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글레이그 대륙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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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연의 주거지는 무재시 동남쪽에 위치한 오래된 아파트 단지 중 하나였다.
위드 소프트웨어에 취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통근 시간의 단축을 위해 그곳으로 이사했다.
돈이 없다면 불편하더라도 장거리 통근을 감내했겠지만, 돈은 수상할 정도로 아낌없이 퍼주는 회사 덕에 이사할 만한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과는 따로 살며, 하나 있는 여동생은 지방 대학을 다니고 기숙사 생활을 한다.
즉, 이사한 집은 온전히 오서연의 차지.
어느 여성, 어느 사람이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집과 같은 자신만의 공간에선 누구나 풀어지고야 만다.
깨끗하고 반듯하게 생활하는 것도 처음 하루 이틀이 전부.
귀찮아서 쓰레기나 사용한 물품 치우는 걸 한두 번 미루기 시작하면 끝이었다.
오서연의 집은 어느새인가 좋게 말하면 생활감 넘치는 집으로, 나쁘게 말하면 너저분한 집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하지만 외관이 무슨 상관인가.
본인이 편하면 그만인 것을.
가뜩이나 회사해선 차갑고 도도한 도시 여자 같은 비서의 모습을 유지해야 했기에 이 정도의 일탈은 있어 줘야 했다.
그랬던 오서연의 집은, 최근엔 웬일인지 새집처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집안 정리에 신경 쓰게 된 계기는 율 때문이었다.
평소와 같이 허공에다 대고 깔깔대는 율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무시하고 회사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였다.
율이 문뜩 그녀를 향해 말해왔다.
너의 그 돼지우리 같은 집 좀 치우고 살지 그러냐.
우리 집 왔었어요!?
간 적은 없지만, 누누이 말했다시피 난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남의 집 엿보지 마세요! 치한으로 신고할 거예요!!
어떻게?
어떻…….
오서연은 할 말이 없어졌다.
하루 종일 회사에 처박힌 이름뿐인 사장이 사실 초월적인 존재인데, 그가 자꾸 자신의 집을 엿보단고 경찰에 신고했다간 끌려가는 건 율이 아니라 오서연이었다.
아마도 그대로 정신병원에 처박히겠지.
머리를 감싸 쥐며 끙끙 대는 오서연의 모습을 한심한 듯 바라보던 율이 말을 이었다.
기껏 친절을 베풀어서 충고해주는 거야. 머지않아 너와 깊은 인연을 가진 누군가가 네 집을 방문할 테니까. 추한 몰골은 보이지 싶진 않을 거 아냐?
깊은 인연을 가진 누군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문구였다.
그게 누군데요?
알아서 생각해봐. 난 충고만 해줄 뿐이야.
오서연은 신탁을 받은 무녀처럼 율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깊은 인연을 가진 게 단순히 가족을 가리키는 걸지도 모른다. 그 경우 깜짝 방문한 부모님이나 동생에게 엉망인 집안 꼴을 보일 순 없었다.
혹은 다른 인연을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친구나 옛 동창, 어쩌면 혹시나 훗날 오서연에게 남친이라고 불릴 누군가가 생기는 걸지도 몰랐다.
그날부터 오서연은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율이 말한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 찾아왔을 때 집안 꼴을 보이며 실망시키지 않기 위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날 속였어!!”
하드디스크를 컴퓨터 본체에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오서연은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에 방바닥을 두드렸다.
그녀는 사기당했다.
언젠가 남친이 될 사람이 나타나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의 깜짝 방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서연의 집을 찾은 방문객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근원을 따지고 보자면 인간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이들이었다.
“집이 생각보다 좁네.”
“형님이 집은 잘 산 모양이야.”
오서연의 집을 방문한 레테라와 레반은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구경했다.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 좀 마셔도 되나? 그 회사 던전에서 시달린 터라 목이 마르는군.”
“아! 이 치즈 케잌, 저희 주인님도 좋아하시는 건데!”
지그문트와 하티는 남의 집 냉장고를 멋대로 열어 뒤적이고 있었다.
오서연, 그녀만의 공간이었던 집은 지금 이세계에서 온 방문자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이러려고 그동안 깨끗이 청소한 게 아닌데…….”
“이렇게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오서연이 쭈그려 앉은 채 컴퓨터 본체를 만지고 있을 때 진혜가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철판 깐 다른 캐릭터들과 다르게 그녀만이 이들 중 유일한 양심이었다.
진혜의 플레이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척 선량하고 남을 해치는 것따윈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저도 도울게요. 이걸 잡고 빼내면 되나요?”
“네? 아뇨. 그건 그래픽 카드라고, 만지실 필요 없…….”
빠각!!
플라스틱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픽카드에서 열을 해소하는 팬 날개 중 하나가 진혜의 손에 의해 부러져 나간 것이다.
“…….”
“죄, 죄송해요. 기계 다루는 것엔 젬병이라서…….”
진혜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것 가지고 그래픽카드가 불량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제부턴 컴퓨터를 가동할 때마다 그래픽카드 쪽에서 울리는 팬 돌아가는 소음에 시달릴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선의로 도와주려 했던 진혜를 탓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탓하려 해도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존재 앞에서 막 나갈 배짱이 없었다.
결국 진혜의 도움을 정중히 사양하고 하드디스크에 연결에 힘썼다.
컴퓨터를 조립을 고등학교 친구네 집에서 배워본 게 전부라서 이 단자를 여기에 꽂는 게 맞는지 헷갈렸다.
조립을 이어가던 오서연은 속으로 울먹이며 외쳤다.
‘차라리 억지로 부탁해서라도 PC방에서 해결해야 했어!’
처음엔 집으로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회사에 컴퓨터가 있긴 하지만 캐릭터들에게 직접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일단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나왔다.
하드디스크 안에 담긴 게 SoR의 게임 데이터이고, 이것으로 게임상의 시스템 등을 검증해볼 수 있다는 설명에 그들은 눈이 빛났다.
오서연을 포함한 그들은 곧장 근처 PC방으로 향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사건 외 관계자인 지그문트와 진혜는 빠져도 상관없었다.
위드 소프트웨어로 쳐들어갈 이유가 사라졌으니 무력도 필요하지 않게 됐으니까.
하지만 지그문트와 진혜는 좀 더 레반, 레테라, 하티 일행과 함께 하기로 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확인하려는 SoR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과 주인이 있는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이어졌고, 또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바라보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렇게 이들과 PC방에 도착한 것까진 좋은데, 용도를 알 수 없는 하드디스크를 컴퓨터에 연결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가게 주인이 들어줄 리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SoR 게임을 확인하고 싶은 캐릭터들과 가게 주인 사이에서 싸움이……, 정확히는 일방적인 폭행이 일어날 뻔한 걸 겨우 말린 오서연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달칵.
“후우!”
하드디스크를 새롭게 장착한 본체의 뚜껑을 덮는 것으로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리는 오서연의 모습에서 드디어 준비가 끝냈다는 걸 알아챈 캐릭터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막 컴퓨터 전원을 켜고 하드디스크가 정상적으로 연결된 걸 확인한 오서연은 그들이 부담스러울 만큼 가깝게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건 알아채고 깜짝 놀랬다.
“주, 준비 끝났어요. 바로 게임 파일을 실행할까요?”
“부탁드립니다.”
레반이 대표해서 한 말에 오서연은 캐릭터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도망치듯 서둘러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하드디스크 안에 달랑 하나 들어간 파일 하나.
그것을 더블 클릭하자 모니터 화면이 까매지고 일순 오서연을 포함한 캐릭터들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잠시 뒤, 검은 화면 속에서 오서연의 눈에 익숙한 문구가 떠올랐다.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Souls of Ragnarok)』
‘정말로 남아 있었구나. 완전히 삭제된 줄 알았는데.’
SoR은 오서연도 심심해서 해 본 적은 있었다.
게임 캐릭터가 현실로 넘어올 자격을 갖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척 재미있게 플레이한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 이렇게 익숙한 문구를 다시 보게 되니 반가웠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이 게임이 필요한 건 캐릭터들, 특히 레반, 레테라, 하티 세 사람의 주인들이었다.
오서연은 아이디와 패스워드 입력을 기다리는 로그인 화면에서 떼 그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요현이나 연성화 아이디를 알고 있나요?”
“우리가 알 리 없잖습니까.”
“그, 그럼 전화로 물어보는 거라도…….”
“오라버니가 순순히 알려줄지 의문인데요.”
신요현도 연성화가 멸신검을 가져가지 않았을 가능성을 찾기 위해 별의별 연구와 시도를 해봤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파고들수록 상대에 대한 의심이 심해져서 그 이상 조사하는 걸 그만두었다.
그렇기에 신요현은 다시 게임 시스템을 파헤치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한다고 해도 아이디를 알려주기커녕, 냉큼 돌아오라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었다.
“애초에 아이디라는 걸 입력한다고 해도 게임에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희는 이렇게 현실로 나와 있는데.”
하티가 타당한 의문을 제시해왔다.
아무래도 신요현과 연성화의 아이디로 로그인 하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다른 캐릭터들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럼 일단 제 아이디로 로그인할게요.”
게임을 안 한지 꽤 됐지만 아직까지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까먹지 않고 기억해두고 있었다.
로그인을 하자 캐릭터 선택 화면으로 넘어갔다.
세 개의 캐릭터 슬롯 중 그녀가 만든 캐릭터는 하나였다.
마지막 접속 날짜로 ‘47일 전’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율이 서버실을 날려버리고 모든 일이 시작된 날로부터 47일이나 흐른 것이다.
잠시 캐릭터 슬롯을 바라보던 오서연은 캐릭터들을 돌아보았다.
“자, 로그인 했으니까 이제 플레이하시면 돼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황당함을 담은 레반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들이 마음껏 조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려 했던 오서연이었지만,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응과 시선이 돌아왔다.
그것도 캐릭터 전원에게서.
“네? 하지만 시스템을 조사하려면 직접 플레이를…….”
“당신이 해야죠.”
“……네?”
화면에 떠오른 캐릭터 슬롯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레테라의 말에 오서연은 멍한 소리를 내었다.
“본래의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이 자신을 조작한다는 게 캐릭터에게 얼마나 실례되는 일인지 모르시나요?”
“네, 네에엣!?!”
이어지는 하티의 말에 당황스러움을 절정이 되었다.
실례라니? 캐릭터 간에 그런 예의가 있는 건가?
그전에 캐릭터는 플레이하는 사람이 바뀌면 알아차리는 건가?
“알아차리고말고. 주인이 아닌 자가 나를 조작하려 하면 바로 불쾌감이 밀려든다.”
이전에 그런 경험이 있던 지그문트가 단언했다.
물론 지금은 그 불쾌감을 주었던 사람과 마음을 열고 잘 지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신이 플레이 해주세요. 아마 저 캐릭터도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진혜의 부드럽지만 간곡한 부탁에 진혜는 다시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캐릭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말에 홀린 듯 자신의 캐릭터 슬롯을 눌렀다.
[이 캐릭터로 플레이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예’ 버튼을 누른 순간, 화면이 암전된 뒤 밝아졌다.
드러나는 건 오서연의 기억에 있는 숲속.
분명 마지막으로 로그아웃 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화면 정중앙에 서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인영.
여성이라기보단 소녀에 가까운 체구.
마녀를 형상화한 듯한 고깔모자와 펑퍼짐한 로브, 한 손에는 자기 키보다 큰 완드를 쥐고 있는 여캐릭터였다.
앨리스.
오서연이 그녀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모습은 어린 시절 보았던 꼬마 마녀 애니메이션을 흉내 내며 만들었다.
자신의 기억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던 그 꼬마 마녀는, 우연인지 화면 너머의 오서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오서연은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그동안 게임 캐릭터로만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플레이에만 열중하고 캐릭터 자체에 그다지 신경을 쓰진 않았죠.”
오서연은 눈가에 고인 물기를 손수건으로 살짝 찍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들처럼 이 아이도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살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묘하게 미어져요. 그러면서 이상하게 기뻐요. 왜죠?”
“그 감정은 당신께 아니에요.”
진혜의 말에 오서연은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흘러들어오는 이 기쁨의 감정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앨리스였다.
그녀가 소중한 사람과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오서연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나도 다시 만나서 기뻐.”
목소리가 닿는 건 아니지만, 감정만큼은 닿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말했다.
그렇게 한동안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레테라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모았다.
짜악!
“자아. 재회의 회포는 이제 충분히 나눈 것 같으니, 슬슬 움직일까요?”
“아, 네! 어디로 가면 되죠?”
“우선 퀘스트를 얻는 게 중요하니 ‘신들의 도시’로 가죠.”
움찔!
그 말에 키보드를 조작하려던 오서연의 손이 멈췄다.
“……신들의 도시요?”
“네.”
“그 세계수 위에 있다는?”
“맞아요.”
“그러니까 오르는 길에 몬스터의 공격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천리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사해서 처음부터 다시 도전한다는, 그 악명 높은 세계수 맞죠?”
“맞다니까요.”
“세, 세계수를 오르는 길의 적정 난이도는 레벨 100 아니던가요?! 전 이제 레벨 89인데……!”
“그건 걱정 마세요. 레벨 100은 가뿐히 넘긴 고인물들의 캐릭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레반의 악의 없는 미소와 자신에게 집중된 캐릭터들의 시선을 바라본 오서연은 느꼈다.
이거 단단히 망했다고.
그 뒤, 세계수로 향하는 오서연과 앨리스의 여정은 처절했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구르라니까!”
“구르기 버튼 눌렀어요!! 왜 안 되는 거예요!?”
“누르면 뭐합니까! 타이밍이 완전히 어긋났는데!”
“앗! 2시 방향에서 적 출현!”
“알고 있으니까 말하지 마세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몹 처리하는 것만 해도 바쁜데!”
“그리폰은 발밑으로 파고드는 게 약하다고 했잖아!”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해보시라구요!”
“다른 사람이 조작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니까!!”
“아, 또 죽었네요.”
캐릭터들과 말다툼을 하다 들려온 진혜의 목소리에 돌아본 화면에는 어느새 [You Died]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이번으로 73번째 추락사였다.
“아아아아악!!! 다 나가요, 이 훈수충들!!!”
참고 참던 오서연이 드디어 폭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