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이벤트의 뒷풀이 4
* * *
율은 플레이어가 본사를 찾아오기 위한 안배를 하나만 해두지 않았다.
요현이 단서를 발견했던, 이전 본사 건물의 미믹은 율에게 도달하는 루트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유일한 건 아니었다.
옛 본사 건물.
그곳에는 미믹 말고도 본사를 찾아내는 단서가 몇 개 더 있었다.
예를 들어 미믹이 안치되어 있던 바닥 바로 밑에는 비밀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는 미믹을 쓰러뜨린 자보다 한발 늦어버린 방문객을 위한 아차상이 준비되었다.
아차상은 고작 사탕 하나.
별 특별한 효과의 아이템도 아닌 그냥 계피맛 사탕이었다.
그 옆으로는 ‘늦었구나ㅋㅋ’이라는 사람 신경 거슬리게 하는 듯한 문구의 쪽지도 있었다.
헛수고했음을 각인시키는 문구에 짜증날 법도 하지만, 하진철은 담담히 쓴 사탕을 씹으며 그곳에 있던 쪽지를 살폈다.
약 올리는 게 목적으로 보였던 쪽지 뒤편에는 사진이 있었다.
요현을 인도했던 것과 같은 사진이었다.
그것을 단서로 하진철은 위드 소프트웨어 건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건물 앞에 도달하자마자 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초대장이 없으면 입장 불가다.
호위로 데려온 세 캐릭터들은 돌발적으로 나타난 그에게 문답무용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여느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손 한번 못 써 보고 제압당했다.
율은 깔아뭉개서 세 겹으로 쌓아놓은 캐릭터들 위에 앉은 채 하진철을 향해 자신이 나타난 이유를 밝혔다.
이미 3시간 전에 또 다른 플레이어가 왔다갔어. 그 녀석이 이곳을 찾아내는 것으로 새 게임을 시작한 조건은 충족됐지.
그가 말한 건 이 게임의 개요와 뭘 하든 상관 안 한다는 기묘한 룰, 다른 플레이어들의 존재에 대해서였다.
그걸로 하진철은 자신의 캐릭터가 현실로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많았다.
그것을 물으려 했지만, 율은 어림도 없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손님으로서 직접 방문한 뒤에 물어보라고. 초대장은 다음 이벤트에 찾을 기회를 줄 테니까. 궁금한 건 그때 말해주지.
제 하고픈 말만 한 율은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며 하진철과 캐릭터들을 거주지로 날려 보냈다.
하진철은 막무가내 같은 율의 행동에 화를 내기보단 그가 말한 이벤트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번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남들은 탈출 티켓을 모으니 급급했던 와중, 오직 하진철만이 탈출 티켓을 빠르게 모은 뒤 초대장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요현조차 정신없는 나머지 이전 율이 언급했던 초대장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상황이었건만, 하진철은 기어코 숨겨져 있던 초대장을 찾아내었다.
“말한 대로 초대장을 가지고 왔다.”
하진철은 보란 듯이 초대장이라고 적힌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어린애의 장난 같은 낙서가 적혀 있는 게 전부이지만, 율은 그것이 틀림없는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거만하게 앉아 두 발을 올려놓고 있던 율이 능글맞게 입꼬리를 휜 채 말한다.
“본래 초대장은 일인당 하나라서, 소지하지 않은 자는 내가 만든 던전으로 강제 진입되지만…….”
“물론 전원 소지했다.”
하진철의 말에 암살자, 전사, 마법사로 보이는 세 캐릭터는 각자 초대장을 꺼내 내보였다.
탈출 티켓이 일 인당 하나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모든 인원분의 티켓을 찾은 게 다행이었다.
너무 감쪽같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여 하마터면 흑룡에게 당할 뻔했지만, 율이 바라는 대로의 흐름은 막은 모양이다.
율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유감이군. 이전에 있던 던전을 더욱 업그레이드 시켜서 끝내주는 체험을 시켜줄 수 있었는데.”
율이 말하는 던전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저렇게 아쉬워하는 걸 보면 결코 겪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예상이 갔다.
“어디보자, 네 점수가…….”
율은 늘 들고 다니는 테블릿을 조작했다.
요현에게 점수와 보상을 건네주었을 때처럼, 그의 모니터에서 하진철이 얻은 점수와 순위가 나왔다.
『플레이어: 하진철』
『스코어: 189점 21위』
참가 플레이어 21명 중 21위.
꼴등이었다.
하지만 율은 당연한 결과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럴 수밖에. 초반에 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해 티켓을 빼앗을 생각 밖에 안 한 녀석이 뭘 하겠어. 티켓을 모은 이후부터는 몬스터보단 초대장 찾는데 주력했으니까 허접할 정도로 낮을 수밖에.”
하진철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지만, 율은 무시하며 주머니에서 꺼낸 걸 던졌다.
“옜다, 꼴등 보상이다.”
덥썩!
하진철의 캐릭터 중 하나, 암살자는 정체 모를 물건이 주인에게 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을 도중에 막기 위해 손을 뻗어 물건을 붙잡았다.
그러나 붙잡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영역 안을 지나가는 건 빠르게 날아가는 제비조차 잡아챌 수 있다고 자신하는 암살자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엄지손톱만 한 물체를 붙잡지 못했다.
아니, 암살자가 경험한 건 물건을 놓쳤다기 보단, 물건이 암살자의 손아귀를 통과하듯 지나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
“참고로 마법은 아니다.”
놀란 듯 눈을 부릅뜨는 암살자의 귀에 놀리는 듯한 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살자를 지나치고, 율이 던진 물건은 하진철의 발치로 떨어졌다.
툭.
하진철은 시선만을 내려 율이 던진 물건을 확인했다.
그건 계피맛 사탕이었다.
지난번에 이어서 이번에도 또 그 사탕을 보상이랍시고 준 것이다.
그 도발하는 듯한 처사에 캐릭터들의 눈이 절로 사나워졌지만 율은 노려보면 어쩔 거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불만 있으면 높은 점수를 받거나, 빨리 움직이던가. 딴짓 하다가 뒤처진 새끼들이 누구한테 불만이야?”
율은 하진철이 거쳐 온 모든 행적을 알고 있었다.
수능 시험을 생각해보라.
아무리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고, 힘들어하는 할머니를 도와주고 왔다고 한들 지각은 지각이다. 그에 대한 손해는 본인이 감수해야한다.
하물며 이들은 좋은 일을 하느라 늦춰진 것도 아니었다.
“네가 본사 건물을 찾는데 늦어진 이유도 쓸데없이 다른 곳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이지. 넌 캐릭터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어. 그렇기에 그 당시에 첫 살인까지 저지르고 사고로 꾸미느라 온 신경을 쏟고 있었고.”
“……꽤 잘 알고 있군.”
“알다마다. 난 눈이 좋거든. 인간이 숭배해 마지않는 초월적인 존재, 신이라 불리는 것들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들은 전부 언제나 인간을 지켜본다고 말하는 관음증 환자들이지. 말 나온 김에 네 살해 행적도 전부 읊어줄까?”
율은 자신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그저 평범한 인간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검고 생기 넘치는 눈동자.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진철의 시체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보다 더욱 소름이 돋는 이유는 무엇일까.
율은 자세를 고치며 의자 위에서 양반다리를 취했다.
한 손으로 턱을 짚으며 입을 움직였다.
“첫 살인은 조심성이 많았지. 누가 뭐래도 자기 부모였으니까. 그래서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고로 꾸미려고 이것저것 고민이 많았지? 그런데 거기서 넌 이상한 걸 느꼈을 거야. 두 번째 살인은 자신이 대리로 모임에 내보냈던 남자. 이건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와 캐릭터도 있기에 빠르게 치고 빠져야 했지만 제법 대놓고 죽였어.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야 했고. 이건 몰랐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상세히 쏟아져 나오는 율에 말에 캐릭터들은 약간의 경직됨을 숨기지 못했다.
“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뉴스에 나타나지 않는 시체 소식에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가 뒤처리를 한 건지 아닌지 헷갈렸을 거야. 그래서 세 번째는 아랫동네의 어느 백수를 죽여 쓰레기장에 방치했던 거고. 이번엔 누군가가 뒤처리를 못 하도록. 하지만 이번엔 금방 뉴스를 탔지. ‘앞날이 창창한 청년의 미래를 빼앗은 묻지마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참 웃기지? 앞날이 창창하긴 개뿔, 그 백수는 네가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30년간 쓰레기처럼 방구석에 웅크린 채 살다가 고독사할 예정이었어.”
오직 하나, 하진철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던 자신의 비밀을 율이 사정없이 끄집어내고 있음에도 아무런 감정적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다.
“네 번째는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죽였어. 사람 수십 명이 지나다니는 도로변에서 말이야. 명령을 수행한 암살자는 바로 숨었지만 살해 순간은 목격한 목격자는 다수. 너는 뉴스가 나오길 기다렸지.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뉴스는 나오지 않았어. 거기서 넌 어느 결론에 다가갔지? 그러나 확신하지 못했고, 그 뒤에 이벤트가 벌어졌어.”
휘리리릭. 덥썩.
검지 끝에서 공 돌리듯 휘리릭 돌리고 있던 테블릿을 멈춘다.
화면에 떠오른 건 일정하게 정렬 되어 있는 빨간 동그라미.
동그라미의 개수는 총 57개였으며, 그 중 하나는 검게 칠해져 있었다.
“다섯 번째 살인은 이벤트에서 마주친 플레이어를 죽였군. 참고로 네가 죽인 놈이 이번 이벤트 유일한 사망자야. 너보다는 성실하게 몬스터들만 잡고, 겨우 티켓 두 장을 모아 나가기 직전 있었는데 갑자기 죽게 될 줄은 몰랐을 거야. 그리고 너희들에게 함께 살해당해 원래 세계로 돌아간 캐릭터는 지금 분노로 이성을 잃은 채 발광하고 있어.”
“관심 없다.”
“그럴 줄 알았어.”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하진철의 대답에 율은 뻔하다는 듯 말을 넘겼다.
“뭐, 결국 종합해보면, 마지막을 제외하곤 넌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인을 반복했어. 그건 네 머릿속에 있는 가설에 확신을 더하기 위한 실험이었지.”
“그래.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다.”
하진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실험으로 결과를 도출한다고 해도 완벽하지 않으니까. 이 게임의 모든 룰을 꿰뚫고 있는 GM의 확언 한 마디보다는 못하지.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군.”
허공에서 율과 하진철의 시선이 부딪친다.
시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어두운 눈빛. 그것이 뭐가 마음에 드는 건지 율은 당장이라도 웃음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 율에게 하진철의 질문이 던져졌다.
“이 게임, 민간인 살해에 디메리트가 없는 거냐?”
“응.”
짤막한 대답.
그 가벼움에 이번 역시 장난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나 하진철은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야만 설명이 된다.
아무도 모르게 죽였던 백수는 쉽게 발견되면서,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죽인 인간들은 쉽게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
두 번째 남자는 율이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럼 네 번째 인간도 마찬가지일 터.
율이 플레이어와 캐릭터, 정확히 말하면 게임 자체의 존재가 세상의 드러나는 걸 막고 있다.
실제로 이미 그의 입에서 두 번째 남자를 자신이 치웠다고 하지 않던가.
줄곧 확인하고 싶었던 해답이다.
그리고 자신을 묶는 답답한 제약이 풀어져 나가는 걸 느낀 그의 입에서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짓는 표정다운 표정이었다.
시체와 같이 어두운 눈빛과 어울리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지만 율은 그저 재밌기만 할 뿐인 듯 웃었다.
“만족했다. 돌아가지.”
“흠……?”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하진철은 더 이상 율과 관계되지 않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캐릭터들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게 다야? 더 묻고 싶은 거나 용건은 없어?”
그것이 의외라는 듯 율은 떠나가려는 하진철을 발걸음을 붙잡으며 물었다.
“글쎄. 지금까지의 네 태도를 보자면 약 올리기만 할 뿐, 알려줄 것 같진 않은데.”
“그건 그렇지.”
율은 부정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하진철을 맞이한 것도 그들을 놀려먹으며 가지고 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장난감의 임무를 짊어진 녀석들이 빠르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운걸? 좀 더 너희에 대해 알고 싶은데 말이야.”
“네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면 쉬운 일 아닌가? 내 생각을 읽거나 하면 되잖아.”
하진철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동태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데 그것조차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율은 멍청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너 바보냐? 첫 페이지를 넘긴 걸로 그 책에 모든 내용을 알아버리면 읽는 재미가 어디 있겠어?”
한심하다는 듯한 율의 말투에 하진철은 순간 자신이 왜 이딴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율의 말은 이어진다.
“내가 보는 건 어디까지나 현재뿐.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는 짓은 너무 재미가 없잖아. 스포일러 따윈 질색이라고. 그래서 지금 네 돌발행동이 내 흥미를 유발하는 중이고.”
신과 같은 위치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으면 완전한 방관자가 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율이 끔찍하게 싫어할 정도로 지루한 일이다.
그는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내고, 그 한계 속에서 과정을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민간인 살해에 디메리트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 넌 이제부터 무엇을 할까? 닥치는 대로 살육하는 살인 게임? 아니지, 아니야. 네가 이제까지 굳이 살인을 저지른 건 게임 룰의 한계를 알기 위해서야. 살육 파티?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나 여기 있다고 홍보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하겠어? 그럼 네가 이제부터 취할 다음 행동은 뭘까?”
“…….”
“‘목표’겠지.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넌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는 부류다. 분명 그것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겠지만, 문제는 난 아직 네 목표를 잘 모른다는 거야. 너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본다면 소설 속 복선으로 범인을 알아맞히는 것마냥 쉽게 알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네 입으로 듣고 싶거든.”
하진철은 더는 들어줄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듯 출입문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출입문 사이로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아갈 수 없었다.
분명 한 호흡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뚫려 있었던 출입문이 막혔다.
그것은 로비의 한 면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얼음벽이었다.
휘오오오오오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분명 건물의 내부임에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피부를 찢고 뼛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하진철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을 돌아보았다.
율은 여전히 하진철의 대답을 종용하듯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이 자식!!”
갑옷을 입은 전사가 율을 향해 달려든다.
자신의 팔뚝만 한 두꺼운 검 하나가 등에서 뽑혀 율의 머리를 쪼갤 듯 휘둘린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러나 쪼개진 건 율의 머리가 아니라 전사가 서 있던 바닥이었다.
언제 휘둘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율의 주먹이 꿀밤을 날리듯 가볍게 뻗어 있었고, 그 밑으로는 전사가 떨어지는 듯한 구멍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네 눈앞에 있는 녀석이 게으른 포식자인 줄 알았어? 천만해. 굳이 따지자면 난 폭군 스타일이거든. 왕년에 원성 좀 많이 들었었지.”
눈보라가 몰아치며 바닥에 쌓이고, 하진철의 몸을 뒤덮여 간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며 마법을 시전한다.
파이어월이라는 불의 벽을 생성하는 마법이었다.
3m가량 솟구친 불의 벽이 암살자와 마법사, 그리고 하진철의 주위를 감싼다.
“지 ㅈ대로 힘을 휘두르는 새끼들 못 봐주겠다며 그것을 막는 목표를 가진 남자가 있다. 이딴 웃기는 게임 멈추겠다며 나를 직접 노리려고 벼르는 여자도 있다. 게임이고 뭐고 관심 없지만 도움을 받은 은인이 있으니 그에게 받은 걸 되갚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노인네가 있다. 마찬가지로 게임에 큰 흥미는 없고 자신의 예쁜 캐릭터를 보는 게 삶의 낙인 뚱보 오타쿠도 있지. 모두 각자의 목표가 있고, 그것에 따라 게임에 임하는 자세는 달라져. 그래서, 넌 뭐지?”
그러나 눈발은 그 불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고열을 품은 벽에도 전혀 녹지 않고 뚫고 들어오는 눈이라니, 마법사가 경악하는 게 미세하게 흔들리는 지팡이의 끝에서부터 전해졌다.
의식까지 앗아갈 듯한 차가운 눈덩이가 자신의 몸 절반을 뒤덮는 걸 느끼며 하진철은 율을 바라보았다.
싱글벙글 웃던 율의 표정이 돌연 사라지더니, 흩날리는 눈발보다 더욱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네 목표를 네 입으로 말해라. 싫다면 여기서 전부 뒈지던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