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21화 (121/173)

〈 121화 〉 남자의 증명 ­ 1

* * *

안범석은 어이가 없었다.

게임을 시작한지 불과 2분 경과.

그의 모니터 화면엔 ‘You Died’이라는 영어 문구가 캐릭터의 사망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 뭐 이딴 게임이 다 있어!”

요즘 할 만한 게임이 없냐는 물음에 친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설마 게임시작한지 2분 만에 보스 몬스터와 마주치는 게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추악한 골렘’이라는 명칭을 가진 녀석은 아무런 장비도, 무구도 갖추지 않는 안범석의 캐릭터 ‘진혜’를 잔인하게 짓뭉개 놓았다.

분명 안범석은 게임을 시작할 때 맹세했다.

캐릭터가 사망할 때마다 팔굽혀펴기 1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스쿼트 100회, 그리고 런닝 10km를 하겠다고.

누군가에게 한 맹세도 아니었지만, 안범석은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한 맹세였다. 실행하지 않고 도망쳐버린다면 마음마저 별 거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팔굽혀펴기부터 시작했다.

“사, 사…암……!! 허억! 허억!”

털썩!

그리고 그의 마음은 팔을 세 번째로 폈을 때 다하고 말았다.

애초에 운동 한 번 해본 적 없는 몸이다. 갑자기 100회를 채우겠다고 해서 정말로 될 리가 없었다.

“그, 그래. 처음부터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았어. 오늘은 처음이니까 3회씩만 하는 거야.”

이건 절대 자신의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저 현실적인 기준으로 수정했을 뿐이다.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며 팔굽혀펴기를 끝내려던 때였다.

욱씬!!

“……!?”

통증이 올라왔다.

다른 곳도 아닌 사타구니, 남자로선 가장 민감한 그 부위에서 말이다.

“뭐, 뭐지?”

반사적으로 그곳을 더듬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찾을 수 없었다.

막대기 하나, 알 두 쪽, 모두 멀쩡한 상태다.

그냥 팔굽혀펴기를 너무 무리하게 해서 하체로의 혈액순환이 잘 안 됐다……라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내고 넘어가기로 했다.

욱씬!!!

“커억!!!”

그렇게 넘어가려는 순간, 허를 찌르듯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이번 통증은 아까보다 컸다.

무언가가 두 알을 움켜쥔 것처럼, 혹은 무언가 파고들어와 안쪽에서 터트려버릴 것처럼.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데 원인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남성의 신체 중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부위에 그러한 고통이 밀려오니 공포가 절로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범석은 허겁지겁 휴대폰으로 119를 눌렀다.

***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만?”

“네!?”

안범석은 어이가 없었다.

응급실로 실려와 별의별 검사를 다 받고 나온 의사의 말이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간헐적인 고통이 찾아와 안범석을 괴롭히고 있음에도!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고통으로 눈가에 물기마저 서린 안범석의 모습이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검사 결과엔 그의 몸은 멀쩡하다고 나왔다.

문제라고 해봐야 고도 비만 정도.

하지만 이것조차 나중에 합병증이 예상되는 거지, 당장 그의 고환 통증과는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의사는 곤란한 듯 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신체가 놀란 것일 수 있겠군요. 처음부터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마시고, 단순한 속보와 식사량 조절로 체중을 조절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그랬었지. 자기와 맞지 않는 운동은 몸만 죽일 뿐이라고.

운동할 생각이 없던 시기에는 그저 흘려들을 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피가 되는 조언이었다.

그렇게 병원에선 소량의 진통제만 처방 받고 안범석은 집으로 귀가하려고 하였다.

욱씬!!!

“크악!!”

또 다시 고환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병원을 나선지 불과 10걸음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두 쪽의 알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 게 된 그 느낌.

분명 사타구니에 달려 있지만, 진짜는 어딘가의 여자아이들이 공기놀이로 마구 던지며 가지고 놀고 있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이게 단순히 신체가 놀랐기 때문에 생긴 고통이라고? 그 의사 완전 돌팔이 아니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안범석이 사람들이 지나는 길에 엎어져 두 손으로 땅을 짚었을 때였다.

“……!”

돌연 고통이 사라졌다.

안범석이 엎어지면서 팔굽혀펴기와 비슷한 자세를 취한 순간에 갑자기 해방된 듯 편안해진 것이다. 자세는 결코 편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안범석이 쓰러진 자리에 새겨진 글귀였다.

「앞으로 97회」

그저 낙서일 뿐이었다.

어린애가 쓴 듯이 삐뚤삐뚤한 글씨체.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 안범석은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바닥을 짚은 그의 두 손 사이에 정확히 새겨져 있는 낙서. 그리고 앞으로 97회라는 내용.

마치 팔굽혀펴기 100회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겨우 3회밖에 실시 못한 안범석을 향한 메시지 같지 않은가?

“뭐, 뭐야! 누가 이런 장난을 친 거야!”

안범석이 벌떡 일어나 외쳐보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 그를 스치며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세를 풀자 또 다시 고환에서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욱씬!!

“으, 으아아아아악!!!”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한 안범석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달릴 때마다 살이 출렁거리고, 체중을 부담하고 있는 관절 부근이 아파왔지만, 적어도 고환은 더 이상 아파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범석이 무언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거리를 달리는 도중, 스쳐지나가는 도로 표지판이 우연히 안범석의 눈에 들어왔다.

낙서는 그곳에도 적혀 있었다.

「앞으로 9.95km」

그것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작 50m밖에 달리지 못한 안범석을 비웃듯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안범석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딱딱 맞춰지기 시작했다.

팔굽혀펴기 100회, 런닝 10km.

둘 다 안범석이 컴퓨터 앞에서 맹세한 말이었다.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실시하기로. 심지어 윗몸일으키기와 스쿼트도 있었다.

트레이닝 맹세 직후, 안범석 자신은 뭐라고 말했었지?

­그리고! 만일 이를 시행하지 못했을 땐 내가 『고자가 되어버려도』 상관없어!!

­오케이, 콜

그냥 해본 말이었다. 그냥 환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도 없이 끝났어야 할 말에 의미가 담겨버렸고, 환청이어야 할 목소리는 실체를 가져버렸다.

무언가가…… 정말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가 자신을 발견했다.

그저 발견하기만 했을까,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는 듯 꽉 붙들기까지 했다.

주로 사타구니 부근을!

안범석,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고자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으아아아악!!! 이건 꿈이야!!”

안범석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 더욱 거세게 내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내달려도 고통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꿈에서 깨는 일도 없었다.

***

“허억!!”

안범석은 기겁하며 눈을 떴다.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게임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맹세한 트레이닝을 실시하지 않으면 고자가 된다니. 뭐 그딴 황당한 꿈이 있단…….

“허억……!!”

그는 기겁하고 말았다.

방과 자신의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바닥엔 정체 모를 얼룩이 가득했고, 누렇게 변한 자신의 옷엔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겼다.

무엇보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하냐는 듯 그의 포동포동한 몸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온몸에 근육이 가닥가닥 끊긴 것처럼, 팔을 조금만 들어 올린 것만으로도 격렬한 경련과 비명을 지를 듯한 고통이 올라올 지경이다.

“꾸, 꿈이 아니었어!”

안범석은 자신이 기억하는 어젯밤 일을 떠올려보았다.

무슨 수를 써도 사타구니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농땡이를 피운다면 진짜로 고자가 되어버린다고 말하는 듯 통각 신호는 더욱 거세졌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이 말한 트레이닝을 실시해야 했다.

평소에 운동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위태로워진 자손 번식의 본능이 신체를 각성시키기라도 한 건지 목표량을 가까스로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참혹했다.

마지막 스쿼트까지 마치고 나서 기절한 듯 잠들어버린 안범석을 심한 땀냄새가 반겨주는 건 약과다.

몸을 씻고 싶어도 씻을 수가 없었고, 위장이 찰싹 달라붙어 먹을 거를 호소하고 싶지만 냉장고에 기어갈 힘조차 없었다.

그래도 안범석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 그래도 괜찮아! 위기는 넘겼어!’

이런 꼴이긴 해도 트레이닝은 모두 끝마쳤다.

고자가 될 위험은 회피했으며, 드디어 지옥에서 해방된 것이다.

안범석은 자신의 컴퓨터 책상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의 원인이 된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가 저 컴퓨터 안에 깔려 있었다.

안범석에게 트레이닝이 강요되는 건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였다.

시작하자마자 튜토리얼 보스에게 죽는 난이도의 게임을 했다간 캐릭터보다 그가 먼저 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

추천해준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저 게임은 앞으로 영원히 봉인해야겠…….

욱씬!!!

“끄악!!!”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다시 고환에서 고통이 덮쳐왔다.

어째서? 트레이닝은 모두 마쳤고, 캐릭터가 죽기는커녕 게임 자체를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사타구니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그칠 줄 몰랐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안범석이 다리 사이를 부여잡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신체의 한계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쿵!

그러다가 한쪽에 있던 책장에 몸을 부딪쳤다.

충격으로 그곳에 꽂혀 있던 책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그중 학창시절에 사용하던 노트도 섞여 있었다.

펄럭!

“……!”

안범석에게 보란 듯이 눈앞에서 펼쳐진 페이지.

그걸 본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전과 같은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힌 건 아니었다. 그 페이지를 적은 건 틀림없는 안범석 본인이었다.

「게임은 하루에 한 시간!」

그것은 한참 학업에 열중해야 될 시기, 게임에만 빠져 사는 그에게 잔소리를 하던 어머니와 나눈 약속이었다.

게임은 하루에 한 시간까지만 할 것.

안범석은 게임 시간을 제약하는 그 약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약속을 어기고 1시간 이상 몰래 게임을 하던 게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그때의 약속을 적은 노트가 다시 안범석의 눈앞에 나타났다.

똑같은 내용이었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달라져 있었다.

“하,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하라는 거냐……? 저 게임을……?”

안범석의 중얼거림을 긍정하듯, 사타구니에서 전해지던 고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안범석은 고통이 사라진 사실에 안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는 지옥에서 해방된 게 아니었다.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크흑! 크흐흐흑!!”

노트와 컴퓨터를 번갈아보는 그의 얼굴에서 서러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어째서 자신이 이런 꼴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누구를 원망해야 될지 모르겠고, 자신이 겪는 비현실적인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도 없다. 도와줄 사람은 더더욱.

어두운 방 안에서 그가 흘린 눈물만이 쌓여갔다.

***

그 후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안범석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고자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위해 SoR의 공략을 뒤져봐야 했고, 그럼에도 게임에선 캐릭터가 죽기가 일수였다.

애초에 이것은 캐릭터가 죽으면서 플레이어가 성장하도록 구성된 게임이다. 한 번 죽을 때마다 강제 트레이닝이 예정된 안범석의 피지컬이 늘어날 여지가 부족했다.

그렇게 성장이 더딘 캐릭터가 죽고 나면, 그때마다 안범석은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트레이닝을 하러 나갔다.

정말로 끔찍한 시간이었다. 지옥이라는 표현 하나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토록 좋아하던 게임이 더 이상 좋지가 않았다.

그토록 즐겨먹던 먹거리도 먹자마자 토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살은 빠졌다. 한 달 동안 무려 100Kg이나.

그러나 지방이 빠진다고 해서 늘어난 살집이 돌아올 리 없었고, 액체처럼 늘어진 살집은 그의 몰골을 더욱 흉하게 만들었다.

그가 자취하는 곳을 찾아온 부모님이 그 모습에 기겁하며 병원에 입원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입원하는 동안 게임도, 트레이닝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바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수십 번의 트라이 끝에 튜토리얼 지역을 빠져나왔지만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안범석에게 가장 무서운 건 몬스터도 함정도 아니었다.

바로 같은 플레이어였다.

플레이어 중엔 안범석의 게임 적응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와 같은 아무 것도 모르는 뉴비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악질 플레이어도 더러 존재했다.

그들은 안범석의 캐릭터, 진혜가 어디에 있든 공격해왔다.

싸우고 싶지 않다고, 가진 아이템 모두 드릴 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빌어도 그들은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고작 게임 하나에 이렇게 비굴하게 구는 안범석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더욱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그들에겐 고작 게임이었겠지만 안범석에겐 아니었다.

악질 플레이어가 진혜를 공격할 때마다 안범석은 정말로 자신이 살해당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때문에 플레이어가 있는 곳도 피하게 되었고, 플레이어의 그림자라도 보이는 순간 허접한 단검 하나를 쥐며 저항할 준비를 해야 했다.

안범석의 게임 일과는 뻔했다.

어떻게든 요구된 1시간을 채우기 위해, 플레이어가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캐릭터를 쭈그려 앉고 버틴다.

그러다 1시간을 다 채우면 도망치듯 게임을 종료했다. 그런 나날이었다.

안범석의 삶도 피폐해졌다.

몸에 맞지 운동은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단기간에 급격한 체중감소는 그의 몰골을 더욱 추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강인하다고 자부했던 마음도 망가진 지 오래다.

오늘치 게임 시간을 채우려고 컴퓨터 앞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문뜩 메마르게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 게임 따윈 하고 싶지 않아.”

텅 빈 눈동자로, 눈물이 눈가에 말라붙은 얼굴로, 그는 게임에 로그인 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트레이닝도 하고 싶지 않아.”

검게 된 로딩 화면.

그곳에 비친 안범석의 늘어진 살집은 본인이 보기에도 추했다.

차라리 포기하고 고자가 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타구니에 찾아오는 고통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마치 등에 칼을 찔리며 협박당하는 사람처럼 그는 강제로 게임도, 트레이닝도 이어가야 했다.

“제발 그만해…….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악마 보다 더한 존재를 향해 애걸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전부 포기할 게……. 사랑도 자존심도 다 포기할 테니까…… 그만 나를 놔달란 말이야…….”

강한 마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던 안범석.

그 마음은 이미 꺾여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방 안에서, 아무도 몰라주는 고통을 홀로 겪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고, 안범석을 그것을 북북 닦았다.

마음이 꺾이든 말든 이제 곧 게임이 시작된다.

SoR에선 무엇이든 방심할 수 없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다.

그리고 죽게 되면…… 또 다시 고통이 시작될 것이다.

전쟁터에 떨어진 병사처럼 그는 감정을 상실한 채 게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

“……어?”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 안범석은 정말 자신이 눈을 뜬 게 맞는지 의심해야 했다.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분명 자신의 캐릭터와 닮았다.

하지만 다르다.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 모습은 생생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안범석이 있는 곳은 더 이상 컴퓨터 앞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방조차 아니었다.

새까만 공간.

별다른 사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그 새까만 공간에 안범석과 여성은 마주보며 서 있었다.

짝. 짝. 짝.

그 순간, 손뼉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범석은 그곳으로 고개를 향했다.

소리가 들려온 어둠 속에선, 웬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박수를 치며 서 있었다.

“캬~ 구경 잘했어. 게임 캐릭터의 뻘짓도 재미있지만, 플레이어의 뻘짓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

그 남자는 웃고 있었다.

이 섬뜩할 정도로 까만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친 악동처럼.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안범석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 목소리……!!!”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 ‘오케이, 콜!’이라고 말이 자다가도 악몽처럼 들려올 지경인데.

흉악하게 일그러진 안범석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내뱉을 뿐이었다.

“너무 원망은 말라고. 예로부터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라잖아? 난 함부로 내뱉어버린 네 말을 주워서 돌려준 것뿐이야. 뭐, 결국 고자는 안 됐으니 다행이지?”

“이 자시이이이이익!!!”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안범석은 상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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