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글레이그 대륙으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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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서 글레이그 대륙을 다시 살펴보고 있단 말이지?”
레테라의 전화를 받은 레아는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결국 율과 만나는 건 실패했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게임을 다시 입수함으로서 사건의 진실을 탐구해볼 여지가 생겼다.
레테라가 연락해온 건 멸신검 퀘스트를 얻기 위해 레아가 발견했다던 고대 서적의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서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그 퀘스트 시작점부터 하나하나 살펴 가며 이상한 점이 없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아에게서 기대했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저기, 이런 말 하게 돼서 유감이긴 한데, 신들의 도시로 다시 가봤자 멸신검 퀘스트는 얻을 수 없어. 그건 ‘레전더리 퀘스트’라고, 딱 하나밖에 얻을 수 없는 퀘스트거든. 그게 멸신검이 신화 등급 무기로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이미 퀘스트를 얻었을 당시 여러 번 실험을 통하여 확인을 마친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신화 등급의 아이템 제작 관련 퀘스트를 얻었다는 정보가 풀리면 너도 나도 그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퀘스트를 성공한 사람들만큼 신화급 아이템은 우후죽순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레전더리 퀘스트는 단 한 사람밖에 얻을 수 없는 구조였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트리거를 만족해봤자 퀘스트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들의 도시까지 올라간 건 완전히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 방금 그 소린 뭐야? 이 집에 얹혀사는 귀신이 가끔 지르던 울음소리와 비슷한 거 같은데?”
[신경 쓰지 마. 우릴 도와주는 조력자가 있는데, 이번에 고생을 좀 심하게 했나 봐.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지금 어때?]
“방금 일어났어. 점심도 먹었고, 지금은 씻고 있는 중이야. 그가 라면이라는 걸 해줬는데 꽤 맛있더라.”
[뭐!? 오라버니께서 끓여주신 라면!? 이 년이 치사하게 그 귀한 걸 혼자만 얻어먹었어?!]
민간인에게 라면이 흔한 음식일지 몰라도 레테라의 입장에선 이 세계로 건너오며 처음 먹어본 특별한 음식이다.
그것도 신요현이 직접 끓여준 라면? 프리미엄이 붙을 만큼 귀중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들이 신요현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레아는 편안하게 그의 곁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일순 살심마저 밀려온다.
그 살의는 실질적 공간의 거리는 무시하고, 수화기 너머의 레아에게로 전해지는 듯했다.
레아는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희도 같이 살면서 잔뜩 얻어먹었을 거 아냐. 겨우 한 번 얻어먹은 거 가지고 쪼잔하게 굴지 마.”
[너 잊은 건지 모르겠는데, 오라버니와 네 묵힌 감정은 해소 했을지 몰라도, 우리끼리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거든? 오라버니의 문제가 급선무라서 넘어가주고 있는 거지, 난 아직 널 후드려 패줄 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서는 건 인정 못해.]
“어디 해보던가.”
도전적인 발언에 이번엔 레아가 일순 살기를 품었다.
평온하던 레아의 주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다.
수화기 너머로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사나운 기세였다.
하지만 레테라가 말한 대로 지금 상대방과 다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사나운 기세를 거둔 레아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화제는 넘어가고 지금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멸신검의 행방을 알아내려면 신들의 도시가 아니라 신공 에이드멀이 있는 로드제란 왕국으로 찾아가. 단서가 있다고 한다면 거기밖에……. 이크. 아버지가 나온다. 이만 끊는다.”
[야, 잠깐……!!]
뚝!
레아가 휴대폰을 닫자 타이밍 좋게 세수를 마친 신요현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러다 창가 쪽에 어색하게 서 있는 레아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 뭐 하고 있어?”
“그냥 바깥 구경 좀 하고 있었어.”
“구경만 하는데 왜 창문에 금이 가 있는 건데?”
“아.”
조금 전 내뿜은 살기 때문일까.
진동과는 다른 자극을 견디지 못한 투명한 유리창에는 선명한 균열이 가 있었다.
레아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신요현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아……. 레반, 레테라에 관한 일이지?”
“아니, 그게…….”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고만 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둬.”
그 말만 남기고 신요현은 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세수를 맞췄으니 옷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도리어 레아가 의아해했다.
“어? 그걸로 끝?”
“왜? 더 할 말 필요해?”
“당장 데려오라고 할 줄 알았지. 평소엔 좀 더 녀석들을 통제했잖아?”
“내가 녀석들을 통제하는 건 그 녀석들이 이쪽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고만 치고 다니기 때문이었지.”
방으로 향하려던 신요현은 다시 레아에게 몸을 돌렸다.
“지난번 헬스장 사건 기억하지? 레반과 레테라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려서 큰일 났었잖아.”
“그래, 큰일이 나긴 했었지. 대부분 큰일은 우리가 일으킨 것 같다만…….”
“뭐, 세세한 부분은 넘어가고……. 아무튼 난 그 녀석들을 어떻게 다시 찾을까 걱정이었거든. 그런데 내가 찾기도 전에 두 사람이 먼저 알아서 돌아왔잖아? 날아간 장소에서 그곳까지 돌아오는 동안 별 다른 사고도 치지 않았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사고만 치던 놈들이 많이 성장했다 싶더라고.”
신요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며칠 전 서해에서 일어난 중국 불법 어선 대량 침몰사건의 주범이 레반과 레테라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레반도 레테라도 그 사실을 일부러 감춘 건 아니었다.
그냥 기억에 담아두지 않아서 까맣게 잊었다.
그 당시 그들의 머릿속은 당장 신요현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그들을 놔두겠다고?”
“마냥 놔두겠다는 말이 아니야. 필요할 땐 얼마든지 간섭할 거야. 그래도 너희는 좀 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돼.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신요현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도 그럴 게, 너희는 내 도구가 아니잖아?”
“……!”
그 말에 레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게임 시절부터 신요현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는 데에 익숙해진 그들이다.
그들은 솔직히 자신들이 도구 취급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런 도구야 말로 자신들의 정체성일지 모른다고 마음 한켠으로 생각하는 캐릭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요현은 그들이 도구인 걸 부정했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말이지만, 레아는 신요현과의 연결점이 흐려진 것 같아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부턴 어디로 갈 땐 가겠다고 미리 말 좀 해달라고. 막상 눈앞에 없으니 불안하잖아. 나도 학생 땐 외출할 일이 있다면 나갔다 오겠다고 부모님에게 말한 뒤에 다녔다고.”
그래도 그 다음에 이어진 말에, 레아가 느꼈던 불만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상호존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세상은 가족이라 부르거든.”
가족.
그것이 도구라는 말을 대신하여 그와의 새로운 연결점을 만드는 것 같았다.
그것에 안심이 되어 미소가 흘러나오면서도, 레아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도구처럼 대하는 게 댁에겐 더 부리기 편할 텐데……. 우리가 진짜 댁 자식인 줄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든가. 아직 여친도 안 사귀어본 남자의 부성애를 멋대로 자극해 놓고 뭐라는 거냐.”
레아가 툭하고 던진 말을 신요현은 재치 있게 받아들였다.
“뭐, 아무튼. 사고만 치고 다니지 않는다면 나도 너희들의 자유행동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거기까지 말하던 신요현은 말을 멈추고 레아를 바라보았다.
문뜩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혹시 연성화의 집을 찾아보겠다거나, 저들끼리 담판 짓겠다고 나간 건 아니지?”
그랬다간 자유행동이고 뭐고 냉큼 붙잡아와 집안에 구금해버릴 거라는 듯 신요현의 눈빛은 살벌했다.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 반드시 그 누군가에게 좋은 결과로 되돌아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특히 연성화와 자신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이것을 해결하겠다고 무작정 상대에게 쳐들어간다면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밖에 되지 않았고, 이것은 신요현이 명백히 제재해야 할 대상이었다.
도리도리!
그에 대해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연성화와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으러 가긴 했지만, 그것이 연성화 본인과 만나는 일은 아니었기에 레아는 찔리는 구석 없이 바로 부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안도한 듯 숨을 내쉬며 그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움직일 때였다.
무언가 얘기 안 한 게 떠오른 건지, 그가 거실 문턱 밖에서 빼꼼 얼굴만을 내밀며 말했다.
“……아. 레아. 조금 있다가 나랑 같이 외출 좀 할래?”
“응?”
생각지 못한 제의에 레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
오서연은 컴퓨터 책상 위에 얼굴을 묻었다.
갖은 고생을 해서 올라온 세계수가 사실은 올라올 필요도 없던 장소라는데 충격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고생을 하면서 세계수를 등반한 의미가…….”
“뭐, 그래도 고레벨 지역을 돌파하면서 레벨이 2나 올랐잖습니까.”
“그건 기쁘긴 하지만 말이죠…….”
구름보다 높게 뻗어 있는 세계수.
하늘을 넘어 우주를 떠받치듯 뻗은 웅장한 나뭇가지 중 하나에 새의 둥지처럼 회색 돌로 쌓아 올린 지반이 존재했다.
원반형 지형 위로 신을 찬양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남긴 것 같은 뾰족한 도시 하나가 자리했다.
그곳이 바로 신들의 도시였다.
처음 온 이라면 그 장엄함에 놀라게 된다는 신들의 땅이었지만, 오서연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감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경치가 좋으면 뭐하겠는가.
기껏 다 올라왔더니 이 산이 아니라면서 다시 내려가자는 소리를 들었는데.
직접 세계수를 등반한 것도 아니지만, 막대한 심리적 피로와 두 손의 뻐끈함에 시달려야 했다.
애써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좀 더 신들의 도시를 탐험하고 싶었지만, 중요한 안건이 있던 캐릭터들은 어서 지상으로 귀환할 것을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오서연은 신들의 도시를 그곳 가장자리에 서식하는 거대 갈까마귀를 통해 그곳을 떠나 지상까지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오를 땐 그토록 험난했던 장소가 내려올 땐 어찌 이토록 쉬운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인 로드제란 왕국으로 향하는 길을 모니터 속 꼬마 마녀가 걷고 있을 때였다.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신경을 두고 있던 지크문트가 입을 열었다.
“대륙의 풍경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
그 말에 캐릭터들도 뭔가를 눈치 챈 듯 모니터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덕분에 인원 다섯에게 압박당하는 모양새가 되어서, 오서연이 “좀 떨어지세요!”라고 외치고 나서야 한 발자국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동안에도 그들의 시선은 모니터로 보이는 주변 풍경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확실히 이상하군. 주변 나무들이 전부 말라 비틀어져 있어.”
“? 흔한 풍경 아닌가요?”
글레이그 대륙은 어디를 가나 정상적인 곳 없었다.
나무가 말라비틀어진 정도야 흔한 것이고, 평균적으로 보자면 그나마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런 흔한 나무를 보며 왜 캐릭터들이 의문을 품고 있는지 오서연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게 있는데, 그들은 중 과반수는 고인물 플레이어의 캐릭터였다.
율이 말한 선행 조건, 플레이 타임 500시간은 최소한의 기준선일 뿐이고, 레반, 레테라, 하티의 플레이 타임은 족히 1000시간을 넘길 정도로 글레이그 대륙을 이골나게 돌아다녔다.
그런 그들이 풍경을 착각할 리 없었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이 장소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이파리들은 생생하고, 나무들은 곧게 뻗어 있던 모습이었다.
“뭔가 이상한걸…….”
그런 이상한 기분은 로드제란 왕국의 왕도, ‘론슬레이’에 도착하고, 도시를 감싼 성벽을 넘는 순간 확신이 되었다.
세계수와 가까운 만큼 그 은혜를 한 몸에 받은 로드제란 왕국은, 신들의 도시와 더불어 글레이그 대륙에서 그나마 번영을 이어가던 국가였다.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오서연조차 이상을 눈치 챌 수 있었다.
SoR을 플레이 해본 유저들도, 그들을 통해 직접 그곳을 돌아다녀 본 캐릭터들도, 찬란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던 론슬레이 도시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손상되지 않는 건물은 찾기가 힘들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겐 힘이 없었으며, 도시 자체가 마치 폐허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누가 이곳을 국왕이 거주하는 왕도라고 생각하겠는가?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을 얻은 듯, 레테라가 살짝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멸망’이 진행되고 있군. 우리가 있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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