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76화 (76/173)

〈 76화 〉 몬스터 웨이브 ­ 2

* * *

“힐러가 필요하냐고?”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믿을 수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하티라고 이름을 밝힌 여성 캐릭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런 녀석이 대놓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잖아요. 힘을 합친다면 좋지 않겠어요?”

하티가 가리키는 곳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의 중심가였다.

신월시의 주요 기업들이 밀집된 듯 쓸데없이 높은 건물들이 즐비해 있는 게 보였다.

쿠구구……!!

그 중 가장 높이 솟아 있던 건물 하나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솟아오른 뿌연 먼지를 뚫으며 솟구쳐 오르는 건 한 마리의 몬스터였다.

가히 산과 같다고 해도 될 정도로 길고 거대한 몸체. 머리 쪽에서 활짝 열린 원통형 입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이빨이 번들거린다.

절벽 위에서 이미 저놈이 떨어지는 걸 목격했었기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샌드 웜.

안 그래도 험난한 사막 지형의 난이도를 더욱 최악으로 만드는 몬스터라고 평이 자자한 녀석이었다.

사막 태생인 놈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현대 지형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몸이 닿는 대로 부수고 있다.

미노타우로스를 손쉽게 해치우던 레반과 레테라조차 샌드 웜은 감히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난적이다.

그리고 몬스터는 샌드 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의 몬스터가 때로 밀려오는 웨이브와 다름없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티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힘을 합치자고 제의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험난한 난이도를 타파하기 위해 파티를 결성하는 것. 어느 온라인 게임에서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너 캐릭터 맞지? 플레이어는 어디 있냐?”

지금 내가 겪는 건 여타 평범한 게임과 다르다.

나는 하티를 경계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플레이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경계해서 따로 숨어 있다면 이해는 하겠지만,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레반과 레테라의 생각도 같았는지 그들은 하티에게 무기를 겨누는 한편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하티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망설이듯 운을 뗐다.

“으음……. 저기,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걸 믿어주시겠어요?”

“……?”

왜 저렇게 망설이듯 말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 진실이라는 게 터무니없는 거라고 미리 예고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들어보고 나서 판단하지.”

“후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티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 그러니까 제 주인님은…… 이곳에 없어요.”

“……?”

뭔 대단한 소리를 하나 했다.

지금 네 눈에도 플레이어가 여기에 없는 게 훤히 보이는데, 무슨 김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알아. 그러니까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있다, 이거 아냐?”

“아마 지금 생각하시는 ‘어딘가’의 범위가 다를 거예요.”

“뭐?”

“신월시 밖에 있거든요.”

무안한 듯 손가락을 마주 두드리는 하티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신월시 밖에 있다고?

그 말은 이 이벤트에 참가 자체를 안 했다는 거야?

그럼 여기 있는 이 녀석은 뭐야?

왜 플레이어가 참가 안 했는데 캐릭터가 멋대로 이벤트에 들어와 있는 거냐고!

하티의 이야기를 들은 레반과 레테라도 어이가 없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형님.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냥 이대로 족치는 게 어떻습니까?”

“발끝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불에 달구면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될지 모르죠.”

아무래도 하티가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당장 제압하라는 내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듯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 너머로 하티가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봐. 그래야 믿든 말든 할 거 아냐.”

그 말에 하티는 어디에서부터 설명할까 고민하듯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고민했다.

“그게……. 제 주인님은 이 이벤트를 경계했어요. 주최자부터가 정상이 아닌데 제대로 된 게 튀어나올 리 없다면서요.”

정확한 판단이군.

만난 적은 없지만 하티의 플레이어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을 보낸다.

진짜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은커녕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괴한 이벤트가 튀어나왔다.

사람만 없을 뿐 신월시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한 정신 나간 스케일의 무대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몬스터들이라니.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이벤트인 것은 분명하다.

잊지 못하는 이유가 악몽 때문일 것 같다는 게 문제일 뿐.

‘현실에서 아포칼립스 체험하는 게임 이벤트가 어디 있냐고!’

무심코 한탄이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이어지는 하티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제 주인님은 이 이벤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알고 싶어 했어요.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셨거든요.”

“그것 때문에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으로 내몰았다고?”

“내몬 게 아니에요! 절 신뢰하신 거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주인을 나쁘게 표현한 것에 화가 난 듯 하티가 부드럽게 휘어졌던 눈매를 날카롭게 좁혀졌다.

살기는 없었지만 분명한 언짢음을 담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뿐이었다.

잠시 째려본 것뿐인데 더욱 살벌한 기세의 눈빛을 레반과 레테라로부터 돌려받은 하티는 바로 꼬리를 말 듯 딴청을 부렸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 발을 빼야 했을 땐 주인님을 지키면서 움직이는 것보다 혼자가 더 편했거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다가 위험하면 발을 빼고, 뭔가 이득을 얻을 것 같으면 그것을 얻고 돌아오라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인의 명예를 변호하는 건 잊지 않았다.

하티도 다른 캐릭터처럼 플레이어를 향한 충성심이 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 혼자 신월시에 남아 있던 거예요. 이벤트에 참가는 못하더라도 동태는 살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설마 플레이어가 없더라도 영역 안에만 있으면 캐릭터마저 강제 참가하는 이벤트일 줄은 몰랐어요.”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듯 힘없이 축 늘어지기 시작한 하티.

율 그놈이 사람 여럿 피곤하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나보다.

나는 하티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하티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역할은 결국 밀정이었다.

주인은 몸을 숨긴 채 그녀가 이벤트,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의 정보를 얻어 오는 것이다.

‘그놈과 비슷한 수법인데…….’

배진환을 죽인 그 암살자의 주인을 떠올린다.

자신은 모습을 감춘 채 모임에는 대리를 보냈다. 플레이어로 의심되는 내 정보를 얻기 위해.

하티 또한 주인을 대신하여 이곳에 왔다. 목적은 마찬가지로 정보였다.

자신의 정보를 차단한 채 상대의 정보를 얻는 것이 정보전의 기본 목표이니 수법이 닮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지만……. 그래도 역시 찜찜했다.

“네 주인에 대해선…….”

“말할 수 없어요.”

주인에 대해 캐물으려 시도해보았지만 하티는 사전에 말을 잘랐다.

그때 그녀가 보인 표정은 너무나 단호했다. 주인에 관해 묻는 순간 그대로 대화를 결렬 내고 사라져버릴 것 같을 정도로.

주인의 정보는 발설할 수 없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새어나갈수록 그것은 주인에게 위협이 되니까, 그건가.

지금까지 만난 캐릭터들이 그러했지만, 이 녀석들은 플레이어의 안위와 관련된 일에는 놀랄 만큼 예민해진다.

결국 난 이 질문을 포기했다.

그녀의 주인이 누구이건 판단할 근거는 부족하다. 진짜 범인이든 아니든 이 이상 파고들었다가 대화가 끊기는 쪽이 더 아쉬웠다.

아직 풀어야 할 의문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좋아. 질문을 바꾸지.”

“뭐죠?”

“어떻게 우리를 찾아낸 거지? 아직 이 사태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설마 이 넓은 도시에 우연히 우리 근처에 있었다는 말로 때우진 않겠지?”

사방 천지가 괴물들이 날뛰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중에서 레반, 레테라가 몬스터과 싸우는 소리를 콕 집어서 찾아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치 처음부터 우리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무게가 쏠렸다.

납득 가는 설명이 없을 시엔 이번엔 우리가 대화를 그만두겠다는 눈빛을 하티에게 던졌다.

“이건 제 영업 비밀이긴 한데……. 그래도 이것까지 말해야 절 믿어줄 듯하네요. 이제부터 신성마법을 쓸 거니 놀라지 마세요.”

신성마법.

스스로에게 의존하는 마법사와 달리 순수한 신앙심으로 신비로운 현상을 일으키는 신앙캐 전용 마법이었다.

하티가 기도하듯 자세를 잡으며 방울 같은 목걸이를 한 번 흔들었다.

마치 종을 울리듯 청명한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그녀의 주위에 새하얀 빛무리가 모이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빛무리를 쫓던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빛무리가 하나로 모여 새의 형상을 띄는가 싶더니, 정말로 살아 있는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는 게 아닌가!

이윽고 완성된 은은하게 빛나는 새 한 마리가 하티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천리(?理)의 새’라고 하는 신성 마법이에요. 일시적으로 새와 같은 동물의 형상을 만들 수 있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살아 있는 건 아니에요. 이쪽 세계의 로봇 같은 거라고 할까요. 조종하는 건 저죠.”

진짜 새를 다루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빛나는 새를 쓰다듬던 하티는 이내 그것을 하늘로 날렸다.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오는 새는 이내 조그마한 점이 되어 우리들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은은하게 빛나던 새가 저렇게 멀리까지 날아가니, 빛이 난다는 걸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나마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라서 눈으로 쫓는 거지, 햇빛이 쨍쨍한 하늘이었다면 빛 속에 몸을 숨겨 찾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 천리의 새의 시야는 저와 공유할 수할 수 있어요. 무언가를 찾아내거나 감시할 때 좋은 용도죠. 단점이라면 최대 세 마리 만드는 게 한계라는 것과 저것을 유지하는 동안 다른 신성마법은 쓰지 못한다는 점일까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단점까지 알려주는 건 저걸로 우리는 감시했다는 사실에 대한 찜찜함을 덜기 위해서일까.

지긋이 하티를 바라보는 우리 세 사람의 시선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플레이어를 찾아 계속 날리고 있던 거예요! 굳이 여러분들만 콕 집어서 감시한 건 아니라구요!”

“감시한 건 맞구나?”

“…….”

하티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래. 감시한 건 그녀의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다고 치고.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해결하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왜 하필 우리지?”

왜 그녀가 우리와 협력하기로 마음먹었는가. 그것을 모르겠다.

우리가 하티를 의심하듯, 하티 또한 우리를 의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녀가 먼저 선뜻 접근해왔다.

“내가 악질적인 플레이어일 수 있잖아? 하다못해 협력하는 척 하다가 뒤통수친다는 생각도 안 해 봤어?”

그 물음에 하티는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절대 내가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잖아요. 계속 보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하티는 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를 내며 나에게로 가까워졌고, 그것을 내 옆에 있는 녀석들이 허락할 리 없었다.

카앙!!

“멈춰.”

“수상한 짓 하면 죽인다.”

어느새 하티와 거리를 좁힌 레반과 레테라가 낮게 읊조렸다.

하티의 목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레테라의 낫이, 위로는 레반의 도끼가 맞닿아 있다.

마치 족쇄를 채운 것과 같은 모양새.

정말로 하티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순간 두 개의 날이 만들어낸 족쇄는 단두대로 돌변할 것이다.

그런 그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하티가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절 믿어주세요. 절대로 허튼 짓은 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하티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레반과 레테라에게는 긴장했던 그녀의 표정은 나에 한해선 평온하게 바뀌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손, 보여주시겠어요?”

“……?”

갑자기 웬 손? SoR의 성직자들은 손금 보는 재주도 있던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나를 향한 하티의 모습에선 악의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하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역시 많이 다치셨네요.”

“…….”

하티에게 내민 내 손은 살가죽이 까지고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 광대짓의 잔재였다.

율의 장난에 놀아난 나는 사람이 없다는 걸 모른 채 계속 생존자를 찾으려 무너진 민가의 잔해를 헤집었다.

이건 그때 입은 상처인 것이다.

거기서 나는 하티가 말한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봤어요. 사람들을 구하려고 잔해까지 헤집는 당신의 모습을. 거기에서 결코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죠.”

그렇게 말한 히티는 상처 입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맞닿은 그녀의 손은 놀랍도록 부드럽고 따스했다.

“‘힐(Heal)’.”

하티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졌다. 성직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회복 마법이었다.

그 빛에 닿자 쓰라리던 손바닥의 고통이 사그라졌다.

그녀가 손을 떼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내 손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게 당신들을 선택한 이유에요. 파티를 맺는다면 일단 믿고 등을 맡길만한 사람과 해야 하잖아요? 저는 어떤가요? 당신이 보기엔 저는 등을 맡길만한가요?”

멀쩡해진 손을 쥐락펴락 하며 나는 하티의 목소리를 들었다.

글쎄,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확신이 선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지 않은가?

그러니…….

“……등을 맡길 정도까진 아니지만, 같은 배를 타기엔 충분해 보이네.”

나는 하티가 일시적으로 동료가 되는 하는 걸 허락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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