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정보 거래 3
* * *
내가 모니터 너머로 바라본 SoR 세계의 모습을 떠올렸다.
멸망해 가는 세계.
그 말 하나 가지곤 쉽게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해가 떴음에도 대지는 서리가 낄 듯 차가우며, 달이 떴음에도 별들은 아지랑이에 흔들릴 정도로 뜨겁다.
바다는 썩어들어 가 악취를 풍기고, 화산엔 용암 대신 짓무른 진흙이 흘러내렸다.
뒤틀린 숲은 생명을 잡아먹고, 거기에서 도망친 몬스터들이 대륙의 중앙을 향한다.
글레이그 대륙 중앙은 인간들의 나라가 밀집해 있었다.
세계수와 가장 가까운 그곳은 아직 멸망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수의 은혜라고 칭송했다.
세계수와 인간은 상부상조의 관계인 걸까. 아니면 인간들의 눈을 멀게 해 그들이 모아온 생명력을 세계수가 착취하는 관계인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세계수의 영향력이 강한 그 땅은 평온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멸망과 싸우기 위해 인간들은 세계수의 밑으로 모여들었고, 마찬가지로 멸망을 피하고자 하는 몬스터들이 그런 인간들의 나라를 공격했다.
수많은 시간 동안 많은 나라가 무너지고 많은 종족이 멸망했지만, 여전히 인간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주를 받은 인간들이 모아온 에너지로도 세계수가 버틸 수 없는 때는 올 것이다. 이미 세계수는 무너질 조짐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인간도, 몬스터도, 이종족도, 자연도, 모두 닥쳐오는 멸망을 피할 순 없다.
그 끝은 종말.
칼에 찔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죽는 게 아니라, 목을 서서히 조여 오는 것처럼 길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게.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게 바로 내가 본 SoR의 미래였다.
그런데 캐릭터가 죽으면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그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에?
그냥 죽는 것보다 나은 게 뭐야?
아무리 봐도 더 끔찍한 일이잖아.
“그럴 리가 없어. SoR은 완전히 서버가 날아갔다고! 게임 속 세계가 남아 있을 리 없잖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충격적인 광경을 부정하기 위해 내가 입을 열었다.
SoR의 서버 컴퓨터는 율이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서버가 따로 있는 게 아닌 이상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임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전혀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즐기던 게임 같은 건 없어요. 그건 우리의 모습이 당신들의 시야에 전달되는 모습일뿐, 글레이그 대륙은 게임 이전부터 실존해왔어요. 그리고 지금도 멸망의 길을 걷고 있죠.”
“……뭐라고?”
“우린 분명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게임의 존재로서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를 일일이 현실의 생물로 만들어내는 것과 다른 차원에 실존하는 생물을 데리고 오는 것. 그 인간의 모습을 한 초월자는 어느 걸 더 손쉽고 재미있게 여길까요?”
하티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 하나가 기반 째로 무너지게 생겼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임 속의 존재가 아니라고?
하티도, 레반도, 레테라도 전부?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인벤토리도 제대로 모르던 레반과 레테라의 반응이었다.
그들이 보는 게임 세상과 내가 보는 게임 세상은 차이가 있었다.
일례로 그들은 인벤토리나 스테이터스 같은 게임 인터페이스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이 게임 캐릭터라면 그러한 게임의 자연스러운 요소를 인지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왜 굳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나는 그저 리얼리티를 위해 그렇게 설정해 둔 거라고 생각하기로 넘어갔다.
그런데 사실은 그 차이가 당연한 거였다면?
마치 실존하는 판타지 위에 억지로 게임으로 덧씌워서 변모시킨 거라고?
그게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그걸 진짜 가능하게 만들 놈이 바로 율이었다.
하티가 하는 말은 완전히 허황되었다고 단정 짓기엔 율이 보인 미친 행보의 무게가 너무 컸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내가 혼란을 느끼고 있을 무렵,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테라가 앞으로 나섰다. 한 손에는 불길한 검은 낫을 쥐고 있었다.
“우리가 있던 세계가 실존하든, 누군가가 만들어낸 놀이터든 알 바 아냐. 그것보다 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이것저것 시도해봐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잖아.”
“그렇죠.”
캐릭터를 돌려보내는 방법. SoR의 진실.
일개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알기엔 너무 큰 규모의 이야기였다.
하티는 의심할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보의 출처를 밝혔다.
“전부 율, 그 남자에게서 들은 거니까요.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되겠네요.”
“……율이 말했다고?”
내 표정이 정색하며 굳어졌다.
레반이 같은 생각을 품은 듯 무기를 쥐었고, 레테라는 이미 손을 움직였다.
치잉!
얇은 쇳소리와 함께 레테라의 낫이 하티의 목 가까이 다가와 멈춰 섰다.
하티가 눈매를 좁히며 레테라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죠?”
“무슨 짓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넌 무슨 목적으로 그딴 헛소리로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거지?”
“헛소리가 아니에요. 정말 그 남자의 입에서 들은 말이라구요.”
“아니. 그럴 리 없어.”
강하게 반발하는 하티의 말을 내가 부정했다.
“난 율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 적 있어.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원래 세계로 되돌릴 수 있는지. 하지만 녀석은 능구렁이처럼 대답을 회피했어. 자신이 말해주기 보단 플레이어 스스로 알아내게 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 판단한 거지. 그런 녀석이 먼저 정보를 건네줄 리 없어.”
“오라버니의 말대로야. 정말 그게 율을 통해 나온 정보라면, 어떻게 그걸 말하게 된 거지?”
“…….”
하티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이 그녀의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내비치는 것 같았다.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다고?”
“아주 수상한 짓 한다고 광고를 하는군.”
보다 못한 레반이 나무 몽둥이를 두어 번 휘두르며 레테라와 합류한다.
근접 전투 직업 캐릭터 두 명이 퇴로를 차단하듯 양쪽에서 압박하고 있다. 하티로서는 도주는커녕 글레이그 대륙으로 돌아가는 걸 걱정해야 될 처지인 것이다.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리 없음에도 하티의 표정은 여전히 단호했다.
“말할 수 없어요! 이걸 설명하려면 주인님에 대한 정보까지 일부 흘릴 수밖에 없다구요!”
“무슨 사정이건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는 이상 결과는 같아.”
“정말 주인에 대한 충정 때문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겠지. 어디 확인해볼까?”
레테라는 당장이라도 하티의 목에 걸쳐진 낫을 당기려 했고, 레반은 몽둥이를 쥔 팔에 근육을 크게 부풀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내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내 허락도 없이 막 나가는 것도 늬들의 충정이냐?”
움찔!
하티를 공격하려던 두 사람이 크게 몸을 떨며 동작을 멈춘다.
그리고 혼나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불안에 떠는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내가 한 배를 탔으니 넷이 같이 나갈 거라고 말한 지 10분도 안 됐어, 망할 놈들아.”
언짢을 표정을 보이자 두 사람은 언제 하티를 위협했냐는 듯 무기를 거두며 딴청을 부렸다.
그들의 모습에 한숨을 쉰 뒤 하티를 바라보았다.
“하티. 네가 말했지? 우리가 아는 율에 대한 전부를 얘기해주는 대신 의문이 남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정보를 건네준다고. 하지만 이러면 의문이 남아버려.”
“……그럼 힘으로 알아내도 됐을 텐데요.”
“그래 봤자 네 입은 못 열걸?”
나는 하티의 주변에서 여전히 딴청 피우는 레반과 레테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만약 누군가 저 두 녀석을 고문하며 내 정보를 불게 하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거야.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네 주인에 대한 치명적인 정보이기 때문 아냐?”
“…….”
“그래도 말해줬으면 좋겠어. 이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거래는 성립이 안 돼. 너도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없을 테고, 의구심을 품은 채 너에게 등을 맡길 수도 없을 테니 여기에서 결별할 수밖에 없어.”
“하아…….”
잠시 아무 말이 없었던 하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을 보고 파티를 고른 건 잘한 판단인 것 같네요. 뭐든지 힘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 당신을 믿고 말씀 드리죠. 하지만 꼭 비밀로 해주세요. 이것이 퍼져나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알았다는 듯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빙성 있는 이유라고 판단만 한다면…….”
“……이제부터 듣게 될 얘기는 묻어주지.”
레반과 레테라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티는 각오를 굳힌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드디어 숨기고 있던 진실을 꺼냈다.
“우리 주인님은…… 사실 여자에요.”
“……응?”
뜻밖의 사실이긴 하지만 굳이 숨길만 한 이유로는 보이지 않기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아직 하티의 말이 끝난 게 아니기에 계속 경청해보았다.
“율, 그 남자가 튜토리얼을 할 때 플레이어가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한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응? 뭐, 그럴 거라 예상은 했어.”
박일봉 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혹시나 했는데, 사람 놀래키기 좋아하는 그 녀석은 진짜 플레이어를 일일이 만나러 다녔나 보다.
“율이 우리를 방문했을 그 시각…… 주인님은 샤워를 하고 계셨어요.”
“……뭐?”
잘못 들었나 귀를 후비고 있을 때, 하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하수도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 갈아 마셔 버릴 자식이!! 다 큰 숙녀의 샤워 시간에 겁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단 말이에요!!! 주인님이!!! 샤워하는 그때!!!”
………………………….
강렬한 열기를 뿜으며 분노하는 하티 앞에서 우리 세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충격이긴 한데, 예상하고 있던 충격과 전혀 방향이 달라서 당황했다.
“전 당연히 광분해서 녀석에게 달려들었죠!! 하지만 분하게도 뭐가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순식간에 제압당했어요!! 그래놓고 녀석이 했던 말이 뭔지 아세요!?”
진정해. 내가 덮치려는 것도 아니고, 가슴 사이즈 D컵 이하는 애초에 여자로 안 봐.
“이게 사람 새끼가 할 소리에요!!? 아니! 애초에 사람도 아니지만! 사람이었다면 당장 성추행으로 고소감이었다구요!! 아니!! 그것도 아니에요!! 그 새끼가 조금만 약했어도 인간의 법에 맡기지 않고 제가 직접 온몸을 편육으로 만들어서 들개에게 먹이로 뿌려줬을 거라구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우리의 눈앞엔 더 이상 성스러움과 자애의 이미지를 가진 성직자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신처럼 모시는 주인, 플레이어.
아무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될 그것을 신성모독 당한 광신도 한 마리가 분노를 토해내며 울부짖고 있었을 뿐이었다.
솔직히 나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날 정도로 무서웠다.
레테라는 여자로서 당한 그 굴욕을 공감할 수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레반은 “뭘 좀 아는 놈이네”라며 율의 취향에 공감하고 있었다.
레반, 넌 일단 눈치부터 키워라.
“그럼 정보는……?”
한바탕 소리 지르던 하티가 겨우 씩씩 대며 진정하는 타이밍에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직 분노의 열기가 감도는 눈으로 말했다.
“우리에게도 그 새끼…… 아니, 그 남자는 게임 개요 등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려고 했어요. 뭘 물으려 하든 모조리 대답을 회피했죠.”
그 점은 우리와 같았다.
“그러다 참다못한 주인님이 팔팔한 여성의 알몸을 감상했는데 대가로 대답 정돈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반발했어요. 그러자 율은 그런 주인님이 엄청 재미있다는 듯 웃기 시작했죠. 그 뒤 당돌해서 마음에 든다며 소원대로 딱 한 가지 질문만 진지하게 답해주겠다고 했어요.”
“……그게 캐릭터를 원래 세계로 되돌리는 방법?”
“네. 말하는 도중에 율은 저쪽 세계가 게임이 아닌듯한 뉘앙스에 말을 했었어요. 여러 정황과 맞추어 볼 때 주인님은 SoR가 게임이 아닌 다른 세계에 연결된 창구의 역할이었다고 결론을 내렸고요.”
그게 플레이어의 영역을 과하게 벗어난 정보를 얻게 된 이유인 걸까.
하티가 율의 정보를 강하게 원하던 이유도 이젠 알 거 같았다.
어쩌면 그녀들은 그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우리보다 더 큰 굴욕을 겪었던 셈이다. 복수심이 불타오를만했다.
“어쨌든, 이걸로 제 얘긴 믿어 주시겠어요?”
잠시 사이에 잔뜩 피곤해진 듯한 하티가 물어왔다.
나는 레반과 레테라 사이에서 눈빛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믿을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엔 딱 그 남자다운 막장 행보였다.”
“너희도 고생이 많구나…….”
레반과 레테라는 이 이상 하티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오히려 율에게 크게 대인 적 있는 사람들로서 동질감마저 생긴 눈치였다.
“뭐, 원하던 얘기는 들었으니, 이번엔 우리 쪽 정보를 넘겨줄게. 우선 율을 처음 만난 건…….”
나는 약속대로 율의 대한 정보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 순간 일어난 이변만 아니었어도 수월했을 것이다.
쿠구구구구구우우웅……!!!
“……?!”
느닷없는 소음과 함께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리의 방향과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따라 고개를 든 나는 무언가 하수도 위에서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헬데트 녀석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라도 한 거야!?”
“아뇨! 헬데트가 아니에요!”
“이건……!!”
하수도 위에서 전해지는 기척을 감지한 세 캐릭터는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