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32화 (132/173)

〈 132화 〉 결별의 이유 ­ 2

* * *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며, 사는 곳도 모른다.

알고 있는 건 게임 내의 캐릭터 너머로의 모습뿐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거짓이 아니었다.

근 1년간의 교류로 녀석과 나는 신뢰를 쌓았다.

녀석과의 대화는 현실 그 누구와 대화하는 것보다 즐거웠고, 녀석과의 모험은 현실 그 어떤 오락보다 짜릿했다.

그러나 결국 진짜 모습도 모르고 만나던 온라인상이라는 관계성의 한계였을까.

익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이중적으로 만드는지를 간과한 거였을까.

그 신뢰라는 것은 사건 하나로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멸신검’이라 부르는 게임 아이템이었다.

***

“멸신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레테라가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레반도, 하티도 의문스러워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전부 그 사건 이후에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다.

나나 연성화나 그 사건을 떠올릴 만한 건 가급적 피해 다녔으니 모르는 건 당연하다.

그 이름에 반응하는 건 레아와 스콜이었다.

단어만으로 안 좋은 기억이 자극받은 건지 두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아버지.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이렇게 겨우 다시 만났는데 얼굴 붉힐 필요 없잖아.”

“그만 돌아가시죠, 아가씨. 지금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봤자 좋을 건 없습니다.”

레아와 스콜은 신호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맞은 것처럼 나와 연성화에게 일단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레아……. 네가 이 말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는 건도 알지만, 분명히 말해야겠어.”

나는 레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넌 끼어들지 마. 이건 나와 저쪽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야.”

“읏…….”

레아는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내 독이라도 삼킨 것처럼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처럼 억지를 부려봤자 오히려 상황만 악화될 거라는 걸 내 눈빛을 보고 안 것이다.

침묵하는 레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연성화를 바라보았다.

막 떠나려던 참이던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이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줄게.”

“아가씨.”

“스콜. 너도 빠져 있어.”

레아와 마찬가지로 스콜도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물러났다.

다시 나와 연성화가 눈을 마주한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더 이상 없었다.

마치 추리소설에서 자신들 사이에 살인마가 섞여 있다는 소릴 들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로 상대에 대한 의문과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말하려는 건 변함없어. 난 이제 더 이상 멸신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 굳이 그 사건 얘기는 꺼내지 않아도 돼. 나도 꺼내지 않을 테고, 그러면…….”

“그러니까 왜 내가 멸신검을 가져갔다는 게 전제냐고?”

더 이상 못 들어 줄 것 같아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이 누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남에게 용서받는 듯한 소리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때도 지겹도록 말했지? 난 멸신검을 가져가지 않았어.”

“나도 키보드 버튼이 부러질 때까지 설명했을 텐데? 나도 멸신검을 가져가지 않았어.”

똑같다.

결국 그때와 똑같은 흐름으로 돌아왔다.

연성화와 내가 결별했던 그 당시처럼.

그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레반과 하티가 분위기 완화를 위해 슬쩍 끼어들었다.

“저, 저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고, 뭣 때문에 싸우는 건지 저희도 좀 알 수 있을깝쇼?”

“그, 그래요! 일단 저희도 좀 알자구요! 그렇게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다 보면 분명 원만한 해결책을…….”

““너희도 빠져 있어!!””

“죄, 죄송합니다…….”

“히잉…….”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레반이 혼이 잔뜩 난 강아지처럼 물러났고, 하티는 아예 두 눈에 물방울을 달고 있었다.

방해꾼을 치워내고 나는 연성화를 돌아보며 외쳤다.

“말이 안 되잖아! 멸신검을 가져갈 수 있는 건 너와 나, 둘 중 하나였어! 하지만 멸신검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누군가가 가져간 뒤였다고!”

서로 자신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두 사람.

그러나 사라져버린 물건.

모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 탈출로 없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언급하지 말자고 한 거야! 어차피 그때의 말다툼만 되풀이 될 뿐인 테니까! 그냥 없었던 잊어버리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잖아!”

“예전처럼 지날 수 있다고? 헛소리 마! 그 관계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간 게 아니야! 예전처럼 서로 웃고 떠들더라도, 네 마음에 아직도 내가 멸신검을 가져갔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건 언젠가 터져버릴 폭탄으로 돌아올 거라고!! 너도 마찬가지 아냐!?”

“그럼 어쩌자는 거야! 답이 안 나오는 싸움만 계속 하겠다고!? 그냥 인정만 하면 되잖아! 한마디만 해줘! 내가 가져갔다고! 난 널 용서할 수 있어! 그럴 각오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웃기지 말라고!!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다툼이 격해지려는 그 순간, 두 명의 그림자가 끼어들어 서로의 시야를 차단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레아와 스콜이었다.

이 점은 과거와 달랐다.

우리가 싸우는 걸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게임 속과 달리, 지금은 격해지려는 우리를 말리려 두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하자, 아버지. 난 이런 꼴을 보려고 억지를 부려온 게 아니야.”

“이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습니까, 아가씨.”

그들에 의해 우리의 흥분도 한층 가라앉았다.

나는 조금 냉정을 되찾은 머리로 레아에게 말했다.

“레아, 네가 말해줘. 게임 속의 기억이 있을 거 아냐? 내가 너를 움직여 멸신검을 가져가기라도 했어?”

“스콜.”

너도 답해달라는 듯 연성화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를 바라보던 레아와 스콜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쪽은 가져가지 않았어.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해.”

“이쪽도 마찬가지다. 멸신검은 손에 댄 적도 없어.”

결국 도돌이표였다.

기대했던 두 사람의 말도 상황을 반전시킬 요소가 없었다.

한 번 꺾인 싸움의 열기를 다시 불태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쉬었고, 연성화 또한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말없이 걸어가는 연성화의 모습에 스콜은 이쪽을 힐끔거리다, 하티는 꾸벅 허리를 숙이다 서둘러 그녀를 뒤따라갔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아 봤자 방금 전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 말고 더 있겠는가.

“……만나러 오는 게 아니었어.”

연성화가 떠날 때 중얼거리는 말이 가슴 속으로 고통스럽게 틀어박혔다.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앞서서 걸어가는 나는 물론이고, 뒤따라오는 레 씨 삼인방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레아는 평소에 기색은 어디 가고 시무룩해진 상태였다.

시간이 꽤 지났고, 자신도 있으니 이번에 만나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온 건 2년 전 그날의 싸움을 재현한 것뿐이었다.

레반과 레테라가 침묵을 지키는 건 아직 사정도 모르겠거니와, 레아와 마찬가지로 시무룩해 보이는 날 배려한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이쪽 사정에 끌려다녀 중 녀석들에게도 설명해 줄 의무가 있겠지.

“‘파천뇌황(???)의 멸신검(???)’……. 그게 그 아이템의 이름이야.”

앞서 걸어가던 내가 문뜩 이야기를 꺼내자 레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의아해하면서도 귀담아들었다.

“파천뇌황이라면…….”

“……그 하늘을 누비며 대륙 전역을 떠돌아다닌다는 레이드 몬스터 말인가요?”

“그래. 썬더 버드 군단을 이끌고 하늘을 누비며 틈만 나면 지상에 벼락을 떨구는 그 민폐 레이드 몹 있잖아.”

파천뇌황은 한 곳에 자리를 트는 일반적인 레이드 몹과 달리 대륙 전체를 활동영역으로 삼는 몬스터다.

만나기도 어려워서 녀석과 싸우려면 복잡한 녀석의 이동 경로를 계산하고 미리 다음 이동 장소를 선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까다로운 몬스터다.

그렇게 고된 과정 끝에 녀석과 마주하게 된다고 하여도, 강하기는 또 오질나게 강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사대룡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토벌은 불가능하다.

체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레이드 보상만을 남긴 채 하늘 저편으로 달아나 버린다.

부상이 부실한 건 아니지만, 파천뇌황을 찾아내고 싸워 이기는 데 들인 공을 생각하면 짜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고인물 유저도 파천뇌황은 수고스러움을 견디면서까지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몬스터다.

“너희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별의별 몬스터나 강자들에겐 주져 않고 파천뇌황은 항상 피해 다녔으니까.”

“그건 그랬습니다.”

“마치 마주하기도 싫다는 듯 흔적만 보여도 자리를 떴었죠.”

“멸신검을 만들기 위해 녀석과 싸우러 다녔었거든. 연성화와 함께 말이야.”

““……!””

놀라는 레반, 레테라에게 나는 게임 공략법 읊어주듯 담담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다른 유저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나와 연성화가 갖은 노력 끝에 발견한 무기 제작 퀘스트였다.

“하늘의 여왕 인연 퀘스트와 로드제란의 신공(??) 에이드멀의 연계 퀘스트를 수행하면 파천뇌황에 대한 언급을 얻을 수 있어. 그 이후로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파천뇌황과 다섯 번 이상 마주치고, 연속으로 격퇴를 성공시켰을 때. 에이드멀에게서 겨우 파천뇌황이 과거에 사용했다던 멸신검에 대한 언급을 들을 수 있지. 그것을 만들어주겠다는 퀘스트와 함께.”

퀘스트를 얻기 위해 파천뇌황과 다섯 번은 싸울 필요가 있었는데, 정작 얻게 된 퀘스트의 내용은 그보다 더 했다.

오로지 파천뇌황과 싸우면서 얻을 수 있는 소재 아이템을 필요로 했으며, 그것을 다 모으기까지 녀석과 족히 100번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전대륙을 돌아다니는 녀석을 쫓아 싸우고, 그것을 100번이나 반복 한다? 레이드가 100% 성공할 리 없으니 횟수는 더 증가할 것이다.

웬만한 고인물은 도전할 엄두도 못 낼 하드코어 퀘스트였다.

“정확히 말하면 신공 에이드멀이 재현하려는 레플리카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파천뇌황의 위용과 제작 난이도, 에이드멀의 손재주를 생각한다면 그건 거의 신화급 아이템일 거라고 확신했지.”

“신화급…….”

“가지고만 있어도 모든 싸움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강력한 아이템 말이군요.”

“그래. 하지만 우린 그걸 사용하려고 만든 게 아니야. 팔려고 만들었지.”

“네?”

“돈이 필요했거든. 그녀의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졌다나봐. 그래서 수술비 때문에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졌다며 당분간 게임을 못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 난 도와주고 싶었어. 그녀와 함께 게임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고. 그래서 막 얻게 된 멸신검 제작 퀘스트를 그녀와 공유한 거야.”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가 마니아들에게만 인기 있는 장르라고 해도 거기에 목숨 거는 사람은 분명히 있었다.

그중에는 돈을 써서라도 자기 캐릭터의 위용을 높이고 싶은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올라온 SoR의 신화급 아이템이 어느 헤비 유저에게 15억에 팔린 건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원래는 이런 건 잘 공유하지 않아. 신화급 아이템 제작 퀘스트라니, 소문만 흘러나가도 뭐 좀 빼먹으려는 날파리들이나 악질 트롤러들이 한가득 몰려들 테니까. 하지만 같이 길드를 만든 그녀는 믿을 수 있었어. 그래서 그 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천뇌황 레이드에 몰두했지.”

“…….”

일정하게 이어지며 내 뒤를 따라오던 레아의 발걸음 소리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잠시 떠오른 옛기억에 몸을 맡기는 것일까.

“결국 재료를 모두 모았어. 신공 에이드멀에게 제작을 맡겼고, 완성까진 현실 시간으로 3일이 걸린다고 했지. 나는 퀘스트를 끝마쳤다는 달성감에 취해서 한동안 SoR를 켜지도 못한 채 푹 잠들었어. 그동안 소홀히 한 현실 문제들도 정리했고. 그렇게 3일이 흘렀고, 나는 완성된 멸신검을 찾아가기 위해 신공의 대장간을 찾아갔어.”

잠시 한숨을 쉬고, 나는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멸신검은 누군가 이미 가져간 상태였어.”

대장간에서 에이드멀과 만났을 때 들은 건, 이미 가져갔지 않느냐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멸신검을 받지도 않았건만 퀘스트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멸신검을 가져갈 자격이 되는 건 같은 퀘스트를 공유한 길드원뿐이야. 난 그녀가 먼저 가져간 건 줄 알았어. 하지만 ”

가져갈 수 있는 용의자는 둘 뿐.

그리고 그들은 서로 자신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결말은 하나뿐이다.

의심과 불신, 그리고 배신감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꾸민 악질적인 함정에 빠진 것처럼,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구도에 빠져 있었다.

“난 멸신검을 판 돈으로 그녀 어머니의 수술비에 보탤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녀가 멸신검을 가져갔다고 생각한 난 돈을 독차지하고 싶었냐고 성을 냈지. 그녀는 반대로 좀 더 편하게 아멸신검을 제작하기 위해 수술비를 핑계로 나를 이용한 거냐며 화냈어. 우리는 그렇게 틀어지게 되었지.”

………….

침묵이 거리를 감싸는 것처럼 느끼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나도, 레아도, 레반도, 레테라도, 그 이야기의 앞에서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처음엔 믿고 싶지 않았어. 상대를 오랫동안 봐 왔으니까. 내가 봐온 녀석이라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그녀가 가져간 것 이외에 멸신검이 사라질 만한 경우가 있는지 샅샅이 조사해봤어. 그래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내가 몽유병에 걸려 잠결에 멋대로 버려버린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니까?”

하하……. 하고 건조한 웃음이 울린다.

나를 따라 웃어주는 이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재미없는 농담이긴 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상대가 훔쳤다는 생각만 더 선명해졌지……. 그랬더니 내가 믿어왔던 그녀의 모든 것이 전부 거짓이 것 같아서 무서워졌어. 그래서 생각하는 걸 그만뒀어. 녀석을 믿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만나려 하지 않은 거야. 그냥 내가 알지 못하는 게임 시스템으로 아이템이 저절로 소멸해버렸다는 걸로 넘기고 싶었던 거지.”

말이 안 된다는 건 안다.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

그 게임은 놀랍도록 버그가 없는 게임으로 유명했다.

핵과 같은 부정행위는 할 수도 없었고, 핵 프로그램을 만들려 시도해 본 해커들은 사람이 이해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지 않은 사차원적인 게임 코드에 꺾여 나갔다고 한다.

소문으로는 크틀루 신화에서 외래신의 언어를 접해버린 인간마냥 서서히 미쳐갔다고 하던가.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그 게임 코드를 만든 게 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결국 핵 등의 부정행위는 아니다.

버그는 아니었으며, 그나마 유일했던 가능성인 아이디 도용은 더더욱 아니게 되었다.

아이디가 도용당해 누군가 캐릭터를 멋대로 움직였다면 레아나 스콜이나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결국, 오늘 연성화와의 만남으로 그녀를 향한 의심만 더욱 선명해졌다.

“오랜만에 연성화와 스콜을 만난 건 기뻤어. 분명 기뻤지만…….”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과 슬픔 때문에 도저히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역시…… 만나고 싶지 않았어.”

………….

걸음 소리조차 멎는다.

지금 여기서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위로가 되기커녕 아픔만 자극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북북!

레아는 소매로 북북 문지르며 눈가에 물기를 닦았다. 격정을 참지 못한 아이가 울음을 참는 것처럼.

강한 모습만 보여 오던 그녀로선 드물게 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반과 레테라 어느 누구도 그 모습을 가지고 놀리거나 도발하진 않았다.

아무리 레아를 싫어하는 그들이라도 무례한 것과 양심 없는 걸 구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레반은 내 말을 듣고 정말 연성화가 멸신검을 가져가 놓고 모른 척 한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레테라는…….

“…….”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침묵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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