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싸움은 그만! 3
* * *
굉음이 울렸다.
커다란 덩어리가 레아의 괴력에 밀려나 한쪽으로 날아간다.
아령이나 무게추와 같은 도구들이 사방으로 나뒹굴었고,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깔아두었던 매트는 깊숙이 파이다 못해 찢어졌으며, 회원들이 자신의 근육을 자랑스럽게 바라보기 위해 사용하던 전신 거울이 산산이 깨부숴졌다.
정말 인정사정없는 위력이었다.
사람이라면, 그게 아무리 전신이 근육을 갑옷처럼 단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방금 전 일격엔 결코 형체 하나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안범석은 살아있었다.
진혜가 직전에 끼어들어 안범석을 감싸고, 레아의 주먹을 등으로 받아낸 것이다.
등갑주가 움푹 파이고, 데미지를 입은 진혜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분명히 둘은 살아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두 인영이 엉켜 날아가게 된 광경을 보며 나는 당황스러운 음성을 토했다.
“뭐, 뭐였어, 방금!?”
“정신 안 차릴래, 망할 아버지! 방금 저 년이 댁을 인질로 붙잡으려고 했잖아!!”
레아의 호통소리에 나의 뇌가 드디어 상황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싸움 도중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진혜가 전법을 바꾼 것이다.
헤븐즈 게이트의 써클은 건물 내부에도 있었다.
레반과 레테라를 기습적으로 날려버린 신발장에 것을 비롯해, 내 등 뒤에도 하나. 그밖에 몇 개나 더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진혜는 그렇게 요현을 인질로 삼고 위협하려 했다는 것이다.
“똑똑히 봤지? 궁지에 몰리자 추잡한 속내를 드러내는 거. 저쪽 세상에서 흔히들 보던, 치졸하게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녀석들이야. 저딴 놈들이랑 대화로 해결하겠다고? 차라리 숨통을 끊어서 어딘가에 묻어버리는 게 더 현명하겠다.”
“…….”
무너진 운동 기구의 잔해 속에서 진혜가 몸을 일으켰다.
불 꺼진 헬스장에서 조용히 타오는 눈빛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왜? 네 주인을 노리니 빡쳐? 지금 내 기분도 그런데. 넌 왜 이 망할 아버지를 노린 건데? 이 목덜미 쥐고 흔들 자격이 있는 건 나뿐이라고.”
“야, 잠깐. 지금 그거 무슨 소리야?”
내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릴 지적하는 사이, 진혜가 쓰러진 안범석을 품에 안고 몸을 날렸다.
그녀가 손을 뻗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빛나는 원형 문양. 또 다른 헤븐즈 게이트 써클이었다.
도대체 몇 개나 설치해 놓은 거지?
아니, 생각해보면 특이할 것도 없었다.
플레이어의 주된 생활반경이 헬스클럽이다. 건물 주변에 집요할 정도로 써클을 설치해둔 걸 보면 건물 내부에도 덕지덕지 붙여놓았겠다.
나를 인질로 잡는 것도 실패하고, 몸도 한계인 시점이다 보니 더는 가망이 없다고 진혜는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안범석과 함께 도망치려고 헤븐즈 게이트를 발동시킨 걸 테지.
문제는 그게 레아의 앞에선 단단히 오판(??)이었다는 점이다.
현재 레아의 상태는 극도로 흥분한 사냥개와 흡사하다. 표적에 작은 움직임 하나를 놓치지 않고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다.
진혜가 써클 내부로 들어가기보다 먼저, 섬뜩한 기세로 치고 들어온 레아의 발이 날아와 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
“어딜 도망가려고?”
꼬챙이의 꿰뚫린 듯 그녀의 발에 밀려난 진혜가 벽에 부딪힌다.
품에 안던 안범석을 떨어뜨린 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이미 깨져서 뒤편에 맨벽을 들어냈던 벽이 이번 일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헬스클럽 건물 외벽에 사람 하나가 드나들기 충분한 구멍이 세 번째로 새겨지고, 진혜의 몸이 그 너머로 날아간다.
레아는 바로 옆에 엎어져 있는 안범석의 모습을 힐끔 보았지만, 진혜처럼 인질로 잡겠다거나 해코지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진혜만 해치우고 사라지겠다는 스스로의 말을 지키듯, 그녀를 쫓아 벽 밖으로 몸을 날리려던 레아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선량해 보인다고 방심하지 마.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조져버리라고!”
안범석을 경계하라는 말을 남기면서 진혜를 마저 끝장내기 위해서인지 레아가 몸을 날렸다.
다시 둘만 남게 된 헬스클럽 안에서 나는 막 의식을 차린 듯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안범석을 바라보았다.
레아는 치졸하게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녀석들이라고 칭했지만……. 정말로 그럴까?
난 이전에 그런 녀석을 본 적이 있다.
우도혁. 책임소재는 이쪽에 떠넘기고 자신은 정당하다 주장하던 이기적인 자식.
이들은 그놈과는 어딘가 달랐다.
진혜가 나를 붙잡으려 했던 그 순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양심이 스스로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 괴로움과 망설임이 스쳤던 건 정말로 연기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인가?
“……안범석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
“으으…….”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역시 내 생각은 레아와 다르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추잡스러운 인간들이었다면 좀 더 악의적인 함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보인 바로는 너무나 엉성하며 대응도 이상했다.
“레아는 당신들에게 추잡한 속내가 있을 거라 말했지만, 제가 당신들은 그저 우리에게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로 밖에 안 보여요.”
과민반응.
이제까지 본 이들의 모습은 분명 그걸로 정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강하다고 느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자리를 넘기고 우리에게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도 됐을 텐데, 다짜고짜 레아와 레테라를 날라버린 것도 그렇고, 너무 급발진이 아니던가.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요? 혹시 이미 다른 플레이어에게 공격 받은 적이 있다던가……. 그래서 저희를 경계하는 건가요?”
“으으……!!”
아직 골을 울리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안범석은 괴로운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은 있다고 판단하고 말을 이어갔다.
“제발 저에게 힘을 빌려주세요. 저 두 사람의 싸움을 멈추려면 우리들끼리 먼저 속을 터놓지 않으면 안 돼요!”
콰아아아아아앙!!!
나에게 피해를 주려던 행위가 단단히 레아를 자극한 건지 밖에서 들리는 싸움 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모르긴 몰라도 진혜를 붙잡은 레아가 건물 외벽에다 냅다 때려 박은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아악……!!”
진동을 타고 전해지는 진혜의 비명.
그것의 반응한 듯 안범석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진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가 싶었다.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건 금방이었었다.
“아아! 그녀가 괴로워하고 있어! 나 때문이야!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야!”
“안범석 씨……?”
“으아아아아아악!!! 나약한 놈!! 나약한 놈!! 나약한 놈!! 나약한 놈!! 나약한 놈!!”
그는 언젠가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반복하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귀청이 떨어질 만큼 큰 목소리로, 그것도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변의 미약한 빛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충혈 된 안구, 갈피를 못 잡는 시선,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이빨, 바들바들 떨리는 몸.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공포에 떠는 것 같기도 하고, 고통에 정신줄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우리에 갇힌 맹수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그가 어떤 상태이기에 저런 반응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 안범석 씨! 제 목소리 들리나요? 안범석 씨!!”
당황하는 내 음성을 뒤로한 채, 그는 갑자기 위로 고개를 처들더니 외쳤다.
“꺼낸다! ‘도굴꾼의 버려진 단검’!”
처음엔 그 소리가 뭔지 알지 못했다. 곧 그것이 게임 시스템의 시동어라는 걸 깨달았다.
쿵!
안범석이 외치는 순간 그의 눈앞에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단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틀림없는 SoR에서 보던 단검이었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환하는 터라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율이 말했다. 시동어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말이면 아무거나 좋다고.
아마 플레이어마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낼 때 쓰는 시동어가 다르겠지.
그런데 안범석은 왜 저런 걸 꺼낸 거지?
도굴꾼의 단검이라면 가장 낮은 난이도의 던전에서 배회하는 도굴꾼 구울이 떨어뜨리는 흔하디흔한 잡템이다.
용도라고 해봐야 잡화점에 팔아 고철값이라도 버는 정도이며, 혹은 똥무기로 보스 잡는 변태 고인물들의 챌린지에 가끔 사용될 뿐이다.
덥썩!
“……응?”
다음 순간 이어진 안범석의 행동에 내 눈이 휘둥글 해졌다.
단검을 들었다.
저 안범석 씨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한 손으로 쥐고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
SoR의 무기는 현실의 것과 완전히 다른 물건이다.
이전에 나도 레테라의 한손검을 넘겨받다가 하마면타면 팔이 빠질 뻔했지 않던가.
경량무기 중에서도 가벼운 축에 속하는 한손검으로도 그 정도였다면, 다른 무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안범석은 들었다.
그때 뇌를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근력 5.
기량 3.
안범석과 악수를 나눈 레반과 레테라는 그의 신체능력을 그렇게 표했었다.
일반인치고는 상당히 신체를 단련한 것 같다며 말이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소지하고 있던 ‘도굴꾼의 버려진 단검’의 정보를 확인했다.
도굴꾼의 버려진 단검 등급: 보통 분류: 단검 공격력: 35 내구도: 30/30 필요 스탯: 근력5 기량3 「망자가 되어 던전을 배회하던 도굴꾼이 사용하던 단검. 생전부터 흙이나 돌 등을 파내는데 썼기 때문인지 무기로서의 효용이 떨어진다.」
떠오른 정보 중 하나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필요 스탯.
이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제한 조건 같은 거다.
작고 조잡한 무기이기 때문인지 도굴꾼 단검이 요구하는 스탯은 레벨1 캐릭터의 기본 능력치보다 낮았다.
필요 스탯: 근력5 기량3
안범석의 신체능력은…… 단검이 요구하는 능력치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렇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건가?
아니, 그전에…….
“……플레이어가 게임 무기를 쓸 수 있다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음성을 흘리고 있을 때, 안범석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가뜩이나 우람한 근육을 지닌 양반이다.
맨손으로 싸워도 상대가 안 될 텐데, 한 손엔 낡고, 이마저 닳았지만, 음산함은 확실히 남아 있는 날붙이를 쥐고 있으니 더욱 위협적이었다.
슬래셔 무비 속 살인마가 눈앞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아, 안범석 씨…… 장난하시는 거죠?”
살갑게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발걸음은 스리슬쩍 뒤로 뺀다.
차라리 레아 말을 진작 들었어야 했나라는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던 안범석은 진짜 살인마라도 빙의된 듯 괴상한 외침과 함께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악!!!”
“당신 진짜로 프로틴 대신 마약이라도 처먹었어?!”
가뜩이나 체격으로도 밀리는데 날붙이까지 든 미친놈에게 대응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도망갈 구석을 찾던 한쪽에 있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헬스장을 떠받치는 8기둥 중 하나이니만큼 두께 무척이나 컸다. 이 정도라면 어느 확실하게 장애물 역할은 해줄 터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기둥의 중간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사라졌다.
안범석은 그냥 휘둘렀을 뿐이다.
낡디 낡은 단검 하나가 그 직육면체형 콘크리트 기둥에 닿았을 뿐이다.
그런데 단검의 날보다 수백 배는 넓은 영역이 뚝 하고 사라져버렸다.
비산하는 돌파편이 얼굴을 스치며 넋을 잃을 뻔한 내 정신을 일깨워주었고, 부서진 기둥 너머에서 한겨울에 깨어난 곰처럼 흉악한 숨을 내뱉는 안범석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야, 율!!! 밸런스 패치를 요구한다!!!”
어디선가 이 광경을 보며 깔깔 웃고 있을 녀석을 향해 외쳐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외침에 더욱 흥분한 안범석만이 다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 뿐이었다.
싸움 좀 하지 말자는 게 그렇게 지나친 소원이었냐, 썩을 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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