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남자의 증명 2
* * *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에게 이유 없는 고문을 가한 상대를 눈앞에 두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다. 적어도 지금 안범석은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두 팔을 벌리며 자신을 막아선 인영 때문이었다.
그 여성이었다. 자신의 게임 캐릭터와 무척 빼다 닮은 여성.
저 증오스러운 악마를 지키고자 가로막은 건 아니었다.
위치가 반대였다.
안범석에게 등을 보인 채, 그녀는 츄리닝을 입은 악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놈에게서 안범석을 지키려는 듯이.
저 악마를 죽이고자 하는 건 안범석 쪽이었는데 말이다.
“‘저것’에게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됩니다.”
진중한 그 목소리에는 안범석에 대한 걱정이, 그리고 악마를 향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악마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하시네. 주인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거 아니냐, 멍멍아? 네 주인의 몰골을 봐. 당장 나에게 달려와 한 대라도 날려주지 않으면 바로 화병으로 쓰러질걸?”
마치 동정이라도 하는 듯한 그 말투였다. 정말로 달려와 주먹을 날린다면 기꺼이 맞아줄 수 있다는 아량까지 엿보였다.
안범석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이 말이다.
그 당당하면서도 뻔뻔한 태도에 안범석은 다시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그래! 네놈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나날을 보냈는지 알아!? 대체 넌 누구야!!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한 거냐고!!”
“내 이름은 율. 네가 즐기던 게임,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의 관리자다. ……이것만 말하려니 좀 심심한데? 다른 직함도 추가할까? 사장도 좋고, 총괄 디렉터도 좋겠지. 아니면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
자기가 밝히고 자기가 되묻는 이상한 놈이었다. 그 내용도 뭔 소리인지 이해도 가지 않는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든 뒤 마구 패주고 싶었다.
그런데 여성이 물러나지 않는다.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치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서 가려고 해도 번개처럼 움직여 그의 앞을 선점했다.
당장 비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슬쩍 뒤를 돌아본 여성과 눈을 마주친 순간 그 목 아래까지 차오른 목소리는 쏙 들어가고 말았다.
감정이 담긴 눈.
안범석을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이 그 투명한 눈동자에서 드러났다.
지금껏 만나본 이성은커녕 어머니에게조차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받아본 적이 없는 온화함이었다.
주체할 줄 모르고 치솟던 분노를 부드럽게 달래는, 그 형체가 없는 감정에 안범석은 약간의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너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가 두 번째 질문이었지?”
츄리닝 남자의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그렇다. 저 율이라는 남자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가장 궁금한 건 왜 하필 자신이었냐는 것이다.
긴장된 시선으로 율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이야.”
“…………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너무나 어이없던 나머지 분노조차 나오지 않는다.
장난이었다고?
하기도 싫은 게임을 강제로 시키는 건 약과였다.
정말로 고환이 터지는 게 아닌가 불안에 떨게 하고, 근육이 찢어지고 관절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몸이 견디지 못해 구토가 나와도 계속 달리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게 고작 장난이었다고?
“왜 그렇게 표정이 굳었어? 진짜 그냥 장난이라니까? 질풍노도의 어린애들이 흔히 하는 그런 장난 있잖아? 남이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고, 나만 재미있으면 그만인 놀이. 당하는 사람이 몰릴 대로 몰려 죽거나 자살하면 ‘그냥 장난이었어요’라고 말한 뒤 촉법소년이라는 이름 뒤에 숨는 단골 대사 말이야.”
키득키득 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정말로 순수함밖에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율은 말하였다.
“생각해 보라니까? 평범하게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면서 두 발로 저글링을 하겠다고 외친다면, 한 번쯤은 보고 싶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게임을 못하면 트레이닝으로, 트레이닝도 못하면 고자가 되겠다는 광대가 하나 있기에 한 번 해보라며 응원해준 거라고.”
부들거리며 주먹이 떨려왔다. 너무 꽉 쥔 나머지 피가 흘러나왔지만 고통을 느낄 여지도 없었다.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녀석이 저딴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넘어가려는 태도를 보자니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두 눈이 충혈되었다.
안범석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여성이 가로막듯 말든, 온몸으로 억지로 밀쳐내며 율에게 달려갈 것이다. 저놈을 패줄 것이다!
타아아앗!!
퍼어어억!!!
그렇게 쏜살 같이 날아간 주먹에 의해 율의 고개가 꺾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안범석은 황당하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율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린 건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아~ 아파라~ ……주인을 모욕한 게 불쾌했나 보구나, 멍멍아?”
무시무시하게 울리던 타격음과 달리 별 데미지도 없는 모습으로 율은 꺾였던 고개를 되돌렸다.
율의 눈앞엔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여성이 서 있었다.
안범석은 혼란스러웠다.
저 여성은 누구기에 안범석이 당한 모욕을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자 율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안범석을 바라보았다.
“너, 눈치가 없구나? 딱 보면 몰라? 네가 만들고, 글레이그 대륙에서 함께 생존기를 이어갔던 그 캐릭터잖아?”
“뭐?”
확실히 자신의 캐릭터와 닮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누가 눈앞에 있는 살아 있는 존재와 게임 캐릭터를 바로 연결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놀람 반, 의심 반으로 율의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 사람이 내가 조종하던 캐릭터, 진혜란 말인가?
타앗!!
“……?!”
안범석이 진혜를 바라볼 때, 진혜 또한 안범석을 바라보더니 무시무시한 기세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안범석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뜨렸다.
왜 이쪽으로 오는 것인가? 혹시 게임을 답답하게 플레이 했다고 쌓여 있는 불만을 표출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안범석의 바로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임 캐릭터가 어떻게 생물로서 완성되는지 말해줄까?”
율의 목소리였다.
직후 안범석을 스쳐 지나간 진혜의 발끝이 율이 있던 공간을 꿰뚫는다.
파아아앙!!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그곳에 율은 없었다.
뒤편에 있던 율은 어느새 날아온 진혜를 지나쳐 안범석의 앞까지 이동해 있었다.
“너희들 플레이어들이 처음 캐릭터를 생성할 때, 그들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 같은 상태야. 자아라는 씨앗은 싹을 트지 않았고, 플레이어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타앗! 파아아아앙!!
바닥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위에서 브레이크를 건 진혜는 곧장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안범석을 지키듯, 그에 대한 위험요소를 제거하듯 주먹을 날려보았지만 이번에도 닿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학습을 해. 주변 사물, 보고 듣는 것, 전투 경험, 사망 경험, 고통, 승리, 패배, 닥치는 대로 학습하며 세상을 인지하고 점차 자아를 확립해나가지.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말이야.”
이번엔 안범석의 좌측으로 이동한 율은 아무 일도 없던 듯 태연히 수다를 이어갔다.
진혜가 그를 쫓고, 그는 사라지는 걸 반복하면서.
너무 정신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나머지 율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씨앗을 자라나게 하는 가장 좋은 영양소가 뭔지 알아? 바로 플레이어의 존재 자체야. 캐릭터들은 언제나 플레이어의 존재를 느끼고, 그들의 감정을 먹으며 자라나지. 갓난아기가 부모의 젖을 빨며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파아아앙!! 파아앙!!!
정신없이 허공에 선이 그어지며 안범석의 주위를 휘감았다. 전부 진혜가 움직인 잔영이고, 율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잡히지 않는 표적을 악착같이 쫓으려는 그 압박감 한가운데에 끼인 안범석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어떤 감정인지는 관계없어. 승리를 향한 갈망도 좋고, 모험과 탐구심, 아니면 단순히 캐릭터 하나를 꾸미고 싶어 하는 것도 좋지. 전문 용어로 캐빨이라고 하던가? 중요한 건 강도야. 강한 감정이 캐릭터의 자아 확립을 돕거든.”
덥썩!!
“어, 엇!?”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진혜는 안범석을 눕혔고, 그대로 그의 등에 팔을 대며 몸을 받쳤다.
마치 기사가 공주님을 한 팔로 안 듯이, 혹은 열정적인 댄스의 클라이막스처럼 말이다.
남녀의 포지션이 바뀐 듯한 자세였지만, 너무나 진지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부끄러워할 겨를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진혜라는 캐릭터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자아를 빠르게 확립했지. 네 감정을 듬뿍 받아먹었거든. 그게 고백했다가 차인 미련이라도 말이야. 참 불쌍하지? 자신에겐 부모와 같은 플레이어 하나밖에 바라볼 수 없는데, 플레이어는 그녀를 그저 누군가의 대용품 삼아 만든 거라니 말이야.”
퍼어어어어어억!!!
그리고, 처음으로 율이 공격해왔다.
아주 한순간, 움찔거리는 진혜가 드러낸 허점을 보란 듯이 파고들며 그녀를 걷어찼다.
그리고 진혜가 사라지자 텅 비게 된 안범석의 등을 이번엔 율이 받쳤다.
남녀 포지션에서 남남 포지션으로 바뀌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가 율이기 때문일까.
안범석은 온 몸의 소름이 일어날 정도의 거부감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율은 언제나와 같은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턱을 들이밀었다.
“안 때려? 네 울분을 풀 절호의 기회인데?”
울컥!!
율의 말대로였다. 진혜가 가로 막았기에 표출되지 못했을 뿐이지, 그에 대한 원망은 언제나 MAX치를 찍고 있었다.
심지어 본인이 직접 때리기 좋은 위치까지 턱을 들이밀기까지 하다니!
안범석은 더 이상 앞뒤 생각하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어억!!!
주먹은 확실하게 틀어박혔다.
그러나 율이 아니었다.
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를 노리며 달려든 진혜의 얼굴에 주먹이 틀어박힌 거였다.
“헉……!!”
놀랄 새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은 부딪쳤고, 그대로 검은 바닥을 굴렀다.
율은 몇 발자국 떨어진 장소에서 그들의 희극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쯧. 가여운 녀석. 처음부터 대용품으로서 만들어진 걸 알면서도 그런 남자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마음이 강하다고 자부한 주제에 고자 위협에 금세 꺾여 버리고, 몸은 녹아내린 슬라임처럼 생긴 녀석을 위해?”
“입 닥쳐……!!”
진혜는 이글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안범석의 주먹에 맞은 그녀의 뺨은 빨갛게 물들여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부딪쳤다간 태생적으로 진혜보다 몸의 강도가 약한 안범석의 주먹이 작살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러 주먹의 충격을 더욱 흡수할 수 있도록 얼굴의 각도를 바꾸었고, 그 흔적은 그대로 그녀의 뺨에 남았다.
“내가 누구의 대용품이건 상관없어! 이 분은 내가 세상에 존재하면서 느낀 단 하나의 온기야! 그런 분이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결국 대답은 변함없는 거지? 별로 가치가 없는 희생이지겠만……. 뭐 어때? 누군가를 위해 자기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지는 본인 결정 아니겠어?”
“자, 잠깐.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율과 진혜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던 안범석이 끼어들었다.
희생? 자신을 위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들은?
혼란스러워하는 안범석에게 율은 팔짱을 낀 손 중 하나를 풀어 진혜를 가리켰다.
“이 멍멍이가 기세 좋게 나에게 직접 클레임을 걸었거든. 더 이상 널 괴롭히지 말고, 이딴 웃기지도 않는 굴레에서 해방시켜달라고 말이야.”
“뭐……?”
굴레라면, 안범석이 겪은 그 강제 트레이닝 말인가?
되물은 건 아니었지만 율은 그게 맞다고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말했지. 네 플레이어가 짊어진 제약에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캐릭터 삭제’라고.”
“……!!!”
캐릭터 삭제.
현실이었으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들렸겠지만, 눈앞에 정말로 살아 있는 캐릭터를 보니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진혜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주제 넘는 짓을 했다는 것처럼.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는지 그녀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 너무 과장해서 상상하지 마. 캐릭터 삭제라고 해봤자 더 이상 그 캐릭터로 플레이 할 수 없는 거지, 진짜 죽는 건 아니거든. ……차라리 죽고 싶어지긴 하겠지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공간이 무슨 공간인지 알아?”
율은 그들이 있는 검은 공간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다. 끝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검은색의 허무만으로 채워진 공간이었다.
“여긴 플레이어가 접속하지 않는 동안 캐릭터가 대기하는 곳이야. 겉보기와 달리 꽤나 쾌적해. 그게 다긴 해도 말이지.”
율은 이번엔 장난기가 없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어떤 것과도 상호작용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지. 세계수가 내린 불사의 저주는 적용되지만, 이곳에선 대륙으로 회수할 수단이 없거든. 그냥 이곳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는 거야. 정신도, 감정도, 자아도…… 모든 게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렇게 말한 그는 진혜와 안범석을 바라보았다.
“일단 플레이어의 동의도 없이 삭제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니까 이 장소에 부르긴 했는데, 정말로 괜찮겠어? 이 공간이 주는 고독을 넌 못 버틸 거다?”
“상관없어.”
“……!! 어, 어째서……?”
정말로 그렇게 되도 괜찮다는 것처럼 진혜가 말하였고, 그 대답에 안범석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살아있는 채로 만나긴 했지만, 이전까지 안범석에겐 그저 게임 데이터에 불과한 존재였다.
“나, 난 정말로 그냥 고백했다 차인 미련 때문에 널 만든 것뿐이야. 특별히 애정을 쏟은 적도 없었어. 오히려 너무 약해서 나만 고생한다고 욕까지 했었다고! 그,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해방시키겠다고 이런 고독한 지옥에 남는 걸 택한단 말인가?
대답을 원하는 안범석의 표정을 본 진혜는 온화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그와의 시선을 맞추었다.
“절 처음 만들어낼 때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캐릭터를 만들고 시작하자마자 2분 만에 튜토리얼 보스에게 죽고, 그 뒤부터는 고자가 될지 모르는 고통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그러나 진혜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듯 더욱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진혜야!
자신이 그저 대용품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이 원래는 다른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녀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전 당신에게 애정을 받았습니다.”
“아…….”
진혜는 안범석의 손을 살며시 붙잡고 들어 올렸다. 그것에 놀란 안범석이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저에게 의지를 주고 있습니다.”
들어 올린 손으로 진혜는 빨갛게 된 자신의 뺨에 댔다. 조금 전 안범석의 주먹에 맞은 자리었다.
그러나 그 흔적을 그의 손으로 덮는다.
그가 자신에게 준 상처 따윈 단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듯.
“하지만 저의 존재 때문에 당신의 고통이 이어진다면, 저라는 존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따듯한 온기를 품은 물방울이 안범석에 손 위로 닿았다.
그를 바라보는 진혜의 눈에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줄곧 당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느껴왔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안범석의 손을 놓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온기를 스스로 내려놓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그 말을 안범석에게 돌려주며 진혜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내 의지엔 변함이 없다. 나를 삭제하고 저분을 해방해라.”
어깨를 으쓱거린 율은 멍한 표정 그대로 시간이 멈춰 있는 안범석을 바라보았다.
“이견 있나, 플레이어?”
“…….”
“뭐, 그럼 없는 걸로 알고, 캐릭터 ‘진혜’는 이대로 삭제…….”
그렇게 말한 율이 무언가를 하려는 듯 팔짱을 풀고 손을 내저으려 할 때였다.
“기다려어어어어어어어어!!!!”
터져 나오는 안범석의 고생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를 진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율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바라본다.
“너, 게임 관리자라고 했지!? 플레이어로서 내 의견을 말하겠다!”
“좋지. 말해봐.”
“룰이 너무 가벼워!”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표정은 점점 즐거워하는 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자가 되는 거론 부족해!! 내가 트레이닝을 실시하지 못하면! 이딴 쓸모없는 불알 두 짝과 막대기는 그 자리에서 전부 절단시켜버려!! 내가 쇼크사로 죽든 과다출혈로 죽든 상관하지 말고!!!”
“오~!”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율은 감탄하고, 진혜는 기겁했다.
“더 이상 괴로운 운동을 이어서 나가지 않아도 돼요!! 저와 함께 모험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은 평온한 생활로 돌아가기만 하면 돼요!! 남성성을 잃을 필요도 없다구요!!”
“그딴 거 필요 없어!!”
진혜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며 안범석이 외쳤다.
“이대로 날 위해 희생하려는 여자를 못 본 척한다면, 난 남자도 아니야!! 이딴 쓸모없는 건 필요 없어!!! 줘도 안 가진다고!!!!”
전혀 굽힐 생각이 없는 안범석의 모습을 보며 진혜는 할 말을 잃었다.
존나게 마음에 드는 똘기라는 듯 율의 배꼽 잡는 웃음소리만 그 어두운 공간에서 울려 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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