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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47화 (147/173)

〈 147화 〉 원흉 대면 ­ 3

* * *

구덩이의 경사는 꽤나 가파르고, 또한 깊었다.

통째로 잘려나간 지대가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지며 그 형태가 무너져 버렸다.

부서지는 지반 위에 선 우리에게 남은 건 부서진 파편과 함께 바닥까지 나뒹구는 일뿐.

상식적으로 상처 하나 없긴 힘든 상황이다.

얼굴보다 큰 돌덩이나 공사 중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쇳조각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자칫하다간 어딘가를 잘못 맞고 부러지거나 사경을 헤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망과는 반대로 나와 연성화는 별다른 상처 없이 바닥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후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의 위를 뒤덮은 흙을 밀어냈다.

흙은 그리 많이 쌓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해수욕장에서 몸 위를 덮으며 노는 모래 정도의 양이었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의 흙을 들어 올리는데도 나는 이를 악물고 땀을 뻘뻘 흘릴 정도의 힘을 쏟아내야 했다.

그럼에도 들리지 않던 흙더미는 연성화까지 가세하고 나서야 겨우 치워낼 수 있었다.

그녀에 도움을 받아야 흙을 치울 수 있을 만큼 내 몸이 허약한 건 아니다.

헬스장 사건 이후로도 근력 운동은 매일 꾸준하게 했으며, 레반에게도 확실히 근력 2까지 올랐다고 확인을 받았다.

그런데도 흙을 치우는 데 애를 먹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쿠웅!!

책 페이지를 넘기듯 한쪽으로 쓸려나간 흙더미들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고, 겨우 압력에서 해방된 나와 연성화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러다 연성화가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질식하는 줄 알았잖아!”

“잘못 떨어져서 황천길 가는 것보단 낮지! 저거 없었으면 최소 골절이었다고!”

나는 치워낸 흙더미 사이에 섞여 있는 하늘하늘한 천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것은 구덩이 밑으로 떨어지는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꺼낸 게임 아이템이었다.

무영(無?)천 등급: 희귀 분류: 재료 「그림자 없는 거미라 불리는 몬스터의 실로 만든 천. 사라진 그림자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두운 빛깔에 얇은 재질이다. 하지만 얇은 재질에 비해 닿는 충격은 놀랄 만큼 잘 흡수한다. 공방으로 가져가면 뛰어난 방어구로 만들어줄 것이다.」

충격을 흡수하는 특성을 가진 천.

덕분에 추락 대미지로부터 몸을 지켜낸 건 좋았지만, 결국은 저쪽 세계의 물건이었다.

이 얇디얇은 천 하나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무게를 품고 있었다.

거미줄로 만든 천이 아니라 크고 두꺼운 군용 천막이 머리 위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 위를 흙이 덮고 있으니 압박감은 더 했다.

두 사람이 협력하여 겨우 흙과 천을 치워내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화르르르륵!!

우리들의 머리 위 허공에서 새빨간 불의 벽이 우산처럼 펼쳐진다.

우리가 굴러떨어진 원인이 된 초수압의 물줄기가 불의 벽을 꿰뚫으려 했지만, 결국 수증기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졌다.

콰가가각!!

휘어진 물줄기는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틀어박혔다.

우리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위치였다.

불의 벽에 의해 물줄기가 휘어지지 않았다면 저것이 우리를 덮쳤을 것이라는 걸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단단히 처돌았나, 이 자식?”

깊게 꿰뚫린 바닥의 구멍을 보니 튀어나오는 욕설을 참을 수 없었다.

처음 일격도 그러했다.

레아와 스콜이 팔을 희생할 작정으로 우리를 밀치지 않았다면 저 물줄기에 정통으로 꿰뚫려 끔찍한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밤하늘 아래를 별똥별 대신 불과 물의 화살이 어지럽게 내달리며 맞부딪친다.

집요하게 우리를 저격하는 적의 마법과 그것을 요격하여 우리를 지키려는 스콜의 마법이 그려내는 광경이었다.

적이 노리는 건 스콜도 레아도 아니라 여전히 우리였다.

보이지 않는 적이 보내는 노골적인 살의에 겁을 먹기는커녕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연성화 또한 비슷한 심정인지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지금껏 플레이어는 몇 번 만나왔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대놓고 죽이려 드는 플레이어는 처음인데.”

“그러냐? 난 여럿 있었는데.”

“있었다고? 여럿이나?”

“전해 말한 적 있잖아? ‘이 새끼만은 족치고 만다’ 싶은 녀석이 둘 있다고. 아, 살해당할 뻔한 거로 치면 한 사람 더 있었지?”

첫 번째는 제 정보를 숨기겠다고 전혀 관계가 없던 사람을 죽인 이름 모를 개자식.

두 번째는 몹 유도라는 악질 행위로 차도살인을 시도한 우도혁.

그놈 사진은 여전히 내 휴대폰에 보관되어 있다. 다음엔 만날 땐 문답무용으로 박살을 내기 위해.

헬스장에서도 한 번 있었긴 했는데, 그 경우는 트라우마 자극으로 인한 폭주였으니 정상참작 해주도록 하자.

“……분명 현실 플레이어가 된 기간은 너나 나나 같을 텐데, 왜 네 쪽에 별종이 더 집중되어 있는 거야?”

짧은 시간 동안 별 괴상한 놈들과 마주친 나에게 연성화는 동정어린 시선을 건넸다.

“내가 가장 알고 싶다, 야.”

“그래서, 내가 만난 플레이어가 지금 이 습격의 주범일 가능성은?”

“…….”

그 물음에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이름 모를 플레이어.

그놈은 어쌔신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내 얼굴은 이미 파악한 뒤다.

어쌔신의 은신 대책을 해두었기에 소재지까지는 들키지 않았을 테지만, 작정한다면 내 위치를 알아내는 것 정도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게임 감각으로 즐긴다던 녀석이 같은 플레이어인 나를 노리는 건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 뒷면에 있는 건 그놈은 아니다.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도 죽일 만큼 정보 차단에 철저한 놈치곤 너무 요란하게 공격해왔다.

녀석 같은 타입은 보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상대에게 틈도 주지 않고 공격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기습이 실패한다면 일단 물러나거나 준비해둔 다음 수를 썼겠지.

아무리 캐릭터의 약화가 목적이라지만, 캐릭터가 뻔히 보호하고 있는 플레이어를 향한 공격을 할 만큼 미련하진 않을 거다.

이름 모를 플레이어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도혁인가?

그 찌질한 놈은 더더욱 아니다.

나를 발견하더라도 언뜻 봐서 우세를 점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도망치겠지.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놈은 아니야.”

“그렇다면 우리를 공격해올 만한 놈은…….”

순간 나와 연성화의 머릿속에선 같은 인물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멸신검을 가져간 녀석과 만나게 해줄까?

정황상으로 보면 지금 공격해오는 상대가 율이 언급한 인물이겠지만, 이쯤 되니 쉽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놈에게 오죽 적당히 휘둘렀어야지.

그래도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땅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구덩이 위쪽에서 울려 퍼졌다.

한차례 무너졌던 경사면의 흙이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으며, 그것에 뒤덮일 뻔한 나와 연성화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스콜이 마법을 막는 것과 별개로 레아와 그 갑주의 남자 사이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일단 이것부터 정리하고 생각하자고.”

“오케이.”

일단 캐릭터들을 무장시키는 게 먼저다.

상대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레아와 스콜은 맨몸이었다.

애초에 싸울 생각 없이 이곳에 온 것이었기에,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와중에도 그들의 무장은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긴급사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무장을 시켜주려고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캐릭터 지정! ‘레아’! ……응?”

그런데 평소와 같은 방법으로 레아의 장비를 꺼내려는데 이상한 것을 느꼈다.

인벤토리를 다루는 거야 항상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손으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명확히 표현할 수 없긴 했다.

그래서 잘 표현은 못 하겠지만…… 뭔가 평소와 달랐다.

“어?”

마찬가지로 스콜의 장비를 꺼내주려 했던 연성화에게서도 나와 같은 반응이 나왔다.

처음 겪는 현상에 의아해하는 것이다.

잠시 서로를 돌아본 우리는 일단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

“무기 지정, ‘뇌룡(?)의 대형방패’! 장착!”

“‘아르크발레스의 비전서’! 장착!”

쿠우웅!!

툭!

레아와 스콜에게 전달해줄 생각이었던 거대한 도끼와 낡은 고서 한 권이 우리들 앞에 떨어졌다.

두 사람에게까지 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보고 방금 전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캐릭터에게 장비를 건네줄 때 느껴졌던 심리적인 동조감이 지금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리 때문인가?”

콰아아아아아앙!!!

구덩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전투 여파로 인해 흙이 또 다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캐릭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구덩이가 깊은 탓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위드 소프트웨어 건물에서 레반, 레테라에게 무기를 장착시키던 때와 비교하면 레아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면 캐릭터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면 무기를 건네줄 수 없는 걸지도 몰라.”

연성화의 추측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이제껏 인벤토리를 열어서 무기를 건넬 때는 항상 캐릭터를 바라보면서 했었다.

무기를 꺼내는 행위가 게임 속에서 거쳤던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거라고 했을 때, 지금은 캐릭터 인식 자체가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나는 입가에 손을 모아 구덩이 위쪽을 향해 외쳤다.

“레아!! 내 말 들려!? 지금 구덩이 아래로 내려올 수 있겠어!?”

콰아아아아앙!!

“나도 그러고 싶은데 철덩이 새끼가 가만 놔두질 않아!!”

레아는 역시 갑주의 남자에게 발이 묶여 있나.

“스콜! 넌 어때!?”

“지금, 말, 나누는 것도, 힘듭니다!”

콰과과과과아아앙!!!!

그 사이에 하늘을 어지럽히는 탄환의 숫자는 배로 늘어났다.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적보단 하나라도 놓쳤다간 치명상을 입을 게 뻔한 우리를 보호하는 스콜이 더 많은 컨트롤과 집중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갑주의 남자가 레아를 공격하는 한편 틈틈이 스콜까지 공격한다고 했을 때, 아마 그는 지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앗!

땅을 박차며 구덩이의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캐릭터를 눈으로 인식하는 게 조건이라면, 반대편에서 구덩이 위를 바라보는 걸로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상대가 그걸 두고 볼 리 없었다.

콰아아아앙!!!

“……!!”

물줄기가 바로 내 앞으로 떨어지며 축축하게 젖은 흙이 송곳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그것에 놀라 내가 비틀거렸고, 뒤에서 연성화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요현! 이쪽으로 와!”

그녀의 말대로 일단 물러나면서 머리 위에서 터지는 불과 물의 향연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우리를 식별할 수 없게 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

구덩이의 경사면을 벽으로 삼으면 보이진 않지만, 가로지르려고 하면 노출된다는 건가.

공격의 정확성이 높아질 테니 이대로 가로지르는 건 자살행위다.

그렇다면 가장자리 경사면을 따라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콰아아아앙!!!

우르르르!!

그런 우리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사각을 만들어주던 가장자리의 경사면이 물줄기에 맞고 무너져 내렸다.

만약 나와 연성화가 양동작전을 벌이며 한 사람이 저곳을 지나고 있었다간 쏟아지는 흙더미에 깔렸겠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연성화는 휴대폰을 꺼냈다.

우리들의 처지에 공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연락하는 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료들이었다.

[여보세요!? 주인님! 무슨 일에요, 갑자기 전화를 끊고!?]

휴대폰 너머에선 하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갑자기 연락이 끊긴 내 안부를 묻는 레반과 레테라의 목소리가 끼어드는 건 덤이다.

“적대 플레이어의 공격을 받고 있어! 도와줘!”

[……!! 당장 갈게요!!]

“지금 위치 정보를 보낼게!”

공격받고 있다는 말 하나만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하티 일행은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연성화가 위치 정보를 보내는 동안 나는 구덩이 위쪽을 바라보았다.

구덩이 위로 약간 보이는 산봉우리.

우리를 노리는 캐릭터는 저곳에 있다. 아마 높은 확률로 플레이어와 함께 있겠지.

“지원군이 오고 있어. 그때까지 버티면 돼.”

휴대폰을 닫으며 말하지만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지원군이 온다고?

아니.

아니야.

그 정도 가지곤 해결할 수 없어.

저 먼 산봉우리에서 저격하는 걸 보면 캐릭터들의 접근도 알아채겠지.

숫자로 불리하다 싶으면 자리를 뜨면 그만이야.

어차피 캐릭터들이 자신들을 뒤쫓는 것보다 플레이어인 우리들의 안전 확보를 우선시할 거라는 걸 알 테니까.

‘그런 건 성미에 안 맞아.’

이따위 시비를 걸어놓고 불리해질 거 같으니 도망친다고?

우린 그걸 그냥 두고볼 수밖에 없다고?

그건 못 참지.

“저놈과는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해.”

“뭐?”

“애초에 우리 캐릭터가 힘이 빠진 타이밍을 기다라고 있던 놈들이야. 이 기회를 놓치려 할까? 아주 작정하게 끝장내려 들 걸? 다른 녀석들이 올 때까지 못 버틸 수도 있어.”

콰아아아아아앙!!!!

또 다시 일어나는 큰 폭음과 진동이 불안감을 자극한다.

풀컨디션 상태라면 모를까 앞서서 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운 데다, 자신들의 지원까지 못 받는 레아와 스콜이라면 확실히 위험하겠다고 생각한 연성화가 물었다.

“그럼 우리가 뭘 해야 하는데?”

“뻔하지.”

척, 하고 내 손가락 끝이 위쪽을 가리킨다.

정확히는 저격이 날아오고 있는 산봉우리쪽이었다.

“저격엔 저격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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