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49화 (49/173)

〈 49화 〉 앞으로의 행방 ­ 2

* * *

목함에는 애물단지 같은 무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던전 클리어 보상이 따로 있었다.

세계수의 이슬잎 등급: 전설 분류: 도구 생명의 이슬을 머금은 세계수의 잎사귀. 세계수는 뿌리를 모든 세상에 뻗고 있다. 뿌리에서 흘러나온 물이 샘을 이루었고, 그렇기에 이것은 축복이자 생명을 구속하는 저주이리라. 잎사귀가 머금은 이슬은 생명의 샘과 같은 것이다. 사용하면 포션을 채울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딱 한 번, 생명의 샘이 없어도 포션을 보충할 수 있는 일회용 아이템이다. 포션은 가지고 다니는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예비용 포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션이 거의 바닥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여신의 눈물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활용할 때는 빨리 왔다.

수련을 갔다 온다던 레반과 레테라가 엄청난 부상을 안은 채 돌아온 것이다.

처음엔 적의 습격인 줄 알고 흥분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게 아니라며 나를 진정시켰다.

“도대체 수련을 어떤 식으로 했기에 꼴이 그렇게 엉망이야?”

“하하…….”

“좀 지나치게 열중했나 봐요.”

세계수의 이슬잎으로 보충한 포션으로 몸을 회복한 레반과 레테라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거 있지 않은가? 키우는 강아지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눈에 흰자위를 보이며 주인을 바라보는 것.

말을 얼버무리면서 나를 힐끔 살피는 그 모습에서 나는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를 연상했다.

이 녀석들, 뭘 했는지 몰라도 내가 알면 크게 혼날 만한 짓을 수련이랍시고 하고 온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점차 커지려고 할 때쯤, 레테라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아, 오라버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

어째 화제를 돌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단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니 들어보기로 했다.

“레벨 업을 하고 싶어요.”

“뭐?”

***

레벨 업.

캐릭터가 성장하는 과정이자 모든 RPG의 주된 컨텐츠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캐릭터의 강함의 단계를 수치를 나타내 캐릭터가 성장해가고 있다는 게 한 눈에 느껴진다는 건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다.

뭐 이건 플레이어의 시점이고, 게임 캐릭터인 레반과 레테라는 레벨 업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들이 말하길, 자신의 안에 있던 벽을 깨부수는 느낌이라고 한다.

강력한 보스 몬스터, 혹은 수많은 잡몹들을 끊임없이 쓰러뜨리다 보면 어느 순간 벽이 무너지면서 자신의 내면이 넓어진다. 그리고 그 넓어진 내면에 새로운 강함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 새로운 강함이란 아마도 스탯의 상승이겠지.

두 사람은 더욱 강해지고 싶어 했다. SoR에서 살아갈 때도 그랬지만 율과 만나고 나서 그들은 더욱 강해질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SoR 때처럼 자신들을 레벨 업 시켜줄 것을 나에게 부탁한 거겠지만…….

“레벨 업이라…….”

조식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도 레벨 업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레벨 업은 경험치가 쌓였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 경험치를 얻는 방법은 몬스터과 싸워서 쓰러뜨리거나 퀘스트를 해결했을 때 얻는다.

그런 게 현실에 어디 있단 말인가.

살모사파 때처럼 인간을 썰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심부름 몇 번 한다고 해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애당초 그들이 현실로 나온 시점에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한 번 확인해볼까.”

나는 바로 앞에서 정돈하게 앉아 내 고민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레반과 레테라를 바라보았다.

게임에 있을 때 그들의 레벨은 120이었다. 사실상 만렙 취급받는 레벨이다.

경험치는 레반 40%가량 채워져 있었고, 레테라는 99%로 레벨 업이 직전이었다. 불우한 사고(?)로 레벨이 직전에 게임이 끝나고 말았지만 그 경험치는 혹시 남아 있지 않을까?

“레테라. 가만히 있어 봐.”

“네!”

내가 뭔가 하려는 걸 안 그녀가 어깨에 힘을 주며 긴장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되짚는 건 캐릭터의 스테이터스를 확인 할 때의 과정이다.

“캐릭터 지정, ‘레테라’. 스테이터스 오픈!”

명령어를 내뱉자 아이템을 확인했을 때처럼 그녀의 스테이터스가 게임의 인터페이스처럼 내 안에 떠올랐다.

이름: 레테라 레벨: 120 직업: 도적 서약: 모래 속에서 잠드는 여왕의 계약 생명력: 42 지구력: 45 체력: 35 근력: 28 기량: 60 지성: 10 신앙: 8 행운: 6

SoR에서 본 것과 똑같은 정보가 나열되었다.

그녀의 이름, 레벨, 직업.

그 아래는 각 능력치가 수치로 나와 있었다.

레벨 업과 고난이도 퀘스트로 얻은 추가 스탯을 어떻게 배분해야 최고 효율이 나올까 고민하며 겨우 완성해낸 모습이었다.

여기서 서약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게임 내에 신(?)적인 존재와 계약하여 전투에서 특수한 버프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나와 레테라는 오래 전 멸망한 고대 문명이 있던 어느 사막의 던전을 탐험하다 그곳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에 있던 방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뱀의 하반신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티르노미아.

오래전 고대 문명의 수호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옛말이고, 문명이 멸망한 지금은 그저 조용히 자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며 자신의 침소 주변을 시끄럽게 어지럽히는 침입자들을 처단해주지 않겠냐며 서약을 건의해왔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와 계약 버프는 전투 중 회피 강화.

기량캐인 레테라와 딱 맞는 계약을 지금껏 찾아다니고 있었다.

가끔 침입자 쓰러뜨리는 알바를 하며 공물을 모으면 보상 아이템도 주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티르노미아 씨……. 가슴이 참 끝내줬는데…….’

거대한 뱀의 하반신을 가진 만큼 거대한 상반신.

루비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와 갈색 피부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건만, 사막의 나라 특유의 얇은 옷차림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몸매는 남성 유저를 끌어 모으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문뜩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 있을 때, 문뜩 레테라의 시선이 따가워진 것을 느꼈다.

“왜, 왜 그래?”

“오라버니가 가슴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그게 대체 무슨 표정인데! 나 방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던 거야!

아니라고 황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레테라는 살짝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서약을 살펴보다가 티르노미아 씨라도 떠올린 거겠죠. 굳이 공물 바칠 것도 아닌데 자주 찾아가니까 그런가보다 했어요.”

뜨끔!

과연 내 캐릭터랄까.

내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기억해두세요!”

그렇게 말하며 슬랜더한 몸매의 레테라가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풍만한 몸매 따윈 전투에선 방해만 될 뿐이라고요!”

“……레아는 잘만 싸우던데?”

“아무튼! 방해돼요!”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레반이 반대 의견을 내었다.

“뭔 소리야. 여자의 매력이 전투에서만 부각되는 건 아니잖아. 역시 풍만한 게 최고지.”

이제 와서 깨달았는데, 레반 이 자식, 이성 취향이 나와 같았다. 내가 만들어서 그런 걸까.

그런데 이대로 있으면 여자 몸매에 대한 토론이 격하게 일어나 시간만 날려 먹을 것 같다는 게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한 레반과 레테라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얼른 화제를 돌려야 한다.

나는 처음 목적이었던 레테라의 경험치 수치를 확인했다.

경험치: 0.04%

“…….”

99.9%까지 올려놨던 경험치가 순식간에 증발되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손으로 눈 주위를 덮었다.

“어? 오라버니? 왜 그래서요?”

“거봐! 사람에겐 각자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면전에서 대놓고 부정하니까 충격 먹은 거잖아! 남자가 큰 가슴 좋아하는 게 죄냐!”

“나, 난 오라버니께 상처 줄 생각은……. 괜찮아요, 오라버니! 얼마든지 큰 가슴을 좋아하셔도 돼요!”

“……그런 거 아니니까 둘 다 잠깐 닥치고 있어.”

그리고 부끄러우니까 자꾸 내 취향 떠벌리지 마.

어떻게든 두 사람을 닥치게 만든 뒤, 나는 이 사태에 대한 원인을 고민했다.

왜 경험치가 날아간 걸까?

우선 의심되는 건 레테라를 플레이하고 있을 당시 벼락으로 게임이 강제종료 되었기 때문이다.

SoR은 강제 종료의 패널티로 캐릭터 사망과 같은 결과를 제공한다.

결국 레테라는 그 보스전에서 사망한 셈이고, 패널티로 그동안 쌓아온 경험치가 날아간 것이다.

그 외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게임 캐릭터가 현실로 나오면 경험치가 모두 날아가게 되는 걸 수도 있었다.

레반의 경험치를 살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준비해, 레반.”

“넵!”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걸 직감한 레반이 온 몸에 힘을 주며 대기했다.

그렇게 힘을 줘봤자 스테이터스 수치에 변동이 있는 건 아니다만…… 그냥 좋을 대로 하게 내버려두자.

“캐릭터 지정, ‘레반’. 스테이터스 오픈!”

이름: 레반 레벨: 120 직업: 전사 서약: 황혼을 여는 군신의 계약 생명력: 45 지구력: 45 체력: 48 근력: 60 기량: 20 지성: 5 신앙: 8 행운: 8

내 기억하고 있던 것 그대로의 내용이 펼쳐졌다.

레테라와 같은 레벨 120, 직업은 전사. 근력 위주로 투자한 스탯.

황혼을 여는 군신의 계약은 전투중 공격력 버프를 받을 수 있는 계약이다.

다만 이것은 힘으로 신족을 멸하고 싶어 하는 어느 군신과 치르는 계약이라서 신족과 자동으로 적대관계가 되고, 그들의 영역인 신들의 도시도 출입할 수 없게 된다는 패널티가 있다.

SoR 속 사정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이제 레반의 경험치를 확인해보자.

경험치: 40.1%

줄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에 봤던 39.6%에서 조금 늘어나 있었다.

게임 속에서 현실로 건너오면서 경험치가 초기화되는 건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다. 레테라의 경험치가 초기화된 건 게임 강제종료 패널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한 0%가 아니고, 레반도 경험치가 증가한 이유로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간이 던전과 보스 몬스터.’

그 이름도 모르는 기괴한 괴물을 떠올린다.

그 괴물을 레반과 레테라가 합심해서 쓰러뜨렸었다. 이건 그때의 경험치일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건, 현실에서도 경험치를 쌓으며 레벨업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확실히 현실엔 몬스터도 퀘스트도 없다.

하지만 이후에도 없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러고 보니 초대장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도 준비한다고 했지.’

이벤트의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꺾었던 것과 같이 몬스터와 싸우는 거라면 그건 강해질 수 있는 찬스가 될지 몰랐다.

“……대충 정리 됐네.”

경험치를 얻기 위해 산에서 야생동물이라도 몰살시키려는 게 아닌 이상, 율이 언젠가 내놓을 이벤트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사실을 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당장은 레벨 업 여건이 되지 않으니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내 말에 수긍했다.

“그럼 그 이벤트가 나올 때까지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뻔하잖아.”

레반의 물음에 나는 그동안 생각해왔던 목표를 말했다.

“다른 56명의 플레이어를 찾아야지.”

나처럼 느닷없이 이 세상 것이 아닌 강력한 힘을 수하로 두게 된 이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미지수였다.

사람의 성격이란 천차만별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 따윈 신경 쓰지도 않고 제 입맛대로 살려는 녀석도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지금 칼을 쥐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들이 위험한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해선 직접 찾아내서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나에게 정의감 따위가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알아버렸는데 어쩌겠는가.

길가에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다면, 그것이 쓰레기에 옮겨 붙어 화재로 번질 위험을 느꼈다면, 그 불을 끄고 가는 게 시민으로서의 도리인데.

***

목표는 정했지만, 그 방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세상이 이다지도 넓고, 사람은 많은데 어떻게 그 중에서 플레이어들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 좀 해야 했다.

뇌를 평소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관 입구에서 주인 할머니와 마주쳤다.

“어이쿠. 장기 투숙하는 총각 아닌가.”

“하하……. 죄송해요. 아직 살만한 곳을 못 구해서요.”

“나야 오래 묵어주면 돈도 벌고 좋지. ……그나저나 총각?”

할머니는 갑자기 살가운 웃음을 지우더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나는 절로 긴장했다.

“내 얘기 잘 듣게. 이래봬도 연장자로서 하는 충고니까.”

“네, 네……?”

당황하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할머니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여자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가슴이 크냐 작냐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한가, 아닌가야. 잘 기억해두게.”

“…….”

어른으로서 충고를 하며 그대로 내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준 뒤 자리를 떠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썩을!! 우리끼리 떠들 때의 소리가 다 새어나왔잖아!!’

이제 할머니들끼리의 수다로 내 취향이 동네방네 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거 같으니 당장 오늘 짐 싸서 이곳을 떠나기로 하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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