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튜토리얼의 끝 3
* * *
레반은 혼자서 폭력 조직 사이의 분쟁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레반과 레테라는 그런 조직 하나를 모조리 시체로 만들었다. 사실 두 사람 중 하나만 있어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지금은 내 통제를 따라주고 있지만 언젠가 통제가 소용없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좋은 녀석이라는 걸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쪽 세상의 상식만 잘 익히게 한다면 큰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레아의 경우는 불안 요소였다.
내 말을 듣지 않는데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매일 확인하는 뉴스 기사에 그녀의 소행인 듯한 사건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래도 그녀를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의 문제를 해결해서 불안 요소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아 하나 만으로도 골치인 현상황에 난데없이 생각지도 못한 불확정 요소들이 수두룩 나타났다.
57명의 플레이어.
나를 제외하고 56명의 플레이어와 그 캐릭터들이라니.
그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들을 가지고 율이 무슨 짓을 할 건지조차도 말이다.
“……무슨 생각이야.”
나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사장용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내 반응 하나하나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이 나를 더 빡치게 했다.
“무슨 생각인 거냐고! 이벤트라니, 패치라느니 하면서 게임 캐릭터들을 끌고 나오다니! 현실에서 우리가 싸우는 모습이라도 보겠다는 거야, 뭐야?!”
굳이 게임 캐릭터를 우수수 불러냈든 것에서 영 좋은 의도를 느낄 수 없었다.
이 놈은 진짜 게임 캐릭터로 현실에서 벌이는 PVP라도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서바이벌?
그 어떤 말이 율의 입에서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아니.”
율은 장난치듯 손가락 끝으로 태블릿 PC를 휘리릭 돌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을 멈추면서, 방금 전 본 SoR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 태블릿 위로 빼꼼 눈만 내민 율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딱히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나도 뭘 시킬 생각 없어,”
“……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건 나만 이 아닐 것이다.
다른 캐릭터의 존재를 알게 되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반과 레테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뒤편에서 오서연 씨가 “데자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그녀의 상황과 비슷했다.
큰 돈 주고 비서로 고용해 놓고 아무 일도 안 시키던 그 어이없는 상황과 말이다.
할 말을 잃은 우리를 향해 율이 말하였다.
“캐릭터들끼리 싸우게 해서 한 놈만 살아남는 데스 게임이라도 떠올린 모양인데,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기성으로 무장한 녀석이 저란 말을 하니 기가 찬다.
“그럼 뭘 하라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까? 캐릭터를 데리고 있게 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서 싸우든, 게임 하든, 노가리를 까든 좋을 대로 해.”
“그렇게 해서 네게 무슨 이득이 있는데?”
“굳이 이득 필요한가? 내가 이득 따져가면서 무언가를 할 거였다면 거기 커피도 못하는 비서는 고용하지도 않았어.”
“사장님 입맛이 까다로운 거잖아요!”
그 동안 시달린 게 많았는지 오서연 씨가 울컥하며 항변한다. 돌아온 반응 완전한 무관심이었다.
“굳이 이유를 알아야 안심하겠다면 이렇게 말해주지. 혹시 다른 사람의 게임 플레이를 관전해본 적 있어?”
“뭐?”
“요즘 유행인 거 같더라. 스트리머라는 사람들의 게임 플레이 모습을 구경하는 거. 왜 구경하는 걸까? 자신이 하는 게임도 아닌데. 그건 그냥 단순히 그 사람의 반응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기 때문이 아냐?”
휘리릭.
다시 태블릿 PC가 그의 손끝에서 돌아간다.
너무 빠르게 돌아서 공모양이 된 태블릿을 손으로 가지고 놀며 율이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냥 구경하며 즐기고 싶은 거뿐이야. 현실로 나온 캐릭터들과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해프닝 자체를. 그런 점에서 너희 일행은 참 재미있었어. 플레이어 57명 중 캐릭터를 만나고 1분도 안 돼서 주거지를 말아먹은 건 네가 유일했거든.”
“………………….”
다시 생각해도 빡치는 그 일이 율의 입에서 언급되자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두 명은 그런 내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긴 한숨과 함께 화를 다스린 나는 가자미눈을 뜨며 율을 바라보았다.
“어째 그것도 보고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당연하지. 난 항상 보고 있거든. 눈앞에 있는 너도, 그리고 전국 곳곳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게임 관리엔 모니터링은 필수라고?”
모니터링이라…….
그가 가진 태블릿 PC에 그런 신비한 힘이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율 자체가 가진 힘인 걸까.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데 기분이 영 좋은 건 아니었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정체 모를 놈이 생활을 감시하고 있다는 건데.
레반도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 혹시 관음증이냐?”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걸로 성적 흥분을 느끼지는 않는다만. 그래도 구경하는 재미를 즐기고 있으니 비슷하긴 한가?”
“부정하지도 않았어, 이 자식…….”
레테라가 기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 동안 비상식이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을 이렇게 기겁하게 만드는 끝판왕의 등장에 나까지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계속 이런 취급 받는 것도 억울했던 건지 율이 항변한다.
“야. 그렇게 따지면 종교인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는 신이라는 녀석도 관음증 환자잖아.”
“너, 방금 그 말이 열렬한 종교인 귀에 들어갔다면 여기에 불 질렀을 거다.”
“불 질러보라지. 그토록 소망하던 신의 면상을 볼 수 있게 되고 잘 됐네.”
율은 오히려 그런 놈이 사타난다면 재미있겠다며 더 좋아하고 있었다.
“아차, 이야기가 딴 길로 새어버렸네. 아무튼 이건 57명의 플레이어들끼리 벌이는 게임이야. 서바이벌도 아니고, 클리어 조건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 그냥 살고 싶은 일상을 살면 돼. 마주치더라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놀이터에서 마주친 어린이들이 뭘 하겠어? 그냥 모래성을 쌓으며 놀거나, 서로 술래잡기를 하거나 하면 되는 거라고.”
놀이터 어린이들에 비유하며 그는 게임에 대해 위험은 없다는 듯이 얘기해주었다.
난 그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느꼈다.
그것은 한 면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궤변이나 늘어놓고 있어, 빌어먹을 새끼가…….”
씨익.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는 소리였다는 걸 인정하듯 그가 웃었다.
“그걸 알고 있다면 나와 여기서 말싸움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난 절대 이 패치를 되돌리지 않을 거거든.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두는 게 더 너에게 도움 되는 일일걸?”
“…….”
이번 건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율에게는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다. 힘을 써도 마찬가지고, 공권력은 논할 가치도 없다.
이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뿌려놓은 혼돈의 씨앗이 어떻게 피어날지 지켜보고 싶을 테니까.
“네가 여기까지 도달해 나를 만난 것으로 튜토리얼은 끝났어. 네가 들은 이야기는 곧 다른 플레이어들도 알게 될 거야. 내가 전할 거거든. 그 뒤로는 어떻게 할지 알아서들 해봐. 갈 땐 이것도 가져가고.”
내가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 율은 웬 목함 하나를 던져주었다.
“뭐냐, 이거?”
“약속했던 아이템. 튜토리얼 완료 보상도 같이 넣었어. 미믹은 아니니까 걱정 마.”
레반과 레테라의 무기를 깨부순 거에 대한 보상인가.
두 손바닥 안에 딱 들어오는 크기라 무기가 들어갈 것 같진 않은데. 아니면 두 사람의 주머니처럼 바닥없는 어둠이라도 펼쳐져 있는 건가.
“자아. 그럼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면서, 잘 가라…….”
“잠깐! 난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듣지 못했어!”
그가 멋대로 축객령을 내리려고 하자 내가 말을 가로막았다.
율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뭐야? 설명은 충분히 해준 거 같은데.”
“알아서 해보라며 몇 마디 던진 게 뭐가 충분한 설명이냐! 게임 할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너희는 튜토리얼을 너무 날림으로 만들어!”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해주면 무슨 재미야. 넘어지고, 구르고, 뒤지고를 반복해서 몸으로 익히는 게 더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라고.”
“그런 스파르타식이니까 뉴비가 기겁하며 떠나가는 거 아냐, 새꺄!”
“거참 불만도 많네. 그래 알았다. 딱 세 가지 질문에만 답해주지.”
내 성원에 율은 귀찮다는 듯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했다.
겨우 세 가지 뿐인가. 참 짜게도 주는군.
그래도 원하는 해답을 구할 기회다.
잘 생각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에서 캐릭터가 살아난 플레이어가 57명이라고 했지? 왜 하필 57명뿐이지? SoR가 망해가는 게임라고 해도 동접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고.”
질문을 받은 율이 손가락을 하나 접으며 답했다.
“간단해. 참가조건을 맞춘 게 너희 57명뿐이었으니까.”
“참가조건? 그게 뭔데?”
그 말에 율은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이 자식이?
“임마! 세부 질문 정도는 좀 넘어가!”
“게임은 개발자 마음이란다.”
개발자라고 해서 무슨 개짓으로 게임을 비틀어도 용서된다고 생각마라, 개자식아.
이를 갈며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 동안, 그의 대답이 이어진다.
“아무튼 답을 하자면, 참가 조건은 두 가지야. 첫째, 한 캐릭터의 플레이 시간이 최소 500시간 이상일 것. 둘째, 게임 캐릭터와 정신 동조를 경험할 것. 이 두 가지를 만족해야 캐릭터가 현실로 나오거든.”
‘정신 동조?’
처음 듣는 단어지만 의미로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게임에 무아지경으로 집중하고 있으면 내가 캐릭터가 된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캐릭터들의 마음을 느끼고, 그들도 내 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플레이 시간이 최소 500시간.
허들이 꽤 높았다.
게임에 그 정도의 시간을 쏟아 붓는다면 상당히 고인물들일 거라는 얘기인데…….
“깊이 생각하는 건 좋은데, 마지막 질문은 언제 할 거냐?”
한손으로 턱을 괜 채, 다른 손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있던 율이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니 만큼 신중히 생각을 고른 나는 곧 입을 열었다.
“……게임 캐릭터가 다시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방법은?”
“있다.”
짤막하게 대답한 율이 손가락을 접자 나와 레반, 레테라의 발치에서 빛이 올라오더니 기하학적인 문양의 원이 나타났다.
우리 세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SoR에서 보았던 텔레포트 마법의 문양이었다.
설명 다 했다고 지금 우리를 내쫓으려고 하는 것이다!
“있다 없다를 묻는 게 아니잖아!! 방법이 뭐냐고!!”
“그건 스스로 알아내야지. 그럼 내가 준비한 게임은 즐겁게 즐기라고.”
“야, 이 개……!!!”
욕설을 내뱉기도 전, 우리는 바닥에 뒤덮인 빛에 휩쓸렸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듯한 흐름과 멀미감.
몇 초 동안의 감각이 끝나자 빛은 사라졌다.
그러자 우리 눈앞에 있는 건 삭막한 공간과 덩그러니 하나 놓인 사장용 의자에 앉은 율이 아니었다.
낡은 여관.
우리가 숙소로 잡고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교통비는 아끼게 해준 건가…….
“……참으로 고맙네, 이 개 자식아.”
빠드득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텔레포트 마법진에 요현, 레반, 레테라가 사라지자 삭막한 방에는 율과 오서연 둘만 남게 되었다.
오서연은 방문자들이 사라져버린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율은 태블릿 PC를 조작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서연은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솔직히 따라가기 힘든 이야기였다.
현실에서 살아난 캐릭터들은 뭐고, 플레이어들은 또 뭐란 말인가.
율은 그녀가 뭘 하든 상관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율은 자신이 뭘 하는지 그녀가 상관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뭘 생각하는가에 대해선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사장님. 방금 그 얘기는 대체…….”
오서연의 물음에 율이 입을 열었다.
“남자의 로망을 자극할 만한 검이 있지.”
“네?”
“멋들어진 형태. 차가운 금속의 감각. 한 번 쯤은 휘둘러보고 싶어질 거야. 하지만 그건 진검이야. 함부로 휘둘러선 안 돼.”
상황에 맞지 않은 뜬금없는 말.
오서연은 그것을 잠자코 들었다.
3년 동안 익숙해진 그의 버릇인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시 읊듯 비유 하는 걸 좋아했다.
“어른스러운 꼬맹이 하나는 그걸 알고 검을 검집에 집어놓았다. 하지만 나머지 56명의 꼬맹이들은 어떨까? 그 멋지고 강력한 검을 휘둘러보고픈 욕망을 과연 참을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을 비유했는지 알 거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게 되면…… 너무나 두려울 테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기대돼.”
“…….”
오서연을 바라보며 들뜬 아이처럼 밝은 표정을 짓는 율.
그것을 보며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율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무언가에서 발을 빼기엔 늦었다는 것만은 자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