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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30화 (130/173)

〈 130화 〉 사람을 찾습니다 ­ 4

* * *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3시 30분.

약속했던 시간에서 30분이나 초과했다.

정문은 여전히 텅 빈 상태다.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형님. 아무래도 친구분은 오지 않는 게…….”

“올 거야.”

레반의 말을 레아의 목소리가 끊어버린다.

그녀는 여전히 정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곳에 감도는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 사람이라면 올 거야.”

침묵에 저항하듯 중얼거리는 레아는 레테라는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았다.

“메시지를 아예 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잖아.”

“봤지만 오는데 늦을 가능성도 있어.”

“오라버니가 기껏 시간을 내줬는데도 늦을 정도의 인성이면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지 않아?”

“닥쳐라,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레아의 대답은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처럼 사나웠다.

어찌되었든 약속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스콜 그는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초조함이 공격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지만, 레아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레테라가 그걸 이해해줄 리 없었다.

눈동자에서 온기가 사라진 레테라가 레아를 향해 성큼 발을 내딛으려 할 때, 내가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처음부터 이 위치에 있으려 했다고 말하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다른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난 아직 좀 더 있고 싶은 기분이야.”

그렇게 말한 나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돌아가고 싶으면 먼저 돌아가도 괜찮아. 난 레아와 좀 더 같이 있을게.”

레아는 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레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테라는 살짝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다고 돌아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형님.”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을 거예요.”

그들의 모습에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적당한 자리를 깔고 앉았다.

어디 원 없이 기다려보도록 하자.

레아가 납득할 때까지, 나 또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갔다.

4시, 5시, 6시…….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이라서 일몰 시간 또한 빨랐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그 주황색이 진청색으로, 진청색은 검게 물들 때까지조차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떠나가신 임을 기다리는 민요 속 주인공이 된 것도 아니고, 그저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정문으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낮에 그 대학생들도 밤샘 작업이 예정되어 있는지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밤공기가 서늘해지는 10월 말의 공기가 피부 속을 침투한다.

추위를 지워내려 옷 위로 팔뚝을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쿠우우우웅!!!!

갑자기 지면 위로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충격이 일어났다.

충격의 근원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레아가 서 있는 땅이 오른발을 중심으로 움푹 파여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가 오지 않자 홧김에 발을 구른 게 바닥에 터진 듯한 흔적을 남겼다.

이쪽에서 보이는 건 레아의 뒷모습뿐이었지만, 사납게 솟구쳐 있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심정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는 것인지 레반과 레테라가 나를 사수하는 듯한 위치로 이동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빠져나와 레아에게 다가갔다.

지금 레아는 확실히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와 오래 동안 함께 해온 나로선 그 모습이 위험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와 친구의 화해를 시키기 위해 고집을 부려가며 기회를 만들었건만, 상대가 나타나지 않아 상심한 어린아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내 글을 보지 못한 것뿐일 거야. 만날 확률이 낮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

“……혹시 우냐?”

“안 울어!”

버럭 소리지는 레아였지만,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이쪽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얼굴을 들여다보려 옆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릴 뿐이었다.

어쩌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레아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과격한 모습만 보이던 레아였기에 새로운 모습에 호기심이 끌리는 건 당연한 일었다.

하지만 무작정 들이댔다간 저 상심한 늑대에게 물리고 마리라.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돌릴 수 있을까 하며 레아와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어……. 형님?”

“어, 왜?”

레반이 나를 부르는 와중에도 나는 시선을 피하는 레아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레반의 목소리에 뒤를 이어 레테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데요?”

휘익!!

그 순간 나와 레아의 고개는 바람소리가 일어날 만큼 빠르게 돌아갔다. 그 원심력에 밀려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물방울은 덤이었다.

저벅. 저벅.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동상 앞에서 정문까지 이어지는 거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안력을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은 어둠 속 한 지점을 바라보았고, 나 또한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도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해가 지자 어두워진 주변을 밝히듯 정문 근처에 가로등 빛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둠을 비추는 빛 속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스콜이냐?”

녀석의 본명은 모르기에 캐릭터 네임으로 물었다.

그 남자 또한 어색하게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가 레아냐?”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현실에서 서로 캐릭터 네임으로 부른다는 거 진짜 오글거리는 상황이구나.

***

잠시 항마력이 손실이 가는 걸 견뎌낸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앞에 남자를 바라보았다.

연상일 줄 알았는데 나이가 나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방금 집에서 나온 듯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사람을 만나러 나온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상대가 나와 맞먹을 만큼의 게임 폐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이 남자가 정말 스콜인가?

내가 모니터 화면 너머로만 접했던 상대가 정말 이 사람이라고?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니 남자를 바라고 있을 때, 그 또한 어색한 듯 이쪽을 바라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레반, 레테라, 그리고 레아 순으로 시선이 옮겨지더니 다시 나를 향해 돌아온다.

그러고는 눈빛이 빛내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이야~! 반갑다! 그동안 잘 지냈냐?”

“……?”

친근하게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리는 남자의 행동.

난 남자와 말과 그 행동을 번갈아하며 살펴보았다.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 누구야?”

이건 스콜에게서 나올 반응이 아니다.

그렇기에 던진 질문에 남자가 움찔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 누구냐니? 나라고, 스콜!”

“……레아.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넌 나서지 말고 있어.”

미리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인데 이미 늦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끝나기보다 먼저 거리를 좁힌 레아가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으아아아악!?! 뭐, 뭐야!?”

그저 건강한 여성 정도였던 체격의 레아가 갑자기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리자 남자는 겁에 질린 반응을 보였다.

레아의 괴력도 괴력이지만, 무엇보다 남자를 노려보는 레아의 눈빛은 숨이 막혀올 만큼 사나웠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듯이.

“뭐하자는 개수작이야? 넌 뭔데 그 녀석을 사칭하고 있는 거냐고?”

레아 또한 상대가 스콜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당연한 일이다.

녀석과 어울리며 모험하던 시간은 나나 레아나 같다. 내가 눈치 챈 걸 그녀가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이 녀석이 정말로 스콜이라면, 게임 속 레아의 모습과 한없이 닮은 그녀의 모습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문제는 지금 레아의 기분이 상당히 언짢은 상태였다는 거다.

가뜩이나 스콜이 나타나지 않은 것만 해도 속상해 죽겠는데 눈앞에서 스콜을 사칭하는 놈이 나타났다? 눈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다.

“네가 누군지 빨리 대답해. 난 지금 네 머리를 그대로 땅바닥에 찢어 눌러 터트려버릴지 고민하고 있으니까.”

“따, 딸꾹!!”

잔뜩 가라앉은 레아의 목소리가 칠판 긁는 소리보다 더욱 소름 끼치게 울린다.

남자는 지금 이 말에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지 딸꾹질을 하며 가랑이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가 너무 강했던 탓일까.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레아는 자신의 말대로 남자의 머리를 땅에 내리쳐 터트리기 위해 팔을 휘두르려 했다.

“레아. 그놈 죽이기만 해 봐. 그땐 내가 너와 인연을 끊을 거다.”

우뚝!!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던 내가 내뱉은 말에 레아가 동작을 멈췄다.

그녀가 고개만을 움직여 아직 격한 감정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나는 그걸 피하지도 않았다. 남자처럼 기세에 눌리지도 않았다.

이런 플레이어로서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레아에게 밀려버리면 난 앞으로도 그녀를 통제할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위험한 힘을 제어할 방법이 사라진다는 건, 그녀와의 관계 파탄을 의미했다.

“그놈 내려놔.”

“…….”

레아가 만들어내는 침묵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

레반과 레테라는 무슨 일이 일어나건 대응할 준비를 하듯 소리 없이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털썩!

“히, 히이익!”

레아는 짐짝을 던지듯 손에 쥔 남자를 내려놓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자는 기겁하며 레아에게서 떨어졌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고 달아나려는 그때, 어느새 뒤를 선점한 레반의 벽과 같은 몸과 부딪쳐 다시 엉덩방아를 찍었다.

쿵! 털썩!

“으, 으아아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도망갈 구석이 레아, 레반, 레테라 세 사람에게 막혀 버린 그 남자가 살려달라고 빌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시 한 번 물을게. 당신 누구야?”

“죄, 죄송합니다! 전 그냥 예전에 SoR를 즐기던 인간이에요! 인터넷 게시글에 한때 유명했던 레아 유저의 글이 올라오길래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약속 장소가 여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건 나와 스콜밖에 모를 텐데?”

“저, 전 이 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약속 날짜가 이 학교 창립기념일이고, 동상 앞이라는 거에서 이 말 동상이 떠올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와 본 것뿐이에요!”

겁에 질린 모습과 필사적인 목소리로 보아하니 저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호기심에 와 본 관계없는 인물이었다.

하필 게시글을 올린 여러 SoR 커뮤니티에 이 학교 재학생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 좁다는 게 이런 식으로 실감될 줄은 몰랐는데…….

“하아.”

귀찮은 상황에 한숨을 쉰 나는 그 남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상관 안 하기로 한 사람들이지만 잠시 그 양반들 이름 좀 빌려야겠다.

“내 얼굴 봐봐. 어디서 본 적 없어?”

“모,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이 학교 정문에서 조폭들이 모여 한 학생에게 넙죽 인사하며 모셔가던 사건은 알고 있겠지?”

“설마……. 설마 당신이 그 조폭 두목의 외동아들!?”

아니, 소문이 어떤 식으로 퍼져 있는 거야.

불곰파 이놈들 때문에 학교에서 이상한 이미지로 찍혀버렸어. 아무래도 휴학하길 잘한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남자가 하는 오해를 그대로 이용해주기로 했다.

“법과 먼 뒷세계랑 가까워지고 싶지 않지? 넌 오늘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 일도 안 당한 거야. 알겠어?”

“네, 넵! 오늘 일은 제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겠습니다!! 당신이 누군지도 생각이 안 납니다!!”

바닥에 넙쭉 엎드리며 외치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턱짓했다.

“됐어. 이제 가 봐.”

“넵!!”

내 말과 동시에 레반이 길을 지켜보자 그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다나기 시작했다.

축축한 바지 채로 집에 가야겠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에 대한 대가를 치른 거라고 생각하지, 뭐.

“결국 스콜은 오지 않았군…….”

피곤하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자극하기라도 한 걸까.

화악!!

피부가 찢어질 것만 같은 섬뜩한 기운이 덮쳐왔다.

익숙한 감각이다.

살기라는 이름의 형체를 이룬 감정이었다.

레반과 레테라가 나를 지키듯 앞을 가로막았으며, 나는 그들의 너머에 있는 살기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젠장……. 오라는 놈은 오지 않고, 이상한 날파리가 사칭이나 하고……! 아아아!! 되는 일이 없네!!”

레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 탓에 안 그래도 거칠었던 머릿결이 짐승의 것처럼 더욱 사납게 치솟기 시작했다.

레아가 내뿜는 건 감정에 휩쓸린 표적 없는 살기였다.

확 터트리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한데, 그녀 자신도 그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내면에서 날뛰고 있다.

“레아! 날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잖아! 시간을 들여서라도 계속 시도해보면 돼!”

“하지만……!”

나를 돌아보는 레아 표정은 복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실은 녀석이 먼저 나를 피하는 게 아닌지, 이대로 나와 녀석의 관계가 완결되는 게 아닌지, 그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에 따른 격정을 토해내려던 레아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봐, 망할 아버지.”

“응?”

“방금 전 인간은 죽이는 건 안 되지만……. 나와 같은 존재에겐 화풀이 정도는 해도 되지?”

“뭐?”

순간 레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뿜던 살기마저 거둔 레아는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학생들을 위해 마련한 작은 산책로였다. 나뭇잎이 주황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나무 여러 그루가 그곳에서 몸을 뻗고 있었다.

“방금…… 내가 뿜어내던 살기에 반응한 놈이 있어.”

콰아아아앙!!!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아는 바닥에 균열을 남기며 몸을 날렸다.

자신들을 지켜보는 수상한 그림자를 사냥하기 위해.

“잠깐만, 레아!!”

말릴 새도 없이 레아는 산책로로 달려들었다.

나무째로 숨을 공간을 날려버리겠다는 듯 주먹 꽉 쥐고 날리려는 순간, 나무 사이에서 눈빛이 빛이 창과 같은 형태로 튀어나왔다.

파아앗!!

공기를 꿰뚫는 빛의 창.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기습이었지만 레아는 빠른 반응속도로 피해냈다.

“‘광휘의 창’……. 성직자인가?”

백덤블링 하는 것으로 공격을 피해내 땅 위에서 자세를 낮춘 그녀는 다시 산책로로 달려들려고 했다.

“잠깐 타~임!!”

그런 레아를 제지하듯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레아를 멈추기 위해 레반, 레테라와 함께 달려가던 나는 그 낯이 익은 인영에 깜짝 놀랐다.

“하티!?”

신성함이 느껴지는 성직자 복장과 복슬복슬한 양을 연상시키는 분홍색 머리카락. 뿔처럼 튀어나온 장신구.

그녀는 과거 율이 개최한 이벤트에서 만난 캐릭터였다.

이벤트 막바지에서 헤어졌던 하티가 왜 이 자리에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진정해주세요! 저희는 싸울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에요!”

항복 선언을 하듯 두 팔을 번쩍 들고 있는 하티였지만 몸을 풀 곳이 절실했던 레아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 몇 대 쥐어 패고 듣도록 하지!!”

“안 싸운다니까 쥐어 팬다는 건 뭔데요!? 진짜 듣던 대로 막나가는 분이네!!”

‘응? 듣던 대로?’

하티가 한 말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레아를 말리는 게 급선무였다.

레아는 좋은 샌드백이라는 듯 주먹을 쥐며 하티를 향해 달려들었고, 하티는 목에 건 성령을 쥐며 사용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 순간, 한 목소리가 레아를 제지했다.

“그만해라. 레아.”

그건, 내가 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레아는 그 목소리를 듣고 경악한 듯 멈춰 섰다. 내가 모르는 목소리를 그녀는 알고 있는 것처럼.

그 굵은 남성의 목소리는 하티가 튀어나왔던 나무 뒤에서 들려왔다.

잠시 뒤, 그곳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레반과 엇비슷할 정도로 큰 신장. 하지만 체격은 좀 더 호리호리했다.

옷은 현대인과 다른 천옷, 한 손엔 보석이 박혀 있는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나도 너희와 싸우고 싶진 않다.”

“너……!”

짧은 머리카락은 어둠에 동화될 것 같은 잿빛.

어딘가 나른한 듯한 눈매와 무표정한 얼굴.

레아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저 얼굴을 안다.

게임 속에서 본 게 전부지만, 녀석이 현실로 튀어나온다면 분명 저러한 모습일 것이다.

“스콜……?”

그게 바로 저 남자의 이름이었다.

SoR를 할 때면 항상 레아의 옆에서 콤비를 이루던 마법사 캐릭터.

그가 우리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래. 하티라는 이름을 듣고 눈치챘어야 했어.

스콜과 하티.

북유럽 신화에서 해와 달을 잡아먹은 늑대 형제의 이름.

하티라는 이름 자체에 스콜과 연관성이 있던 것이다.

하티는 나와 마찬가지로 녀석이 만들어낸 새 캐릭터였다.

“너…….”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무 뒤편에서 걸어 나오는 마지막 인영을 바라보았다.

오프라임 모임에서도 만났고, 하티의 주인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결국 만나러 가지 않았던 그 인물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연성화.

세상이 좁다는 말의 의미가 아까보다 더 크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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