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56화 (56/173)

〈 56화 〉 조우 ­ 3

* * *

레아를 찾으러 갔던 레반이 돌아왔다.

레테라가 아닌 그를 보낸 건 그녀가 미경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 탓도 있지만, 레아와의 첫 조우 때 크게 한 방을 먹은 적이 있어서 앙심이 남지 않았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레반을 보낸 건데 그도 좋게 끝나지 않은 것 같다.

돌아온 레반에겐 다툼의 흔적이 있었다.

사이보그 같던 녀석의 옷이 해지고 얼굴에서 피가 흐를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격렬한 싸움이었으리라.

‘역시 아직 그녀와 만나는 건 시기상조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레반은 나에게 사과했다.

자신이 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사과였다. 내가 시킨 것은 레아를 찾으라는 거지 싸우고 오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그는 벌로서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려 했다.

대가리 박기에서 진화한 그랜드 대가리 박기라는 정신 나간 체벌 자세에 허공에서 놀란 듯한 귀곡성이 살짝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만두게 했다.

말도 없이 멋대로 일을 저지른 건 레반만이 아니었기에 그를 탓할 순 없었던 것이다.

내가 행동을 제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던 레반과 레테라는 이내 내가 한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심이십니까?”

“진짜로 이걸 하겠다고요?”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컴퓨터의 모니터, 어느 커뮤니티 사이트에 내가 올린 게시글이었다.

『SoR 서비스 종료를 추모하는 오프라인 모임을 개최합니다. 참가 멤버 모집 중.』

오프라인 모임.

온라인상에서 만나던 사람들이 현실에서 만나는 모임이다.

만나서 하는 일은 별 거 없다. 좋아하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거나 다 함께 놀러가거나 밥을 먹거나 하는 게 전부다.

단순한 동호회와 뭐가 다른 거냐고 묻는 거냐면, 가상공간에서 만남이 현실로 확장되는 거라고 할까.

게임 상에서만 존재하던 유저들끼리의 유대감을 현실에서 만나 더 강하게 하는 것이 게임 오프라인 모임의 기본 목적이다.

물론 난 해본 적이 없다.

천생 아싸가 이런 걸 왜 하겠는가. 당장 내 캐릭터 레벨 업 시키기도 바쁜데.

그런데도 내가 오프라인 모임을 연 이유는 현실의 플레이어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율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던졌던 미끼와 같은 방법으로.

“이거 폭파된 서버실 사진이잖습니까?”

레반이 알아본 대로다.

내가 모집 게시글과 함께 올린 건 SoR 홈페이지 공지에도 올라왔던 그 사진.

율이 일으켰다던 번개 마법에 의해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서버실의 사진이었다. 공식 홈페이지로 가서 캡쳐해 왔다.

그동안 엄청난 일들을 많이 겪다 보니 무척 오랜만에 사진을 본 기분이다. 실제로는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율은 내가 너희를 만나고 이 사진 속 단서를 발견해 자신까지 도달하는 그 기간이 튜토리얼 기간이라고 했어. 우리가 도착한 그날 이 게임의 개요와 규칙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전달되면서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고 했지. 뭐, 그 내용은 세상 어찌되든 상관없어 하는 녀석의 빌어먹을 방치형 게임이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태평하게 플레이어들의 동태를 구경하고 있을 놈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분명 이 모습 또한 보고 있겠지.

“우리가 스타트를 끊은 모양이 되었지만, 사실은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거야. 이 사진 자체가 현실에서 캐릭터들과 만난 플레이어를 향한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스타트를 끊었겠지. 아무튼, 이 사진엔 아직 효력이 남아 있어. 플레이어들만 알아볼 수 있다는 효력이.”

게임 참가 조건이자 캐릭터가 현실로 나오는 조건 두 개.

플레이 타임 500시간 이상인 캐릭터가 있을 것. 그건 오랜 시간 이 게임에 관심을 두어왔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캐릭터와 정신 동조가 있을 것. 이것의 발동 조건은 불확실하긴 하지만, 일단 게임이 깊이 빠져든 인물들에게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SoR에 깊이 빠져 있는 게 플레이어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SoR 커뮤니티도 자주 이용하겠지. SoR가 끝난 지금도 버릇처럼, 혹은 나처럼 다른 플레이어를 찾기 위해 들어왔다가 이 게시글의 사진을 발견한다면…….”

툭툭.

모니터 속 사진을 두드리던 나는 고개를 레반과 레테라에게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플레이어가 모임에 나타날지 몰라.”

어떠냐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누군지도 알 수 없고, 우리에게 호의적인지도 알 수 없는 자들을 불러 모은 모임에 나가겠다는 건가요?”

“뭐어……. 그렇지.”

위험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누가 올지 알 수 없다. 선량하고 말도 잘 통하는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충분히 있으니까 문제였다.

물론 아무리 힘을 얻었다고 한들, 범죄를 저지르거나 남에게 거리낌 없이 피해를 주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서 만날 테니 함부로 행동하기도 어려울 테고.

그런데 그것을 레반과 레테라가 이해해주냐는 거다.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이란 ‘적’과 ‘아직 적이 아닌 자’ 둘 중 하나였다.

지금 가끔 자기들끼리 적을 바라보듯이 노려볼 때가 있는데, 타인이라고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이것만큼은 이쪽 세상의 상식을 익힌 지금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 정도로 SoR에서의 경험이 진하게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너희들도 같이 갈 거야. 같은 SoR의 유저인 척하는 거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의 대비도 철저하게 하고.”

“흐음…….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죠. 그밖에 다른 좋은 방법도 없는 거 같으니.”

그렇게 말하니 그들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모양이다. 만일의 일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지키면 될 테니까.

두 사람의 동의도 구했겠다. 나는 올린 지 꽤 시간이 지난 게시물을 확인했다.

간단한 모임 같은 것도 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이런 모임 공지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급한 김에 대충 적어 올리긴 했는데 반응이 어떨지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내가 올린 글에는 댓글이 꽤 달렸다.

대부분 악플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이놈은 누구임?

­오늘 처음 커뮤니티 가입한 사람이 글 쓰고 있네.

­이거 장기매매임. 내가 봄.

­저 사진은 SoR의 영정사진인가. 슬프구만.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냐? 참가비라던가 일정이라던가 함께 공지해야지.

­위에 아싸인 티내네. 게임 오프라인에 참가비가 왜 있어?

­뭔 개소리야. 당연히 참가비 있는 거지. 모임 장소는 공짜로 빌리냐? 너야 말로 진따 티내지 말고.

­이 ㅅㅂ롬이?

­뭐 이 ㅅㅂ새꺄.

­너 어디야 새끼야. 튀어나와.

­자신 있음 신월시 불담동 하늘다리 공원 앞으로 와보던가.

이 새끼들은 게임 쏟던 시간이 갑자기 사라지자 한가함을 주체 못하는 건지 남이 올린 게시글에서 키보드 배틀을 벌이고 있었다.

이놈들이 현실에서 PK를 벌일 일은 결코 없다는 것에 내 지갑 속 교통카드를 걸겠다.

“고인물들이 많은 커뮤니티라서 그런가, 낯선 사람에게 경계가 심하네.”

그래서 이곳에 글을 쓴 거지만 참가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반나절 정도 기다려보고, 여전히 반응이 없으면 다른 커뮤니티에도 올려보자는 생각을 하며 댓글란을 내려갔다.

“어?”

쓸데없는 말싸움이 대부분이었던 댓글란 가장 아래.

놀랍게도 참가 희망을 낸 댓글이 있었다.

­모임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무례한 태도와 비속어가 일상화된 공간이라서 그럴까.

정중한 말투로 쓴 평범한 댓글 하나가 오히려 눈에 더 띄어보였다.

‘이것은 그냥 순수한 마음에 참가하는 SoR 유저일까? 아니면 내가 찾던 플레이어?’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일단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소와 시간을 답글로 달아두었다.

그 답글을 달고 보니 또 새로운 사람이 참가를 희망했다.

그렇게 그날 총 다섯 명의 사람들과 오프라인 모임 약속을 잡게 되었다.

***

노인 잡아먹는 늑대 그림을 로고로 내세운 이상한 카페, 스카이피아.

어째 난 이 카페와는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아니면 위드 소프트웨어 건물 쪽에서 마셨던 노점장표 커피 맛이 그리워진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언젠가 레테라와 함께 찾았던 번화가 쪽 스카이피아를 약속장소로 잡았다.

카페 앞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레반과 레테라와 함께 그곳에 서서 기다렸다. 약속시간까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긴장 되네…….”

이런 모임은 처음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플레이어가 나타날지 알 수 없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긴장되었다.

사실 나 정도는 양호한 거고, 진짜로 긴장한 건 옆에 있는 두 사람이었다.

“으음……. 「내 이름은 이만. 평범한 회사원.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정말 즐겁게 플레이해서 SoR가 서비스 종료했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주로 쓰는 캐릭터는 근력캐. 이름은…….」 으으음……! 이름이 뭐더라?”

“「이름은 이태나. 평범한 꽃가게 직원. 마찬가지로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음. 주로 쓰는 캐릭터는 기량캐. 선호하는 무기는 폭마쌍검. 얻은 장소는 비룡의 골짜기의…….」 응? 어디였지?”

큰 모자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녀가 길옆에 서서 컨닝 페이퍼 종이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은 장난 아니게 수상했다.

길 가는 행인들이 힐끔거릴 때면 이들과 떨어져서 모르는 사람인 척 하고 싶을 지경이다.

‘같은 모임 참가자가 아니라 타인인 척 하며 다른 테이블에 앉혀놔야 했나…….’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게임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는 거니 자신들도 한 사람의 게이머를 연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냥 남 대하기 서투른 사람을 연기하며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도 충분한데, 그들로서는 뭐라도 하고 싶었나보다.

확실히 남들 즐겁게 떠드는 동안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경험도 그리 좋은 건 아니긴 하다만…….

아무튼 적당히 대화에 낄 수 있도록 간단한 게임 용어들을 가르쳐주고, 그들의 이름과 설정도 만들어주었다.

레반의 가명은 이만. 직업은 회사원.

직장 상사의 갈굼에 의한 스트레스를 게임으로 푸는 서글픈 현대인. 자기 캐릭터의 이름을 직장 상사의 이름으로 해서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는 설정이다.

레테라의 가명은 이태나. 꽃집 가게 직원.

아는 동생 추천으로 게임을 시작했다가 재미있어서 빠지게 된 새내기. 최근에 얻은 좋은 무기를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게임 서비스가 종료되어 많이 아쉬워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한국어는 현란하게 하는 녀석들이 얼굴만 잘 가리고 이 이름들을 쓴다면 위화감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설정을 만들어준 건 좋은데,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설정은 물론 게임의 기본 상식까지 외워야할 게 많던 것이다.

애초에 가짜가 진짜처럼 연기하는 게 어디 쉽겠는가?

결국 두 사람은 시험시작 직전의 수험생처럼 그 동안 공부해왔던 걸 계속 복습해야 했다.

그래서 누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불안할 만큼 수상한 광경이 완성된 것이다.

“레반, 레테라. 이제 그만해. 슬슬 약속시간이야. 혹시 대답하기 어려운 화제가 나오면 그냥 얼버무려. 대화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내가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볼 테니까.”

“크윽……!”

“조금만 더 시간 있었다면 완벽하게 외울 수 있을 거 같은데…….”

레반은 분하다는 듯 컨닝 페이퍼를 구겼고, 레테라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졌다. 결국 불안전한 상태로 모임에 임해야 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약속시간이 됐는데 이쪽으로 다가오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들 늦는 건가?

아니면 온다고 해놓고 뻥치고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건가.

어떤 놈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온라인의 특성상 후자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기다려본 뒤에 파악하기로 하며 하염없이 그곳에 서 있을 때였다.

꾸욱. 꾸욱.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옆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초등학생 쯤 되었을까? 짧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앙 기모띠!”

“???”

뭐야, 이 초딩 새끼는?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 그 꼬맹이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형아! 이거 SoR 게임 모임 하는 거 맞지?”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초딩이 모임 참가자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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