당신 방금 미친 새끼라고 말하려하지 않았어요?”
“안 했습니다.”
“했잖아요, 방금!”
“안 했다니까요.”
그녀는 부정했지만 나는 그녀가 숨기고 있는 일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조력을 바라듯 뒤에 서 있던 레반과 레테라를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들었지? 미친 새끼라고 말했던 거!”
“네. 똑똑히 들었습니다. 확실히 그놈은 저희가 봐도 미친 새끼입니다.”
“욕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때론 마음속에 쌓인 걸 뱉어내는 게 건강에 이롭다고요.”
내가 눈짓을 하자 의도를 읽은 두 사람이 빠르게 내 의견에 동조했다.
사람이 셋 모이면 없는 용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던가.
그것은 단체로 하는 거짓말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관용표현이지만, 단 셋만으로 여론을 충분히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 이곳엔 율을 질타하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다.
그가 그동안 보인 막장 행보에 우리도 충분히 시달리지 않았던가! 오서연 또한 그렇지 않을 거라 보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가 편히 속마음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서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얘기를 꺼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사실 사장님은…….”
쟁반 위에 커피 중 하나를 술 마시듯 쭈욱 들이킨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섭취한 건 알코올이 카페인이었지만, 그것으로 흥분한 뇌를 마음껏 날뛰게 풀어놓은 그녀가 외친다.
“……아니! 사실 그놈은! 그놈은 미친 새끼가 맞아요!!”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을 털어놔서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나지 얼마 안 돼 어색했던 우리들은 율을 향한 뒷담화 아래에 대동단결 했다.
***
오서연. 나이 27세.
위드 소프트웨어에 취직할 당시엔 24세였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취업에 대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기업에선 상사와의 갈등과 직장 내의 부조리, 과도한 업무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그만두고 말았다.
그 뒤 변변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간단한 시간제 알바만 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쌓여갈 즈음이었다.
그러던 중 오서연은 신문에 올라온 어떤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비서직 구함?”
위드 소프트웨어라는 게임 회사였다.
솔직히 들어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온라인 게임을 즐기긴 했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전혀 해보지 않았다.
위드 소프트웨어의 기묘함을 게이머들 사이에서만 유명하지, 현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에게 접할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잘 알지 못하는 게임 회사의 구인 광고.
학력이나 경력 전혀 따지 않는다는 문구에서 1차적으로 수상함을 느꼈고, 문의 전화를 하자 원하는 때에 면접 받으러 오라는 기계음에서 2차적인 수상함을 느꼈다.
제대로 된 상식이라면 이런 곳에 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서연은 어느새 신문지 광고에 적힌 주소로 향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뭔가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곳을 향하던 발걸음은 위드 소프트웨어 건물 앞에서 멈췄다.
“실례합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건물 속에서 울릴 뿐이었다.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건물.
설마 인신매매나 장기팔이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라는 불안이 엄습한 그녀는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팡파레와 폭죽이 터지며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흩날린 것은.
퍼버벙! 펑!
“웰컴~! 환영한다, 위드 소프트웨어에 온 걸!”
언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남자가 눈앞에서 환영했다.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한 오서연의 손을 재주 좋게 붙잡아 바로 세운 남자는 스스로의 이름을 율이라 밝혔다.
성도 없는 그 이름을 오서연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바로 출근해.”
“네!?”
그리고 만난 지 30초 만에 비서로 고용하는 율의 행태에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무슨 이력서도 안 보고, 면접도 안 봤는데 바로 사람을 뽑는단 말인가?
“딱히 사람 가려가면서 뽑을 생각은 없었거든. 아무나 먼저 오면 뽑을 생각이었지. 그리고 네가 가장 처음으로 왔네. 취직 축하해.”
“아, 저기, 네……. 그, 그럼 이제부터 전 뭘 하면 되죠?”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네?”
“아니, 역시 아무것도 안하는 건 좀 그런가? 어차피 회사는 나 혼자 운영하니까. 넌 그냥 가끔 커피나 타 와. 그리고 비서라는 이미지를 좀 더 내보이면 좋겠는데……. 머리를 묶고 안경을 쓰는 건 어때? 최대한 차갑고 도도한 도시 여자의 느낌으로. 마침 얼굴도 반반히 괜찮네.”
오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놀리는 건가 장난치는 건가.
일하러 온 사람을 예쁘게 꾸미고 커피나 타오게 시키다니. 이게 말로만 듣던 직장 내 성차별이라는 건가?
기분이 팍 상한 오서연은 그대로 돌아가려 했다.
“관두겠어요. 예쁘장한 커피 심부름꾼을 원하시면 다방 여자라도 부르시던가요.”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필요한 건 비서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하나야. 업무는 필요 없어. 그냥 그 존재만 필요한 거라고.”
율의 말은 더욱 아리송했다.
사용하지 않고 두기만 한다면 비서라는 게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섞인 오서연의 표정을 본 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외모 따지며 커피 심부름 따위로 부리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인간이란 건 생각보다 상대의 내면을 살피지 않아. 특히 요즘엔 더욱 그런 성향이 짙어졌지. 내 꼴을 봐. 누가 날 한 회사 사장님이라고 생각하겠어?”
확실히 그렇다.
오서연의 눈에 비친 율은 후줄근한 츄리닝을 한 동네 백수 정도의 이미지.
도무지 한 회사의 사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 권력이라는 건 그 사람 개인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사람을 따르는가에서 나오는 법이지.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으면 그게 무슨 왕이겠어? 그냥 내가 사장이라고 나서는 것보다 유능해 보이는 비서가 옆에서 이분이 사장님이라고 말하는 게 더 설득력이 생기는 거라고.”
율이 비서가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이 사장임을 증명할 누군가를 데리고 있으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인상의 외모를 유지하는 건 비서에게도 중요한 덕목이지. 생각해봐. 더벅머리의 꾸미지도 않은 추남과 훤칠하고 잘생긴 미남이 똑같은 내용의 개소리를 지껄인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신임 받을까?”
“…….”
오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은 외모가 아닌 내면을 보라고 말하지만, 외모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해. 그건 사람을 가장 처음으로 인식할 때 판단기준이 되거든. 새나 동물들도 짝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가꾸는데 내면이 더 중요하다며 그것을 소홀히 하는 건 그냥 변명이지. 내면으로 인정받고 싶은 거면 속마음을 세상에 떠벌리고 다니던가.”
척, 하고 그의 손가락이 자신에게 향하자 오서연은 움찔거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나 동작 하나하나가 자신이 집어삼킬 듯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살짝 위축된 그녀를 향해 율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언젠가 방문객이 찾아왔을 때 ‘이상적인 비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 이것도 꽤 어려울 거라고? 외모도 가꿔야 하지, 몸매 관리도 해야 하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하지.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 외엔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어차피 모든 업무는 내가 다 하니까.”
……회사 업무를? 혼자서?
동네 백수나 사기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미친놈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율이 내뱉은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 말에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믿게 만드는 듯한 이상한 힘이.
그 때문에 오서연이 혼란해지는 와중에도 율은 말을 이어갔다.
“근무시간은 식사시간 포함 하루 8시간. 출퇴근 시간 조정 가능. 주말 근무 없음. 방문객이 없는 동안 뭘 하든 자유. 잡지를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간식을 먹거나 해도 아무런 터치 안 해. 다만 너무 나태해져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진 말라고.”
파격적이다.
정말 지나칠 만큼 파격적이다.
이런 직장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니, 모든 현대인들의 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수상했다.
너무 매혹적이라서 너무나 수상하다.
그렇게 좋은 직업이 있을 리 없다. 분명 노예계약이라던가 사기 같은 함정이 있을 것이다.
“역시 전 관두겠어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오서연은 그곳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휴대폰을 꺼내 버튼을 조작하고 있었다.
뭐지? 납치범이라도 부르는 걸까?
순간 두려워졌지만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율이 조작하고 있는 건 휴대폰 인터넷 뱅킹이었다.
“참고로 월급은 이 정도. 여전히 의심하는 거 같으니까 특별 서비스로 미리 네 계좌로 보냈다. 확인해봐.”
“???”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서연이 계좌를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녀에게로 돈을 보낸단 말인가.
그녀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자신이 이용하는 인터넷 뱅킹에 들어가 통장 계좌를 확인했다.
“………………!?!?!!!?!”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취준생인 그녀로선 한평생 통장에 이 정도의 자릿수가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이거 진짜에요?”
“진짜다마다. 참고로 4대 보험 적용에 연말 보너스까지 있다고?”
화들짝 놀란 오서연의 모습에 좋은 구경 했다는 듯 히죽히죽 웃던 율이 말했다.
지나치게 수상하다.
지치게 수상한 직장에 지나치게 수상한 남자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그렇지만 오서연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거부하기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