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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49화 (149/173)

〈 149화 〉 뇌명(?)이 울리다 ­ 1

* * *

난데없이 터진 물폭탄 때문에 산간지대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산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의 뿌리가 물을 흡수하고 흙을 고정시켜 산사태 방지한다.

하지만 그것도 비처럼 서서히 물이 쌓이는 경우의 얘기지, 갑자기 불어 닥친 물세례라면 얘기가 다르다.

물 300톤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댐에서 1초간 방류되는 양이다.

뿌리가 흡수하고 자시고도 없이 봉우리 정상은 얇은 표층 째로 벗겨져나갔다.

모래로 쌓은 성이 무너지듯 산봉우리는 꼭대기부터 녹아내렸고, 그로 인해 생긴 토석류는 지상까지 내려와 우리가 있는 영역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철퍽! 철퍽!

그렇게 산사태가 잠잠해진 뒤, 우리는 발목 아래까지 적시는 진흙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연성화는 신발 속으로 질퍽거리는 감촉이 침범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좀 지나친 거 아니야?”

“뭐라구요? 잘 안 들리는뎁쇼, 파이어 애로우로 융단 포격 명령을 내린 아가씨.”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닿은 토석류는 주변을 불태우고 있던 화재마저 진압하였다.

진 흙이 묻으면 좀 어떠한가.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이었다.

산불이 더 퍼져나가기 전에 끌 수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갑주의 남자는 주인의 위험을 눈치 채고 산봉우리 쪽을 향해 달려갔다.

앞서 간 녀석이 자연스레 우리를 망할 시비꾼에게 안내해줄 것이다.

놈들도 갑작스런 토석류를 피해 지상으로 내려왔다면 곧 마주칠 수 있을 거다.

“도망치진 않았겠지?”

“저 애들이 저러는 꼴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 듯 우리들 곁을 지키는 레아, 스콜에게서 살기가 점차 진해진다.

앞선 부상은 포션을 통해 회복했고, 지금은 완전한 무장까지 갖춘 상태다.

스콜은 가슴, 어깨, 허리부근에 경갑과 마법사 특유의 긴 천이 혼합된 옷을 입었다. 최소한에 방어력과 옷에 서린 마법적 부과효과를 챙기려는 무장이었다.

레아는 오랜만에 착용한 전신 갑주의 감각에 익숙해지려는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과 어울리는 금색 바탕의 기사 갑옷.

이것을 입는 건 현실로 나온 이후……. 아니, 내가 게임을 그만두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몸을 감싸는 익숙한 무거움에 점차 과거의 감각을 깨워가던 그녀는 문뜩 나를 향해 물었다.

“죽여 버려도 되지?”

‘누구를?’이라는 질문은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이토록 살기를 드러내며 죽이고 싶은 게 조금 전 습격해온 그들밖에 더 있겠는가.

이미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거 없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듯, 레아는 본격적으로 날뛰기 전에 확인을 한 것이다.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어떠한 사냥개보다 무섭게 달려나가 표적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러고도 남을 만큼 그녀는 열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대단히 아쉽게도, 나는 그런 그녀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해주어야 했다.

“죽이지는 마.”

“아, 왜!”

바람을 배신당했다는 듯 레아는 부모에게 짜증을 내는 사춘기 소녀처럼 소리쳤다.

“또 그놈의 불살주의야!? 저놈들은 자기 방어 목적으로 공격해댄 것도 아니잖아!”

“나라고 딱히 불살주의인 건 아니거든? 전적이 있기도 하고.”

“있다고?”

설마 죽여 본 전적이 있다는 말이 나올지 몰랐다는 연성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한 사람의 입에서 사람 죽여본 적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봐라. 누가 안 놀라겠는가.

“실제로 죽인 건 레반과 레테라이긴 한데, 명령을 내린 건 나였으니 결국 마찬가지지. 사정이 좀 복잡해. 나중에 설명해줄게.”

곧 충돌이 일어날 판국에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캐릭터라는 막강한 힘을 얻었지만, 연성화는 그 힘을 함부로 휘두르고 다닐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 심성 탓에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것도 가까이에서 접해본 적도 없을 것이고, 그 탓에 나와 심리적인 거리감을 두게 될지 몰랐다.

그 거리감이 앞으로 일어날 전투에서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레아의 의문에 답해주는 한 편 하나의 목표를 제시했다.

“잊은 건 아니지? 우리가 왜 이곳에 모이게 되었는지.”

“……!”

“율이 언급한 인물이 저 녀석인지 확인해야 돼. 그러니 죽이지는 마.”

나라고 갑자기 살해당할 뻔했음에도 참는 호구는 아니었다.

감정에 휩쓸려서 가장 중요한 걸 놓치게 되는 게 싫은 것뿐이다.

“……알았어.”

이를 갈며 말하는 소리에 레아도 내 의중을 안 레아가 잠자코 받아들였다.

살심을 억눌러야 할 때를 그녀라고 모르진 않았다.

그렇다고 열기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라 속으로 묵힐 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나는 열기를 분출할 배출구를 만들어주었다.

“사람 무는 개새끼의 이빨 두 개 정도는 뽑아도 돼.”

죽이는 것과 별개로 저놈은 이미 선을 아득히 넘겼다.

내가 남의 운명을 결정짓는 심판자는 아니지만, 언제든 사람을 찌를 수 있는 개자식 손에 칼이 쥐어진 걸 놔둘 만큼 만사에 무관심하지도 않다.

그 말에 레아가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두 번 다신 음식물도 씹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뽑아놓을게.”

“맡겨두십시오.”

레아는 물론 스콜까지 수락했다.

죽여선 안 되는 건 플레이어뿐. 나머지 두 캐릭터에겐 분노를 원 없이 쏟아내도 좋다는 말에 그들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이로서 목표는 제시되었다.

내가 한 짓을 알게 된 연성화가 어떤 마음을 품든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건 문제없을 것이다.

“…….”

연성화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이것만 말해줘.”

“응?”

“네가 죽였다던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었어?”

어떤 사람들?

보자……. 조폭에다가 다짜고짜 사람 납치하고, 패고, 약점을 보이면 이용하려들던 놈들을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떠올리기도 싫은 놈들이었기에 나는 대충 한 마디로 정리하여 말했다.

“사람 가죽 뒤집어 쓴 살모사 새끼들이었어.”

“그럼 됐어.”

“뭐?”

“네 성격은 게임 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넌 절대 자신만을 위해 남에게 부조리한 폭력을 휘두르는 녀석이 아니야. 현실에서 만난 네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았고,”

연성화는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런 너니까 지금까지 믿으려 할 수 있던 거야.”

“얘가 쪽팔리게 왜 이래.”

그런 연성화의 시선도, 온화한 말투도 무척 낯부끄러웠기에 나는 눈을 피했다.

쑥스러움이 밀려오는 얼굴을 감추려 다른 곳을 돌아볼 때, 뒤편에서 따라오던 레아와 스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늬들 왜 우는 거냐?”

“시끄러. 안 울었어. 감동도 안 했어.”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란 이런 건가 봅니다.”

우리들의 싸움 때문에 이놈들을 방치한 기한이 길었던 건가.

머리에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응? 잠깐, 아버지.”

그러던 중 레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녀석들의 기척이 사라졌어.”

“뭐?”

그 말에 나아가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려온 진흙과 돌덩이 뒤덮인 숲 너머에 보이는 건 새까만 어둠뿐이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도, 모습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들의 기척이 사라졌다는 레아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망쳤다는 거야?”

“도망쳤으면 바로 추적을 시작했지. 그냥 갑자기 훅하고 사라져 버렸어.”

“텔레포트 계열의 마법을 쓴 건 아닙니다. 공기 중 마나의 유동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짐승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지닌 녀석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건만, 그것을 피해 모습을 감춘다고?

연성화와 나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어찌되었든 도망치지 않고 숨은 거라면, 우리를 기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인데…….”

이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접근하는 건 아무리 봐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적들이 돌연 사라진 이 상황을 밝혀내지 않으면 저 괴물이 입을 멀리는 듯한 숲 사이로 걸어들어 갈 순 없다.

“하나는 기사에, 다른 하나는 마법사. 은신 스킬을 배우고 있을 만한 녀석은 없었어. 은신 스크롤인가?”

“숙련된 암살자도 아니고, 스크롤로 재현한 은신이라면 효과가 떨어져. 방금 막 싸워서 한참 달아오른 우리 애들을 피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은데?”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뭔가 짚이는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파이어 애로우를 날리기 전까지 우리는 그 기사 캐릭터가 접근했다는 걸 눈치 못 챘지?”

“응? 확실히 그랬지.”

“처음엔 뭔가 트릭을 써서 들키지 않고 접근해 온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실 우리가 오기 전부터 녀석이 그 장소에 있었다면?”

“뭐?”

연성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함께 굴러 내려온 듯 온 몸이 진흙에 뒤덮인 바위였다.

“‘암석’ 말이야.”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연성화는 귀신 같이 알아듣고 표정을 굳혔다.

그동안 협력 플레이를 해온 짬은 만만한 게 아니다.

“스콜. 날려버려.”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그녀가 망설임 없이 지시를 내리자 스콜은 손에 든 책을 펼쳤다.

그 책 또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촉매로, 이전에 사용한 완드보다 고효율적으로 마법을 운용할 수 있었다.

파앗!

펼쳐진 책이 빛나기 시작하며 스콜은 자신이 선 땅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쇼크 웨이브.”

그 순간, 연못에 돌멩이를 던져 넣은 듯한 파문이 진흙 위에서 퍼졌다.

그것은 스콜을 제외한 우리 세 사람에겐 어떠한 영향도 없이 그저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잔잔한 호수 위에서처럼 퍼지던 파문은, 우리를 지나친 순간 갑자기 격류가 되었다.

콰가가가각!!!!

원형으로 퍼지는 쓰나미처럼 사람의 키보다 높게 솟구친 진흙이 사방을 휩쓸었다.

굴러온 토사류에도 견뎌내던 나무가 부러지고 사람만한 바윗덩어리가 날아간다.

진흙 위로 퍼지는 충격파는 토석류로 어지러워진 주변을 말끔히 밀어내었다. 그 범위는 눈대중으로 봐도 반경 50m를 넘었다.

그리고, 충격파의 위력이 점차 사그라들 즈음, 한 쪽에서 흐름을 거스르는 반발이 일어났다.

퍼어엉!!

반구체를 그리는 투명한 막이었다.

예전에 하티가 비슷한 걸 만든 적이 있지만, 새하얬던 그것과 다르게 저것은 표면에 푸른빛이 서려 있었다.

신성력이 아니라 마나를 통해 만들어낸 방어막이었다.

특이한 건 그 막이 지키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내가 가리킨 바위와 같이, 어디에서든 굴러다니는 바윗덩어리들이었다.

『변신 마법 ­ 암석화』

말 그대로 암석으로 변신하는 마법으로, 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대신 은신처럼 기척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놈들이 몸을 숨긴 트릭이 바로 이것이었다.

“……에이 씨. 너무 빨리 눈치 챘잖아.”

그 바윗덩어리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리 봐도 바위로밖에 보이지 않던 그것이 빛나는 가루를 흩뿌리며 사람의 형상 하나를 뱉어내었다.

20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는 길게 드리워져 있고, 가죽 자켓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남자의 뒤편에서 바위 두 개의 모습이 흩어지며 두 명의 인영이 더 모습을 드러내 뒤를 따랐다.

조금 전에 달려 나갔던 갑주의 남자와 마법을 난사한 것으로 추측되는 여성이었다.

저벅.

우리와 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선 남자가 이쪽이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여어! 이렇게 같은 SoR끼리 만나게 될 줄 몰랐군. 내 이름은…….”

콰아아아아아앙!!!

그러나 그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폭음이 터졌다.

남자가 말하자마자 날아든 스콜의 마법과 레아의 돌진이 각각 상대의 두 캐릭터를 노렸기 때문이다.

상대는 지체하지 않고 반격했고, 그 부딪침으로 일어난 폭풍에 남자는 엉거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폭음의 충격이 가셨을 때 성난 목소릴로 외쳤다.

“야! 아직 말하고 있는데 뭐하는 짓이야!!”

그 말에 어이가 없는 건 우리 쪽이었다.

“저 또라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냐?”

“냅둬. 단기 치매가 와서 자기가 방금 뭘 했는지 기억 안 나나 보지.”

정당한 결투라도 하기 바랬다면 그 타이밍이 한참 전에 지나가버렸다.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면 우리도 환영이야. 첫만남 때 그랬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시비를 걸어온 대가는 받아야지?”

그 말에 호응하듯 우리 앞에 선 레아와 스콜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냈고, 그 기세에 닿자 살짝 위축되는 듯 했던 남자가 갑자기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참……. 용케 살아났다며 칭찬 좀 해주고 시작하려 했더니……. 그레토! 파니야!”

“레아!”

“스콜!”

플레이어들의 외침과 함께 각자의 캐릭터들이 상대의 숨통을 끓기 위해 달려든다.

어쩌면 현실 세계로 온 뒤 처음으로, 캐릭터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살육전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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