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지그문트 2
* * *
그날부터 박일봉의 게임 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유저는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게임에 대해 공부하며 서툰 손으로나마 SoR의 세계에 적응해나갔다.
더 이상 게임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마음은 그에겐 없었다.
그저 자신이 슬픔의 눈물을 흘렸을 때, 따라서 눈물을 흘리던 캐릭터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정말 미친 듯이 게임 하나에만 몰두했다.
노동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이미 직장은 그만두고 집도 팔아 버린 채 은둔하듯 산에 틀어박혔다.
생활비나 인터넷 걱정은 없었다. 손자를 대학에 보내겠다고 마련해둔 돈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발전기와 생필품을 설치하고, 비싼 위성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원래는 망가지 몸을 요양하려고 땅을 사 지은 오동나무 집이었건만, 박일봉은 게임에 몰두하느라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박일봉의 건강은 오히려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신체가 망가진 이유는 늙은 나이로 무리한 노동에 의한 후유증이었다. 이곳이라면 공장 매연 등에 노출될 염려도 없었다.
게임할 때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손자를 잃은 뒤 실의에 빠져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던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기 시작했다.
몸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되찾은 것이다. 그렇게 박일봉은 건강을 되찾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이제 와서 낫기엔 이미 그의 몸속은 손을 쓸 단계를 넘었다.
박일봉은 자신의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기에 하다못해 SoR의 세상을 마지막까지 여행하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 아니라, 기묘한 감정을 들게 하는 손자의 캐릭터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미친 짓이었다.
사람도 아닌, 그저 컴퓨터 속 데이터 따위에 정을 주다니.
하지만 서로 슬픔을 공유한 듯한 기묘한 체험을 한 뒤로, 박일봉은 그 캐릭터가 더 이상 단순한 데이터 쪼가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박일봉은 그 캐릭터가 정말로 살아 있다는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남에게 말하면 치매 노인 취급할 일이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지그문트……. 이게 그 애가 지어준 이름이냐?”
그때 처음으로 박일봉은 그 캐릭터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했다.
이게 손자의 자식과 같은 거면, 자신은 이 캐릭터의 증조할아버지쯤 되는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품으며 두 사람은 SoR의 곳곳을 여행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파티를 맺어보기도 하고, 박일봉의 실수 때문에 전멸당하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은 이기고.
던전 속에서 숨겨진 방을 발견하고, 함정에 떨어지고, 그러다 결국 가장 안쪽의 보물을 쟁취하고.
처음엔 박일봉의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던 지그문트도 어느 때부턴가 그의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기 시작했다.
솔직히 정말로 즐거웠다. 이런 걸 손자와 함께 즐기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될 만큼.
그러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게임을 즐기고 있을 때, 돌연 컴퓨터 화면이 어두워졌다.
“……!? 뭐야!?”
박일봉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한참 던전을 탐험하고 있던 중 갑자기 화면이 암전되고 스피커의 소리가 뚝 끊기는데 놀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정전? 아니었다. 형광등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컴퓨터 고장? 그것도 아니었다. 모니터만 어두워졌을 뿐 본체는 여전히 세차게 돌아간다.
그럼 뭐란 말인가? 모니터와 본체의 연결을 확인하려고 모니터를 잠시 책상 위에 눕혔을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책상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이내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어정쩡하게 일어나 있던 박일봉이 그 충격에 놀라 다시 의자 위로 넘어졌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걸 손으로 억누르며 그는 갑작스레 나타난 의문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박살 난 책상과 컴퓨터의 잔해 위에 누워 있던 그 인물은 마찬가지로 박일봉을 놀란 듯 바라보다가 곧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박일봉은 자신이 플레이하던 캐릭터, 지그문트가 현실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뺨을 꼬집고 때리고, 심지어 하룻밤 자고 일어나도 눈앞에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소리지만, 그의 캐릭터가 진짜 살아난 것이다!
박일봉은 한동안 이 사실을 인정하고 적응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선 이쪽 세계의 상식에 대해 완전힌 문외한인 지그문트를 교육시키는 한편, 한 번도 이용해본 적 없던 게임 커뮤니티에 가입하였다.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없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글은 없었다.
공식 홈페이지도 확인했지만 게임을 한 기간이 길지 않고, 마법사 캐릭터를 만나본 기회가 적은 그는 공지에 올라온 사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지그문트가 언급해주는 것으로 알았을 뿐이었다.
어떻게 게임 캐릭터가 세상에 나오게 된 건지 박일봉의 궁금증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렇게 지그문트를 만난 지 보름째 되는 날.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존재가 나타났다.
그날은 잠든 가슴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집근처에 멧돼지가 나타났을 때도 이 정도로 가슴이 술렁이진 않았다.
마치 모르는 새에 거대한 호랑이가 머리맡 가까이 다가온 듯한 섬뜩함에 박일봉은 번뜩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근처 바닥에서 자고 있던 지그문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 무언가 소음이 들렸다.
문을 열고 뛰쳐나간 박일봉이 목격한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컥……!!”
푸른빛이 감도는 달빛 아래,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한손엔 지그문트의 목을 틀어쥔 채 말이다.
“좋은 밤이야.”
그 남자는 박일봉을 바라보며 웃었다.
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남자. 그런데 그런 그에게 지그문트가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지그문트의 강함은 박일봉도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만 한 조약돌을 던져 멧돼지의 이마를 꿰뚫어 사냥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게 체감되었으니까.
그런 지그문트의 목을 틀어쥐는 것으로 제압한 그 남자는 절대 겉보기만큼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기르는 멍멍이 목줄은 잘 해놓으라고.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주인 이외는 전부 적으로 생각하거든.”
스스로를 율이라고 밝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틀어쥐고 있던 지그문트의 몸을 박일봉의 앞으로 내던졌다.
땅 위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지그문트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박일봉을 지키듯 섰다.
그 모습에 율은 재미있다는 듯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런데 너희들은 특이 케이스야. 본래 게임 캐릭터는 자신을 만든 자만을 주인으로 인식해. 그 주인이 자신을 조종하는 데엔 큰 거부감이 없지. 그러나 플레이어가 바뀌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조종하는 건 극도로 싫어하거든.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적을 두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지. 캐릭터 나름대로의 반항이랄까.”
율의 말을 듣고 초반에 지그문트가 박일봉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그저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박일봉의 컨트롤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로 지그문트가 반항하고 있던 거란 말인가?
“하지만 그 녀석의 경우는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군. 정신 동조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는 걸 깨달았고, 또한 그 주인을 향한 당신의 슬픔과 후회와 속죄와 애정의 감정을 느낀 거야. 그리고 진지하게 자신을 마주 보고 대하는 태도에 널 주인으로 인정하기로 한 거지. 그래서 현실에 나올 수 있었던 거고.”
“그걸 어떻게…….”
율의 입에선 그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 튀어나왔다. 마치 그동안 박일봉과 지그문트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놀라는 박일봉의 모습에 율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난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그 뭐든지 알고 있다던 율의 입에서 상상도 못 했던 사실들이 이어졌다.
자신이 게임 캐릭터를 세상에 불러들였다는 것, 이것은 특정 조건을 맞춘 플레이어만이 참가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것, 특별한 룰은 없다는 것, 아무것도 강제되지 않는다는 것.
무엇 하나 어려워할 것 없이 색다른 삶을 즐기면 된다고 말하는 율이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박일봉은 인생을 헛살아온 게 아니었다.
“그럼…… 누군가 게임 캐릭터의 힘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남을 피해를 입혀도 된단 말이오?”
“물론.”
“어찌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남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제 잇속을 채우려고 하는 자가 분명 있을 거 아니오!”
“뭐, 확실히 그런 놈들이 여럿 있긴 했었지.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지? 다른 경쟁자를 쳐내고 자신의 잇속만을 챙긴다. 너희가 당연하게 그려내는 경쟁의 한 모습이잖아? 타인과의 경쟁에서 쉽게 이길 수단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어?”
판자촌을 밀어버리고 건물을 세우려는 자가 그곳의 주민들마저 신경 쓰던가? 아니다.
한 대기업의 수장이 정리해고로 길거리에 내려앉을 사원의 삶까지 신경 쓰던가? 아니다.
경쟁에서 이겨 높은 곳에 올라간 자는 뒤처지는 자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그 경쟁이 공평한지 아닌지도 관심 없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의지건 뭐건, 그들은 삶 속에서 타인과의 경쟁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패를 손에 넣은 것이다.
“난 너희들에게 장난감을 쥐어주고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게 해줬어. 거기에 대한 대답이 힘에 의한 경쟁이라면 그런 거겠지. 아이를 키우는 의무를 짊어진 당신이 자신의 손자를 강제로 경쟁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것처럼 말이야.”
“……!!”
율은 아픈 곳을 찔렀다.
박일봉의 다 아물지도 못한 상처에 율은 억지로 손을 집어넣어 넓혔다.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악동 같이 천진난만하면서도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것에 분노한 지그문트가 순식간에 활시위를 메기고 율을 향해 쏘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분명 화살은 율의 이마를 관통하고 그 뒤편의 땅을 헤집었지만 정작 그는 멀쩡했다.
데미지는커녕 상처 하나 남지 않은 이마가 간지러운 듯 손가락으로 긁어대며 그가 말했다.
“뭐, 아무튼 즐거운 게임 되라고. 그 몸 상태로는 앞으로 한두 달 즐길까 말까겠지만.”
“……!!”
마지막까지 박일봉의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한 말만을 남기며 율은 사라져버렸다. 마치 신기루라도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올 만큼 율의 잔상은 박일봉 내면 깊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대체 그 자는 무엇인가?
신과 같은 전능함이 엿보였음에도 자비 따위는 없으며, 악마와 같은 악독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악의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단 말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대로 눈감고 모른 척 해야 하는 건가?
어느 고민 하나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박일봉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달을 올려다보며 괴로운 생각을 이어가야 했다.
***
“……하여간 어딜 가든 어그로는 왕창 끄는 녀석이야, 그놈은.”
박일봉의 말에 내가 중얼거렸고, 거기에 레반과 레테라, 심지어 지그문트까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현 씨가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진의 숨겨진 의미는 몰랐지만, 지그문트가 가르쳐 줌으로써 알게 되었죠. 그래서 일부러 그런 사진을 올린 당신이 저와 같은 플레이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참가 희망글을 남긴 거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일에 몸 상태가 악화되어서 나가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고개를 드세요!”
박일봉이 고개를 숙이자 나는 서둘러 양손을 저으며 그의 행동을 막았다.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한쪽 선반에 빼곡히 쌓인 진통제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아파서 모임에 나오지 못한 사람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저에게 찾아오라며 쪽지를 보낸 건가요? 하지만 제가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플레이어일 수도 있었잖아요?”
“솔직히 그 점은 저에게도 도박이었습니다. 살갑게 다가와선 뒤통수치는 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박일봉은 힐끔 하고 옆에 있던 지그문트를 살폈다.
레테라에게 당한 탓에 지그문트의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생명이 지장이 갈만한 상처는 어디 하나 없었다.
“제멋대로 공격을 해온 지그문트에게 자비를 주며 제압만 한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이 정도면 믿어도 될 만한 인물이겠다고.”
“뭐, 저쪽도 일단은 선을 지켰으니까요.”
신뢰가 담긴 눈빛을 받는 게 쑥스러워서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그럼 목적이 순전히 믿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플레이어를 찾는 게 다인가요? 다른 의도 없이?”
“네. 사실은 처음엔 그것만이 요현 씨를 부른 이유의 전부였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부탁이요?”
내 물음에 박일봉은 옆에 있던 지그문트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녀석, 지그문트를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뇨, 거절합니다.”
…………!?!?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레반, 레테라 심지어 미리 들어둔 얘기가 없는 듯 지그문트까지 놀랐다.
그리고 그 직후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는 내 모습에 박일봉까지 놀라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