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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12화 (112/173)

〈 112화 〉 통제불가 ­ 2

* * *

현재시간 밤 10시.

영업시간이 종료되면서 건물의 불은 다 꺼져 있다.

전부 퇴근한 건가?

하지만 아직 안에 사람은 남아 있는지 창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보인다.

안범석과 진혜는 아직 안에 있을 것이다.

몰래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나 실험해보았지만, 결과는 불가능이었다.

문이 안쪽에서부터 잠겨 있다.

뒷문 또한 잠겨 있는 건 마찬가지고, 열려 있는 창문도 없었다.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고개를 위로 향하자 방법이 보였다.

“레반이 친 사고가 이렇게 도움이 되네.”

오늘 오후, 자신을 스토킹 하는 머슬 피프틴을 떨쳐내려고 레반이 창문을 깨고 밖으로 몸을 날리는 미친 짓을 벌였었다.

그때 깨진 창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문 교체는 내일하기로 하고 오늘은 임시로 천으로 막아두었을 뿐이다.

사람 하나는 거뜬히 지날 수 있는 구멍으로 들어온 바람 때문에 천이 흔들리며 나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마침 깨진 창문 옆으로 배수관 파이프가 지상까지 내려와 있고, 그 옆으로는 에어컨 실외기 등 발을 디디기 적당한 물체들이 있었다.

“오늘 리프팅은 적당히 할 걸 그랬어.”

팔다리가 근육통으로 후달리는 상태에서 파이프를 타고 3층 창문까지 오르는 건 상당히 고역이었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인지 파이프를 오르는 내내 등 쪽에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방향을 보니 레아가 대기하고 있는 건물 쪽이었다.

평소처럼 사나운 시선이라기 보단 내가 떨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 하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이쪽에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후우…….”

창문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유리조각에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창문 안쪽으로 들어온다.

정면을 가리는 천을 거둬내자 보이는 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헬스클럽 내부의 모습이었다.

불 꺼진 단련실을 비추는 건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야경이 전부.

언제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런닝머신도, 기타 트레이닝 기구도 전부 깊은 잠에 든 듯 침묵만이 감돌았다.

언제나 땀과 열기가 가득했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아무도 없는 단련실로 들어오니 스산함마저 느낄 정도다.

아니, 스산함을 느끼는 건 이곳의 분위기 탓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레반과 레테라가 무언가에 의해 사라져버린 장소에 돌아왔다.

이곳에 무언가 함정이 숨겨져 있다면, 난 지금 입을 떡하니 벌린 괴물의 입 안으로 목을 들이민 셈이리라.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나는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이동했다.

계단을 이용해 1층까지 내려왔고, 그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다른 이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단련실 안쪽 사무실에 불이 켜진 사무실이 보인다.

멀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분명 저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긴장 때문에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려고 한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크게 심호흡 했다.

팽팽해진 폐가 천천히 이완되니 손발의 긴장도 조금은 풀렸다.

그대로 사무실로 다가가 바짝 몸을 붙였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옆으로는 사무실 안쪽에서 단련실을 바라볼 수 있게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그곳 가장 자리에 실적 한쪽 눈만을 내밀며 사무실 안쪽을 살폈다.

“……???”

거기에 있던 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사악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수상한 의식을 치르는 모습도 아니었고, 캐릭터 두 명을 처리했다며 축배를 드는 모습도 아니었다.

산만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자신의 가슴께 밖에 오지 않는 미모의 여성을 두 팔로 꼬옥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틀림없는 안범석과 진혜였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서로를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은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헤어짐을 목전에 둔 연인 같았다.

“……역시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어.”

안범석이 진혜를 끌어안은 채 입을 열었다.

진혜에게 하는 말이겠지만, 그 목소리는 나에게도 들릴 정도로 굳고 선명했다. 그가 보통 각오를 하고 이 말을 내뱉는 게 아니라는 듯.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진혜는 고개를 저으며 슬픈 목소리를 흘렸다.

“안 돼요, 범석 씨. 지금은 떠나서야 해요.”

“그럴 수 없어.”

“부탁이에요.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당신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레반과 레테라를 사라지게 한 흑막과의 대면도 각오하고 찾아온 건데, 그런 내 행동이 무색하게 이곳에선 웬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로 비극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옷이 구겨지도록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은 두 사람은 그 모습 자체로 애절함이라는 감정을 드러내었다.

“난 너의 플레이어잖아. 결코 혼자 두진 않을 거야.”

안범석의 입에서 플레이어가 언급되었다. 그것도 스스로 플레이어라는 걸 밝히면서.

설마 했지만 정말로 두 사람은 이 게임의 참가자였던 모양이다.

안범석이 플레이어.

그렇다면 예상했던 대로 캐릭터는 진혜겠지.

그런데 왜 레반도, 레테라도 저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거지?

지금도 레아가 캐릭터의 존재를 감지한 기색은 없다.

은신 스킬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캐릭터임을 감출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의문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진혜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한 것은 겨우 하루 정도의 유예를 벌었을 뿐, 분명 그들은 돌아올 거예요.”

그들?

그들이라는 게 누구야?

진혜는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라도 하는 걸까?

“한 명이라면 몰라도, 두 명 이상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당신을 지켜낼 자신이 없어요. 일순간뿐이었지만 제가 엿본 그 둘은 정말 무시무시한 힘을 품고 있었어요. 분명 엄청난 플레이어의 손에서 성장한 캐릭터들이겠죠.”

진혜의 입에서 또 다른 캐릭터의 존재가 언급되었다. 그녀는 그 녀석들에게 공격 받을 걸 두려워하는 눈치다.

설마 여기서 제 3자까지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그들의 주인처럼 보이던 사람도 결국 놓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두 캐릭터를 사라지게 했어도 만약 숨겨둔 패가 있으면 어쩌지 못할 상황이었으니까요.”

응?

야, 잠깐만.

두 캐릭터의 주인처럼 보이는 녀석을 놔주었다고?

‘이거 우리 얘기잖아!!’

그녀가 사라지게 했다던 두 명의 캐릭터.

그리고 놔주었다는 플레이어 의심 인물.

정확히 우리를 가리키는 소리였다.

‘근데 왜 자기가 공격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먼저 술수를 쓴 건 그쪽이잖아!’

이쪽은 전혀 그녀를 해할 의도가 없건만, 저쪽이 위협당하는 듯 표현한 통에 바로 이쪽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란 걸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혜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주인이 운영하는 헬스클럽에 찾아가 보니, 난데없이 강력한 캐릭터 둘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찌 과민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올 거라고 말하는 걸로 봐선 어딘가에 가둬놨거나, 먼 곳에 이동시키는 수법을 쓴 게 분명하다.

‘적어도 녀석들에게 큰 위험이 닥친 건 아니라는 건가. 그 점 하나는 다행이네.’

하지만 진혜 입장에선 다행이 아닐 것이다.

놀란 마음에 술수를 써버렸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건 자신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가 이곳에 남아 담판을 짓겠어요.”

진혜는 우리가 복수하기 위해 추격할 것이라 예상하는 모양이다.

이미 이렇게 모습을 많이 드러낸 판국에 갑자기 모습을 감춰봤자 추적해올 것은 당연한 이치.

그렇기에 적어도 안범석에게 가는 피해를 막으려는 것 같다.

어떻게든 말로 우리를 설득한 뒤, 잘 풀리지 않는다면 힘을 써서라도 막을 생각일까.

‘뒷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면 왜 난 그대로 보내준 거지?’

진혜의 말에 의하면 내가 숨겨둔 패가 있지 않을지 염려한 모양이지만, 실제로 그런 건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캐릭터인 진혜에게 통하리라 믿기는 힘들다.

캐릭터 특유의 압도적인 신체능력 앞에선 작은 발악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

두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두고 떠날 수는 없어.”

옥쇄를 각오한 듯한 진혜에게 안범석이 말하였다.

“나와 함께 도망치자. 아버지가 물려준 이 건물도, 헬스클럽도, 회원들도 다 필요 없어. 그 모든 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곁에 있겠어.”

세상에.

자기 소유 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여자를 선택하겠다니, 이것만큼의 찐사랑이 또 있을까?

하지만 현명한 생각은 아니다.

사랑도 사랑지만, 이 대한민국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할 일상을 보내려면 일정 이상의 수입은 당연히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며 드라마 보는 아줌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대화를 시도하면 들어주려나?’

판단을 잘해야 한다.

레반과 레테라가 무사하다는 걸 알면 굳이 저들과 싸울 이유는 없었다.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안범석은 캐릭터의 힘을 악용할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고, 진혜도 레아처럼 반항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이거라면 대화를 시도해도 위험하진 않을…….

“전 이미 각오를 마쳤어요.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상대를 죽일 각오를요.”

죽일 각오를 왜 해, 미친년아.

대화 시도해볼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잖아.

나는 진심을 대하 말하면 마음이 전해질 거라는 동화 같은 사고방식을 믿지 않는다.

대화는 대등한 조건에서 해야 하는 법.

이쪽은 맨손인데 상대 테이블엔 대구경 더블 배럴 샷건이 있다면 잘도 대화가 성립되겠다. 목숨 구걸만 하다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안 되겠다. 레아와 함께 오는 게 좋겠어. 일단 저들을 건물 밖으로 불러내서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렇게 결정한 나는 들어왔던 경로를 되돌아가기 위해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불행은 그때 닥쳤다.

으직.

아령이었다.

운동기구 옆에 슬쩍 삐져 아령 끝에 새끼발가락을 찍고 말았다.

주변이 워낙 어두운 통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아령을 미처 보지 못했다.

사용한 운동기구를 제자리에 놓지 않는 개새끼들에게 저주를.

“웁……!!”

기습적으로 발끝에서 솟아오르는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몸을 웅크린 뒤 불안한 눈으로 뒤편을 살핀다.

최대한 억누르려 했지만 희미하게 소리가 새어나와 버렸다.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조심한 것에 비하면 명확하게 구분될 정도의 소리였다.

만약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캐릭터인 진혜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 문을 부수고 튀어나오겠지.

문이 부서져 나가는 순간 레아에게 연락하기 위해 손가락을 단축키 버튼에 가져다 댄 채 대기했다.

“…….”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무실 쪽엔 변함이 없다.

듣지 못한 걸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긴장을 유지한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시야가 뒤집혔다.

“……?!?!”

쿠우웅!!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한 건 내가 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진 직후였다.

운동하는 회원의 안전을 위해 바닥은 푹신한 재질로 되어 있었지만,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내 몸은 모든 뼈와 내장이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역시 너였나…….”

충격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내 머리 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분명 진혜의 것이었다.

슬쩍 눈을 돌리니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 있을 터인 그녀가 어느 등 뒤에서 내 몸을 붙잡고 바닥에 메친 것이다.

‘말도 안 돼! 분명 사무실에선 변화가 없었는데!?’

아직 남아 있는 충격 때문이 흔들거리는 시야로 사무실 쪽을 바라본다.

거기엔 놀란 얼굴을 한 안범석이 막 문을 열고 뛰쳐나오고 있었다.

“맙소사! 신요현 회원님!? 정말 당신입니까!?”

앞서 진혜를 통해 듣기는 했지만 정말 내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듯 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가오는 그를 향해 진혜는 손을 들며 제지했다.

“물러서세요, 범석 씨. 밤중에 몰래 침입해오다니, 좋은 의도로 왔다고 보긴 힘들어요,”

사라진 두 사람 찾아낼 겸 대화하려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설령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저쪽이 믿어줄 것 같지 않지만.

정말 최악의 타이밍에 들켰다.

잠가놓은 건물에 몰래 숨어 들어와 대화를 엿듣고 있었으니, 나라도 수상쩍게 여기지.

“어, 어떡하면 좋지?”

평소 단련에만 힘 쏟을 뿐이지 이러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안범석이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 거리고 있었다.

나도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레아에게 연락하려 해도, 조금 전의 충격으로 휴대폰은 저 멀리 날아간 상태다. 그녀를 부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잘 됐어요. 그때 놓아준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참에 붙잡아서 여러 가지 알아내도록 하죠. 지하실로 옮기면 적당할까요?”

왜 지하실이야.

고문 같은 거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불안해하는 내 눈빛을 무시한 채 진혜는 몸을 숙이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안심해. 기절만 시킬 테니까.”

이대로 동맥을 조여 기절시킬 생각인가 보다.

내 목을 조이는 손아귀를 붙잡아 저항하려 했지만, 무의미한 짓이라는 듯 강한 압박이 목에 전해진다.

그 압박이 강해질수록 의식이 흔들리기 느끼는 순간, 도리어 뇌는 꺼지기커녕 강하게 번뜩였다.

‘……어?’

진혜가 내 목을 조이는 순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퍼즐이 모이며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위기감을 느낀 뇌가 갑자기 풀회전을 시작한 게 아니다.

그녀가 내 목을 조이는 이 순간이 바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레반과 레테라.

캐릭터임에도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진혜.

처음에 나를 의심하면서도 놔줘야했던 이유.

그리고 지금 목이 졸리는 이 상황.

‘서, 설마……!!’

알았어! 이 녀석이 쓴 트릭을!

하지만 진실을 알았어도 이대로 기절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는 진실을 알게 되자마자 퇴장하는 스릴러 장르의 조연이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한다.

점등이 점멸하듯 깜빡이기 시작한 의식 속에서 어떻게든 절묘한 수를 생각해낸 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지금……이야……!!”

“……!!”

내 행동은 별 거 아니었다.

시선을 바로 옆으로 움직이며, 어떻게든 목에 가해지는 압력에 저항에 말을 내뱉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상대에겐 어떻게 보일까.

시선이 안범석을 향해 있고, 갑자기 두서없이 ‘지금이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면.

혹시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숨어 있던 내 동료가 소중한 사람을 노린다는 불길한 상상에 도달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내 예상대로, 진혜는 놀란 눈과 함께 안범석을 돌아보았다.

“……?”

하지만 어디에도 하나 이상 없는 안범석은 어리둥절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뻥이다…!!!”

빠악!!

진혜의 주의가 분산된 틈을 타, 나는 그녀의 몸통에 있는 힘껏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그 충격에 밀려난 진혜가 내 몸에서 떨어지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물러난 것이다.

초인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캐릭터가, 사력을 다했다고는 하지만 일반인인 내 발차기에 밀려났다.

이상하지 않은가?

트릭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었다.

“쿨럭! 쿨럭! 쿨럭!”

진혜를 떨쳐내고, 나는 잦은 기침을 내뱉으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한 손에 쥐고 있는 물체를 확인한다.

그것은 팔찌였다.

진혜의 오른손에 껴 있던 이것을 그녀를 떼어냄과 동시에 벗겨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어…….”

복선은 있었다.

이전, 사무실 문을 열 때 그녀가 문고리를 잡는 손을 오른손에서 도중에 왼손으로 바꾸었었다.

그것은 오른손 소매에 감춰놓은 이 팔찌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구도자의 가혹한 팔찌 등급: 특이 분류: 장신구

효과: 이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동안, 캐릭터의 레벨과 스테이터스는 강제적으로 1레벨에 맞춰진다.

「한 구도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기 위한 가혹한 시련을 즐겼다. 그 구도자의 혼이 서린 이 팔찌는 사용자에게 오히려 제약일 뿐이다.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착용해도 말리지 않으리라.」

장신구 아이템은 보통 캐릭터에게 도움이 될 만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이 팔찌가 그러했다.

캐릭터의 모든 능력치를 강제적으로 1레벨 수준으로 낮춰버린다.

그게 전부다.

출력만 낮아진 것뿐이기에 얻는 경험치의 양은 고렙 때와 마찬가지로 적고, 다른 데 쓸 곳도 없다.

손해만 보고 이득은 하나도 없는 애물단지.

그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고인물이란 남들은 하지 않을 짓을 얼마든지 하고야 마는 별종.

1레벨의 수치인 상태에서 레벨 100 이상의 난이도를 요구하는 보스 몬스터롤 오로지 피지컬만으로 쓰러뜨리는 쾌감은 아는 사람만이 알지.

“이상하더라고……. 내 목을 조였을 때 느껴졌던 힘이 일반적인 캐릭터에 비해 너무 약하게 느껴졌거든.”

캐릭터가 가진 힘은 그저 목격한 정도가 아니라 스탯 테스트를 위해 레반, 레테라와 겨루면서 직접 체험까지 했다.

진짜 캐릭터 본연의 힘이었다면 나는 반항조차 못했을 것이다.

목을 지나는 혈류는 단숨에 막혔을 것이고, 나는 기절보단 목뼈가 부러지는 게 아닐지 걱정해야 했겠지.

그러나 정작 실제로 느꼈던 진혜의 힘은 기습만 한다면 내 힘으로도 떨쳐낼 정도였다.

이 차이 때문에 능력치 제한 아이템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레아, 레반, 레테라 세 사람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만하다.

1레벨의 수치라면 겨우 모든 스탯이 10에 고정된 정도.

일반인의 시점에선 그 정도만 해도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지만, 정작 고레벨 캐릭터의 시점에선 일반인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약한 것이다.

“완전히 눈 뜬 장님이 되어버린 거지. 바로 눈앞에 캐릭터가 있었는데 눈치 채지 못하다니. 레반과 레테라가 기습을 허용해버린 것도 그 탓이겠지.”

“…….”

잠시 물러났던 진혜는 아무 말 없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아까 그녀를 걷어찼을 때 묻은 것이었다.

그 뒤 다시 나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숨이 막힌다.

더 이상 진혜에게 목을 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구도자의 가혹 팔찌를 벗어낸 진혜는 지금 캐릭터 본연의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졌지만, 제약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 목숨은 오히려 그녀의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게 된 셈이었다.

지금 이 거리로도 그녀는 충분히 날 제압할 수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건 칭찬해주지. 하지만 그러면 어쩔 거지? 내 힘이 돌아오면 네 입장에선 오히려 더 안 좋을 거 같은데?”

“일단 몸을 웅크려. 그 뒤 머리와 가슴을 집중적으로 보호해.”

“……?”

의미를 알 수 없는 내 소리에 진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뒷말을 전하려고 하기 무섭게 이변은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멀쩡했던 벽이 터져나간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황금빛 섬광이 진혜의 측면에 꽂힌다.

진혜가 미처 반항하지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그 힘에 몸이 꺾이며 함께 날아간다.

그대로 반대편 벽이 부셔지며, 그 너머로 그녀의 신형이 사라진다.

진혜를 집어삼키고 사라진 황금빛 섬광의 정체는 바로 레아였다.

팔찌가 벗겨지며, 본래의 능력치로 돌아온 진혜의 기척을 감지한 레아가 문답무용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마치 포착한 먹이를 물어뜯으러 온 늑대처럼.

나는 레아와 함께 벽 너머로 사라져버린 진혜에게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말을 이어갔다.

“……그럼 적어도 덜 아플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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