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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42화 (142/173)

〈 142화 〉 앙금 폭발 ­ 1

* * *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

“이놈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레반과 레테라, 어느 쪽도 전화가 연결될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휴대폰을 닫아버렸다.

율에게서부터 그들이 오서연 씨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리 찔리는 짓을 했다고 해도 내 전화를 일부러 피할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휴대폰 전원이 나가있다고 보는 게 가능성 높겠지.

레반이야 종종 충전하는 걸 잊어서 전원이 꺼지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꼼꼼한 레테라마저 전원이 나가 있는 건 의외였다.

휴대폰 배터리 소모는 신경 쓰지도 않고 인터넷을 마구 돌아다니기라도 한 걸까.

저쪽은 멸신검 증발의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직접 게임을 플레이 하며 여러 모로 실험하고 있다고 들었다.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작은 정보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닥치는 대로 뒤지고 다녔을 수도 있겠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같이 있다고 하는 오서연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번호는 지난번에 교환해서 휴대폰 연락처에 남아 있다.

통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녀를 통해 레반과 레테라에게 냉큼 돌아오라고 전할 수 있었지만…….

“……관두자.”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오서연에게는 미안한 일지만, 지금 만큼은 그들이 원 없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뒤져보게 놔두는 게 나을지 몰랐다.

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언젠가 나도 도달하지 못했던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그게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이번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돌아오지 못하면, 그들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율의 말을 들은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율은 말했다. 멸신검을 가져간 자와 대면하게 해준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놈이 마음만 먹으면, 내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할아버지의 얼굴 주름 개수까지 정확히 맞출 거란 건 이미 충분히 학습했다.

문제는 그 녀석의 의도였다.

순순히 우리에 대한 호의 때문에 그런 제의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편안한 꼴보다는 고생하는 꼴을 더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멸신검의 행방과 소지자는 내가 꼭 알고 싶어 하는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그 제의에 응함으로서 더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이 리스크와 하이 리턴.

그게 율의 방식이다.

그의 조언뿐만 아니라 게임 속에도 그 법칙이 녹아 있었다.

값진 보상을 얻을 수 있지만 수많은 죽음을 강요하는 고난이도 퀘스트, 강력한 무기가 잠들어 있지만 악질적인 함정이 가득한 고대 던전, 강력한 일격을 날릴 때야 말로 가장 큰 딜을 넣을 수 있는 보스 몬스터.

무언가를 얻고자 하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이번 일에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스스로 해결하겠다며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마라톤이 아니다.

풀어내고 싶지만 못하고 지금도 짐처럼 남아 있는 앙금이다.

위험이 동반된다고 해도 이참에 깨끗이 해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지막 치즈버거를 먹어치우고 헤어지기 전, 율은 이렇게 말했다.

­성월시 북동쪽 영호구에서 빠져나오는 17번 산간 도로. 그곳에서 북쪽으로 좀 더 빠지다 보면 지금은 폐쇄된 리조트 공사 부지가 있어. 거기로 가 봐. 모든 일의 원흉이 그곳에 나타날 테니까.

“그래서 결국 이곳까지 오긴 했는데…….”

기술의 발달은 참으로 편리하다.

버스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율이 지정한 장소에 대한 정보는 휴대폰으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6년 전 올라온 인터넷 기사를 확인해보았다.

이곳은 선용 리조트가 세워질 예정이었던 공사부지 .

공사부지라고는 하지만 공사용 장비나 건축물은 따로 없고 깊이 파헤쳐진 땅만이 남아 있었다.

총책임자가 어느 날 돈을 들고 날랐고, 그 탓에 리조트 계획도 흐지부지된 채 터만 방치되었다고 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율이 지정한 장소에 도착한 나와 레아가 목격한 것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빈 공터였다.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찾아온 어둠이 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질긴 생명력을 지닌 잡초 몇 개만 자라나 있을 뿐, 대부분은 돌과 바위조각뿐이다.

사람의 기척은 물론, 찾아올 이유조차 찾아볼 수 없는 외딴 곳.

정말 이곳에 멸신검을 가져간 장본인이 나타난다고?

“아버지.”

내가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 주변을 둘러보던 레아가 나를 불렀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땅이 가파른 각도로 푹 내려앉는 지대의 가장자리.

본래는 건물을 세우기 위해 파헤친 구덩이로 추정된다. 군데군데에 미처 뽑아가지 않은 철골 잔해가 남아 있었다.

레아는 어둠이 깔려 잘 보이지 않는 구덩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 누군가 있어.”

“…….”

말을 내뱉던 레아의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난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시력엔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목소리와 굳은 표정은, 나에게 많은 걸 시사하고 있었다.

“……내려가자.”

촤르륵!

가파른 흙벽 위를 미끌어지며 나는 레아와 함께 구덩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구덩이 바닥.

나는 앞으로 향하기 전에 미끄러져 내려온 흙벽을 돌아보았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흙벽의 모습은 위에서 내려다 볼 때와 전혀 달랐다.

주변을 둘러싼 검은 벽의 모습이 마치 로마 콜로세움의 원형 경기장 모습을 본 뜬 것 같았다.

저벅. 저벅.

구덩이 바닥의 중심을 향해 말 없이 걸어갔다.

레아가 감지한 누군가는 우리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곧 이쪽을 마주하며 서 있는 두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머리에 무뚝뚝한 표정을 한 여자와 회색 머리에 현대인과 맞지 않은 천 옷을 늘어뜨린 남자.

아주 잘 아는 인물들이었다.

율이 리스크 운운했을 때 설마 하고 생각하긴 했었다.

“……네가 아니길 바랬는데.”

“이쪽이 할 말이야.”

내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나와 같은 심정이라는 듯 스콜과 함께 연성화도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

“율이 보냈지?”

“맞아. 그쪽도야?”

“응. 가면 멸신검을 가져간 녀석과 만나게 될 거라더라.”

역시 연성화도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멸신검을 가져간 자가 나타날 거라 했던 자리에 나타난 옛 친구.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아. 이 주변에 혹시 다른 인원 없어?”

“……없어. 있는 건 우리들뿐이야.”

레아의 그 말이 확인사살 같았다.

나와 연성화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는데 공기가 불편해진 것을 넘어 숨이 막혀온다.

눈앞에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강조하는 듯한 상황. 그렇기에 오히려 조심스러워졌다.

여기에서 말 한 마디가 잘못 나오는 순간, 한계까지 억눌렸던 무언가가 폭발할 것이다.

““하아…….””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만으로 긴장 상태는 어이 없이 풀려버렸다.

“그 망할 자식은 무슨 생각인 거지…….”

“조금이라도 혹한 내가 바보지.”

잘 짜여진 무대 같은 느낌이 오히려 상대와의 갈등을 피하게 만들었다.

멸신검을 가져간 자와 대면하게 될 거라며 짚어준 장소에 나타난 상대방.

투기장처럼 둘러싸인 흙의 벽.

주변에 다니는 사람도 없고, 지형이 뒤틀릴 정도의 파괴가 일어나도 특별히 문제될 것 없으리라.

마치 비극적인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라는 출제자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은가?

“관두자. 이대로 또 만나봤자 지난번과 같은 다툼만 반복하는 꼴이 더 돼?”

“무엇보다 율이 어서 싸우라고 부추기는 듯한 상황이라서 더 싫어.”

우리는 이 이상 파고드는 걸 피했다.

만약 우리 둘끼리만 만났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판국에 율이라는, 별종이긴 하지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녀석이 보증한 상태에서의 만남이다.

서로 의심하고 깎아내리다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겠지.

하지만 지금 부딪칠 수 없다.

부딪쳐선 안 된다.

우리가 진심으로 부딪치게 된다면, 우리를 따르는 강력한 ‘폭력’에 의해 결코 사소한 다툼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갈등을 피한 이유는 노골적인 무대뿐만이 아니다.

아직도 미련하게 상대를 믿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상대를 향하고 있는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차마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티가 아침부터 안 보이던데, 혹시 그쪽에 있어? 스콜에게 물어봐도 얼버무리기만 하고 안 알려주더라.”

“우리 쪽 레반, 레테라가 나가 있는데, 아마 저들끼리 만난 모양이네. 율의 말로는 우리 대신 그날의 진실을 찾겠다고 동서분주한다더라.”

실제로 동서분주하는 건 플레이하는 게임 속 캐릭터였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하더라. 그 녀석들이 진실에 도달할 거라고.”

“……그래?”

그 말에 잠시 복잡한 감정을 표정에서 드러내던 연성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들이 돌아온 후에 다시 만나자고. 이런 광대를 위해 준비된 듯한 무대 말고.”

“알았어.”

생각이 일치한 우리는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율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우리를 이 자리에서 만나게 했는지는 모른다. 그의 말 자체가 페이크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서 캐릭터들의 소식을 기다리자.

만약 그들이 알아온 진실이 정말 상대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는 거라면……. 이 만남은 그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예방접종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단지 그것뿐이다.

“뭐해? 가자.”

돌아가려는데 레아가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연성화 쪽 스콜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연성화는 물러나려 했지만, 레아와 스콜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 말이야. 그날 만난 뒤로 돌아가서 엄청 침울해 있었어.”

“얌마. 그 얘기를 지금 왜 꺼내는 거야?”

뜬금없이 남의 치부를 밝히는 레아의 발언에 내가 당황했다.

“우리 주인도 평소 한 시간이면 끝나는 목욕을 2시간 넘게 욕실에 틀어박혔다. 하티가 감기 걸린다며 강제로 끌어내지만 않았어도 더 틀어박혀 있었겠지.”

“넌 또 왜 경쟁하듯 말하는 건데?!”

캐릭터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들은 주인들의 감추고 싶은 모습을 서로 알려주기로 약속이라도 한 거야 뭐야?

이상한 짓 그만하라는 듯 레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그녀는 계속 스콜을 주시할 뿐이었다.

스콜 또한 레아를 주시한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불편한 마음은 계속 이어지겠지. 이젠 더 이상 못 참아.”

“이쪽도 마찬가지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쪽으로 흐른다.

스콜의 태도의 이상함을 느낌 연성화가 나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쪽이 범인이라면, 스스로 털어놓고 싶어질 때까지 쥐어 패면 그만이야.”

“그쪽이 범인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것으로 관계를 끊자.”

“야, 레아……. 아니지? 안 그럴 거지?”

설마 했다.

어긋난 관계를 다시 이으려고 레아가 그동안 얼마나 생떼를 부려 가면서 우리를 만나게 했던가.

하지만 결과만 보자면 납득이 가는 행동 동기였다.

부담만 될 뿐인 애매한 관계를 이어가기 보단, 차라리 여기서 결판을 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콜. 허튼 짓 하지 마. 나 화낸다? 진짜 화낼 거야?”

연성화가 짐짓 날 서린 어조로 스콜을 제지하려 했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표정에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늘 자신의 말을 헌신껏 따르던 캐릭터가 갑자기 통제를 벗어나는 경우를 말이다.

“미안해, 아버지. 그동안 둘을 화해시키려고 말썽부리던 내가 이런 말하기도 뭐하지만…….”

“미안하다, 주인. 나도 얌전하게 넘어가려 했다만…….”

쿠웅!!

레아가 한쪽 발을 내밀자 지축이 흔들리며 뒤에 있던 나까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화르륵!!

스콜이 손을 뻗자 그의 주변으로 떠오른 화염 구슬 때문에 놀란 연성화가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좀…….”

“……날뛰어야 속이 풀리겠다.”

타아앙!!

둘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미처 말릴 세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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