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이벤트의 뒷풀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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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나는 질식, 혹은 압사하기 전에 금화 더미 아래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짓눌릴 것 같은 돈의 무게에 전혀 휘둘리지 않은 레테라가 나를 꺼내준 것이다.
근처에 있다가 나처럼 금화 더미 아래에 깔리는 봉변을 당한 오서연도 레반이 꺼내주고 있었다.
그녀도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나는 거실 한 가운데에 수북하게 쌓인 황금빛 덩어리를 올려다보았다.
율이 아까 뭐라고 했지? 금화가 10만 하고도 몇천?
10만이라는 숫자는 듣기만 해선 실감이 안 됐지만, 거의 천장에 닿을 듯이 쌓여 있는 금화를 보자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걸 실감했다.
한우 스테이크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이 정도면 강남땅을 살 정도잖아!
내가 압도적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공중에 둥실 떠오른 가방 위에 앉아 있던 율 인형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가난한 서민 출신 청년이여, 돈에 파묻혀 본 감상은 어떠냐?
그 말에 울컥하여 녀석에게 소리쳤다.
“깔려 죽을 뻔했다! 돈이 많아도 죽으면 뭔 소용이야!!”
하하하, 방금 그 말 제법 철학적인데?
“웃기냐!? 이게!?”
성을 내보아도 율 인형은 신경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되레 그 반응에 내 머릿속 열기가 가라앉았다.
역시 이놈에겐 뭔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실감한다.
레반과 레테라가 공중에 떠 있는 율을 가리키며 ‘죽일까요?’라고 묻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됐다며 고개를 젓고 발치를 굴러다니는 금화 하나를 집어보았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낯설지 않은 형태였다.
“SoR의 금화잖아?”
금화에는 앞뒤로 얼굴이 없는 사람의 형상이 찍혀 있었다.
각각 창세 신화에 나오는 불굴의 신과 절망의 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관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문명을 유지하는 국가가 있는 이상 당연히 통용되는 화폐는 존재했다.
물론 한 나라가 망하면 그곳의 화폐가 종잇조각이 되듯, SoR에서도 국가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쓸모없는 금속 덩어리로 전락하긴 한다.
그러나 아직 광기와 혼돈에 물들이지 않는 정상인들은 화폐라는 사회적 질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이 미련인지 의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가까스로 사회가 순환하는 움직임은 유지되었다.
당연히 이 금화를 통해 아이템을 거래하거나 의뢰를 한다.
나 또한 SoR의 고인물로서 꽤나 많은 금화를 소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금화라는 게 인벤토리에 담는 아이템과는 다르게 분류된다는 것이다.
획득한 금화는 소지금 목록에 쌓일 뿐이라서 인벤토리의 아이템처럼 꺼내 쓸 수 없다.
인벤토리에 있었다면 진즉에 꺼내 팔아서 돈 좀 벌었겠지.
저쪽 세계에선 가치가 들쭉날쭉할지라도 이곳에선 엄연히 부동산 이상으로 통하는 안전자산인데.
유저들과 캐릭터들이 글레이그 대륙을 떠나면서 수많은 금화가 공중으로 붕 떠버렸거든. 보통의 경우라면 유저들의 소지금은 시중에 풀리겠지만, 안 그래도 살아남으려고 발악하는 국가들인데 대량의 금화마저 풀렸다간 인플레이션으로 멸망만 가속화되겠지. 그래서 내가 회수했어. 이것들이 바로 그거고.
“결국 짬처리잖아. 이거 1위 상품 맞는 거지?”
맞고말고. 완전한 순금은 아닐지라도 금 함량은 엄청 높다고? 금은방에 몇 개만 팔아도 네 알바 월급은 가볍게 넘을걸? 금값 우습게보슈?
우습게볼 리가.
가난한 자취생활을 겪은 지가 불과 얼마 전인데 감히 돈을 우습게보겠는가.
그렇기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재산을 가지게 되니 약간의 두려움마저 밀려왔다.
“이렇게 많은 걸 어디에 쓰라고? 금 시세 대폭락 테러라도 하리?”
웬만한 거대 은행에서도 보관하지 않을 듯한 양이다.
잘 변동하지 않는 게 금 시세라고 하지만, 이 정도 물량이면 거의 테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시세 폭락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뭘 그리 걱정이야. 필요할 때 조금씩 환전에서 쓰면 되는 것을. 그리고 그 시세 테러도 꽤 괜찮을 거 같은데? 금값만 믿고 떵떵거리는 녀석들이 목매다는 꼴을 보면 웃길 거 같지 않아?
“하겠냐, 미친 새끼야.”
그거 유감이네.
진심으로 그런 꼴을 보고 싶었던 건지, 그냥 해본 말인 건지.
율 인형은 별 다른 말없이 물러났다.
그러면서 떠날 때가 됐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말을 남긴다.
그럼 이번 이벤트 수고했어. 다음 것도 기대하라고.
“……! 다음 이벤트도 있어?”
그럼 없겠냐. 너희들이 그렇게 소망해왔던 대로 꾸준한 업데이트와 함께 지루하지 않게 해줄게.
오늘 겪었던 그 난리부르스가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벤트 보상으로 난데없는 부자가 되긴 했지만, 그런 일을 또 겪고 싶냐는 건 다른 문제다.
군대에서 값진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고 한들 다시 가고 싶다고 말하는 미친놈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야, 야! 그딴 거 필요 없어!!”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율 인형은 그 말만을 남기고 자신이 올라타고 있는 상자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라지는 모습이 딱 본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눈앞에서 사라지던 모습과 흡사했다.
“씨팔!! 하다못해 언제 할 건지는 말해주고 가라고!!”
녀석이 사라진 공간을 향해 외쳐보았지만 공허한 울림만 생길 뿐이었다.
나는 결국 녀석을 쥐어 패면서 풀지 못한 스트레스가 머리를 조여 오는 걸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이벤트는 한 발만 삐끗 했어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뻔했다.
몬스터 대군에, 레이드 몬스터, 마지막엔 흑룡.
다음 이벤트가 이것보다 못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율 그 새끼가 꾸미는 일인데 더한 것이 나올 게 분명하다.
‘도망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의 금화가 있다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을 것이다. 레반과 레테라가 있는 이상 억울하게 맞을 일도 없을 테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 봤자다. 율이 그걸 방관할 리 없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플레이어는 녀석의 손바닥 위에 있는 셈이다.
율이 이번처럼 자율 참가가 아니라 강제참가 형식의 이벤트를 낸다면 우리로선 피할 길이 없다.
“결국 대비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돈은 생겼지만 그걸로 인생을 만끽할만한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율이 무슨 악독한 이벤트를 꾸미던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했다.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레반과 레테라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내 고민과 결정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저희야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원하신다면 뭐든지요.”
참으로 든든한 녀석들이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다음 이벤트가 약간은 기대되는 이유는 이 녀석들이 있는 덕분일 것이다.
나는 한껏 웃음을 입가에 베어물고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 오늘은 푹 쉬자.”
흑룡의 공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지 아직 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커피 덕분에 버티고 있는 거지, 몸도 정신도 당장 기절하듯 잠들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오늘은 일단 푹 쉬고, 앞날을 대비하자.
그렇게 결정하며 나는 손님으로 찾아온 오서연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녀를 돌아보았다.
“…………갖고 싶으면 몇 개 드릴까요?”
“허억?!”
내 말에 깜짝 놀란 오서연은 바라보던 금화더미에서 허겁지겁 시선을 뗐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건지 그녀의 입가엔 침마저 흐르고 있었다.
“아, 아냐! 그냥 금화 한 개를 백 그램가량이라고 쳤을 때 이만한 양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 계산해 보려고……!”
넋을 놓고 있던 게 부끄러운지, 아니면 금화에 욕심 있다고 생각되는 게 싫었는지 오서연은 새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늘어놨다.
이 대량의 금화를 보관할 방법도 찾아봐야겠다.
괜한 사람들이 눈독 들여서 내 소유물을 지키고자 하는 충성스러운 짐승들에게 물리지 않도록 말이다.
***
“…….”
그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10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외벽이 유리로 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건물이다.
오히려 주변에 높은 건물들 사이에 가려져 마치 숨은 듯 은밀해 보이기까지 한다.
후르릅…….
뒤편에 카페에서 산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한동안 멈춘 듯 건물만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20대 중후반쯤은 되어 보인다.
바깥 활동을 잘 하지 않은 듯 피부가 새하얗고, 선이 가늘어서 여성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튀어나와 있는 목젖이나 깎고 나서 남은 수염의 흔적으로 보면 남성임이 틀림이 없었다.
길게 자란 머리가 눈썹 아래까지 뒤덮여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리고 있다.
그러나 그 머리카락 사이에서 보이는 눈빛은 평범한 사람들이 본다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시체의 것이라고 착각할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남자의 옆에 누군가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뒤덮은 자였다.
복면으로 얼굴마저 감쌌기에 그 자의 외모라고 구분 지을 수 있는 건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붉은 눈빛만이 전부였다.
그 복면인은 가만히 서 있는 남자에게 부복하며 고개를 숙인다.
“사방에서 건물을 살펴보았지만 몰래 잠입할 수 있는 루트는 없었습니다. 창문은 모두 잠겨 있고, 마법적 처리를 했는지 바깥에선 문을 딸 수도 없습니다.”
“……들어올 거면 정문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에 비해 남자의 목소리를 제법 미성이었다.
그의 시선은 활짝 열려 있는 건물의 출입문으로 향했다.
막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에 저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건물에 접근하자마자 어서 들어오라는 듯 출입문이 좌우로 열리며 그대로 고정되었다.
그 안에 감도는 불쾌할 정도의 침묵은 섣불리 발을 들이는 걸 꺼리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복면인에게 다른 샛길이 없나 찾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방금 들었던 대로. 샛길은 없었다.
결국 좋든 싫든 여기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저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자.”
남자는 나지막이 말하였다.
그러자 옆에 도열해 있던 세 그림자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하나는 조금 전 보고를 올린 복면인이었다.
소리조차 없는 그 발걸음은 당장이라도 그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감춰버릴 것만 같았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자였다.
덩치는 거의 2m를 넘어가는 듯했고, 절그럭거리면서 울리는 발걸음은 땅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기 충분했다.
얼굴은 투구에 뒤덮였으며, 거기에 장식된 작은 뿔은 위압감을 키우는 용도인 것 같다.
마지막 하나는 긴 보라색 로브에 한 손에는 고목의 가지를 꺾은 듯 세월이 느껴지는 지팡이를 쥐고 있는 자였다.
손에는 가죽 장갑, 로브의 하단은 발목 아래까지 뒤덮여 질질 끌렸으며, 무엇보다 챙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특이하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의 본래의 외모를 전혀 내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자신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누군가의 성격을 반영이라도 한 것처럼.
저벅. 저벅.
집단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과묵한 그들이 정문을 지나 로비로 들어섰다.
밖에서부터 엿보이던 것보다 훨씬 건물 내부의 모습은 황량했다.
남자를 둘러싼 세 인영이 주변을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고, 남자 본인만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은 로비 정중앙에 올 즈음에 멈췄다.
일행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름 하진철. 나이 만 28세. 독신. 학교는 지방 전문대를 나왔으며, 군대는 의가사로 제대했음.”
남자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둘러싸던 세 명의 인영들은 남자의 앞에 서며 적의를 강하게 드러냈다.
동시에 네 쌍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비어있을 터인 안내데스크 위에 올라간 신발은 전혀 개의치 않은 지 리듬을 타며 까딱거렸다.
“대학 동기생이나 군대 선후임들이 말하길, 일단 시킨 일이나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하지만,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남들이 웃을 때 잘 웃지 않고, 남들이 울 때 잘 울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게 딱 주변 사람들 평가.”
안내데스크 빈 의자에 앉은 채, 두 발을 책상 위에서 교차한 그는 면접서를 읽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정작 그의 손은 문서 하나 없이 깍지를 끼며 머리를 받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 정체는 내 게임에 참가한 플레이어이자, 지금까지 캐릭터들을 통해 총 다섯 명의 사람들을 죽인 싸이코패스. 혹시 여자 손목 좋아해? 아니면 고양이라도. 응? 하진철.”
안내데스크에 앉은 남자, 율은 감겨있던 눈을 슬쩍 뜨며 물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말투지만 하진철이라 불린 남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초대장이 없다고 쫓아내진 않겠지?”
하진철은 주머니에서 종잇조각 하나를 꺼내 보였다.
초대장이라기보단 어린애의 낙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기엔 ‘초대장’이라는 글자가 서툰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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