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69화 (69/173)

〈 69화 〉 지그문트 ­ 1

* * *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박일봉이라고 밝혔다.

오동나무 집 카펫 위에 둘러앉은 우리는 박일봉의 깊게 허리를 숙인 사과를 받는 중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 박일봉의 한 손에는 우리를 그렇게 방해 했던 사냥꾼의 머리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사냥꾼의 머리를 자신과 함께 숙이게 한 것으로 모자라 강제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그가 말하였다.

“이 바보 녀석이 가끔 시키지 않은 일을 멋대로 할 때가 있거든요. 잠잘 거니까 깨우지 말라고 하는 말을 잠을 방해할 만한 자들을 원천 차단하는 거로 해석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게 바로 사냥꾼이 우리를 공격한 이유였다.

자신의 주인이 숙면 중이니까 찾아와서 방해하지 말라. 그것이었다.

그냥 정중하게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일까. 하다못해 화살에 쪽지를 묶고 날려도 되었을 텐데.

그 고생을 하게 된 이유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캐릭터가 가끔 통제 없이 막 나가는 것 때문에 고생한다는 박일봉의 말은 절실히 공감이 갔다만.

“아무리 그래도 먼저 초대해놓고 쫓아내려는 건 뭔 경우 없는 짓이야?”

“맞아. 주인의 통제는 제대로 따라야 할 거 아냐.”

“늬들이 할 소리는 아니니까 좀 닥치고 있어라.”

그렇기에 난 레반과 레테라의 입을 다물게 했다.

딴 놈은 몰라도 이놈들만큼은 그런 소리를 할 처지가 못 된다. 너희가 저지른 사고들을 헤아려보라고.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든 뒤 나는 박일봉을 돌아보았다.

“역시 박일봉 씨도 플레이어였군요.”

“네, 그렇습니다.”

사냥꾼의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던 박일봉이 그를 해방시켜 준 뒤, 나에게 의식을 집중하며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이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맛이 갔습니다. 거기에 놀라고 화낼 겨를도 없이 갑자기 모니터에 이놈이 튀어나왔지 뭡니까.”

박일봉은 바닥에서 막 고개를 든 사냥꾼을 가리켰다.

강제 대가리 박기로 검은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진 사냥꾼의 얼굴은 판타지 레반이나 레테라 보다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외모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이놈 역시 쓸데없이 잘생겨서 눈에 띈다.

“여기 있는 이 녀석의 이름은 지그문트. 제가 키우고 있던 캐릭터죠입니다 느닷없이 현실로 튀어나와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돌보게 되었습니다. 레오 씨도 그렇지요?”

“전 그냥 요현이라고 불러주세요.”

레반과 레테라를 둘러보며 말하는 박일봉의 말에 내가 그렇게 먼저 운을 뗀 뒤 말하였다.

“저도 박일봉 씨와 마찬가지예요. SoR의 서버실이 날아가기 직전 낙뢰 때문에 집안이 정전되어서 불을 찾는 사이에 이 녀석들이 튀어나왔던데요. 처음엔 적응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허허. 뭐, 갑자기 삶의 요소가 확 바뀌게 되어버렸는데 바로 적응한다면 그쪽이 특이한 거겠지요.”

박일봉은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보면 그냥 게임과 큰 인연이 없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런 그가 캐릭터 플레이 타임 500시간을 넘겨야 하는 이 게임에 (강제로) 참가하게 됐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제로 박일봉은 몸이 불편한 건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런 손으로 게임을 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그런 것치곤 조금 전 그가 잠에서 깨어날 때의 잠꼬대로 볼 때 게임을 제법 즐겨본 사람 같았다.

뭘까, 이 부조화는?

그것을 넌지시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박일봉 씨는…….”

“압니다.”

“네?”

“젊은이들도 어려워하는 게임을 늙고 힘도 없는 제가 참가 조건을 만족할 때까지 플레이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말씀 아니십니까?”

박일봉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내가 도리어 당황했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실인 걸요. 실제로 제가 게임을 한 기간도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습니다.”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3개월? SoR을 한 기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데 플레이 시간 500시간을 넘겼다고?

불가능하다.

물론 이론상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하루 6시간 이상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플레이해 온다면 3개월 안에 500시간을 달성하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피로도다.

하루 6시간을 꼬박 게임만 하며 보낼 수 있겠는가? 중간에 식사나 휴식을 제외하고서라도 6시간이다.

심지어 SoR은 어려운 난이도 때문에 다른 캐주얼한 게임보다 피로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쌓인다. 일반인은 3시간만 플레이해도 지쳐서 게임을 나간다.

나 같은 게임 폐인이야 젊은 혈기까지 끌어다 쓴 빡센 플레이로 레아, 레반, 레테라 세 사람의 플레이타임을 만족 시켰지만, 그것만 해도 몇 년 걸렸다.

그런데 단 한 캐릭터뿐이라고 해도 3개월만에 500시간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박일봉의 말은 쉽사리 믿기가 어려웠다.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혹시 캐릭터를 플레이 하지 않고 접속만 한 시간도 카운트 되는 겁니까?”

“글쎄요. 설령 제가 그랬다고 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게임 마스터가 그것을 인정할지는 의문인데요.”

튜토리얼을 위해 찾아온 율을 실제로 만난 건지 박일봉의 입에서 정확히 그가 언급되었다.

그도 그리 좋은 경험을 한 게 아닌 듯 씁쓸한 표정을 짓던 박일봉은 옆에 있던 지그문트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진실은 별 거 없습니다. 이 녀석은 제가 플레이하기 전부터 500시간을 만족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박일봉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의 전조일 뿐이었다.

“지그문트, 이 녀석은 제가 만든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난 너무 놀라 말을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본 전제가 무너졌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가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현실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뭐, 뭐라……!”

말을 더듬으며 놀란 감정을 토해내고 있을 때, 갑자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헛소리 마라.”

그 목소리의 주인은 레반이었다.

팔짱을 끼며 거의 적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굳어 있는 그를 이어서 이번엔 레테라가 소리를 내었다.

“그건 불가능해.”

확신해 차 있는 말투. 그리고 박일봉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그녀의 눈빛엔 적대감마저 엿보였다.

“…….”

레반과 레테라가 박일봉을 향한 적의를 드러내자 지그문트 또한 그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그의 힘으로 두 사람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아까 레테라에게 당했을 때부터 이미 증명된 일이다.

그러나 지그문트의 소리 없는 시선은 박일봉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되는 순간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두 사람에게 맞설 생각이다.

레반과 레테라의 기세가 지그문트의 기세와 맞부딪치며 숨 막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런 공간을 나와 박일봉의 목소리가 끊어낸다.

“둘 다 그만해!”

“예끼, 이 녀석아! 손님이 와 계시는 게 뭐하는 짓이냐!”

나는 호통으로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했고, 박일봉은 한술 더 떠 지그문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서로 으르렁대던 강아지들이 주인에게 혼이 난 것처럼 세 사람은 모두 한쪽으로 쭈그려졌다.

하지만 레반과 레테라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지그문트가 박일봉이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는 건 믿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아직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박일봉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우리들의 시선을 받은 박일봉은 멋쩍은 듯 잠시 턱수염을 매만졌다.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는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우수에 잠겨 있었다.

“……전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박일봉의 이야기의 시작은 놀랍게도 스스로에 대한 자학이었다.

***

박일봉에겐 가족이 없다.

그의 아내도, 아들도, 며느리도 모두 여행을 가다가 트럭 전복 사고에 휘말려 잃고 말았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건 그와 손자 하나뿐이었다.

순식간에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박일봉에겐 홀로 남은 손자를 키워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쥐어졌다.

박일봉은 손자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기 원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였기에, 남과 비교하여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높고 부유한 삶을 살기 원했다.

그렇기에 박일봉은 손자를 엄하게 가르쳤다.

그것을 그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손자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기 위해, 그는 손자에게 끊임없는 교육을 강요했다.

좋은 성적의 성적지를 가져오면 왜 더 노력해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냐고 다그쳤다. 다음에 이것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오지 않으면 용돈을 줄이겠고 말하며.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손자의 안 좋은 식사 버릇을 엄하게 꾸짖었다. 사회에선 작은 식사 버릇마저 남에게 험담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며.

박일봉은 손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다.

대학등록금과 앞으로 손자의 미래를 위한 자금을 벌기 위해 늙은 몸을 이끌고 공장을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손자는 고3이 되었다.

이제 수능을 치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박일봉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손자는 수능을 치르지 않았다.

수능날 직전에 가출해버린 것이다.

박일봉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그동안의 노력을 보답 받을 수 있는 순간이 코앞이었는데 손자는 도망친 것이다.

분노한 박일봉은 몇 년 동안이나 사라진 손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흥신소를 통해 손자가 막노동을 다니며 싸구려 원룸에서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당장 손자가 산다는 원룸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박일봉이 본 것은 자신에게 경악과 공포가 담긴 표정을 보이는 손자의 모습과 그가 방금 전까지 플레이하고 있던 듯 보이는 컴퓨터 게임이었다.

게임이라니?

게임이라니!

가출하고 막노동이나 하면서 하는 게 고작 게임이란 말인가!

더 좋은 삶을 놔두고 도망친 게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박일봉은 손자를 처참하게 때려눕히고 있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손자가 게임을 즐기고 있던 컴퓨터를 몽둥이로 때려 부숴놓았다.

박일봉은 피멍이 든 채 울고 있는 손자에게 당장 방을 빼고 돌아오라는 엄포를 놓고 그곳을 나왔다.

그러고는 손자가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흥신소를 시켜 그를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다.

박일봉은 다시 되돌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몇 년을 낭비하긴 했지만, 다시 공부를 시키고 수능을 치르게 하면 손자를 남부럽지 않은 길을 걷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박일봉이 다녀간 그 날, 손자는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자살이었다.

유서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던 원룸 옥상에는 그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영원한 잠에 들기 전에 슬리퍼를 정리하는 것처럼.

그 자살 소식이 전해진 순간 박일봉의 세상은 무너졌다.

가족을 잃고 오직 하나 남은 손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쳤다.

그 아이가 성공하길 바라며 엄하게 가르치고, 늙은 몸으로 공장을 다니다 병까지 얻었지만 견뎠다.

오직 손자의 미래를 위해서.

그런 손자가 사라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방식으로.

박일봉은 손자의 장례를 치른 뒤에도 거의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에 몸의 상태는 심각해져 갔다. 주변 이웃들이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며 걱정할 정도였지만 박일봉은 폐인과 같은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손자의 유품을 정리하던 박일만은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뭐지? 가출한 이후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던 걸까?

노트를 펼쳐본 박일봉은 이내 실망했다.

그것은 공략본이었다.

보스의 패턴, 공략법, 지역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루트, 숨겨진 아이템이 있는 장소 등을 빼곡히 적으며 연구한 노트였다.

손자는 정말 진지하게 그 게임을 즐겼던 모양이다.

왜 그런 쓸모도 없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는지 박일봉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노트 가장 마지막 장애는 게임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혹여 자신이 잊어버릴 때를 대비해 적어둔 것이리라.

그것을 본 박일봉은 대체 무엇이 손자를 이렇게 게임에 빠지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손자가 하는 게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라는 걸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컴퓨터에 그 게임을 설치하고 플레이해보았다.

첫 감상은 역시 최악이었다.

어떻게 조작하는지도 모르겠고, 뭐만 하면 캐릭터가 자꾸 죽는다.

뭘 목표로 움직여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무 곳으로 움직였다가 끔찍하게 생긴 괴물에게 캐릭터가 죽고 처음 자리로 되돌아온다.

역시 이딴 쓰레기는 뭐하러 하는지 모르겠다.

죽기 전의 손자는 미쳐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이상한 걸 재밌다며 하고 있었다니.

박일봉이 성을 내며 그대로 게임을 끝내려고 했을 때였다.

­저기, 무슨 일이 있으세요?

게임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새하얀 사제복장을 하고 있는 여성 캐릭터였다.

­아까부터 봤는데 움직이는 게 게임 처음 시작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초보자 같아서요. 장비를 보면 꽤 고레벨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나요? 혹시 참견이 싫으시면 그냥 갈게요.

게임 속 유저가 허둥대며 방황하고 있는 박일봉의 모습을 보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갑작스런 대화에 당황했지만, 말을 걸어준 성의가 있고 하니 그는 어떻게든 채팅을 치는 법을 알아내고 대답했다.

­사실 이건 제 손자의 캐릭터입니다. 제 손자가 게임을 한 번 체험 시켜주겠다고 해서…….

박일봉은 말을 하면서 부끄러워졌다.

무슨 손자가 시켜준단 말인가. 그는 이미 세상을 떴고 자기가 멋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

그러나 상대방은 그걸로 캐릭터가 보인 이상 행동을 이해해 준 모양이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손자 없이 어르신 혼자 플레이하고 있었나 보네요. 괜찮으시면 제가 기본적인 거라도 가르쳐드릴까요?

­네?

그렇게 방금 만난 유저에게서 게임 적응에 도움을 받게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잡몹과의 전투법을 배웠지만, 박일봉의 컨트롤 실력이 변변치 않아서 유저의 말대로 하지 못하고 수없이 죽어야 했다.

“이 쓸모없는 녀석! 제대로 좀 움직이지 못 하겠냐!”

박일봉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손이 아니라 캐릭터를 욕했다.

왠지 모르게 유저의 말대로 움직이려고 해도 캐릭터 일부러 정반대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마 캐릭터가 뭣대로 움직일 리 없으니 그의 착각일 테지만…….

결국 스스로도 질릴 만큼 사망을 반복하는 박일봉이었지만, 유저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부활 포인트와 사냥 지점을 왕복하면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싸우는 것에 익숙해졌을 때쯤, 그 유저는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이 이 근처에 필드 보스에요. 저걸 쓰러뜨릴 정도라면 이 근처에서도 문제없을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같이 싸우죠!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며 같이 싸우자고 말하는데, 적이 너무 강해보인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수십 법의 트라이를 반복했고, 결국 필드 보스의 숨통을 끊는 데 성공했다.

전투를 끝냈을 때는 박일봉은 온 몸이 땀에 절여있었다.

겨우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이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 걱정 없을 거예요. 그럼 즐거운 게임 되세요!

그렇게 말한 유저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떠나갔다.

유저가 떠나고, 박일봉은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떨리는 건 그가 아프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저가 막타를 양보해 준 덕에, 마지막 일격을 박아 넣을 때의 짜릿함이 손안에 생생히 남았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이런 감동을, 성취감을 느끼고자 손자는 게임에 몰두했던 걸까.

겨우 손자의 기분을 이해한 박일봉은 웃음이 나왔고, 웃음은 이내 괴로운 눈물이 되었다.

“난 대체 이제까지 뭘 한 거야……!!!”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을 원망 했다.

손자가 원했던 게 이거였다.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게임조차 즐거움이 있고, 노력의 보상이 있고,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일은 뭔가?

모두 손자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그를 엄하게 몰아갔고, 노력의 보상은 없었으며, 힘을 내라며 등을 떠밀어준 적조차 없었다.

바로 이거였는데.

손자가 원하던 것은 좋은 대학도 기업도 아니라, 힘든 일을 하면서도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그런 행복을 원한 거였데!

처음엔 쓰레기라고 욕했던 게임 하나 만큼의 행복조차 박일봉은 되어주지 못한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얘야! 정말 미안해……!! 으흑흑!!”

책상 위에 머리를 박으며 흐느끼던 박일봉은 곧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의 안에 가득 찬 슬픔. 거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게 섞여 있었다.

정말 이상한 소리였다.

슬픔이면 슬픔인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은 뭐란 말인가?

하지만 이 슬픔은 분명 그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와 마음이 연결된 것처럼 낯선 감정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든 박일봉은 곧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왜 네가 우는 거냐?”

그것은 컴퓨터 속, 자신이 이제까지 플레이하고 있던 캐릭터였다.

왜인지 모르겠다.

이런 이벤트도 없고, 캐릭터 제스쳐에 눈물 흘리는 동작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아무런 조작도 가만히 서 있는 캐릭터는 선명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박일봉의 마음이 전해지며 자신의 주인의 죽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것처럼.

“왜 너도 우는 거냐고……. 울어야 하는 건 난데, 왜…….”

박일봉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저 저 캐릭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자신이 빼앗아간 거 같아 너무나 미안함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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