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캐릭터 원정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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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이미경은 집안에 쎄한 분위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까지는 집에 이사 온 사람이 그녀의 존재 때문에 쎄한 기분을 느꼈으면 느꼈지, 그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이 분위기는 외출했던 신요현 일행이 돌아온 직후부터 이어졌다.
낮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조금 긴장한 것만 빼면 멀쩡해 보였던 신요현은 돌아왔을 땐 무척 침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피곤하니 일찍 잘게. 저녁은 너희끼리 먹어.”
그 말만 남기고 신요현은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남겨진 건 레반과 레테라. 그리고 전에 이미경을 마음대로 부려먹은 경력이 있던 레아였다.
신요현은 그들끼리 저녁을 먹으라 했지만, 애초에 그들이 밥을 먹는 건 그와의 식사 자리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생물학자가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연구하고 싶을 정도로 열량 보존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그들은 그저 거실에 모이기만 했다.
정말로 모여 있기만 한 것이다.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용히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 공간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 보였다.
처음엔 쎄한 정도였는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미경은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쉴 리도 없는 유령임에도 말이다.
‘도망치자.’
이미경은 가만히만 있어도 연옥에 떨어질 것 같은 공간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집안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로 가자.
바로 신요현이 있는 곳이었다.
얼마나 참한 청년이던가.
외모 자체는 평범하긴 하지만 온화하고, 성실하며, 또한 친절하다는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 성격이 괴랄 맞은 이 세 사람과 비교되니 더욱 장점이 부각되었다.
어찌 그런 사람이 이런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위험 인물들을 아래에 두게 된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숨 막히는 공기에서 달아나려면 신요현의 방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기도 거기까진 닫지 않을 테지.
그렇게 결정한 이미경은 슬쩍 천장을 통과해서 윗층으로 이동하려 하였다.
“어디 가냐?”
레테라의 그 목소리만 없었다면 말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미경의 모습을 레테라를 포함한 세 사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저, 그게……. 신요현 님이 저녁을 안 먹으니 마실 거라도 가져다 줄지 물어보려고요!
차마 너희들과 같이 있기 싫어서 도망간다고 말할 수 없는 이미경이었다.
“오라버니는 내버려둬.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테니까. 만약 네가 오라버니를 성가시게 했다간…… 우리도 성불 시켜 줄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약속 못 지킬지 몰라.”
레테라는 천장을 통과하려고 하던 이미경을 가만히 주시하였다.
평소처럼 살기를 뿜은 것도 아니고, 거친 언사를 내뱉은 것도 아니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아무 감정 없이.
신요현의 사적 영역까지 굴러가려는 깡통 한 개를 발견하고 치워버릴 생각 말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문제는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던 레반이나 레아도 똑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미경이 만약 살아 있는 상태였다면 그 집중된 시선만으로 의식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와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자신은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 없는 사람 취급해 달라는 듯이.
그렇게 이미경을 얌전히 만들고, 그들이 있는 공간이 다시 질식할 듯한 침묵에 잠기려는 그때 누군가 침묵을 깨트렸다.
“미안하다.”
그 말을 내뱉은 건 레아였다.
그동안 안하무인처럼 굴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사과에 말이라는 게 놀라운 듯 레반과 레테라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싶었어. 그것 때문에 억지 피워서라도 만나게 했고, 그 결과가 이거야.”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며 레아는 후회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그냥 도망만 다니는 줄 알았어. 그때처럼 나와 스콜을 통한 대화가 아니라 직접 만나서 얘기해본다면 오해가 풀릴 줄 알았지. 하지만 내 착각이었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생각했지.”
관계는 진전되는 듯하다가 틀어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어진 줄 알았던 상처는 2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도망친 게 아니야. 날 찾지 않게 된 이후로도 그녀가 멸신검을 가져가지 않을 가능성이 없나 계속 찾아보고 있었어. 하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의혹은 깊어졌기에 거기서 멈춘 거야. 그녀를 믿고 있던 만큼 눈앞에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레아는 방금 전 이미경이 통과하려고 했던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있는 건 신요현의 방이었다.
침대 쪽에서 자꾸 뒤척이는 소리가 그들에게만 포착될 만큼 희미하게 울린다.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걸 반복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된 건 내 탓이야. 너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할 말 없어.”
그런 요현의 상태가 레아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쑤셔왔다.
사죄하듯 말하는 그녀를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반이 입을 열었다.
“딱히 널 탓할 생각은 없다. ……아마 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뭐?”
“저쪽 세상에서 형님과 함께 여행했을 때, 간혹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을 형님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난 그걸 없애주고 싶었지만, 슬픔의 근원은 알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건드려서 괜히 악화시킬 수 있으니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
“나도.”
잠자코 듣고 있던 레테라가 끼어들며 말했다.
“오라버니 말 안 듣고 억지 부리는 것만으로, 그의 슬픔을 덜어줄 실마리가 생긴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우리가 티격태격 대긴 해도 결국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거잖아.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막나가는 건 거의 유전이지.”
어쩔 수 없는 자신들의 천성 아니겠냐는 듯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말을 레반이 받으며 말을 잇는다.
“결과가 좋지 못한 걸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두고 손 떼겠다고 말하면 그땐 가만 안 두지.”
레반과 레테라의 모습이 짐승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듯 섬뜩하게 변했다.
신요현을 힘들게 한 장본인이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며 포기한다면, 그때야말로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고 말 것이다.
살기 어린 두 사람의 모습에, 차라리 이쪽에 익숙하다는 듯 레아는 살짝 풀어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 상황을 두고 볼 생각은 없어. 하지만 어떻게 할 거지? 이 상황을 원만히 풀어갈 아이디어 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데.”
“우선 이것부터 묻자. 정말로 저쪽이 멸신검을 가져가 놓고 오리발을 내미는 건지. 네 생각은 어때?”
“그럴 리가 없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레아는 딱 잘라서 말했다.
“만약 저쪽이 평소에도 그럴 기미를 보여 왔다면, 나나 아버지나 올 것이 왔다는 듯 상대를 쥐어 패고 결별했겠지. 그렇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고뇌하고 있는 거고.”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커다란 난관에 도전까지, 크고 작은 일을 함께하면서 쌓아온 신뢰 관계.
인간관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신뢰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를 의심하지도, 믿지 못하는 정체 상태를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너나 오라버니나 저쪽에 대한 믿음을 아직 못 버렸단 말이지……. 그래, 좋아. 그럼 저쪽이 멸신검을 가져갔다는 전제는 아예 빼고 시작해보자고.”
연성화 일행과 헤어졌을 때부터, 줄곧 이것만을 고민해온 건지 레테라의 말은 술술 흘러나왔다.
“그럼 남은 전제는 대략 세 가지겠지? 첫째, 오라버니가 알지 못하는 버그가 일어났다. 둘째, 신공 에이드멀이 노망나서 잃어버린 거다. 셋째, 오라버니와 연성화 외의 누군가 가져갔다.”
“난 그 버그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있는 한 거야?”
그들이 있던 세상을 게임이라고 인식하는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시점이다.
엄연히 그곳에서 살아갔던 이들에겐 버그니 핵이니 말해봤자 잘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그들은 경험해본 적 없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버그가 어쩌면 일어났을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대장간의 괴팍한 영감탱이가 노망? 조수 대장장이가 무기 만들 때 실수 하는 모습을 보고 실패작을 들이밀며 어디가 잘못 되었다는 걸 2시간 동안 조목조목 쏘아대는 모습을 내가 직접 봤는데? 그리고 제삼자가 가져갔다는 건…….”
“그 가능성에 확신을 줄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저 양반도 포기했지. 애초에 다른 용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레반과 레아의 말을 듣고 있던 레테라는 그게 문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우리는 그 세상의 모든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오라버니도 알지 못하지. 그저 눈에 보이는 가능성만 찾아다니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던 레테라가 손가락을 하나 딱 세우며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모든 가능성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에게 묻는다면?”
모든 가능성을 알고 있는 존재? 그런 게 있을 수 있는가?
플레이어의 시점도, 캐릭터의 시점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있던 그건 신과 같은…….
……거기까지 생각한 레반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팍 구겨졌다.
“그 개자식과 만나는 건 격렬히 사양하고 싶다만.”
“……? 누군데?”
질색하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레반과 달리, 그를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위험도만 따지면 이 세계에서 최고등급으로 위험한 녀석이니까, 녀석과 만나기 위해선 우리도 만반에 준비를 해야겠지.”
레테라는 품 안을 뒤적거리며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들 앞으로 꺼내놓았다.
거기에 적힌 의미 불명의 숫자를 본 그들이 의아함을 드러내자 레테라가 말했다.
“원정대를 모으자.”
***
“여보세요? 오오! 오랜만이구나! 나야 건강하단다. 전에 너희가 주고 간 물건 덕분에 몸이 쌩쌩해졌어. 한 30년은 젊어진 기분이야. 뭐? 도움이 필요해? 신요현 그 청년을 위한 중요한 일? 그렇다면 빠질 수 없지. 지그문트!”
“아니, 주인. 갑자기 온 연락을 냉큼 수락해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예끼, 이놈아! 생명의 은인이 곤경에 처했다는데 뭔 말이 그리 필요해! 냉큼 짐 싸서 다녀와!”
강원도 한적한 산골 마을에서.
“네!? 갑자기 도와달라뇨!? 저는 내일 범석 씨와 중요한 약속이……. 아니, 그렇다고 제가 한 짓을 잊은 건 아니지만……. 아, 알았어요! 갈 테니까 협박하지 마세요! 헬스클럽도 모자라서 주거지까지 박살 나면 저와 범석 씨는 거리에 내앉게 된다구요!”
무재시 한 아파트에서.
[띠리링]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의 집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착신음을 울리는 휴대폰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하티였다.
외출해서 신요현 일행을 만나고 돌아온 연성화는 빨리 씻고 자고 싶다며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에게 새 옷을 건네주러 온 하티가 그것을 발견했다.
쏴아아아…….
샤워 소리 때문에 연성화는 착신음을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혹시 중요한 전화일지 모르고, 아니라면 지금 주인이 샤워 중이니 나중에 연락해 달라고 하티가 대신 알려주려 휴대폰을 집었다.
“응?”
그런데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 번호가 그녀가 평소 알고 있는 전화번호와는 달랐다.
하지만 이쪽 세계의 전화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하티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이 휴대폰의 주인은 통화할 수 없는 상태라 나중에…….”
[아, 여보세요? 뭐야. 그 사람이 받을까 했는데 네가 받았구나?]
그 목소리, 기억하고 있다.
틀림없는 레테라의 목소리였다.
“레테라……? 무슨 일인가요? 주인님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고.”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 우리 오라버니의 휴대폰으로 걸면 괜히 신경 쓰이게 할 거 같아서 공중전화로 걸었는데, 괜한 짓 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고맙네요. 휴대폰 화면에 신요현 씨 이름이 떴으면 저도 살짝 패닉이 왔을 거예요.”
하티는 휴대폰을 가지고 샤워실에서 멀리 떨어지며 말하였다.
무슨 용건으로 연락한 건지 모르겠지만, 신요현 본인도 아니고 레테라가, 그것도 공중전화로 연락했다는 말에 비밀스러운 용건이 있음을 직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너, 우리 오라버니가 멸신검을 가져갔다고 생각해?]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져가고 말고 상관없이 감히 우리 주인님을 힘들게 한 값을 톡톡히 받아내겠지만.”
훌륭한 광신도의 표본 같은 말을 하던 하티는 이내 진정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신요현 씨를 직접 만나봤어요. 주인님의 친구 분이었다는 걸 알기 이전부터. 비겁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하던 그의 고집과 강직함을 직접 보고 느꼈고요.”
흑룡에게 전멸하기 직전임에도 끝까지 하티 몫의 티켓을 가져가지 않으려 했던 신요현의 강직함이 하티에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신요현 씨가 가져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님이 가져갔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그건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건 장담할 수 있어요.”
[잘 됐네. 나도 그쪽이 가져갔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것만 가지곤 이 문제는 제자리만 맴돌 뿐 영원히 풀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만한 놈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쉽게 만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서 도움이 필요해. 좀 도와주겠어?]
“실마리요? 누굴 만나러 가는 건데요?”
[너도 알고 있는 놈이며, 이 사건에 관여되어 있지 않더라도 진실은 알고 있을 게 분명한 녀석.]
“……?”
그것만 가지고는 연상되는 인물이 없는지 하티는 의문을 표하자 레테라가 살짝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네 주인의 알몸을 봐 놓고 가슴이 D컵 이하로는 여자로 안 본다며 비웃던 그 천하의 쌍놈새끼 말이야.]
“율……!!”
율을 만나러 갈 것이니 도와달라는 레테라의 제의를 하티는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주인이 여자로서 당한 모욕을 잊지 않은 하티의 두 눈이 광신도 특유의 그것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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