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캐릭터 원정대 3
* * *
자고 일어나니 시계는 오후 1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밤새도록 침대 위에서 뒤적거린 끝에 이 꼴이다.
어느샌가 겨우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땐 점심을 막 지난 시점이었다.
“어이가 없네.”
비루한 꼬락서니의 자신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게임 하나에 광적으로 빠져 살던 그때가 더 성실했을 것이다.
수면 부족이나 학업 문제가 게임 활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계보다 더 정확한 시간 배분에 정성을 쏟았으니까.
정신 차리자.
연성화와의 재회가 의도치 않은 심란함을 가져왔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녀에 대한 문제를 접어두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세수하듯 얼굴을 문지르는 것으로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낸 나는 옷을 적당히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
방을 나서자마자 매케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무언가 타는 냄새와 톡 쏘는 듯한 독특한 냄새가 섞여 1층에서부터 올라왔다.
서둘러 냄새를 따라 1층으로 부엌으로 향한다.
“간장이 이거라고? 그럼 내가 넣은 건 뭐야? 까나리 액젓? 둘 다 짠맛 나니까 상관없지 않아? 아니면 아닌 거지, 소리는 왜 질러!!”
부엌에는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다 대고 말을 거는 레아의 모습이 있었다. 아무래도 유령인 이미경과 대화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엔 펄펄 끓으면서 수상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냄새가 놓여 있었다.
벽과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에서 튄 듯한 얼룩이 가득하다.
엉망인 건 그곳만이 아니었다.
각종 조미료 등으로 엉망이 된 식탁은 차라리 얌전한 거고, 야채를 썰었을 터인 식칼은 어찌 된 영문인지 도마와 싱크대까지 함께 썰어버린 상태였다.
흐윽!
어디에선가 들린 이미경의 귀곡성이, 이 이상 집이 망가지기 전에 제발 말려달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다 못한 내가 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뭐해?”
“아, 왔어, 아버지?”
이미 내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는지 뒤에서 다가온 내게 놀라지도 않고 레아가 말했다.
“일어나면 출출할 거 같아서 먹을거리 좀 만들고 있었어. 된장찌개라는 거 좋아한다며? 레반 녀석이 요리하다 정 안 되면 마법에 가루를 쓰라고 했는데, 어떤 거야? 이건가?”
“확실히 후추가 옛날 서양에서 황금과 동급으로 귀했다는 얘긴 있지만, 그렇다고 마법은 아니야. 그리고 그 마법의 가루라는 말을 들으면 예전 트라우마가 재발할 것 같으니까 다신 하지 마.”
“……?”
마약인 줄 모르고 찍어 먹었다가 쇼크로 황천 갈 뻔한 사건을 모르는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작가 한숨을 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엌이 전쟁터가 됐긴 했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레반과 레테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갔어?”
“저들끼리 훈련하러 갔어. 금방 오겠지.”
레아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냄비를 국자로 휘적거린 채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훈련?
확실히 그들이 날마다 훈련하러 나가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침 일직부터였고, 동시에 아침 일찍 끝냈다.
점심이 지난 후로도 돌아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허나 레아는 그 점에 대해 설명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 다 됐으니 먹어봐!”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식탁 위를 대충 치우고, 펄펄 끓는 냄비를 맨손으로 잡아 식탁으로 옮겼다. 뜨겁지도 않나.
어째 화제를 돌리려는 것 같은 레아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냄비가 올려진 식탁 앞에 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준 정성이 있는데 안 먹겠다며 사양할 순 없었다.
부엌 상태를 보면 정상적인 음식은 아닌 것 같지만, 설마 못 먹을 정도는 아니겠거니 하며 냄비 뚜껑을 연다.
“……레아.”
“응?”
“왜 된장찌개가 보라색이냐?”
받아드릴 수 있는 형태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도무지 레아표 된장찌개를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라면으로 때우기로 했다.
“맛있을 텐데…….”라며 토라진 듯 된장찌개를 한 입 먹어본 레아는 그것을 냄비째 창밖으로 집어던졌고, 그런 그녀에게 내가 끓인 라면을 나눠주었다.
라면은 맛있게 잘 먹었다.
그렇게 레아와 둘이서 라면을 다 먹을 때까지도 레반과 레테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놈들 진짜로 어디 간 거지?
***
부우우웅…….
오서연은 언제나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 위에서 변하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점점 올라가는 층수가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져 몸을 굳게 만든다.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이었다.
율에 의해 어쩌다가 입사하고 첫 출근 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마치 활짝 열린 괴물의 입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
물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최근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이름뿐인 사장의 이름뿐인 비서로 일한 지 어언 3년째.
이제는 율이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칠 생각 없이, 정말로 비서로서의 이름을 지니고 있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상사가 다른 곳에선 온갖 미친 짓을 벌이고 다니는 괴물이지만, 직장 자체만 보면 편한 곳이다.
그렇다면, 그런 편한 직장에 들어가는 데 어쩌서 이렇게 긴장이 된단 말인가?
그것은 회사 건물 앞에서 마주친 사람들…… 정확히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들 때문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오서연 씨.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금색 눈동자와 은발을 뒤로 묶어 여우의 꼬리처럼 늘어뜨린 여성.
이름은 레테라라고 했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그녀와의 대화를 회상했다.
아까 설명 드린 대로 저희 오라바니, 신요현은 지금 무척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어요. 친구와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쥐고 있을 인물은 현재로선 그쪽의 사장, 율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오서연도 잘 알고 있는 신요현. 그리고 그의 옛친구인 연성화의 사이를 어지럽히는 갈등 하나.
그들의 캐릭터들은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기 원했다.
오라버니와 연성화가 싸우게 된 사건의 진실을 알아 와 주세요. 멸신검을 가져간 게 누군지만 알아도 상관없어요. 우리에겐 그놈의 대답이 필요해요.
게임 플레이어 개인 간에 일어난 문제이다.
게임 회사 직원이라고 모든 플레이어의 게임을 모니터링할 수도 없을뿐더러, 혹여 남아 있을지 모를 로그조차 서버실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율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수백, 수천 명의 플레이어의 게임 내 행적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 정도로 율의 근원은 알 수 없고,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그의 능력은 경외심마저 생길 것 같이 상상을 초월한다.
만약 율이 가르쳐주지 않는다면요?
그러나,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행동을 보여 올지 또한 전혀 예상 수 없었다.
정답 페이지가 찢겨나간 소설 페이지 내용을 스포 하는 것처럼 술술 말해줄지 몰랐고, 반대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제 손에만 진실을 쥔 채 가르쳐주지 않을 가능도 농후했다.
오로지 이쪽을 약 올리기 위해.
오서연이 본 율은 그러고도 남을 작자였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아요.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ㅣ지 끈질기게 물어봐 주세요.
하지만…….
저희 또한 끈질기게 당신에게 부탁드릴 겁니다.
덥썩! 하고 그때 레아는 오서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도 오서연의 어깨에 선명한 주름을 남아 있을 정도로 손에 꽉 힘을 주던 그녀가 말했다.
출근길에서 만나서 부탁드릴 거고, 퇴근길에서도, 외식하러 갈 때도, 휴가라서 놀러 갈 때도, 집에서 쉬고 있을 때도 찾아가서 간곡히 부탁드릴 겁니다. 설사 저희를 피해 율의 건물 내부에 숨는다고 해도 출입구 앞에 떡하니 자리 잡아 당신이 나오길 계속 기다릴 거고요.
협박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줄 알았더니 도움을 거절하는 선택지는 미리 배제한 강권(?)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들을 제법 오래 지켜봐 왔기 때문에, 이럴 때 필요한 특효약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녀의 호주머니 속 휴대폰엔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신요현의 전화번호가…….
참고로 이번 일은 오라버니께 절대 비밀입니다. 만약 알리겠다면…… 친밀한 저희 사이가 많이 틀어지게 되겠지요.
그 순간 본 레테라의 눈빛은, 하마타면 선 채로 지려버릴 뻔했을 만큼 싸늘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요현이라는 비장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마저 차단해버렸다.
결국 오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오서연은 사장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타박타박 걸었다.
장식품은커녕 벽에 심플한 무늬 하나 없는 삭막한 복도를 걷는 오서연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아는 율이라면, 역시 쉽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율이 어떤 놈인가.
인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을 극한까지 괴롭히는 걸 즐기는 미친놈이다.
바라는 게 있을수록, 그것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는 절대 원하는 걸 손에 쥐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서 가져가 보라는 듯 눈앞에서 대놓고 흔들며 약 올리는 게 바로 율이다.
‘힘겨운 싸움이 되겠어.’
어느새 사장실 문 앞에 선 오서연은 긴장된 한숨을 쉬었다.
캐릭터들의 간절한 염원이 그녀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쥐고 협박하는 오서연의 평온한 일상이 매달려 있는 것이지만!
똑똑!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들어가기 전에 문을 두드렸다.
이름뿐인 직책이라고 해도 오서연의 위치는 비서.
비서로서의 최소한의 자세를 내보이지 않았다간 율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랐다.
설령 항상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작은 노크 하나가 오서연에게 주어진 중요한 의무였다.
“들어갈게요.”
달칵.
문밖에서 안쪽에 말한 뒤, 손잡이를 돌렸다.
도대체가 사장실인지 감옥인지 알 수 없는 삭막한 풍경에 시야에 들어온 그 순간이었다.
휘익.
그 시야 속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공중에서 회전하는 직육면체의 물체.
그것이 자신의 얼굴로 떨어진다는 걸 느낀 오서연은 황급히 두 손을 올렸다.
“꺄악!?”
덥썩!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보호한다는 조건 반사가 전부였다.
그런데 날아온 물체가 오서연의 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자리하려 했다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 이게 무슨……?”
황당해하는 오서연은 손아귀에 붙잡힌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스마트폰보다 조금 큰 크기의 직사각형 금속.
두께는 평소 오서연이 읽고 다니는 책과 비슷했고, 무게는 훨씬 묵직했다.
금속 물체를 뒤집은 그녀는 표면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100기가짜리 하드디스크?”
물건에서 눈을 뗀 오서연이 물건을 던진 자를 돌아보았다.
느닷없이 하드디스크 던진 율은 평소와 같이 사장용 의자 위에 누워 뒹굴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 너와 저 밖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멍멍이 원정대가 그토록 원하는 ‘대답’이지.”
역시 율은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캐릭터들이 팀을 꾸려 왔지만, 율이 준비한 방법 시스템을 돌파할 가망이 보이지 않아 주변만 맴도는 것부터, 그런 그들에게 부탁을 받고 온 오서연까지.
오서연이 물을 질문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이 하드디스크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데요?”
“게임.”
의자에서 뒹글거리던 율이 오서연 쪽으로 빙글 몸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가 들어 있지. 확장판 이전의 오리지널 버전 그대로.”
“네? 하지만,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는 이미 서비스 종료했잖아요? 서버 컴퓨터도 날아갔는데…….”
“너 바보냐? 게임에서 튀어나온 녀석들과 실제로 만나고 대화까지 했으면서 아직도 이게 0과 1로 이루어진 게임이라고 믿고 있어?”
아무리 오서연이 기가 세지 못한 성격이라도 면전에다 내뱉은 바보라는 소리가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살짝 울컥하긴 하지만, 율이 이런 식으로 신랄한 소리를 내뱉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잠자코 들었다.
“서버도, 게임도, 그저 연결선일 뿐이야. 필요한 놈만 빼 오고, 서비스 종료하며, 서버까지 날려버린 지금도 글레이그 대륙은 여전히 존재해. 현재로선 그 하드디스크 안에 담긴 게 내가 남겨놓은 글레이그 대륙과의 유일한 연결선이야.”
오서연은 다시 하드디스크를 바라보았다.
마법 세계로 가는 통로도 아니고, 진짜 신화와 전설들이 형상화되어 날뛰는 세상과 이어진 통로가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오싹하게 다가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100기가 하디스크 안에 말이다.
“진실을 알고 싶다며? 그건 이전 게임 환경 그대로를 구현해 놨어. 직접 게임 시스템을 살펴가면서 확인해봐. 신요현과 연성화, 레아와 스콜 중 누가 멸신검을 가져갈 수 있는지. 혹은 제 3자가 가져갈 수 있는 게 맞는지.”
“……정답은 있는 거예요?”
“적어도 난 출구 없는 미로를 풀어보라면서 던져주지는 않지.”
“…….”
다시 한 번 하드디스크를 바라보던 오서연이 율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오늘 조퇴해도 될까요?”
“가 봐.”
조퇴 사유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율은 의자 위에서 늘어진 자세 그대로 손을 휘적거렸다.
사장이 심각하게 위험하긴 하지만, 원하는 때에 조퇴도 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정말 신의 직장과 같은 곳이었다.
하드디스크를 레테라 일행에게 전해주기 위해 사장실을 나서려던 오서연은 발음 멈췄다.
상대가 율이었기에 하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고마워요. 이렇게나마 도와줘서.”
끼익. 탁.
그대로 사장실 문을 닫고 가버린 오서연을 향해 율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야 고맙지.”
율에게 이 모든 것은 그저 놀이였다.
동네에서 모인 아이들이 노는 방식이 무엇이겠는가.
한바탕 뛰어다니고 싶으면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고, 숨어 있다가 깜짝 놀래켜 주고 싶으면 숨바꼭질을 하면 그만이다.
첫 번째 이벤트를 치른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다음 이벤트에 대한 예정은 없었다.
율은 이벤트 일정도, 내용도 전혀 정해두지 않는다.
그저 재미있는 생각이 날 때마다 그것을 실행할 뿐이다.
“멍멍이들의 생쇼 덕분에 재미있는 게 떠올랐어. 두 번째 이벤트는 그걸로 해야지.”
나비들이 일으킨 날개짓이 단 한 명에 의해 태풍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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