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결별의 이유 1
* * *
연성화를 처음 만난 건 오프라인 모임에서였다.
뭔가 신경이 쓰이는 정도에서 넘어갔던 그녀는 훗날 하티를 통해 나와 같은 플레이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모임 또한 나처럼 플레이어를 찾아낼 목적으로 참가한 거겠지.
하티에게서 들은 연성화의 목적은 율을 쓰러뜨리는 것.
율 쪽을 노리는 건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했기에 플레이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 목적은 같았다.
이 게임을 빙자한 초월자의 유희를 끝내는 것이다.
당장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낌새는 없고, 최종 목적지 또한 같다 보니 그녀와 만나는 건 뒤로 미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내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캐릭터를 옆에 대동한 모습으로 말이다.
“스콜?”
나는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아 연성화 옆에 서 있는 회색 머리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 내가 알고 있는 스콜 맞아?”
“…….”
끄덕.
그는 조용히 고개를 세로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중한 동작으로 나에게 살짝 허리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당신이 대화해야 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한 걸음 물러난 스콜이 활짝 편 손바닥으로 가리키는 건 연성화였다.
그러한 스콜의 태도에 당황하는 건 내 쪽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주인 플레이어만을 최고로 쳤다.
캐릭터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1순위가 바로 자신의 주인인 것이다.
오직 주인에게만 예의를 차리며 그 외의 존재에겐, 설령 같은 주인을 둔 캐릭터라고 해도 거슬린다 싶으면 적대한다.
그런데 스콜은 주인이 아닌 나에게도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나 또한 주인과 비슷한 위치라는 걸 인정한다는 것처럼.
“……게임 캐릭터의 성격은 그동안의 플레이에 영향 받는다고 했던가?”
그 순간 연성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그곳엔 레아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레아 또한 연성화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평소 안하무인이었던 레아에게서 나온 반응이라곤 믿기지 않을 행동이었다.
마치 어른 앞에서 얌전해진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건지 연성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이 녀석들에게 그대로 담겨 있는 모양이네.”
그렇게 말한 연성화는 레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조금 전에 다녀갔던 사칭범과는 눈빛 붙어가 달랐다.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다양한 회한에 잠기는 눈.
저건 나를 알고 있는 눈이었다.
아마 나 또한 같은 눈을 하고 있을 테지.
“너…….”
틀림없이 녀석이었다.
스콜이라는 캐릭터 너머에서 항상 나와 대화하던, 바로 그 녀석.
연성화가 그 녀석이라는 걸 안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해 터져 나오는 격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대학생이라며!?”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냐, 등신아!!”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덩달아 긴장한 표정을 짓던 연성화가 걱정한 거 물어내라는 듯 외쳤다.
“아니, 썅! 나이 속인 건 그렇다 치고 성별까지 속여!?”
“속인 적 없어! 네가 멋대로 착각한 거지!!”
“채팅에선 맨날 음슴체 쓰고, 하는 짓은 나랑 맞먹을 정도로 괄괄한데 어떻게 여자인 줄 알라는 건데!”
“여성성 없어서 미안하네! 왜? 오빠라고 불러주리!?”
“ㅈ까, 새꺄! 너한테 오빠 소리 듣는다니! 상상만 했는데도 지금 내 팔뚝에 소름 돋아 난 거 안 보여!?”
“추위 탓이잖아! 나 때문에 생긴 것처럼 말하지 마!!”
“반절은 네 책임이야!!”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캐릭터들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끼어들어서 말릴 만큼 심각한 다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칠 생각을 안 하지 않으니 듣고 있는 입장도 뻘쭘한 것도 사실이었다.
레반이 슬쩍 레아에게로 이동하며 물었다.
“혹시 평소에도 저런 분위기냐?”
“……응.”
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해 보이는 말다툼에 어이없을 법도 하지만, 레아의 표정은 그리운 것을 보았다는 듯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런 레아의 변한 모습이 너무 낯선 나머지, 레반도 레테라도 기겁하며 슬금슬금 거리를 벌릴 정도였다.
한편, 그리운 감상에 젖어 있는 건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스콜은 레아와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의 다툼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던 하티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건 덤이다.
“이건 뭐죠……. 조금 전까지 주인님은 친구분과 만나게 되면 다시 싸우게 될지 모른다면서 계속 고뇌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밍기적 대다가 결국 이렇게 해가 져서야 겨우 도착한 거잖아요? 그런데 다툰다는 게 겨우 이런 거예요?”
걱정해서 손해 봤다는 듯이 말하는 하티를 향해 스콜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장난이다. 서로를 인정하기에 칠 수 있는 장난이지.”
그렇게 말하는 스콜의 모습은, 그리웠던 기억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로 일부러 ‘역린’을 피하고 있는 거다. 그 주제로 대화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역린?”
“…….”
스콜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사촌 언니가 이 대학교에 다녔거든. 대학 축제 때 놀러 와 본 적이 있어.”
“그래서 이 짝눈 말 동상을 알고 있던 거냐……. 그런데 왜 대학생이냐고 묻는 말에 부정하지 않았어?”
“……나이 얘기로 이어지다가 내가 연하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미리 연상인 걸로 선수 쳐 두면 안 물을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 이상으로 별 것도 아닌 이유였네.”
정문 쪽 말 동상 앞.
그곳에 서서 나와 연성화는 대화를 나누었다.
말다툼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정신없이 말을 이어가다 보니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난 별로 나이 따지는 사람 아니야. 오히려 자기가 나이 많다며 상전처럼 부리는 녀석은 질색이거든.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아.”
“네가 머리를 돌로 찍어버렸다던 중학교 선배 셋처럼?”
“응? 나 그 얘기 했었던가?”
“했었어. 타이탄 길드가 당연한 듯 사냥터를 통제하니까 자기가 겪었던 학교 선배들과 다를 바 없는 놈들이라고 얘기해줬지.”
“아, 기억난다. 그 후에 네가 ‘그럼 그놈들처럼 저 개자식들 대가리 찍어버리려 감?’이라고 말했던가?”
“분한 마음에 했던 말이야. 설마 망설임 없이 네가 ‘콜’이라고 외칠 줄은 몰랐지.”
“너도 군말 않고 따라왔잖아.”
옛날이야기를 하니 너 나 할 것이 없이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걱정했던 그녀와의 마찰은 없었다. 마치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걸, 그동안 계속 피해 다녔나 하며 살짝 후회가 들기도 했다.
“……게임 접은 줄 알고 있었어.”
“나도.”
내가 꺼낸 말에 연성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침울해 보이는 표정.
역시 그 당시의 기억은 나나 그녀에게나 좋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난 한동안 SoR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엄청 하고 싶어지더라. 그런데 레아로 플레이하려는데 기분이 좀 찜찜해서 캐릭터를 새로 만들었어. 저기 쟤가 레반이고, 옆에 있는 게 레테라야.”
나는 우리를 배려해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던 캐릭터들을 가리켰다.
연성화가 돌아보자 지목받은 레반과 레테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넌 대학교 가서 하게 됐구나. 난 한 달 정도 안 하다가 하티를 만들어서 접속하게 됐어. 가끔 스콜로 접속해서 네가 접속했는지 확인해보았지만 언제나 미접속 상태더라고. 그래서 나도 네가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어.”
“아, 그래서였구나.”
“응?”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성화 앞에서 손가락을 뻗어 스콜을 가리켰다.
“스콜이 얌전한 거 말이야. 네가 가끔 접속해줬기에 삐뚤어지지 않았나 봐. 난 2년 동안 통 접속하지 않았거든. 그것 때문에 단단히 앙금을 품어서 반항기가 찾아왔어.”
“반항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망할 아버지.”
레아가 불만스러운 듯 말해왔지만, 이전과 같은 사나움은 없었다.
그녀의 가장 큰 마음의 상처였던 연성화와의 관계가 개선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풀린 걸까.
그리고 이쪽의 사정을 잘 모르는 연성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이 문제는 건들지 않기로 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지난번 일은 고마워. 하티를 도와줬다면서?”
첫 번째 이벤트.
하티와 협력해서 사대룡 중 하나인 흑룡의 습격에서 살아남고 그 세계를 탈출한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뭘. 협력해주는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거지.”
“그런 부분에 깐깐한 건 변함없네.”
“남 등쳐먹어서 배불리기 싫은 것뿐이야. 망할 놈이었다면 얼마든지 등쳐먹겠지만 말이야.”
참고로 내가 지금 가장 등쳐먹고 싶은 건 바로 율이었다.
율을 떠올리자니 연성화에 목표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너 율을 쓰러뜨리려 한다며?”
“이 게임의 주최자 말이지? 응. 그놈을 때려눕히고 협박 좀 해줘야 자신이 벌인 짓을 되돌릴 마음이 들겠지.”
율을 때려 눕힌다라…….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겉은 동네 백수처럼 생긴 주제에 그 내면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게임을 끝내는 건 찬성이지만, 율 그놈을 상대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 같지 않아. 이벤트랍시고 사대룡까지 소환하는 미친놈이라고.”
“확실히 흑룡 아그나벨리어스가 나타났다는 소릴 들었을 땐 나도 기겁했어. 그런 괴물을 다루는 녀석을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막막하더라.”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쉰 연성화였지만, 이내 각오를 다지듯 눈을 빛냈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위험한 자에게 이 세계에선 허용되지 않는 무력이 넘어갔을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해서든 이딴 웃기는 게임을 끝내주겠어.”
“……역시 너도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응? 그런가?”
본인은 잘 모르겠다는 듯 연성화는 멋쩍게 뺨을 긁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응?”
내밀어진 휴대폰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연성화에게 말했다.
“번호 찍어봐. 방법이 어찌됐든 최종 목적지가 같다면 서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겠지.”
“동맹하자고?”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 싶은 사람과는 다 하고 다니는데? 이미 두 사람 발견했어. 마찬가지로 ‘이 새끼만은 족치고 만다’ 싶은 녀석도 둘 있지만, 그놈들은 아직 못 찾았고.”
게임 감각으로 사람 죽이고 다니는 싸이코패스 새끼와 첫 이벤트에서 봐줬더니 뒤통수를 친 돼지 새끼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런 내 표정에서 꽤 여러 일들을 겪어온 것이라는 걸 안 연성화는 조용히 휴대폰을 받았다.
키패드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에 손을 대자 그녀의 주머니에서 ‘부웅!’하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자.”
연성화가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우리는 휴대폰에 찍힌 전화번호에 상대방 이름을 적으며 연락처에 저장했다.
생각해보니 내 휴대폰에 여자 전화번호를 적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대상이 동고동락을 함께한 게임 친구라는 사실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캐릭터들이 있는 쪽에서 레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뭐하는 거냐?”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이쪽을 바라보지 못하는 레아와 스콜,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나머지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순정 만화 속 최애 남녀 주인공들끼리 갈등 끝에 화해해서 감동 먹은 것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우리 주인님이 가끔 그러시거든요.”
“하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렴.”
살짝 달아오른 얼굴의 연성화가 가볍게 입을 놀리는 하티를 타박했다.
자신의 취미를 들켜 자리를 피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밤이 늦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떠나려는 발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우린 이만 가볼게. 우리 집은 신월시라서 슬슬 가보지 않으면 밤늦도록 돌아다닌다고 부모님께 잔소리 듣거든.”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내 게시글을 발견하고,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도 안 서면서 신월시에서 먼 이곳까지 온 걸까.
연성화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조심해서 가라.”
“그리고…….”
“……?”
스콜과 하티를 데리고 떠나려던 연성화가 갑자기 발을 멈춘다.
뭔가 망설이는 듯이 우물쭈물 거리는 어깨.
그러나 역시 말해야겠다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때의 사건은…… 이제 신경 안 써. 분명 너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난 괜찮아. 그러니 아무 말 안 해도 돼.”
“………….”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낀다.
조금 전까지 훈훈했던 감정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사라져버린다.
분명 그녀는 그 말이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한 말이겠지.
나와 화해하기 위해선 분명 그 과거를 딛고 걸어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오판이었다.
연성화가 디딘 건 나아가기 위한 과거의 발판이 아니었다.
그건 역린이었다.
서로 건들지 않도록 피해왔던 것을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보란 듯이 밟고 말았다.
“잠깐 기다려.”
떠나가려는 연성화 일행은 잔뜩 가라앉은 내 목소리가 가로막는다.
거기에 담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인지, 이쪽을 돌아보는 연성화의 표정이 경직됐다.
그녀만이 아니라 주변의 캐릭터들도, 특히 레아와 스콜의 표정이 가장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너…… 아직도 내가 ‘멸신검(???)’을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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