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화해의 한 잔 1
* * *
신요현이 안범석에게 좋은 정신병원을 추천해주고 있을 그 시각.
지상에서는 레아와 진혜가 잔해를 파헤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하아! 하아!”
쿠궁!
진혜는 차량 한 대 정도나 되는 콘크리트 더미를 온몸으로 밀어 한쪽으로 치워냈다.
현재 그녀의 몸은 엉망이 된 상태에서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사실상 한쪽 발로만 몸을 지탱하고 한쪽 팔만을 사용해 물체를 움직이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아래에 있는 안범석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섬뜩!!
“……!!”
그 순간, 몸이 반응한 건 지난 세월 간 쌓인 경험 때문이었다.
사망에 대한 패널티가 일반적인 플레이어보다 많은 안범석과 진혜는 항상 다른 플레이어를 경계해왔다.
그것이 과민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기척을 죽인 살의에도 반응하는 역할도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퍼붓던 비가 그치고 달빛을 드러내는 하늘에서, 두 맹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드디어 도착했다아아아아아아!!!!”
“이 자식, 감히 우리를 날려 보내!?!!”
분노와 함께 타오르는 황갈색과 은색의 머리카락.
서해로부터 시작해, 전혀 길이 정돈되지 않는 산길, 줄줄이 이어진 건물의 위 등등.
자그마치 8시간에 걸쳐 무재시로 이어지는 경로를 일직선으로 직행해 달려온 레반과 레테라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장기간의 전력질주 끝에 그들을 맞이하는 건 자신들이 있었던 헬스클럽 건물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모습이었다.
역시 자신들이 사라진 이후 무슨 일이 있었다.
현재 신요현의 행방은 묘연하다.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그러던 중 건물 잔해 위에서 돌무더기를 치우고 있는 진혜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캐릭터라는 걸 알아본 그들은 더는 고민할 것도 없이 저것이 자신들을 날려버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후부턴 이지(?)는 필요 없었다.
단단히 돌아간 눈으로 순순한 살의와 분노를 드러낼 뿐이다.
그 기백에 뒤덮어 마치 하늘에서 강력한 몬스터가 출현한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춘 진혜였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면치 못하리라 느꼈을 만큼 그들의 모습은 살벌했다.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두 맹수가 진혜의 몸을 마구 난자해버리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대지가 측면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레아가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건물의 외벽 하나를 통째로 집어 던진 것이었다.
트럭과 충돌한 것처럼 레반과 레테라의 몸이 외벽에 밀려 옆으로 날아갔다.
그 육중한 물체는 두 사람을 바닥에 처박았고, 다음 순간 무술가가 나무판자 격파하듯 산산이 터져나갔다.
쿠콰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무슨 짓이냐, 더벅머리!!!”
“설마 오라버니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적에게 붙은 건 아니겠지, 더벅머리!!!”
“난 더벅머리가 아니라 천연웨이브라고 했지? 둘 다 이 자리에서 뒈지고 싶냐?”
분노가 전혀 풀리지 않는 두 사람이 레아를 향해 살기를 드러내었다.
그 살기에 반응한 건지, 아니면 더벅머리라고 부르는 것에 빡친 건지 레아 또한 흉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간에 낀 진혜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했다.
당장 터질 것 같은 폭탄과도 같은 공간을 먼저 무너뜨린 건 레아 쪽이었다.
“헛짓거리 말고 이리 와서 땅이 파!! 망할 아버지 먼저 구해내야 할 거 아냐!!”
아버지……, 신요현을 언급하는 소리에 레반과 레테라의 눈동자에 드디어 이성이라는 게 돌아왔다.
“뭐? 형님?”
“오라버니가 이 아래 묻혀 있는 거야!?”
“그래. 미약하지만 목소리도 들려. 이 빌어먹을 아버지는 이쪽이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한가하게 수다나 떨고 있는 모양인데? 확 때려줄까, 저거…….”
“형님이 무사하다면 다행이지만, 건물은 왜 무너져 있는 건데!?”
“오라버니는 왜 그 아래에 깔려 있는 거고! 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시끄러! 늬들이 서쪽 바다 오징어랑 짝짜꿍 거리며 놀고 있을 때 그 양반 도와준 게 나거든! 고맙다는 말도 안 하냐!”
아버지이네, 형님이네, 오라버니이네, 부르는 호칭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콩가루 집안이라 생각하게 될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혜는 이 셋이 이러니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광경처럼 느껴졌다.
필시 신요현이라는 남자는 캐릭터를 가족처럼 허물없이 대하는 인간이겠지. 진혜를 마치 연인처럼 아끼는 안범석처럼.
“그리고 이 여자는 뭐냐? 우리를 기습해온 녀석 아냐?”
“오라버니를 도운 네 싸운 게 이 년이라면, 우리에겐 적이라는 소리인데?”
잠시 멀어지는 줄 알았던 살의가 진혜에게 집중되었다.
진혜의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져갔다.
“뭐, 그건 그렇지. 지금도 처리하긴 애매하긴 해. 뭣하면 늬들이 마무리하던가.”
레아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맛 좋은 먹이라는 듯 맹수 앞으로 던져두기까지 했다.
원망스러운 시선을 레아에게 던지자, 네가 원망할 자격은 있냐는 듯 사나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우드득.
그리고 돌아오는 건 레아의 표정만이 아니었다.
레아의 투척에 잠시 물러났던 레반과 레테라가 손가락을 살벌하게 풀며 다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심코 뒤로 물러나려는 진혜였지만 금방 잔해더미에 등이 닿아 움직일 공간도 없었다.
“……음?”
“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던 두 사람은 이내 작은 침음을 흘렸다.
그들의 시선이 진혜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본래라면 꽤나 아름다운 미인이었을 것이다. 자신들과 달리 실제 모델로 한 사람이 있는지 외모도 이쪽 세계의 인간들과 가깝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젠 흔적뿐이다.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 있는 건 미인이라기보단 좀비에 가까워 보였다.
잔뜩 산발된 머리카락, 찢어진 두피 사이에선 두개골이 힐끗 보였고, 왼쪽 눈꺼풀은 아래로 쭉 찢겨져 있었으며, 콧대는 낮아지고 피를 흘린 자국이 남아 있다.
턱에 균열이 생기고 어긋난 흔적도 보이고, 꺾인 쇄골이 툭 튀어나왔으며, 한쪽 팔은 완전히 뒤틀렸다.
지금은 옷가지로 억지로 동여맸지만, 복부 부근에는 내장이 흘러나온 흔적까지 보였다.
한쪽 무릎이 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한 발로 몸을 지탱할 수밖에 없으며, 그 한 발조차 발가락 세 개가 짓이겨 나가 있었다.
“거참 알뜰하게도 쥐어 팼네!!”
“때릴 구석이 없잖아!!”
레반과 레테라는 진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지금 겉만이 아니라 안쪽까지 엉망이었다. 이 상태에는 게임 캐릭터라도 충분히 위험했다.
지금 레반이나 레테라가 한 대만 톡 쥐어박아도, 균열에 일어난 댐에 마지막 충격이 가해진 것처럼 진혜는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자기 몫을 빼앗겨버렸다는 듯 크게 분개한 두 사람은, 그대로 진혜에게 등을 돌렸다.
“어……?”
진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날려버리고 신요현을 위협한 자신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을 텐데 숨통을 끊지 않고 물러난다니?
“어째서……?”
그녀가 중얼거린 말에 레반이 고개를 돌리며 답해주었다.
“이 헬스클럽에 오기 전에 형님과 한 가지 약속했다. 설령 플레이어와의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목숨을 빼앗지 말고 싸워달라더군. 그런데 지금 네놈은 조금만 싸워도 죽어. 그러니 여기서 멈출 수밖에!”
그리고 레테라도 고개를 돌리며 첨언한다.
“안심하지 말라고. 일단 오라버니가 살아계신다니 그를 찾는 걸 우선시 하는 것뿐이니까. 오라버니의 허가가 떨어지는 순간 넌 내 손에 죽어.”
“뭔 소리냐? 내가 죽여야지.”
“뭐?”
레반에 지적에 레테라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그들도 잔해를 치우는 작업을 거들기 시작했다.
진혜는 위험성만 보고 다짜고짜 저들을 날려 보냈다. SoR에서 쌓인 경험에선 타 플레이어가 접근해오면 좋게 흘러갔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그 강력한 힘을 함부로 휘둘리지 않았다.
주인인 신요현의 의지를 존중하며, 그가 없는 지금도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쫓아냈는데 알고 보니 더 위험한 녀석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다니 말이야.”
진혜의 생각을 눈치 챈 듯, 레아가 잔해를 한쪽을 던지며 말하였다.
그녀의 말대로다.
그나마 상대를 파악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저들과 달리, 통제를 벗어난 레아가 훨씬 위험했던 걸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것이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일이라니, 웃음도 안 나오는 일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범석 씨를 찾아내면, 이번엔 이들과 제대로 대화해보자.’
진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냥 나한테 맡겨. 내가 더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으니까.”
“난 저 여자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도록 통쾌하게 죽일 수 있어.”
“좋아. 그럼 반으로 갈라서 서로 반반씩 죽이는 건 어때?”
“콜.”
멀리서 레테라와 레반이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안범석을 구해내자마자 도망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 진혜였다.
***
“……그렇군요. 그 모임에 나왔던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 때문에, 신요현 씨는 플레이어를 찾는 겁니까?”
안범석의 이야기가 끝나고, 이번엔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게임 캐릭터가 현실로 나타나면서 주거지가 날아가는 작은(?) 사건을 시작으로 겪게 된 별의별 일들.
율과의 만남. 튜토리얼의 끝. 거기서 알게 된 다른 56명의 플레이어.
그 존재에 불안을 느끼고 열어본 오프라인 모임에서, 이 게임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살해당했다.
그때 율이 말했던 대로 배진환 씨의 시신은 발견되었다.
전혀 상관없는 장소에서,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뉴스에 보도되었다. 마치 그의 죽음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가짜였다는 것처럼.
하지만 뉴스 화면에 비춰진 유가족들이 슬퍼하는 모습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다.
조용히 살아가려는 플레이어라면 상관없다. 아니면 관종이라 주목을 모으려는 플레이어라도 상관없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만들지만 않는다면.
실제 사람 목숨을 게임 데이터 정도로만 생각하는 놈은 56명 안에 분명 있었다. 어쩌면 한 놈이 아닐 수 있다.
그런 놈이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면 꿈자리가 사나웠다. 그러니 찾아내 족치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안범석은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불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합격점입니까?”
“……엄청 아슬아슬하긴 하네요.”
“크윽! 그, 그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안범석은 비통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 숙였다.
확실히 사정을 알게 되면서 어느 정도 회복하긴 했지만, 내가 보는 안정석의 평가는 아직 위험군이었다.
1년이 넘도록 율에게 조교(?) 당한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다.
패배 = 하드 트레이닝이라는 공식 때문인지, 심리적으로 몰리면 뭔가를 하지 않고 못 배기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냥 발광하기만 하면 귀여운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양반은 게임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치이기도 하다.
나라서 겨우 대응한 거지, 그 낡은 단검이 일반인에게 향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뭐, 사실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안범석 씨에 대한 인상이 워낙 들쭉날쭉이여야 말이죠.”
“…….”
“그래서, 좀 더 당신을 오래 지켜보고 판단하고 싶어요.”
“네?”
침울해져 있다가 내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안범석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희와 ‘동맹’하지 않으시겠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