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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20화 (120/173)

〈 120화 〉 마음에 남은 고통 ­ 3

* * *

폭풍과 같은 소란이 지나갔다.

요란한 울림에 놀라 잠에서 깬 사람들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음에도 세상은 평소보다 더욱 어둡게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할 수가 없었다.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사람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잠자리로 돌아갔다.

회사에 남아서 야근하는 사원들도 소란을 들었지만, 힐끔 창문 쪽을 살펴볼 뿐이었다. 그들은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눈으로 힘겹게 남은 작업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건물 하나가 폭삭 주저앉는 대형 사건이 터졌음에도 밤에 잠긴 도시는 적막을 이어나갔다.

한밤중 내리는 빗소리가 모든 소란을 지운 것처럼.

사고 현장을 뒤덮은 어둠이 타인의 눈을 가려버린 것처럼.

이 싸움터를 지켜보는 관조자가 외부인에게 쓸데없는 관심은 치우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르르르……. 쿠궁!!

무너진 건물의 중심에서 자동차만 한 크기의 콘크리트 파편이 들썩이더니, 곧 한쪽으로 뒤집히며 쓰러졌다.

그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레아였다.

먼지만 좀 뒤집어썼을 뿐, 특별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본다.

콘크리트 잔해들, 휘어진 철근, 전해 사이에서 처량하게 튀어나온 운동기구, 머슴 머슬이라는 괴상한 네이밍의 간판까지 보였다.

특히 간판에서 근육 자랑을 하고 있던 머슴은 안주인과의 뻘짓을 집주인에게 들키기라도 했는지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3층 건물이 한 번에 무너져 내렸지만 의외로 쌓인 잔해의 높이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떨어지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건물 지하까지 무너져 내린 모양이다.

“……응?”

주변을 살피던 레아의 한쪽 눈썹이 휘어진다. 잔해들 사이에서 진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덜그럭! 쿵!

레아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탓에 거동도 불편한 몸으로 그녀는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시선은 수직으로 아래를 향한다. 이 밑에 묻혀 있는 자신의 주인을 찾듯이.

“……!”

그러다 마찬가지로 잔해에서 빠져나온 레아와 눈을 마주쳤다.

겁을 먹은 듯 경직된 몸. 그러나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전투태세도 없고, 경계하는 모습조차 없었다.

그저 쫓기는 것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를 치워내며 잔해를 파헤치는 속도를 올릴 뿐이었다.

더 이상 진혜는 레아와 싸우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이 살아남는 것조차도.

레아의 공격으로 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직전까지 안범석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미련하게 잔해를 들출 뿐이었다.

그런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진혜의 무방비한 등만이 레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썩을.”

레아는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차라리 함정냄새가 난다면 좋다구나 하며 보란 듯이 등을 노려줄 텐데, 도무지 연기 같지 않은 무방비함에 오히려 투기만 꺾인다.

그녀는 강하거나 비겁한 놈을 박살내는 걸 좋아하는 거지, 싸울 의지도 없고 처량하기만 한 녀석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지금만큼은 심정적으로 진혜에게 공감이 갔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녀도 서 있는 곳의 밑을 파헤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잔해 밑에 묻혀 있는 건 안범석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주인이자, 플레이어이며, 부모인 존재.

신요현.

레아가 아는 그는 그저 게임만 잘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라면 분명 잔해에 깔려 죽지 않았을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쏠리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레아가 쥐고 있는 롱소드처럼,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레아를 잡아당겼다.

그저 잡아 당기만 할까.

종이컵과 실로 만든 장난감처럼, 중요한 게 뭔지 헷갈리지 말라는 요현의 잔소리마저 레아에게 전하고 있었다.

우지근!!

“……!”

마음만 앞선 나머지 너무 대책 없이 땅을 파헤치던 게 화를 불렀다.

기둥처럼 솟은 채 박혀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가 균형을 잃고 진혜의 머리 위로 넘어지던 것이다.

장정 대여섯의 덩치를 합한 것보다 큰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깔린 순간 터져 죽고, 보통 사람이 아닌 진혜 조차 지금의 몸상태로 깔렸다간 무사하기 힘들었다.

서둘러 피하려고 했지만 부러진 채 덜렁거리는 다리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머리 위를 떨어지는 덩어리가 그림자가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런 콘크리트가, 일격에 터져나갔다.

옆에서 날아든 레아의 발차기에 의해서.

꽂힌 건 발 하나였지만 충격은 골고루 퍼진 것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는 쿠키처럼 바스러진 채 흩어졌다.

돌가루가 우수수 흩날리고, 그것을 맞으며 레아는 지상에 내려앉았으며, 진혜는 자신을 구해준 레아를 향해 놀란 시선을 건넸다.

후욱!!

그 순간, 레아의 손가락이 뻗어왔다.

그 기세는 강하고 살벌하여 진혜의 눈을 관통한 채 뇌를 헤집을 것처럼 느껴졌다.

움찔거리는 진혜의 코앞에서 손가락을 멈춘 채 레아는 짜증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이따가 계산하자.”

“…….”

진혜를 그대로 꼬챙이로 만들어버릴 듯했던 레아는, 그대로 등을 돌려 주변에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던 진혜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 커다란 노성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빨리 안 움직일래?! 네 주인이 쥐포 되든 말든 그냥 방치할까!!”

“아, 알았다!”

레아의 호통에 진혜는 서둘러 잔해를 파헤치지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어째 조금 전까지 서로 죽이고자 싸우던 이들끼리 힘을 합치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리 낯선 기분은 아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 분명 그때였다.

SoR에 있던 시절, 다짜고짜 공격해오는 적대를 플레이어를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진혜의 반응을 보고 상대가 아직 뉴비라는 걸 깨달은 상대방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이것저것 도움을 준 뒤 사라져버렸다.

그런 류의 플레이어가 고인물이라고 불리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상대가 약하거나 성장 여지가 있을 땐 조력을 해주고, 자신과 비슷한 동수일 때는 전투를 즐기며, 상대가 강할 땐 그 끊임없는 도전과 고난의 벽을 즐긴다는 괴기한 부류들.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레아에게서도 받았다.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녀의 주인도 고인물인 걸까?

“한 곳만 파헤치지 말고 넓게 퍼져 봐! 어디 있는 줄 알고 한 우물만 파는 거야!”

상념에 빠지려고 할 때 다시 레아의 호통이 날아왔다.

진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은 일단 안범석을 구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으, 응…….”

“말이 좀 짧다?”

“아, 알겠습니다!”

삐딱하게 다가오는 레아의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하며 말투를 고쳤다.

고인물인 것과는 별개로 역시 저 여자는 무서웠다.

어쩌면 지금까지 만나본 이들 중 제일……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레아에 대한 공포가 순수한 강함에 대한 공포라면, 형용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는 따로 있었다.

‘율…….’

떠오르기만 해도 분노가 치미는 자의 모습을 떠올린 진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놈 때문에 안범석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

포션병을 열었다.

그대로 병을 기울여 한 방울을 살짝 떨어뜨렸다.

떨어진 주홍색 물방울은 곧 피를 흘리는 머리카락 사이에 닿았다.

치지이이이익……!!

포션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소리는 염산을 떨어뜨린 소리 같았다. 혹은 고기 굽는 소리?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이 엄청났던 모양이다. 기절해 있던 안범석은 세상 떠나 갈듯한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질긴 밧줄에 의해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왜 이 꼴인지 알 수 없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지 모를 좁은 공간, 통풍이 되지 않는 건지 답답한 공기, 스마트폰의 불빛 이외의 빛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불빛 너머에서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았다.

“시, 신요현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무슨 일일까요?”

손전등 모드로 바꾼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한 채 나는 안범석을 시큰둥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갑자기 눈 까뒤집으시고 달려들던 매드 헬스 트레이너라면 뭐 좀 짐작 가는 게 있겠죠.”

그 말에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며, 부들거리는 입술로 겨우 물었다.

“혹시 제가…… 신요현 씨를 공격했습니까?”

“네. 게임 무기까지 꺼내서 미친 듯이 날뛰더군요.”

담담히 인정했고, 거기에 돌아온 건 번데기처럼 몸을 뒤집은 안범석이 얼굴을 땅에다 냅다 박는 것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아!!!”

그 혼신의 사죄가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부딪히며 아주 크게 울렸다.

고막을 지키려 손가락으로 귀를 찔렀고, 적당히 들어줄 만큼 낮아진 안범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플레이어와 싸우게 된 건 처음이라서!! 머릿속이 이것저것 혼합되어서!!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아!!!!”

너무 충격 받은 나머지 내뱉는 말이 횡설수설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이성을 잃고 날뛸 기색은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확실하게 정신을 차렸다고 판단한 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 뒤, 나는 기억이 애매한 안범석을 위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참고로 밧줄은 풀어주었다.

더 이상 날뛸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만에 하나 그가 또 돌변한다 하더라도 대응할 방법은 있었다.

“거, 건물이 무너지다니……!”

건물 붕괴 이야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안범석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소유한 건물은 물론, 그 안에 구비된 모든 운동기구가 한 번에 날아갔는데 충격 받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심지어 보험처리도 힘들다. 초인 여성 두 명이 맞붙고, 자신도 날뛰느라 건물이 무너졌다고 얘기를 하면 얼마나 믿어주겠는가?

갑자기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을 날려버려 앞날이 막막해진 안범석의 고개가 푹 꺾였다.

거의 자업자득이긴 해도, 그 처량한 모습을 보며 게임 캐릭터 때문에 주거지가 날아간 경험이 있던 나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무사한 거죠? 건물이 무너질 때 우리는 1층에 있지 않았습니까?”

“이거 덕분이죠.”

탕탕!

나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좁은 공간의 가장자리. 그 무쇠로 된 벽을 두들겼다.

“‘거인족의 무쇠 투구’. 원래는 당신을 포획하려다 실패했던 아이템인데, 인벤토리에 있던 같은 물건을 저희 머리 위에 소환했거든요. 덕분에 쏟아져 내리는 잔해에서 무사할 수 있던 거죠.”

“그럼 당신이 저를 구한 거군요.”

안범석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한 번은 당신을 해치려 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목숨을 지켜주다니.”

“별로 감사받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에요. 그나저나 혹시 공간 이동 스크롤 가지고 계세요? 전 하나 가지고 있던 걸 얼마 전에 써버려서요.”

“아쉽게도 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레아 쪽이 저희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게 말한 난 한쪽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아, 한 가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뭡니까? 이렇게 폐를 끼쳤는데 뭐든지 말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이성을 잃었을 때 신경 쓰이는 이름을 언급했거든요. 이 빌어먹을 게임의 주최자, 율 말이에요.”

움찔! 쿵!

그 말에 안범석의 몸이 크게 떨렸다. 너무 크게 움직인 나머지 무쇠 투구에 머리를 부딪쳤을 정도로 그의 반응은 격했다.

“아고고……!”

포션으로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새로운 상처를 정수리에 새긴 그가 머리를 매만진다.

역시 이 남자는 율과 심상치 않은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튜토리얼 때 한 번 만나고 끝은 아닐 것이다. 안범석의 반응은 신체가 절로 반응할 정도의 ‘시간’이 느껴졌다.

“당신이 이상 행동을 보이던 것도 녀석과 관련된 거 아닌가요? 괜찮으시면 말해주세요. 전 그 녀석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이 웃기는 게임을 끝내는 방법은 항상 열려 있다.

율을 쓰러뜨리는 것. 그러나 지금으로선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으니 녀석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

안범석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내린 듯 뒷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지갑 하나를 꺼냈다.

그가 지갑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먼저 이것을 보여줘야겠군요.”

“……? 뭐죠?”

사진을 건네받아 스마트폰에 비춰보았다.

몸무게가 200은 족히 나갈 듯한 심각한 지방을 낀 남자가 한 명 찍혀 있었다.

사진의 의미를 알 수 없던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요, 이 걸어 다니는 비곗덩어리는?”

“5년 전까지의 접니다.”

“앗, 죄송합니다. 그만 지나치게 말해버렸…… 아니, 뭐요!?”

그 말에 깜짝 놀란 난 사진 속 남자와 눈앞에 안범석을 비교해보았다.

지나치게 말했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도무지 지나쳐 보이지 않는 심각한 비계 덩어리가 사진 속에 있었다.

반면에 눈앞에 있는 건 우람한 근육과 건장한 채격을 가지고 있는 헬창남. 도무지 동일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5년 전까지만 해도 고도비만이라고 했었지? 그래도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

고도 비만 앞에 초(?) 자를 붙여도 될 정도였다.

이랬던 사람이 5년 만에 근육남이 된다고? 인간이 이렇게까지 확 바뀌는 게 가능해?

내가 의문을 감추지 못하자 안범석은 그럴만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운동과 담을 쌓았었습니다. 그것보단 먹는 거나 방에서 게임 하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죠. 아버지는 싫은 사람에겐 억지로 운동을 권하지 않는 분이었고, 저도 움직이기 힘든 것만 제외하면 현재 모습에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겉모습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부류였죠.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습니다. 상대에게 전혀 호의를 받지 못할 생김새로 마음만은 알아줄 거라 믿으며 좋아하던 여자에게 고백했거든요.”

“아…….”

그의 슬픈 눈을 보니 결과는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저는 차였습니다. 아주 성대하게 말이죠. 당신을 생각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인정받고 싶으면, 그 강한 마음으로 출렁거리는 살을 뺀 뒤에나 오라고!

“전 분했습니다. 그렇게 차인 것으로도 모자라 집에 돌아온 뒤엔 버릇처럼 컴퓨터 앞에 앉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혐오감마저 생기더군요. 그리고 그때는 친구에게 추천을 받은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를 막 시작하려던 때였습니다.”

­이대로는 안 돼!

컴퓨터 앞에 앉은 안범석은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

그는 오늘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 캐릭터를 좋아했던 여성과 닮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심이 많이 섞였기 때문인지 실물보다 더 예뻐져 버렸지만, 그 당시엔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도 따와서 캐릭터에 ‘진혜’라는 이름 붙였다.

그는 증명하고 싶었다. 혹은 미련일지 몰랐다.

겉모습은 이래도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와 함께 게임 속을 여행하며, 캐릭터가 사망할 때마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결심했다.

­결심했어! 게임 속 그녀가 죽을 때마다 난 팔굽혀펴기 1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스쿼트 100회! 그리고 런닝 10km를 실시하겠어!

그저 생각 없이 정한 룰이었다. 최근에 읽은 만화책에서 따온 트레이닝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작 안범석은 진지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과 자신의 마음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동시에 살도 빼는 일석삼조의 방법이었다.

여기까지 계획을 세워놓고 안범석은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다.

좀 더 자신을 몰아붙일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만일 이를 시행하지 못했을 땐 내가 『고자가 되어버려도』 상관없어!!

­오케이, 콜.

그 순간, 분명 안범석 혼자만 있을 터인 방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 밝고 순수하기까지 한 목소리.

하지만 그가 주변을 둘러봤을 땐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환청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

거기까지 들은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뱉을 수 없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억누른다.

분명 이전까지는, 실연의 아픔으로 자신을 바꾸고자 결심한 한 남자의 청춘극일 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주인 모를 목소리가 더해지는 순간 장르가 끔찍한 스릴러로 변모하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 주인이 예상이 갔다.

그렇기에 자연히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졌다.

“신요현 씨…….”

안범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는 정신 나간 난이도로 유명한 게임이다. 오죽했으면 튜토리얼에서 100이나 죽었다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그런데 뭐? 팔굽혀펴기 1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스쿼트 100회, 그리고 런닝 10km를 한다고?

하루에 한 번도 아니고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저는 악마와…… 아니, 악마보다 더한 놈과 ‘계약’해버리고만 겁니다.”

주르륵……. 하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안범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고 공허하여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눈.

이건 진짜 지옥을 경험한 사람의 눈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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