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원흉 대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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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들의 싸움이라 하면 분명 이런 것이리라.
성인 남자 열 명은 달려들어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대도를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거한.
대도가 휘둘릴 때마다 일어난 풍압만으로 지반이 쩍쩍 갈라지고, 주변 숲을 불태우고 있던 불길마저 겁에 질린 듯 몸을 떤다.
거기에 맞서는 건 짐승의 털과 같은 거친 금발을 휘날리는 여성.
평균보다 약간 큰 정도의 체격을 가진 그녀가 크기 2m에 달하는 거한을 향해 달려든다.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져 내리는 대도.
거기에 맞서는 여성은 맨손이었다.
상식적이라면 다음 순간 여성의 몸이 일거에 양단되어야 했다.
카아아아아아앙!!!!
그러나 맞붙고 있는 두 남녀는 상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울려 퍼지는 건 파육음이 아니라 금속음.
금발 여성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도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행동에서 여성은 활로를 찾았다.
떨어지는 대도, 그곳 손잡이에서 가장 먼 검면의 끝을 때린 것이다.
절묘한 위치였다.
검이란 손잡이에서 멀어질수록 그곳으로부터 전달되는 힘이 약해진다. 검술 중에는 상대의 검끝을 붙잡아 제압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검끝을 제압한다고 하여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대도의 실린 힘은 만만치 않았다.
너무 끝 쪽을 후려쳤다간 주먹의 힘이 검면에 퍼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안쪽을 후려쳤다간 대도에 실린 힘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금발 여성은 힘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며 어디를 치는 게 최적의 결과로 이어질지 한순간에 파악하여 알아내었다.
덕분에 아름다울 정도로 곧은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대도의 측면으로 자신의 힘을 끼워 넣어 경로를 뒤트는데 성공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결국 여성을 스쳐지나간 대검은 땅을 쪼갤 기세로 깊숙이 처박혔다.
강력한 힘에 대가는 큰 동작과 빈틈이 넘치는 몸이다.
대도를 완전히 휘두른 갑주의 남자는 허점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러한 틈을 보완하기 위해 두꺼운 갑옷으로 몸을 무장한 것이다.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가지고 있는 것이 맨주먹뿐인 여성의 힘으론 갑옷의 견고함을 뚫고 대미지를 주기엔 힘들어 보였다.
그렇기에 갑옷을 먼저 제거해야 했다.
타악!
여성은 대도를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밟으며 뛰어올랐다.
몸을 반바퀴 회전하며 남자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 듯했던 그녀는 잽싸게 손을 뻗어 남자의 투구를 붙잡았다.
투구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가죽 벨트가 있었지만 무시했다.
가죽따윈 찢어버리고, 설령 찢어지지지 않고 버틴다면 남자의 목째로 졸라 죽일 생각이었다.
뚜둑!!
한순간 가해지는 힘에서 먼저 한계를 맞이한 건 가죽 벨트 쪽이었다.
고정하던 벨트가 끊어지자 투구가 솟구치며 남자의 턱밑까지 드러나던 순간이었다.
남자의 머리 위를 넘어가며 투구를 뽑으려 했던 녀석은 곳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기둥 같은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콰아아앙!!!
황급히 팔을 올려 방어하는 그녀를 후려친 건 다름 아닌 남자의 다리였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유연하고 날렵한 그는 오른발을 차올려 머리 위에 여성을 가격한 것이다.
충격에 밀린 여성이 투구를 놓친 채 뒤로 날아갔고, 그것을 쫓든 남자가 몸을 휘둘렸다.
땅속으로 파고들었던 대도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오히려 땅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뒤 뒤편을 통해 솟구쳤다.
마치 흙으로 이루어진 용과 같이 솟구친 대도는 아직 땅으로 떨어지기 전이었던 여성을 향해 날아갔다.
퍼버버벅!!!
살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여성과 갑주의 남자 사이가 다시 멀어진다.
대도는 몸을 비트는 것으로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나 대도와 함께 솟구친 흙과 돌조각이 문제였다.
대도를 휘두르던 괴력을 그대로 담고 있던 그것들은 마치 산탄총처럼 대도가 지나간 경로에 흩뿌려져 여성의 몸을 때렸다.
주륵…….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산탄총처럼 날아온 돌조각이 꽂힌 피부와 아슬아슬하게 대도에 스친 뺨에 난 자상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타아앙!!
그 상처에 아파할 겨를 따윈 여성에게 없었다.
그녀는 측면으로 몸을 날려 구덩이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을 막으려고 갑주의 남자가 뒤쫓는다.
두 남녀의 싸움은 어떻게든 구덩이로 다가가려는 것과 그것을 저지하는 것의 충돌이었다.
남자가 대도를 휘두르거나, 여성이 그것을 피하고 맞받아칠 때마다 굉음이 울리며 주변 지대가 뒤틀렸다.
구덩이로 접근하려는 행동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여성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달려들었고, 남자 또한 우직하게 자리를 사수하려는 듯 여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오~! 무기도 없이 싸우는 주제에 제법 잘 버티잖아?”
그리고 그러한 싸움의 양상을 태평하게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율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자.
망원경이란 현대적인 도구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토에겐 상대가 안 되지. 질질 끌지 말고 냉큼 끝내버려, 파니야.”
“그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남성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화려한 차림의 마녀 복장을 한 다홍색 머리칼의 여성이 서 있었다.
파니야라고 불린 그녀의 주위로는 허공에서 뭉쳐진 물덩어리가 떠 다녔다.
그건 마치 포대처럼 쉴 새 없이 물줄기를 쏘아대고 있었는데, 쏘아진 액체는 수km의 거리를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러다 도중에 붉은 불의 화살을 맞고 산화한다.
허공에서 연달아 터지는 물줄기들을 바라보며 파니야는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여자 쪽은 맨몸으로 그레토와 대적하고 있고, 남자 쪽은 휴대성 말고는 장점이 없는 소형 완드 하나로 제 모든 공격을 요격하고 있습니다. 만약 완전한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맞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파니야는 그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바로 옆에서부터 불쾌한 심기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키워낸 너희들이…… 저런 맨몸뚱아리에다 반쯤 죽어가는 녀석들보다도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파직!
망원경 몸통에 금이 갈 정도로 손을 꽉 쥔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파니야와 그레토는 남자가 직접 키워낸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저쪽 플레이어들보다 남자의 육성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였고, 그런 자존심의 흠집은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주인의 심중을 헤아린 파니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좀 더 성가셔질 뿐이지, 우리의 승리엔 변함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야 좀 마음에 든다는 듯 남자는 다시 망원경을 눈에 대고 싸움에 집중했다.
장비로 보나 대미지로 보나 자신의 그레토가 압도적인데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금발 캐릭터 때문에 자꾸 감질났다.
자신을 뽐낼 수 있을만한 속 시원한 승리를 원했다.
그거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마스터. 다시 한 번 학인 하겠습니다. 적 플레이어의 목숨을 노려도 상관없으십니까? 이쪽 세상에선 같은 인간을 죽이는 행위엔 큰 페널티가 동반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상관없어. 그 웃기는 게임 마스터가 말했잖아? 플레이어끼리의 싸움에 무슨 범죄가 일어난다고 한들 공권력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그레토의 싸움을 지켜보단 망원경의 시점이 이동되며 과거 공사장터였던 구덩이 쪽으로 이동했다.
저 아래에 플레이어 두 명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언급하기로는 나와 원한 관계가 있다던 플레이어라고 하잖아. 내가 PK이나 몹 스틸, 욕설 등은 자주 하고 다녀서 누구인지 짐작은 안 가지만, 불안의 싹은 모조리 뽑는다가 내 신조야. 소설도 속 시원한 사이다물밖에 안 본다고.”
파니야의 마법과 상대 쪽 마법사의 마법이 펑펑 터지는 상공 아래.
그곳 구덩이에서 그 두 플레이어가 공포로 벌벌 떨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우월감에 웃음이 나왔다.
이 우월감이야말로 그의 본질이었다.
자신은 항상 남들의 우위에 있어야 하며, 그런 자신을 무시하거나 위협하는 놈들은 용서 못한다.
게임 캐릭터라는 이름의 폭력을 얻은 뒤부터 항상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거나 무시하는 주변인들을 모조리 병원으로 보냈다.
저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스트레스 원인이 될만한 건 모두 제거해야 한다.
“응?”
그때 구덩이 쪽에서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언가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다 다시 쏙 들어갔다.
이상한 건 그게 사람 머리는 아니었다는 거다.
좀 더 크고 둥그스름한 무언가다.
“뭐였지?”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구덩이 아래쪽에서 불이 뿜어졌다.
퍼어어엉!!
“우왓?!”
그 폭발에 놀란 남자가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불의 화살과 물의 창이 맞부딪치는 격전지의 상공.
그곳을 뚫으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무언가 날아옵니다. 요격할까요?”
“……아니. 놔둬.”
처음엔 놀라긴 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리 놀랄 필요가 없었다.
날아오는 무언가는 그들이 있는 곳보다 한참이나 떨어진 산봉우리 정상에 떨어지고 말았다.
“푸하하하하! 근처에도 오지 못했잖아! 너무 무서워서 조준도 제대로 못하는 건가?”
캐릭터의 힘도 빌릴 수 없는 놈들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한 남자는 보이지 않는 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파니야의 반응은 달랐다.
공격을 늦추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그녀는 표적에서 시선을 떼 무언가가 날아간 산봉우리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한 듯 눈을 부릅떴다.
“도망쳐야 해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야!!”
남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파니야는 그를 안고 몸을 날렸다.
당연히 쉴 새 없이 쏘아대던 마법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편으로 이어진 산봉우리.
우르르르……!!!
그것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초장거리 마동력 대포 등급: 전설 분류: 대포남은 사용횟수: 2「현자들의 나라 헤이돌로스엔 전설적인 마법공학자 이카로스가 만든 도구들이 존재한다. 마동력 대포는 그중 하나로 초장거리 저격에 특화되어 있다. 내비된 마나석을 어마어마하게 소모하여 실전에선 잘 쓰이지 않는다. 사격 보조 기능이 있으며, 기록에 따르면 산맥 너머를 날아가는 와이번을 쏘아 맞추었다고 한다.」
하얀 원통형에 사이버틱한 물체 하나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채 서 있었다.
헤이돌로스를 여행하면서 얻어낸 아티팩트 중 하나로, 연료를 구비된 마나석으로 소모하기에 마력이 없는 우리라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문제는 겨냥이었다.
마동력 대포는 포신의 길이만 10m에 달하는 거대 대포였다.
사용은 할 수 있어도 설치는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캐릭터가 아닌 우리가 사용하려면 지면에 쏘는 결과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화약통을 굴렸던 때처럼 물건을 쌓은 뒤 그 위로 대포를 소환해 세우는 것이다.
방향은 얼추 맞기만 하면 되었다.
사격 보조 기능 덕분에 어느 정도 표적과의 오차는 수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이것으로 무엇을 날리냐는 거다.
적어도 일반적인 포탄은 아니었다.
“오케이, 명중.”
저 멀리 솟은 산봉우이 끝에 정확히 물건이 착탄하는 모습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함께 사격을 보조해준 연성화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동력 대포를 가지고 귀한 아공간 구슬을 쏘아 보내겠다고 했을 땐 무슨 생각인가 했어.”
아공간 구슬.
인벤토리와 별개로 사물을 담고 다닐 수 있는 아이템으로, 등급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물체의 양이 다르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쏘아 보낸 건 귀하디귀한 최상급 아공간 구슬이었다.
아깝긴 하지만, 우리를 엿먹이는 놈을 반대로 엿먹일 수만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저 안에 든 게 뭔데?”
연성화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물 300톤. 원래는 카르마니아 쪽에 가뭄에 시달리는 부족 구하기 퀘스트를 수행하려고 아공간 구슬에 담아둔 건데, 이걸 이렇게 써먹네.”
콰과과과가가아아아아앙!!!
폭음과 산이 움직인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 움직이는 건 따로 있었다.
아공간 구슬이 부서지며 쏟아져 나오는 300톤의 물이 흙과 나무를 뽑아내며 내려오는 산사태였다.
산봉우리 전체가 슬라임으로 변한 듯 흐물흐물하게 변하며 주저앉는 모습이 이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적이 산봉우리 아래에 숨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저격할 상황이 아닐 것이다.
빨리 피하지 않는다면 저 산사태에 휩쓸리고 말 테니까.
그리고 작전이 통했는지, 하늘에선 더 이상 물줄기가 날아오지 않았다.
“마스터어어어!!!”
쇠에 부딪쳐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 급속도로 멀어진다.
플레이어 신변에 변화를 깨닫고 이쪽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된 것이리라.
쿠웅! 쿵!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집착에서 해방된 레아와 스콜이 구덩이 밑으로 착지했다.
레아는 말할 것도 없고, 물줄기에 피해를 몇 번 입은 스콜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과할 정도로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원하는 건 하나다.
당한 만큼 갚아주는 거.
그리고 그건 나와 연성화의 생각과도 같았다.
“자, 그럼 가볼까? 우릴 이렇게 고생하게 만든 빌어먹을 원흉과 대면하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