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리벤지 1
* * *
새하얀 공포가 그 공간을 장악한다.
살이 에일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 추위.
정신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몸속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귀나 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없는 건 하진철의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하로 처박힌 전사를 제외하고, 암살자와 마법사의 몸은 이미 두꺼운 눈덩이에 뒤덮여 있었다.
평범한 눈이 아닌지 사람 모양으로 뭉친 흰 덩어리 안쪽에서 그들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작 외부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하진철의 몸의 90%는 그 눈덩이에 뒤덮인 상태였다. 겨우 남은 머리도 잠식되어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 먹이를 포식하는 것처럼 턱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얼굴로 눈덩이가 기어 올라왔다.
이것에 뒤덮이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율을 응시하는 하진철의 시선은 여전히 어둡고 경직된 상태에서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 이 녀석들에게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적이 있었지.”
“……?”
하진철의 첫마디는 그거였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율은 표정이 사라졌던 얼굴에 미소를 되돌리며 하진철의 말에 귀를 기우렸다.
“전쟁 관련 다큐였다. 근현대사의 모든 전쟁, 전술과 무기. 숫자와 규모 등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었지. 난 그들에게 그것을 자세히 보고 이해하게 만들었다. 선진국을 기준점으로 삼았을 때, 일개 군부대 총과 수류탄의 위력, 중화기, 물량, 이쪽 인간의 개인의 신체능력, 사상, 전술, 모든 것을 상기시킨 뒤에 물었지. ‘너희라면 저들을 없앨 수 있느냐’라고.”
하진철이 말하는 건 당연히 자신의 캐릭터들일 것이다.
과연 캐릭터들이 어떤 대답을 했을지 궁금하다는 듯 율은 눈을 빛냈다.
“내가 말한 저들의 기준은 군인 500~1000명 사이를 맴도는 대대였다. 저들이 모든 준비를 갖춘 풀컨디션 상태일 때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수 있냐고 물었고, 내 캐릭터들은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할 수 있다’라고.”
그렇겠지.
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임 캐릭터들은 이 세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신체조직부터가 이미 이쪽 세상과는 궤를 달리한다.
아무리 사람과 똑같은 외형을 하고 있어도, 캐릭터란 분류상으론 이미 몬스터가 가까운 존재들이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영화에서 등장하는 괴수에게 맞설 정도의 무력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군부대로는 그저 경험치 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이번엔 전차, 함선, 전투기, 인간은 물론 생물의 영역을 벗어난 전술병기를 보여주고 물었다. ‘이것이 연대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공격해 왔을 때, 없앨 수 있느냐’라고. 이번엔 조금 고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했지. ‘할 수 있다’라고.”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게 게임 룰의 한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하진철이 행했던 이러한 지식 주입과 질문들은 게임 캐릭터의 한계를 알기 위함이었다.
아마 캐릭터들의 대답에는 거짓도 허세도 없을 것이다.
주인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할 수 없으니 최대한 냉정하고 표적과 자신을 분석하고 도출한 결론이겠지.
그렇기에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 뒤 나는 미사일 관련 영상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를 모조리 시청하게 했다. 그중에서는 인류 최악의 무기인 핵폭탄도 있었지. 다만 실제 전쟁에서 사용될 일이 적은 핵폭탄이니 정보가 갈린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기준은 가장 위력적이라고 알려진 러시아의 차르봄바로 삼았다.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3000배라고 하던가. 그리고 물었지. ‘이것들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느냐’라고. 이번에 그들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자신들끼리 토론하더군.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 답했다. 이번 건 무리라고.
아무리 자신들이라도 저 정도의 위력에서 멀쩡하긴 힘들다고.
그 말에 하진철이 실망하려는 찰나 그들은 말을 덧붙였다.
“‘다만, 우리 셋이 모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라고 말하더군. ‘직격으로 떨어지든 말든, 열기와 방사능에 휩쓸리든 말든, 약간의 피해를 입을지언정 살아남을 수 있다’고. 거기서 난 웃음이 나왔지. 난 처음부터 그 세 명이 힘을 합쳤을 때의 기준으로 물은 건데, 녀석들은 지금까지 개개인의 무력 기준으로 답해온 거였으니까.”
무표정했던 하진철의 얼굴에서 선명한 미소가 새겨진다.
누군가는 소름 돋는다고 말할 위험한 미소.
아마 캐릭터들의 대답을 들었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현대 기준 최강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 대해 가르치며 물었다. 만약 미국이 국가적 모든 전력을 쏟아 붓는다고 하면, 그것을 뚫고 나아가 미 대통령의 숨통을 끊을 수 있냐고. 이번 대답을 들을 때까진 참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도 그럴 게 한 나라와 싸운다는 거니까. 변수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그리고 그들은 말했지.”
60%의 확률로 가능합니다……라고.
하진철에게는 그 대답만을 충분했다.
“최고지 않아? 겨우 셋이 모였을 뿐인데 국가 하나와 대적할 수 있는 무력이 생긴 거다. 최강국 수장의 목을 딸 확률도 반보다는 높다. 물론 모든 캐릭터가 그렇진 않겠지. 이건 내 캐릭터만이 가능한 거야. 내가 최강으로 키워놓은 그들의 무력은 현실에 와선 무시무시할 정도의 병기로 변한 거라고.”
휘오오오오……!!!
하진철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 대부분을 뒤덮은 눈덩이는 이제 눈과 입 주변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하얀 덩어리에 삼켜지기 직전이었지만, 하진철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힘은 나만이 가질 수 있다.”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탐욕스러운 눈빛을 시체 같던 눈동자 안에서 강하게 빛내며 입을 움직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다우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극한의 한기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임에도, 그 눈빛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오히려 죽음 직전에서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다른 플레이어건, 캐릭터건, 전부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내 힘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으로 하겠어. 그게 내 목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진철의 얼굴은 완전히 눈에 뒤덮였다.
모든 이가 눈에 뒤덮여 침묵밖에 남지 않은 공간에서 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내가 미쳤다는 소리를 자주 듣긴 하는데, 너도 만만치 않구나? 그래서 마음에 들어.”
따악.
율은 손가락을 튕겼다.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그친다.
바닥에 수북히 쌓여 있던 눈, 하진철과 두 명의 캐릭터를 뒤덮고 있던 눈덩이조차 봄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
겨우 눈 감옥에서 해방된 두 캐릭터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율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걸 지나가다 마주친 똥개 정도의 느낌으로 받아넘긴 율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이면 충분해. 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다. 이만 가봐.”
붙잡을 땐 언제고, 용건 다 보았으니 가도 된다는 손짓에 캐릭터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마법사도, 암살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분노를 쏟아 붓고 싶은 눈치였지만, 도저히 율에게 파고들 기회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율에게 빈틈이 없는 게 아니다.
올 테면 얼마든지 와보라는 듯 온몸에서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공격을 꺼리게 만든다.
이미 먼저 달려들었던 전사가 나가떨어진 후 아직까지도 움직임이 없지 않던가.
전사가 사라진 구멍을 바라보던 하진철은 그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대신 율을 바라보았다.
“넌 누구지?”
“알고 있잖아? 회사 사장 겸, 총괄 디렉터 겸, 디자이너 겸, 프로그래머 겸…….”
“그딴 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또 개소리로 약을 올릴 낌새의 말을 끊어내며 하진철이 말한다.
그의 시선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사와 암살자를 스친 뒤, 다시 전사가 사라진 구멍을 바라보고 마지막엔 율에게 고정되었다.
“국가 수준의 무력을 가진 녀석들이다. 그것에 거짓이 없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그런데, 그런 녀석들을 장난감 다루듯 하는 넌 뭐지?”
사실 밝히지 않은 일이지만, 하진철은 자신의 캐릭터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율의 목을 치라고 미리 언질을 해둔 상태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혼자서만 소유하길 원했던 하진철의 게임 마스터이자 근원을 알 수 없는 존재인 율은 다른 플레이어나 캐릭터보다 훨씬 껄끄러운 존재였다.
첫 만남 땐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해버렸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대비를 하고 왔다.
외형에선 잘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현재 캐릭터들이 하고 있는 장비는 하진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장비였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왔지만, 정작 캐릭터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성급하게 달려들었던 전사만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나가떨어졌을 뿐이었다.
캐릭터들만 있으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것도, 꿀릴 것도 없다는 생각이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율, 이 남자는 무엇인가?
최고 수준까지 키운 캐릭터 셋이 국가 수준의 무력을 가지고 있건만, 그런 이들을 가지고 노는 이 남자는 인류 멸망급의 무력을 가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진철은 그 답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저 성격 꼬인 남자가 쉽사리 밝힐 리도 없었다.
역시나 율은 악동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서 뭐 하게?”
하진철의 눈매가 좁혀진다.
그의 눈은 눈덩이에 뒤덮이기 직전의 때처럼 위험한 빛으로 번뜩였다.
“네놈이 우리를 능가하는 무력을 가진 이상, 나는 언젠가 반드시 네놈을 없애지 않으면 안 돼.”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냐? 참 당돌하네.”
보통 자신에게 해코지 하겠다고 선언하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두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율은 내버려 둔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나타나는 자만큼 재미있는 즐길 거리는 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진철은 율이 여기서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당돌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 거겠지
“넌 의외로 나를 잘 이해하고 있구나? 나에게 저먼 스플랙스를 먹인 어떤 녀석과 비슷할 정도야.”
“……?”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에 하진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율이야 분명 재미로 어울려준 거겠지만, 저 괴물에게 저먼 스플랙스를 먹이는 미친놈이 있다고?
뭔 놈의 담력을 가진 녀석인지 얼굴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한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지금과는 큰 상관없는 놈일 뿐이었다.
“뭐, 좋아. 이번엔 나도 대답 듣겠다고 핍박한 것도 있고 하니, 특별히 짧게만 대답해주지.”
그때 율의 말이 이어졌다.
변덕이라도 부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장난질의 일환인 것일까.
그런 하진철의 의심과 달리 율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말했다.
“‘인간 오타쿠’.”
???
뜬금없는 명칭.
하진철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캐릭터들마저 저게 뭔 소리인가 황당함을 들어낼 뿐이었다.
“장난하는 거냐?”
“장난 아닌데? 나 진짜 인간 좋아해. 이것만큼 나를 잘 표현한 단어는 없다고. 이제 만족했지?”
해줄 말은 그게 전부라는 듯 율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난 이만 방으로 돌아가련다. 너희는 게임 신나게 즐기라고.”
가볍게 손을 흔든 율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폭풍이 지나간 듯 그들이 있는 로비엔 침묵이 자리 잡고, 때마침 구멍 아래로 떨어졌던 전사가 겨우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며 기어 나왔다.
캐릭터들은 일제히 자신의 주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하진철은 묵묵히 율이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았다.
늘 무표정하던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누구든 쉽게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력을 손에 넣었건만, 가장 죽이고 싶은 상대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사실에 분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그럼 몸조리 잘해~!”
“서연 씨도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오서연을 배웅하고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지겹도록 느끼는 거지만 피곤하다.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사대룡이 튀어나오는 정신 나간 이벤트를 겪은 지 불과 3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현재.
마셔두었던 벌써 커피도 효력을 다했는지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려고 한다.
“피곤하시면 주무세요, 오라버니.”
“아니, 그래도 할 일은 하고 자고 싶어.”
걱정스러워하는 레테라의 권유를 넌지시 거절하며 나는 깨끗해진 거실 바닥에 앉았다.
이곳을 가득 메우던 금화 더미는 더 이상 없었다. 모조리 다른 장소에 옮긴 것이다.
그 장소란 바로 인벤토리였다.
인벤토리는 게임 관련 아이템이 아닌 이상 물건을 넣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금화는 게임 외 아이템으로 취급되었다.
그런 금화를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있던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금화를 게임 아이템인 오크통에 담아두고, 그 통째로 인벤토리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본래는 술을 담아두는 용도인 오크통이었지만, 금화를 보관하기 위해 일부만 남기고 모조리 내용물을 빼내었다.
욕실 하수도 구멍에 흘러 들어가는 술을 보며, 그것을 좋아하는 레반이 거의 영혼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 여유분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무튼 그렇게 대량의 금화를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 금은방에 몇 개만 가져가서 팔아봐야지.
금화는 시골 증조할아버지의 창고에서 찾아냈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고, 지금 할 일은…….
“레반.”
“넵!”
내가 이름을 부르자 레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오며 말했다.
지금부터 할 건 게이머로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네 레벨 업을 확인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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