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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92화 (92/173)

〈 92화 〉 고인물이란 ­ 3

* * *

얻어야 할 네 장의 티켓 중 하나를 도둑맞아버렸다.

우리에겐 치명적인 손해였다.

더 이상 황금빛 아우라를 품은 몬스터는 보이지 않고, 운에 맡기며 티켓이 나올 때까지 싸우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다.

포션은 바닥났으며, 힐과 버프를 걸 수 있는 하티 또한 마나가 모두 소진되었고, 그에 비해 주변에 널려 있는 건 하나 같이 만만치 않은 몬스터뿐이다.

레반과 레테라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이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한 번뿐.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티켓을 얻어낸다?

너무나도 승률 낮은 도박이었다.

‘그밖에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사실 나가고자 하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었다.

현재 티켓은 세 장.

최악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이곳에 있는 인원은 네 명 중 셋은 확실하게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탈출할 수 없는 한 명이 누가되느냐다.

나, 레반, 레테라, 하티.

이 중 특별한 인연이 없는 자는 하티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 돕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마주친 게 전부인 타인에 불과하다.

언젠가 우도혁 녀석에게 말한 대로 소중한 사람을 우선시한다면 가장 뒷전이 되는 게 하티일 것이다.

꾸욱…….

하티 또한 상황이 점차 안 좋게 돌아가는 걸 눈치 챈 건지 불안한 손길로 목에 건 방울을 움켜쥔다.

이렇게 되는 게 싫어서 암글라드 전(戰)에 열심히 임한 거지만, 어디서 튀어나온 쌍놈들이 그 전리품을 가져가 버렸다.

덕분에 소거법으로 자신만 덤터기를 쓰게 됐다는 눈치였다.

물론 난 넷이서 함께 나갈 거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말을 악착같이 지킬 수 있을까.

살기 위해서 본성을 드러내지 않을까.

적어도 하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레반과 레테라 또한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다.

이미 셋이 확정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시점에서 더 이상에 위험을 부담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런 생각이 분위기로부터 드러난다.

아마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주저 없이 하티를 제압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편하게 티켓을 뜯고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가 교차하며 불편한 침묵을 만들어냈다.

조금 전까지 잘 맞물리며 돌아가던 파티가 이제는 이곳저곳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진다.

‘개 같은 기분이네.’

이 침묵이 싫었다.

한 마음 한뜻으로 싸웠던 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거나 경계를 하는 모양새도 보기 싫었다.

점차 강해지면서 심리적 압박을 가해오는 몬스터, 한정된 시간, 제한된 티켓.

이 이벤트를 만든 작자가 얼마나 악취미적인 녀석인지 알만했다.

그놈 뜻대로 흘러가는 것도 빡치는 일이었기에 나는 내 나름의 훼방으로 흐름을 바꾸기로 했다.

“인벤토리 오픈. 아이템 지정, ‘탈출 티켓’. 소환!”

인벤토리에 담아두었던 탈출 티켓을 꺼낸다.

갈등에 원인이 된 티켓이 바로 눈앞에서 출현하자 긴장감이 한층 더 짙어졌다.

하티는 뭔가 망설이는 듯하다.

비전투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신체능력이면 나에게서 쉽게 티켓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의 협력 관계는 완전한 끝장나는 거고, 또한 그것을 레반과 레테라가 두고 볼 리 없었다.

허나 하티에겐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티켓을 얻을 기회는 지금이 유일할지 몰랐다.

그런 딜레마에 빠진 듯 표정을 잔뜩 굳힌 그녀에게 나는 성큼 걸어갔다.

“자. 가져가.”

“?!”

그리고 티켓을 내밀었다.

하티는 물론 그것을 지켜보던 레반과 레테라까지 경악한 눈치였다.

“무, 무슨…….”

“무슨 일이긴, 정당한 보수지. 내가 알바 다녀봐서 아는데, 부릴 대로 부려먹고 제대로 보수도 안 주는 악덕 사장만큼 개새끼는 없더라.”

그렇게 하티의 손에 티켓을 쥐어주었다.

하티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지 티켓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귀중한 티켓 중 하나를 그렇게 선뜻 주다니요!”

당연히 레반과 레테라에게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티켓을 줘버리면 우리 세 사람끼리 의자 뺏기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는 양쪽에서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고막을 지키기 위해 귀를 꾹 눌렀다.

“시끄러워. 그리고 너희들도 받아.”

우는 아이에게 사탕 물려주듯, 나는 강매하는 상인처럼 남은 티켓 두 장을 두 사람에게 쥐어주었다.

“좋아. 이걸로 티켓은 각자에게 나누어졌다. 남은 건 내 몫의 티켓뿐이야.”

“무슨…….”

“돌려주지 마. 이제 와서 돌려준다고 한들 절대 안 받을 테니 그리 알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고 있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나는 엄지로 가슴께를 쿡 찍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에게 내 목숨을 맡긴 거다. 남은 시간 동안 전력을 다해 티켓을 구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 그런데도 늬들끼리 눈치 보고 경계하고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

마차를 끄는 말이 일정하지 않고 갈팡질팡한 채 나아가서야 안 될 일이다.

파티를 유지하며 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모두 같은 목표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충격 요법이었다.

***

“푸하하하하핫!!!”

요절복통.

한자 자체는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배가 아프다는 뜻이지만, 주로 그 정도로 배가 아파올 만큼 웃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율은 현재 배를 감싸 쥐며 웃고 있었다.

진짜 배가 아플 정도로 웃는다기보단 스스로의 유쾌한 감정을 과한 몸동작과 함께 표현하는 듯이 보였다.

“이거 진짜 가관이구만! 마차 끄는 말들이 서로 물어뜯을 것 같다고 자기의 목숨을 당근 삼아서 유도하는 거냐!”

율과 오서연이 바라보는 TV 화면은 요현과 그 일행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룰 변경을 알리고 빠르게 티켓을 얻은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이벤트 세계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플레이어를 비추는 채널은 줄어들고, 한 채널에서 고정되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그러다 보니 오서연도 신요현 쪽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율이 이쪽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며 채널을 돌린 것이지만.

“자기 캐릭터라면 모를까 새빨간 타인의 캐릭터에게까지 티켓을 주다니……. 티켓만 얻고 달아날 수 있잖아요? 너무 순진하다고요!”

그나마 얼굴을 알고 지냈기에 오서연은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신요현 쪽에 더 신경이 쏠렸다.

그러다 보험으로 사용될 수 있는 티켓을 그냥 뿌려버리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저것이라면 파티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은 그렇게 정의로운 생물이 아니다. 제 배만 채운 뒤에 멋대로 사냥을 끝낼 수도 있다.

게임 캐릭터들이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서연이 보기엔 저것은 너무나 순진한 믿음이었다.

“순진하다고? 그 반대야. 인간이라는 생물을 바라볼 때 저놈만큼 신랄한 시선을 가진 놈은 없을걸.”

하지만 율은 웃으며 오서연과 반대되는 의견을 꺼냈다.

“신요현 저놈은 인간의 순수함을 믿지 않아.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마저 통용되지. 그렇기에 안전을 고수하기보단 스스로 위험을 부담하려는 거지.”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오서연의 물음에 율은 척하고 손가락 끝을 그녀에게 향했다.

“불신하는 대상을 타인에게 한정 짓는 너와 다르게 저놈은 자기 자신마저 불신하는 거라고.”

“???”

더욱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오서연은 깊은 의문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율은 더 이상 그녀에게 설명해주지 않고 TV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런 주인의 가치관을 충성스러운 멍멍이들이 알아줄지는 별개의 이야기겠지만.”

이제부터 더 재미있어지겠다는 듯 즐겁게 팝콘을 씹으면서 말이다.

***

“……인정 못해요.”

“레테라?”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가 돌아간다.

왜일까.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레테라의 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기시감을 느꼈다.

“추가적으로 티켓을 얻을 확률은 지극히 낮습니다. 아무리 형님의 말씀이라도 이번만큼 따를 수 없습니다.”

“레반?”

이 녀석들 지금 내 말을 거부한 거야?

거기에서 나는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거…… 마치 레아 같은 분위기…….’

집 나간 딸내미를 떠올린다.

그녀의 분위기가 지금 두 사람의 분위기와 놀랍도록 일치했다.

작정하고 반항하고자 하는 분위기였다!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설마 레반과 레테라가 내 의도 이렇게 짙은 반발심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플레이어의 안위에 위배되는 행위가 반발심을 부추기는 건가?

“오라버니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라고요? 절대 그렇게는 못 해요. 정 오라버니가 저희가 돌려주는 티켓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강제로라도 티켓 숫자에 맡게 머릿수를 줄여서라도 저희의 뜻을 내보이겠습니다.”

휘번뜩, 하며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간다.

두 육식동물의 표적이 된 하티가 움찔거리고, 그런 겁먹은 양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듯 두 사람이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동작 그마아아아아아안!!!!”

하티를 덮치려는 레반과 레테라를 향해 내가 먼저 달려들었다.

어차피 내가 가로막아 봤자 두 사람이 나를 지나치며 돌진할 게 뻔했다.

그렇기에 나는 두 팔로 레반의 목을 조이며 두 다리로 레테라의 허리를 붙잡았다.

모양새야 이상하지만 두 사람은 확실히 구속할 수 있었다.

“형님! 이거 놓으십시오!”

“놔주세요, 오라버니!”

“시끄러워! 날뛰지 마! 내 몸이 늬들에 비해 한없이 연약한 거 알고 있지!? 늬들이 날뛰었다간 내 뼈가 이대로 부러진다!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내 몸을 담보로 나를 위해 움직이려는 두 사람을 묶는 아이러니가 일어났다.

그들은 나를 떨쳐내려 버둥거렸지만, 일정 이상의 힘을 내지 못했다.

정말로 내가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꼼짝 못 하게 구속한 나는 어쩔 줄 몰라 제자리에서 허둥대고 있는 하티에게 외쳤다.

“야, 하티! 빨리 도망쳐!”

“네, 네?! 하, 하지만 파티가…….”

“널 죽여서 내 분량의 티켓을 확보하려는 놈이 두 명이나 있다고! 파티고 자시고 성립될 거 같냐!! 파티는 해산이야!! 빨리 가!!”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내 몫을 희생해서라도 파티가 유지되도록 한 건데 해산이라니.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내 가족 같은 녀석들이 나를 위해서 조금 전까지 함께 싸운 동료를 죽이겠다고 말하는데, 그러라면서 눈 하나 깜짝 안 할 정도로 난 대범하지 못하다고!

“으, 으으……!!”

하티는 망설이듯 신음을 흘렸다.

살기 어린 두 사람과 그들을 붙잡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눈을 꽉 감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티켓을 바로 쓰지 않는 건 마음의 부담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은 이 자리에서 달아나 주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보통 사람 이상의 신체능력으로 하티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그동안에도 우리 세 사람의 씨름은 이어졌다.

“형님! 이제 그만 놔주십시오! 그 여자는 이미 도망갔습니다!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못 놔! 쫓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해!”

“맹세할게요! 그러니까 놔주세요!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본인이 가장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진짜 맹세한 거지!? 어기기만 해봐! 평생 네놈들 얼굴 안 보고 살 줄 알아!”

“맹세합니다! 진짜 맹세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하십시오! 형님이 힘들어하니 저희까지 괴롭습니다!”

쿵!

그 말에 나는 두 사람의 구속을 풀고 땅 위로 쓰러졌다.

실랑이가 얼마나 이어지고 있었는지 온몸이 땀에 젖었고,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곁에 레반과 레테라가 주저앉았다.

“대체 왜인 거예요…….”

그들로서는 드물게 나를 향한 원망이 표정에 서려 있었다.

이렇게 나를 위하고 있는데 왜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 주냐는 원망이었다.

“형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는 세계는 없습니다. 형님이 살기 위해선 저나 절벽가슴이나 그 힐러, 셋 중 하나의 희생이 필요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우리와 가장 인연이 적은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어요. 그게 왜 안 된다는 거죠? 오라버니는 저희 셋 중 하나가 사라지기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들의 원망은 당연했고, 논리 또한 틀림이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내 행동은 지극히 유치한 어린애의 생떼 수준이었다.

그 사실은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선에서 숨듯 팔로 눈 위를 덮었다.

“……살다 보면 역겹다고 생각되는 인간을 보게 될 때가 있거든.”

“……?”

“임금 제대로 안 주는 악덕 사장이라던가, 게임 감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을 죽이는 놈이라던가, 자기를 피해자로 포장하며 우리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녀석도 있었네.”

크게 짚어봐서 그 정도지, 뉴스 등으로 시선을 돌리면 토악질 날만큼 혐오스러운 인간은 많았다.

“그런 역겨운 면모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그건 분명 내 안에도 있어.”

하티를 희생시키는 생각을 나라고 안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세 번째 티켓을 얻은 시점부터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차라리 우리만이라도 탈출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무슨 짓이든 하려는 욕망은 점차 커져갔다.

그리고 그건 내가 싫어하던 부류와 똑같은 짓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다’. 그런 변명을 쓸 때면 내가 싫어하는 자신이 밖으로 기어 나올 거 같아. 그러면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간, 나 자신도 혐오하는 인간들과 똑같아지게 돼.”

눈가를 가렸던 팔을 치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동도 없이 그저 정체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먹구름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겨운 인간만큼은 되게 놔두고 싶지 않아. ……나 자신도, 그리고 너희들도.”

““…….””

레반과 레테라는 침묵했다.

내 말을 듣고 자신들이 당연한 듯 행했던 이들을 돌아보는 걸까.

“아, 물론 너희가 역겹다는 게 아니야. 너희의 생각은 위기에 처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본다고. 그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마구 휘두르고 다니는 새끼들이 문제지.”

심각해진 그들의 표정을 풀어주려고 말해본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 이상이 높다고 한들 그것을 이루는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저희 셋 중 하나는 희생되어야 해요.”

“알아. 그래서 가만히 있을 생각 없어.”

충분히 쉬었다고 느낀 나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레반과 레테라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난 아직 포기 안 했거든.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티켓을 얻고 나갈 거야.”

“그러다 실패하면요?”

“내 고집이 초래한 일이니까, 그건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싶지만 그런 사태가 오기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건.

“절대 짊어지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할 일을 말해주세요. 뭐든지 수행해 보일 테니까요.”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두 사람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불안을 피해갈 수 없던 마음에 작은 위로를 얻은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래. 그러니까 남은 시간 동안 머리에서 쥐가 날 만큼 방법을 쥐어짜내야…….”

말을 이어가던 나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한 탓이다.

내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린 레반과 레테라는 고개를 내밀며 휴대폰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하다 나를 따라서 표정을 굳혔다.

1시 하고도 36초.

네 번째 웨이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이런 미친?!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난 거야!!”

암글라드를 잡은 직후부터 별의별 일이 일어났지만, 이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줄은 몰랐다.

율이 일부러 룰을 수정했을 정도이니 네 번째 웨이브에 무언가 있다는 건 예상했다.

그것을 겪지 않기 위해 세 번째 웨이브 시간에 다 끝내려고 했었는데, 어느새 1시 정각을 넘긴 것이다!

우리는 지체할 것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보이냐?”

“아뇨.”

“아무것도.”

내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웨이브는 항상 하늘에서 몬스터가 쏟아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역시 그럴 줄 알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설마 계속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식상하다고 네 번째부턴 지하에서 솟구쳐 나오는 거로 변경한 건 아닐 테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웨이브가 시작된 지 1분 가까이 흘러간다.

아무리 몬스터가 떨어지기까지 시간차가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오래 걸린다.

‘율이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을 리 없어. 대체 뭐가 일어나려는 거지?’

주변에 다른 변화가 없나 둘러보고 있을 때, 레반과 레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하늘이…….”

그 말에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다. 떨어지는 몬스터 따윈 보이지 않는다.

대신, 구름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그동안 줄곧 정체되어 있던 구름이 유동하는 모습을 언뜻 봤는데,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구름이 움직인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속도는 지상에서 보기에도 너무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뭐야? 뭐가 일어나려는 거야!?’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향했다.

태풍의 눈처럼 뻥 뚫린 중심 아래에 그동안 지상에 닿지 못했던 햇빛이 내려온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빛 아래에서 나타났다.

마치 천사가 강림하기라도 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외관은 천사와 거리가 멀었다.

하얗기는커녕 새까맣고 날카롭게 뻗어있는 날개.

공룡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대한 몸체, 기다란 꼬리, 거대한 뿔이 달린 머리까지.

그것을 알아본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율, 이 개새끼가.”

네 번째 웨이브는 이전과 같이 몬스터 대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몬스터 대군이 차라리 나을 만큼 어마무시한 놈이 튀어나왔다.

몬스터의 생태계중 최정점.

아무도 토벌하지 못해 토벌 불가 판정까지 받은 끝판왕격 존재.

흑룡, 아그나벨리어스.

전설의 사대룡 중 하나가 눈앞에 강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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