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글레이그 대륙으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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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땅 위로 솟은 뿌리는 산맥과 같이 높고, 줄기는 구름조차 뚫으며, 그 가지 끝은 별에 닿아 있다고 하는 거대한 나무다.
그 위대한 전경은 대륙 어디를 가도 목격할 수 있다고 하며, 세계수에 다가갈수록 그 은혜로움을 받아 멸망의 손길에서 몸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세계수 중간층에서 분리된 첫 번째 가지엔 새의 둥지와 같은 도시가 드리워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신들의 도시다.
그곳엔 인간들이 신이라고 추앙하는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은 인간들에게 세계수의 뿌리 부분을 허락했다.
대지에 돌출된 뿌리는 대략 다섯 가닥으로 나눠진다.
글레이그 대륙의 인류사는 대부분 이 뿌리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채워져 있다.
혹독한 세상 속에서 뿌리 지역을 차지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대로 차지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기록된 역사 속에선 수많은 인종이 결합하고 분리되고, 수많은 국가가 태어나고 멸망했다.
그런 끝에 그레이그 대륙의 국가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
다섯 가닥으로 뻗은 뿌리 최남단. 전설 속의 엘프들이 이룬 요정들의 나라, ‘글레이시란’이 있었다.
남서쪽에는 성자들의 나라, ‘아이즈네’.
신앙심이 가장 깊은 나라이며, 그곳의 사람들은 세계수 위의 신들을 마음 깊이 따르고 숭배한다.
북서쪽 전사들의 나라, ‘카르마니아’.
다양한 세력이 대립하며 뿌리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북동쪽에는 현자들의 나라, ‘헤이돌로스’.
다섯 왕국 중 가장 조용하고 은밀하며, 번영보단 진실의 탐구에 힘쓰는 국가다.
그리고 남동쪽에 있는 것이 영웅들의 나라, ‘로드제란’.
지금은 얌전해졌을지 몰라도 한 시대 전에는 영향력이 다섯 뿌리지역 전체에 미쳤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
그 여파는 지금도 이어져 다섯 뿌리 지역 중 가장 번영한 왕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대리석처럼 반듯한 모양의 타일로 뻗어가던 대로는 곳곳이 금이 가거나 훼손되어 있고, 주변 건물엔 담쟁이 넝쿨 같은 게 자라나 외관을 망치는 대도 누구 하나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길과 골목 모퉁이에는 부랑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즐비해 있으며, 한참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조차 눈에 생기가 없었다.
이게 가장 번영한 왕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담긴 모니터를 함께 바라보던 이들 중 하티가 입을 열었다.
“시스템이 망가진 거죠.”
“시스템?”
“혹시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가진 ‘불사의 저주’. 그것의 주체가 세계수라는 거.”
게임 내에선 직접 설명해주진 않지만, 게임의 배경 스토리를 즐기는 부류, 특히 SoR의 세계를 깊이 탐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채는 사실이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저주 뒤에는 세계수의 영향이 자리하고 있다.
캐릭터가 레벨업을 위해서 쌓아온 경험치.
그것을 캐릭터의 사망과 동시에 모두 회수해가는 것이다.
회수한 경험치는 세계수의 수명을 늘리는 생명력으로서 작용한다.
“몬스터와 싸우고, 세계를 여행하며, 죽을 때마다 생명력을 받치던 우리들이 사라지자 세계수도 약해진 거다. 그 영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거지.”
뻔한 일이라는 듯 지그문트가 고개를 주억거렸고, 레테라가 뒷말을 이어갔다.
“덕분에 땅은 메말라 가고, 작물은 자라지 않으며, 그 위에 사는 인간들도 약해지겠지. 세계수가 있는 땅을 노리는 바깥 몬스터들의 습격은 잦아지는데 비해 인간들은 전과 같은 활력을 되찾을 수 없으니 악순환만 반복될 테고.”
“그래서 이 꼴이 만들어진 건가요……. 가장 번영한 로드제란이 이 정도면 다른 왕국도 양호할 것 같지는 않네요.”
레테라의 이어 진혜도 현실적인 추측을 내놓았다.
“그리고, 아직 불사의 저주가 살아 있는 이상, 우리도 죽는다면 이곳에서 함께 멸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건가……. 한때 우리가 집 마당처럼 거닐던 장소에서.”
캐릭터가 죽으면 글레이그 대륙으로 돌아간다는 법칙을 떠올린 레반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한때 자신들이 살아가던 터전이 저렇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한 거라 생각한 오서연은 위로의 말을 꺼내려 하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레반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 상관없지.”
“죽지만 않으면 되잖아.”
“어차피 저 세계엔 별로 미련 없기도 하고.”
“당신들 지나치게 쿨한 거 아닌가요!?”
캐릭터들의 이구동성에 어이가 없어진 오서연이 외쳤다.
그들에겐 애국심도 애향심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건 부모 격인 플레이어를 향한 정뿐이었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이젠 흥미 없었다.
“아무튼. 신공 에이드멀은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플레이어들의 문제다.
하티는 빨리 멸신검을 제작한 에이드멀을 만나 여러 가지 확인을 해보고 싶은 듯 화제를 넘겼다.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
레테라가 운을 떼자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신공의 대장간을 방문한 경력이 있는 진혜, 지그문트이 각자 말하였다.
“첫째, 명예를 쌓고, 국왕을 만나 신임을 얻으며, 그 후에 왕실직속공방 사용허가를 맡는다.”
“둘째, 무기 제작 스킬을 익혀 마스터급을 달성하고 공방 대장장이에게 인정받아 출입 허가증을 받는다.”
“뭐야, 너 무기 제작 스킬도 있었어? 사냥꾼이?”
“이전 주인이 처음엔 대장장이 직업으로 하려다가 중간에 사냥하는 맛을 깨닫고 사냥 스킬을 키웠거든. 어차피 둘 다 기량 중시 직업이라 전환도 쉬웠지. 그래서 사냥꾼이 된 지금도 손재주는 쓸 만해.”
박일봉의 오동나무집 가재들은 다 자신이 만들고 관리한다고 자랑하려 했던 지그문트지만, 이야기가 딴 길로 새는 걸 원치 않은 레테라가 도중에 끊어버렸다.
“아무튼.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어느 세월에 명성을 높여 국왕을 만나거나 대장장이 스킬을 익히겠는가.
그보다는 더 빠르고 현실적인 수단이 있었다.
“설마 정면돌파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
이들이라면 그것을 제시하고도 남을 거란 생각에 오서연이 말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 건 안 합니다.”
“경비 병력을 뚫고 정면 돌파를 하기엔 당신의 캐릭터 능력치가 너무 떨어져요.”
레반과 레테라의 말은 여건만 충분했다면 진짜 정면 돌파를 시켰을 거란 말처럼 들려서 무서웠다.
이 세계의 왕국 사람들은 범법자에게 무척이나 매섭다.
그저 게임 감각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유저들은 경비원과 같은 공권력의 칼 같은 개입에 뭐가 이렇게 깐깐하냐고 욕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정말로 게임이었지만 당연한 감상이었겠지만, 게임이 아니라 어딘가에 진짜 있는 또 다른 세상인 이상 게임 감각으로 말썽을 부리는 이에겐 제재가 답이었다.
“그럼 어떻게 에이드멀을 만나죠?”
“걱정 마십쇼. 고인물들은 다양한 편법을 알고 있습니다.”
지그문트나 진혜도 제법 오래 게임 플레이를 해왔지만, 레반, 레테, 하티 세 사람의 경력은 그들보다 더 했다.
확실히 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여럿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세 사람의 모습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
“같이 외출하자고 해서 뭔가 했더니……. 그냥 옷 사러 가는 거였어?”
사람이 많은 번화가를 레아와 함께 걸었다.
뭔가 중요한 일인가 했는데 김 빠졌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었다. 그것들 없이 대놓고 다니기엔 레아의 외모가 너무 눈에 띄었다.
모자와 선글라스 이외엔 며칠 전에 보았던 복장과 같았다.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너 옷이 그거 밖에 없잖아. 전에 옷가게에서 훔친 거.”
“내가 깔끔함도 모르는 여자처럼 말하지 마. 똑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같은 게 세 개나 있어 항상 갈아입고 있다고. 전에 훔칠 때 여벌용으로 챙겨놨거든.”
“야, 그 옷가게 어디냐? 대놓고는 할 수 없더라도 몰래 배상해줘야겠어.”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는데, 이렇게 레아의 말을 듣고 나니 그녀에게 털렸던 옷가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레아가 친 사고에 대해 내가 수습하려고 하자 그녀는 의외라는 듯 말해왔다.
“저쪽 세계에서와 다르게 여기선 꽤나 얌전하네? 원하는 게 있다면 왕궁 뒤편에 대포를 날려서라도 털어가던 양반은 어디 갔어?”
“그 얘긴 꺼내지 마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명수배로 고생했던 걸 생각 하면 현기증 나니까.”
그땐 꼭 필요한 퀘스트 아이템이 왕궁 보물창고에 있는데 회수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사용한 과격한 수였다.
그런 내가 겨우 옷가게 턴 것 정도에 호들갑인 내 모습이 레아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내 진짜 성격을 억누르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도 그렇고, 레반이나 레테라도 그래. 우리는 당신의 성격을 닮았어. 뜨겁고, 과격하지만 호쾌한. 그런데 어째서 여기선 그렇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거야?”
“그게 이쪽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게임이랑 달라.”
레아의 말대로, 내 본성은 얌전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것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에서 내 감정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행동해도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야. 기껏해야 나와 싸우다 진 다른 플레이어가 열불 터지는 정도겠지.
게임 속에서의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올 수는 없다.
게임이니까 왕궁을 털어보기도 했지, 보석을 가지고 싶다며 금은방에 트럭으로 돌격해봐라. 저쪽에선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이라면 깜방 직행이다.
“게임과 현실에 차이가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면 문제가 되거든. 굳이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에서, 사회에서 약속한 선을 넘는 녀석은 변절자로 분류되고, 배척받아.”
“……그럼 배척받아도 상관없는 힘을 가지면 되는 거 아냐? 내가 그 힘이 되어줄게.”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냐.”
내가 성격을 죽이는 이유가 그저 힘이 약하기 때문으로 생각하는 레아에 살짝 쓴웃음이 나왔다.
“말했잖아. 게임이랑 다르다고. 게임에서야 몇 번이나 상대를 죽일 수 있지만, 현실에선 한 범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게임에서 상처를 입으면 금세 잊을 수 있지만, 현실에선 잊혀 지지 않아. 게임에선 누군가 나를 원망해도 모니터를 넘지 않지만, 현실에선 직접적으로 쏟아지거든.”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성질 죽이는 것으로 남들과 원활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고말고.”
“그럼 답답하지 않아?”
“그러니까 가끔 게임으로 스트레스 풀던 거 아니겠냐. 원래 게임의 용도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어? 어떤 미친놈이 그걸 현실로 끌고 나와서 문제지.”
굳이 율 하나를 가리키는 문제가 아니다.
게임 문제를 현실로 끌고 나오거나 혼동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그게 게임 자체의 문제라고는 볼 수 있다.
“이쪽 세계의 어른들은 게임을 많이 하면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게 된다고 착각한단 말이지…….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는 놈이 게임을 하는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이 나라의 편견 가득한 어른들에 대한 한탄을 금치 못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함께 걷는 녀석으로부터 동조가 들어왔다.
“맞아. 그렇다니까. 하여간 뭣도 모르고 게임을 질병으로 몰고 가는 놈들이 제일 문제야. 지들은 오락 안 즐기나? 저기 저 높으신 놈들에겐 여자와 부대끼고 놀거나 세금으로 비싼 화분 사는 게 건전한 오락인가?”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온 레아가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목소리도 전혀 다르다.
애초에 그녀에게 이 나라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까 내릴 배경 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
정반대편,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난 얼굴을 굳혔다.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위드 소프트웨어 본사에 처박혀 있을 그 자식이 어느 새부터인가 바로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누가 보면 일행인 줄 알 정도로 가깝게.
“안녕? 데이트 중이야? 내가 방해했나?”
“율……!!”
얼굴만 봐도 열불 터지는 남자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걸치며 친한 척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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