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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78화 (78/173)

〈 78화 〉 몬스터 웨이브 ­ 4

* * *

SoR의 세계엔 야생동물이 없다.

죽어가는 세상에서 종의 멸절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살아남는 것은 질긴 생명력을 가진 몬스터뿐이다.

그런데 딱 하나, 몬스터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야생동물처럼 보이는 생물이 있었다.

그것이 토끼였다.

기존 상식대로라면 토끼는 몬스터의 한 끼 식사거리로 사라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SoR의 토끼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몬스터들이 슬슬 피해 다녔다.

SoR 세계를 여행하는 유저들은 그 토끼를 볼 때면 신기해하며 다가간다.

몬스터밖에 없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현실에도 있는 야생동물을 발견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생긴다.

미믹과 더불어, 이 토끼의 존재는 SoR의 3대 트라우마 제조기였다.

레반과 레테라도 그 토끼를 겪어 본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TV 동물 프로에서 나온 토끼를 보는 순간 TV를 부숴 먹을 뻔했다. 이 괴물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놀라면서.

그들을 심정을 이해한 나는 그들이 아는 녀석과 현실의 토끼는 다르다고 설명해주었다.

아마 현실로 나온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그런데 그런 내 말이 우습게도 만나버리고 말았다.

고인물 학살자이자 트라우마 제조기인 그 토끼가 눈앞에 있었다.

살금…….

그 토끼를 바라보며 나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뺐다.

레테라가 말한 대로 천천히 움직여 두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저 토끼를 자극하지 않도록.

우물우물…….

“……?”

그 순간 우리가 도륙 내었던 몬스터의 시체를 맛나게 먹고 있던 토끼가 머리를 돌렸다.

내 작은 움직임이 녀석의 주의를 끌었나 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똘망똘망하지만, 내가 보기엔 깊은 심연이 박혀 있는 거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나는 티가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일정 거리 내로 들어가지 않으면 먼저 공격해오지 않아.

유일하게 공격해오는 경우는 저쪽이 배가 고플 경우인데, 지금 사방에 널린 것이 몬스터의 시체이다.

먹을거리가 넘쳐나니 굳이 공격할 이유는 없고, 실제로도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먹이에 집중하고 있지 않던가.

‘아무 짓도 안 하고 갈 테니까 식사나 마저 해라.’

이놈과 싸워서 좋을 게 없다.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바람을 담아 그 토끼를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르.”

그리고 내가 본 것은 털을 삐쭉 세우고 얼굴을 구기는 토끼의 모습이었다.

낮게 울리는 울음소리에는 명백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뭐야?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런 반응을 받으니 억울할 지경이었다.

내 얼굴이 녀석에겐 밉상이었던 것도 아닐 테고, 대체 뭐야?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말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저 녀석이 그걸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쩌적……!!

토끼의 왼쪽 뺨에 선이 생긴다.

그리고 그것이 열렸다.

우물거리며 몬스터의 시체를 먹던 입과는 다른, 두개골의 구조를 의심하게 할 만큼 이상한 방향으로 벌어진 커다란 입이었다.

벌어진 입 안에선 기괴한 모양의 이빨이 나 있었다.

치열이 고르지 않아 무언가를 씹어 먹기 위해서라기보단, 그저 고통스럽게 물어뜯는 목적이 더 강해보이는 이빨이었다.

쩌적…! 쩍…!

그런 이빨을 가진 입이 두 개나 더 나타난다.

하나는 오른쪽 뺨에서 목으로 내려오는 지점, 다른 하나는 왼쪽 옆구리를 지나 등까지 닿는 지점이었다.

거기에 더 이상 귀엽고 앙증맞은 토끼의 모습은 없었다.

세 군데에서 드러난 입이 크게 벌어지면서 형체가 일그러진 혐오스러운 괴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거다.

이게 유저들이 트라우마가 생기게 만드는 1차적인 충격이다.

귀여운 외모에 방심하고 다가갔다 이 그로테스크한 면모로 유저를 맞이하며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토끼라는 이름도 유저들이 편의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 녀석의 진짜 이름은 ‘헬데트’.

특이하게도 다른 판타지지나 신화에서 따온 몬스터가 아닌, 오직 SoR에서만 등장하는 오리지널 몬스터였다.

꿈에 나올까 봐 두려운 외모가 1차 충격이라면, 2차 충격은…….

!!!

바로 지금 일어났다.

분명 눈꺼풀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이의 상황은 시간을 몇 초나 생략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흘러가 있었다.

뒤에서 달려 나와 내 앞을 가로막은 레반과 레테라의 등. 이미 휘두른 상태인 그들의 무기.

그들이 먼저 헬데트를 공격한 게 아니다.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드는 헬데트를 막은 것이다.

그러나 짧은 부딪침 속에서 손해를 입은 건 놀랍게도 레반과 레테라 쪽이었다.

푸슉!

피가 뿜어졌다.

레반은 손등과 팔꿈치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 레테라는 어깨 바깥쪽이었다.

피가 뿜어진 자리에는 갑옷이 우그러져 있었고, 그 안으로는 살점이 무언가에 뜯겨나간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키키키키키기기긱!!!”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지만, 이 생물 같지도 않은 끔찍한 울음소리가 바로 헬데트의 것이었다. 칠판 긁는 소리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끔찍하다.

분명 내 앞에 있던 헬데트는 어느새 측면에 세워진 건물 외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크게 벌어졌던 세 개의 입 중 두 개가 무언가를 잘근잘근 씹듯 움직이는 채 말이다.

‘저 괴물 새끼!’

그 모습만으로도 나는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벌어졌던 일들을 쫓아갈 수 있었다.

저 괴물은 나에게로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도중 방향을 꺾어 레반과 레테라의 공격을 피하고, 그들에게 부상마저 입힌 뒤로도 힘이 남아 저 벽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것이 헬데트가 유저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2차 충격이었다.

엄청난 전투 난이도.

필드를 돌아다니는 잡몹 종류인 주제에 전투 난이도는 고레벨 보스 몬스터와 맞먹는다.

무시무시한 스피드와 공격력으로 유저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 위용은 고인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유저들조차 버거움을 느낄 정도다.

게임으로 접할 때도 인간의 반응 속도 한계를 실험한다는 소리를 듣는 녀석이었는데, 현실로 나오니 그 충격이 더 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현실로 나오자 무시무시해진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아앙!!!!

언제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옆에 있던 레테라가 낫을 휘두르며 헬데트가 달라붙어 있는 외벽을 갈랐다.

하지만 헬데트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그 특유의 반사 신경과 각력으로 이미 건너편 건물의 외벽으로 몸을 날렸던 탓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그런 헬데트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녀석이 착지하려던 바로 그 자리에 레반이 휘두른 나무 몽둥이가 날아와 박혔다.

완전히 허를 찌른 듯한 공격이었지만, 헬데트는 붕괴가 일어나는 외벽에서 다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멀쩡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약간 스치는 걸 막을 순 없었는지 길쭉한 토끼 귀 중 한쪽이 뜯겨 날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키키기기긱!!!” “카가가가각!!!” “커커커거거걱!!!”

자신이 피를 입었다는 것에 분노하는 건지, 벌어진 세 개의 입에서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잔뜩 흥분한 채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헬데트를 두고 레반과 레테라가 외쳤다.

“야, 성직자! 형님을 보호해!”

“오라버니에게 털끝만큼의 상처도 남기기만 해봐! 너까지 죽일 거야!!”

“왜 협박하고 그래요! 그러지 않아도 할 일은 열심히 한다구요!!”

서둘러 내 곁으로 다가온 하티가 방울형 목걸이를 손으로 쥐며 눈을 감았다.

신성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마나를 끌어 모으듯 집중하고 있던 그녀가 곧 방울을 흔들며 읊조렸다.

“자애로운 가호를 우리에게. ‘홀리 베리어’!”

띵!!

청명한 울림과 함께 나타난 반투명한 막이 나와 하티를 감쌌다.

그거면 됐다는 듯 레반과 레테라는 모든 신경을 헬데트 하나를 향해 쏟아냈다.

쿠콰과과과과과과!!!!!!!!

선(?).

눈으로 쫓기도 힘든 공방이 이어진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움직이고 잔상처럼 남은 선뿐이었다.

헬데트의 이빨, 레테라의 낫, 흘러내리는 타액, 레반의 몽둥이, 헬데트의 털,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 은색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황갈색 머리카락, 주먹, 다리.

순간적으로만 관측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선을 그리며 사방에 꽂히고 부숴갔다.

나와 하티를 지키고 있는 방어막 위에도 빗방울 떨어지듯 수도 없이 선들이 두들겼다.

“좀…… 살살…… 싸워……!!”

그 충격이 만만치가 않은지 방어막을 유지하고 있는 하티가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결판이 나기 전에 먼저 그녀의 스태미나가 바닥날 판이었다. 방어막도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보다 먼저 싸움이 끝나는 모양이다.

어느 정도 몰아붙이며 헬데트의 체력도 떨어진 건지 스피드가 눈으로 쫓을 수 있을 만큼 줄었다.

거기에서 레반과 레테라가 승부에 나섰다.

콰직!!

헬데트가 레반의 일격 사이로 파고들며 왼쪽 어깨를 물어뜯었다. 경동맥에 가까운 위험한 위치였다.

이대로 다리의 각력으로 몸을 날린다면 살점이 뜯겨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헬데트가 노리는 대로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덥썩!!

“크륵?!”

레반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어깨를 물어뜯은 헬데트의 몸을 붙잡은 것이다.

빠르게 움직임을 위해 무거운 무기를 내던지는 모험까지 저질렀지만 덕분에 헬데트를 잡을 수 있었다.

헬데트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몸을 마구 날뛰며 어깨의 상처를 넓혀갔다.

그러나 레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헬데트의 몸과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당기며 녀석의 목을 훤히 드러나게 했다.

공중에서 헬데트를 붙잡은 레반의 몸은 그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고, 그 위를 레테라가 낫을 든 채 덮쳤다.

레반과 헬데트가 찰싹 붙어있는 상황.

그럼에도 레테라는 망설이지 않고 낫을 휘둘렀다.

사악……!!!

불길한 검은 낫이 긴 선을 지으며 지나갔다.

정확히 레반의 두 팔 사이에서 드러난 헬데트의 목을 가르며.

놀랍게도 낫은 레반의 몸에 단 1mm도 닿지 않은 채 헬데트만을 갈랐다.

푸화악!!

헬데트의 목에서 피가 뿜어졌고, 그대로 그들은 땅 위로 떨어졌다.

쿠우웅!!

흔들리는 지축. 피어오른 흙먼지.

나는 긴장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먼지 사이에서 헬데트가 고개를 내민다.

목과 머리가 분리된 상태로. 더 이상 녀석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사냥감을 내보이며 먼지 속에서 일어난 레반과 레테라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끝난 것이다.

“후우…….”

하티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방어막을 거두었고, 나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 다 괜찮아!?”

일단 그렇게 물었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갑옷 여기저기에 헬데트의 이빨자국이 남아 있고, 곳곳에 출혈이 심하다. 몬스터 대군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끄떡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 쓰러지거나 하지 않아요.”

나는 그게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야 두 사람의 눈에는 분명한 피곤의 기색이 엿보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빨리 포션이나 먹어.”

그렇게 타박하며 그들의 치료에 전념하려던 때였다.

“저기…… 막상 쉬려고 하는데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요…….”

두 사람이 포션을 마시고 있을 때 하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헬데트가 쓰러진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는 긴장한 듯 잔뜩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긴장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겁에 질린 듯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녀가 왜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머리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헬데트의 특성…… 한 가지 잊은 거 없나요?”

“…………아.”

이런 망할.

레반과 레테라의 승리에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헬데트가 트라우마가 되는 진짜 이유.

그것은 충격적인 비주얼과 강함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하나 더 있지 않은가.

나는 하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보았다.

건물의 옥상.

그곳에 까만 눈이 가득했다.

심연을 담은 듯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전부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전부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유저들은 3차 충격을 받는다.

헬데트. 이놈은 그 강함이 무색하게 집단생활을 하고 있는 몬스터였다.

동족애가 강한 건지, 이 자식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보스급으로 강한 주제에 우르르 몰려다니기까지 한다. 자신의 동족이 싸우는 소리를 감지하면 바로 몰려드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이것이 바로 헬데트가 고인물 학살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날고 기는 고인물이더라도 저만한 수의 헬데트에게 답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저가 저런 대량의 헬데트를 두고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도망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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