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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13화 (113/173)

〈 113화 〉 통제불가 ­ 3

* * *

상상도 못 했던 일격이었다.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무언가가 진혜의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발차기였다.

겨우 발차기 하나에 오른쪽 늑골은 모조리 바스러지며, 내장은 갈려나갔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날아간 진혜는 바로 몸을 세웠다.

그러나 굽혀진 무릎이 펴질 줄 몰랐다.

기습적이었다고는 하나 방금 당한 일격의 피해는 상당히 컸다.

그런 진혜의 모습을 차갑기 그지없는 은안(??)이 내려다본다.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듯 사납게 솟구쳐 있는 금발.

둥글게 뜬 보름달의 빛을 베일처럼 몸에 감으며 서 있는 그 모습은 흉포한 야수가 달밤의 사냥을 하러 나온 것 같았다.

한 손에는 롱소드 하나가 쥐어져 있다.

굳이 무기를 놔두고 발차기로 첫 일격은 먹인 건 여유의 표시일까, 잔뜩 괴롭힌 후 처리하겠다는 가학적인 사냥의 선고일까.

‘위험한 녀석이다.’

결코 약하지 않을 터인 자신의 육체가 심각하게 손상된 걸 느낀 진혜는 식은땀을 흘렸다.

무기도, 장비도, 심지어 아이템도 없이 순수한 신체능력만으로 이 정도의 대미지를 입히다니, 진혜가 PVP에서 싸워온 자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강함이었다.

레아에게서 잠시 시선을 뗀 진혜는 주변을 파악했다.

헬스클럽의 벽을 부수고 날아간 그녀들은 빈 공터 위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헬스클럽 뒤편에 있는 공터다.

밤이 되면서 사람이 빠져나가 불빛 하나 없는 주변 건물이 마치 검은 철창처럼 공터를 감싸고 있었다. 비까지 와서 근처를 지나는 사람조차 없었다.

진혜는 자신이 한 마리의 맹수와 함께 철창 안에 갇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녀들이 부수고 튀어나왔던 벽의 구멍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현의 목소리였다.

“함부로 접근하지 마, 레아! 그 녀석은……!”

“알고 있어.”

진혜가 가진 능력과 트릭을 눈치 챈 요현이 경고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레아가 먼저 말을 끊어버렸다.

요현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한 게 그녀다.

요현과 가장 거친 시간을 함께 한 것도 그녀다.

그가 도달한 결론에 레아가 도달하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단 일격, 1초를 수없이 쪼개도 모자를 그 찰나에 시간에 레아는 순식간에 단서를 긁어모았다.

발차기를 날렸을 때 한 순간 보인 상대의 신체 반응.

뭔가 술수를 부렸다기에 마법 계열의 직업군인 줄 알았건만, 반사적으로 진혜가 보인 신체의 움직임은 근접 전투 계열에 가까웠다.

스쳐 지나가며 살폈던 요현이 쥐고 있던 팔찌형 아이템. 분명 구도자의 팔찌였다.

레벨1로 보스 몬스터 사냥이라는 변태식 플레이에 동참한 적이 있으니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갖가지 단서가 조합되며 그녀의 머릿속에 이번 소동에 전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쓴 트릭까지도.

“별 시답잖은 트릭으로 사람 귀찮게 하긴.”

콰아아아앙!!

그렇기에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 따위에 주저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이.

“……!!”

일격에 대미지를 크게 입은 나머지 아직 자세를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진혜가 가까스로 반응했다.

이번에도 롱소드가 아닌 발차기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위력은 충분히 위협적일 정도다.

두 팔을 교차해 방어를 시도해보았지만 솔직히 무사할 거란 자신은 도저히 못하겠다.

카아아앙!!!

그러나 직후에 울리는 건 뼈와 살을 짓뭉개는 소리가 아닌 금속이 울리는 소리였다.

달려들었던 레아가 오히려 뒤로 밀려나고, 진혜에겐 상체가 뒤로 밀리는 것 이상의 충격은 없었다.

대신 그녀의 두 팔에 묵직한 무게 감돈다.

방패였다.

진혜의 전신을 감쌀 정도로 거대한 타워 실드. 그것이 레아의 일격으로부터 진혜를 지킨 것이었다.

방패가 나타난 건 진혜가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니다.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이용할 수 있는 게임적 시스템 덕분이었다.

“요현 씨, 당신은 도대체……!”

진혜의 위기에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준 안범석이 충격과 불신의 눈빛으로 요현을 노려보았다.

“그저 운동을 시작하려는 순수한 회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다 연기였습니까!? 처음부터 저희들의 목숨을 노린 거냐고요!!”

“네!? 아뇨, 오해입니다!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었어요!”

“당신의 캐릭터가 제 소중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데 뭐가 오해라는 겁니까!”

“오해 맞다니까요! 따지고 보면 댁의 캐릭터가 다짜고짜 레반과 레테라를 사라지게 한 게 먼저잖아!!”

오해.

전부 오해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온 거다.

설마 단서라도 얻으려고 다녔던 헬스클럽 자체가 플레이어의 생활 영역, 그것도 심층부였을 줄 알았겠는가.

플레이어를 찾아내려고 했던 요현 일행의 행동은 곧 진혜를 자극하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대처는 오히려 요현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상황을 서로에게 인식시키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하다.

요현은 당장이라도 분노하며 달려들 것처럼 보이는 안범석을 손을 들며 제지하고 외쳤다.

“그냥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안범석 씨! 전 대화를 목적으로 이곳에 왔고,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당신은 대화할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잘하게 긴 말을 늘어놓기 보단 짧게 요건을 제시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일 것이다.

효과가 있었는지 안범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별로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대화로 풀 수 있다면 풀고 싶어요.”

그 말은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조금 전까지 진혜와 함께 도망치네 마네 싸우고 있던 그였다.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다면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었겠지.

“오케이! 저쪽도 대화 소망! 이쪽도 대화 소망! 싸울 필요 전혀 없음! 들었지, 레아!? 안 싸워도 돼!”

겨우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요현이 다시 레아에게 싸움 중지 요청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레아의 불만 가득한 시선이었다.

막 한바탕 하려던 차에 방해 받은 탓일까?

아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요현의 목 부근이었다.

빨갛게 남아 있는 손자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이 갔다. 분명 당하기 직전인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을 놔두고 혼자서 잠입한 무모함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런 주제에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자는 건가.

방금 전까지 위협해온 상대를 앞에 두고?

설사 본인이 그것을 원한다고 해도 레아는 납득할 수 없었다.

“X 까.”

그렇기에 레아는 중지를 세우며 무시했다.

설마 이 정도로 정색하며 거부할지는 몰랐다는 듯 요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혜의 표정도 비슷했다.

그녀 자신도 캐릭터인 만큼 플레이어와의 유대감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저렇게 자신의 주인을 막말을 뱉어대는 캐릭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방금, 뭐라고?”

“이유가 뭐든 먼저 술수를 써 온 건 저쪽이야. 확실하게 찍어 눌러 줘야 나중에 허튼 짓 못한다고.”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널 데려온 거지, 상대방을 작살내라고 부른 게 아니라고! 견제만 해줘도 충분해!!”

“굳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게 있는데, 난 잠시 힘을 빌려주기로 한 거지 너에게 돌아가기로 한 건 아니거든? 저 쓰레긴 내가 치우고 갈 테니 바라던 대로 둘이서 느긋하게 수다나 떨어.”

자기가 호위하는 것보다 불안의 싹 자체를 뽑아버리는 게 더 낫다는 것인가.

결과만 보면 그럴지 모르지만, 그래서야 불안함을 느낌에도 용기 내어 대화의 응해주기로 마음먹은 안범석을 볼 낯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싸우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대로 멋대로 싸웠다간 아무 무기도, 장비도 지원 안 해줄 거다!”

“문제없어.”

레아는 요현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우려 하나 없이 당당하기만 그 표정은 ‘나 알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오히려 요현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위험하다.

지금 레아는 노강화 롱소드 하나만 쥐고 있어도 충분히 위험했다.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요현 자신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요현이 입을 다물자 레아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다시 진혜를 향해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녀에게선 살의가 흘러넘쳤다.

저건 진심이라는 걸 직감한 요현은 바로 안범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범석 씨! 당장 캐릭터를 풀무장 시키세요! 빨리!”

“네!? 안 싸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쟤가 말을 쳐 안 듣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댁도 내 입장 되어봐! 반항기 온 청소년만큼이나 통제 불가인 녀석이라고!!”

“아니 그런 위험한 걸 왜 데려온 건데!?”

“그쪽 캐릭터가 그나마 통제 가능한 두 명을 날려버렸으니까!!”

다급한 나머지 경어마저 생략하게 된 두 사람의 대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레아는 성큼성큼 진혜와의 거리를 좁혔다.

견고하고 무거운 방패가 있으니 조금 전처럼 덧없이 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첫 일격 때 이미 큰 손해를 입은 진혜였다.

레아와 맞붙기 전에 우선 몸을 회복시키는 게 먼저다.

타악!

그렇기에 땅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간격의 유지는 PvP의 기본. 육중한 방패를 들고 10m 이상 거리를 벌린 진혜는 다시 바닥에 내려앉으며 포션을 꺼냈다.

포션을 마셔서 망가진 옆구리를 치료할 생각이었다.

보란 듯이 꺼내어진 포션병을 보며 레아는 눈매를 좁혔다. 상대가 회복하려는데 멍하니 보고만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지금이야말로 달려들어 진혜를 압박해야 될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렇기에 레아가 빠르게 몸을 날린다. 그러나 진혜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진 게 아니었다.

곡선을 그리는 듯 굳이 옆으로 몸을 빼낸 후 진혜의 측면을 향해 달려 든 것이다.

“……?!”

가장 짧은 경로를 놔두고 굳이 돌아서 공격해 오는 이상한 움직임.

훨씬 많이 움직여야 하며 불필요한 요소도 많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그 움직임에 가장 경악한 것은 진혜였다.

콰아아아앙!!!

레아는 이번에도 롱소드가 아닌 발차기로 진혜를 공격했다.

금속의 표면 위를 무직한 충격이 물결처럼 퍼져나갔고,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위력에 진혜의 두 발이 약간의 고랑을 새기며 뒤로 물러났다.

쿵! 데구르르…….

방패가 밀려날 때의 충격으로 손에 쥔 포션병이 튕겨져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조금은 마셔서 신체는 회복했지만 충분하지가 않다.

아직도 욱씬 거리는 옆구리의 통증을 무시하고 진혜는 레아를 방패째 밀어내려고 하였다.

“말했지? 시답잖은 트릭이라고.”

쿠그그극…!!!

그런 진혜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타워실드에 맞닿은 레아의 발이 그대로 내리눌렀다.

타워실드의 각도가 기울어지며 마치 진혜가 방패째로 짓밟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여자, 뭐야!’

진혜는 기가 찼다.

아무리 하이 그라운드를 빼앗겼다고 한들, 겨우 발로 지그시 누를 뿐인 레아를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롱소드를 휘둘렀다면 이 정도의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감당해야 할 충격의 범위가 좁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패를 짓누르는 힘의 배분은 진혜의 스태미나를 빼앗는데 절호의 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 자신과 같은 타입을 상대하는 것에 이골이라도 난 것처럼 익숙하다.

“큭……!!”

진혜가 신음을 흘렸다.

이대로 짜부라질 것처럼 바닥과에 거리가 가까워진다.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듯 진혜는 방패를 지탱하는 손 중 하나를 땅 위에 짚었다.

……!

손에 맞닿은 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비유나 다른 무언가의 착시도 아니다.

짓밟히고 있던 진혜의 몸이 방패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를 누르고 있던 레아의 발이 진혜가 있던 공간을 통과하며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을 때렸다.

콰아아아아앙!!!

메마른 바닥에 새겨지는 폭력의 잔재.

레아의 발은 공터를 부수었고, 그 밑에 잠자고 있던 흙먼지를 일제히 비산시켜 주변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그 뿌연 공간에서 레아의 은색 눈동자만이 살벌한 잔영을 남기며 움직였다.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짐승처럼 시선을 돌린 그녀가 망설임 없이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롱소드가 아닌 맨손이었다.

그것은 레아의 머리 위쪽에서 떨어지며 막 타워실드를 내리치고 있던 진혜와 교차하였다.

콰아아아앙!!!

짙게 피어오르던 흙먼지가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파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위에서 떨어지며 타워실드째 레아를 깔아뭉개려 했던 진혜는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타워실드가 레아가 내지른 주먹에 가로막혀 전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쾅!!

진혜는 공중에서 멈춘 타워실드의 끝을 발로 짓밟았다.

방패의 반대쪽이 지랫대처럼 솟아오르며 레아의 주먹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튕겨지듯 날아가는 타워실드와 함께 바닥에 착지한 진혜는 레아와 거리를 벌렸다.

진혜의 공격을 먼저 읽고 있던 레아는 옷에 먼지가 묻었을 뿐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다.

바닥에 내려앉은 진혜가 방패로 몸을 지키며 숨을 고르는 한편, 레아는 자신이 짓밟았던 바닥을 바라보았다.

“마술이란 건 원리를 다 알고 있으면 참으로 시시해지는 법이지. 무슨 수법을 쓴 건지 모를 땐 경계했지만 까고 나니 결국 이 정도인 거고.”

본래는 평평했을 터인 공터가 그녀의 발길질에 의해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엉망이 된 바닥이지만 그 위에 희미하게 남은 원형의 문양의 정체를 그녀는 꿰뚫어 보았다.

“공간이동 계열의 중급 신성 마법, ‘헤븐즈 게이트’. ‘성기사’구나, 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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