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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55화 (155/173)

〈 155화 〉 묵힌 원한 ­ 4

* * *

그레토의 목이 날아갔다.

아무리 웬만한 중상에도 죽지 않는 초인이라고 한들, 생명체로서의 한계는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게임 속에선 그저 수치로만 표현되는 대미지만, 이곳에선 상처가 곧 대미지다.

아무리 캐릭터들이라도 목이 날아간다는 크리티컬 앞에선 생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면 더 이상 생물조차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인간과 다를 뿐, 여전한 생명체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레토의 몸은 천천히 넘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어, 어억……!”

설마 멸신검까지 쥐어준 그레토가 저렇게 당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는지 석오태의 입이 떡 벌어진 채로 굳고 말았다.

완전한 벙어리가 되어버린 그를 시선 한구석으로 치워두고, 나는 땅 위에 엎어지는 그레토의 시신을 보며 연성화에게 물었다.

“……너 캐릭터가 죽는 거 실제로 본 적 있어?”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실제로 일어날까?”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가 말하는 건 연성화가 율에게서 들었다던, 캐릭터를 저쪽 세계로 돌려보내는 방법에 관한 문제였다.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설정인 ‘불사의 저주’.

그것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글레이그 대륙을 벗어난 지금조차.

그 말이 진실이라면, 저 그레토의 시신에도 분명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파앗!

변화가 일어났다.

쓰러진 그레토의 몸을 하얀 빛무리에 뒤덮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죽은 시체를 파먹는 미생물처럼 그의 몸을 천천히 분해시키더니 하늘로 떠올랐다.

그 움직임을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뒤쫓았다.

“저 빛무리, 게임에서 캐릭터가 죽으면 나타나는 그거 맞지?”

“응. 게임에선 땅에 스며들 듯 아래로 내려갔는데…… 저건 반대로 위로 올라가네?”

게임 속에서 사망하면 시체는 빛으로 변해 땅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육신은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나아가다 마지막으로 쉬었던 생명의 샘에서 부활한다. 그게 저쪽 세상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세계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인지 육신이 변한 빛무리가 향하는 곳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계속 올라가던 빛무리는 밤하늘의 별무리와 뒤섞여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 남은 건 이제 별빛뿐이다.

도시의 불빛과 한참이나 떨어진 덕분에 밤하늘의 별들은 평소보다 더 잘 보였다.

“……설마 우주 저편에 글레이그 대륙이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우주에서 왔다고 밝혀도 이상할 것 없는 녀석이 판을 짜놨으니 뭐라 부정하기도 힘드네.”

그레토의 잔해가 밤하늘로 사라지는 것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 게임,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의문점이 짙어져만 갔다.

***

“…….”

무기에 묻은 그레토의 피를 털어내고, 하늘로 올라가는 빛무리를 힐끔 바라 보던 레아는 그대로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건 각종 마법을 시전하며 휘두르는 스콜의 모습이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그레토가 사라진 밤하늘을 수많은 빛들이 어지럽힌다.

결코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발광체.

마나의 힘으로 구현해낸 살의의 형상화들이었다.

쏘아지는 마법들의 주인은 스콜과 파니야였다.

기사 대 기사의 싸움은 끝났지만, 마법사 대 마법사의 싸움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레아가 끼어들어 동료를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난 먼저 간다~.”

“쳇.”

레아는 그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스콜을 도우려는 기색도 없다.

그저 잔업과 씨름해야하는 동료를 놀려먹듯, 씨익 한 번 웃어주며 지나쳐갈 뿐이다.

스콜은 레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보단, 그녀가 먼저 싸움을 끝냈다는 사실이 분한 듯 작게 혀를 쳤다.

“네 녀석이 질기게 버티는 바람에 추월당해 버렸잖아.”

스콜은 그 불만을 파니야를 향해 털어놓았다.

파니야의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눈앞의 스콜을 쓰러뜨리는 것 하나조차 벅찼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멸신검을 든 그레토를 상대하는 동안에도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친구와 흔히 나누는, 누가 먼저 목표를 달성할까 겨루는 그런 흔해빠진 경쟁 말이다.

파니야 손에 쓰러진다는 전제 따윈 아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누굴 우습게보고 있어!”

석오태와 같은 개차반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을 받아온 파니야가 자신이 무시 받는 이 상황이 고깝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스 레이드 건! 버스트!”

아이스 레이드 건은 얼음 탄환을 쏘아대는 사출구를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버스트는 위력 증폭 마법.

말 그대로 마나 소모양이 많아지는 대신 마법 그 자체의 위력을 높이는 마법이다.

가뜩이나 현실의 총기류보다 강한 위력을 가진 얼음 탄환은 추가로 마나를 쏟아 붓는 것으로 대구경 저격 소총을 뛰어넘는 위력을 가지게 되었다.

레이드 건 마법의 포대는 항상 시전자의 주위를 떠다니며 표적을 공격한다.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쏘아지는 마법 탄환은 견제 이상의 효과를 내며 당하는 입장에서도 골치 아프다.

오죽하면 마법사 캐릭터와 PVP를 할 때면 최우선적으로 저 포대를 없애는 것이 당연시될 정도였다.

그러한 기능을 가진 원통형 포대 네 개가 파니야의 주위에 형성되었다.

철컥.

각 포대는 서로 다른 목표를 겨냥했다.

하나는 눈앞에 있는 스콜을 향해, 하나는 등돌려 걸어가는 레아, 하나는 신요현이며, 하나는 연성화였다.

파니야는 처음을 제외하곤 플레이어를 직접적으로 노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과 가까이 있는 석오태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긴급사태다.

아직은 스콜과의 1대 1을 유지하고 있지만 레아가 마음을 바꿔 끼어들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역전 당한다.

그러니 적어도 저들의 의식을 분산시켜야 한다.

플레이어를 지키느라 파니야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없게 되는 틈을 노려 강력한 일격을 때려 박는 것이다.

“멍청하군.”

상대의 의도를 읽은 스콜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겨냥된 네 개의 포대가 일제히 얼음을 뿜었다.

파바방!!

정확히 표적을 향해 사출되는 얼음 탄환.

그러나 그 중 그 어느 것도 파니야가 원한 결과를 그려내진 못했다.

콰과광!!

레아는 날아오는 탄환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대방패를 짊어지듯 어깨에 걸쳤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레아의 상체는 완벽히 보호되었고, 그녀의 뒷목을 노리고 날아들던 탄환은 방패에 막혀 덧없이 바스라질 수밖에 없었다.

신요현과 연성화 쪽으로 날린 탄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왼손의 방패로 자신에게 쏟아진 공격을 막았다면, 오른손의 도끼는 감히 주인들을 노리는 얼음 탄환을 일격에 박살내었다.

“레아가 저쪽으로 간 시점에서, 우리의 주인들을 노리는 공격은 이미 쓸모없다는 걸 모르겠나? 차라리 네 포대 전부 나에게 집중했다면 그게 더 승산 있었을 거다.”

콰가각!!

“……!!”

스콜 또한 길게 뽑아낸 마력검을 휘둘러 눈앞에 얼음탄환을 모조리 베어내고 달려나간다.

견제를 위해 시전한 파니야의 마법은 주의를 분산시키기커녕, 오히려 스콜이 거리를 좁히기 딱 좋은 빈틈을 만들어내었다.

스콜이 지근거리에서 압박해 온다.

파니야가 준비하고 있던 강력한 일격을 취소하고 방어마법을 펼쳐졌지만, 그것이 완전한 형태를 취하는 것보다 먼저 파고들어온 마력검이 방어벽을 가른다.

“크아아아아아아!!!!”

마지막 발악처럼 파니야는 생성된 포대를 전부 자신을 향해 돌렸다.

이대로 스콜과 함께 동귀어진이라도 벌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콜의 눈빛에 흔들림은 없었다.

뒤질려면 너나 뒤지라고 말하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것만으로 시야 밖에서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였고, 그 움직임은 자연스레 마력검의 휘두름으로 이어졌다.

촤악!! 촤아악!!

마력검이 그려내는 푸른 선이 V자처럼 이어졌다.

그것에 파니야의 양팔이 잘려나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듯, 파니야는 뒤로 몸을 날리려 하였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콰직!!!

그러나 그녀의 발등을 밟아 뭉개는 스콜의 발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려던 파니야의 목덜미를 붙잡아 주위로 힘껏 휘둘렀다.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공중을 난 파니야 몸에, 아직 다 사출되지 않았던 남은 얼음 탄환이 날아와 박혔다.

퍼버버벅!!!

파니야의 피부를 파고들고, 몇 개는 관통하며 지나가는 얼음 탄환들.

그대로 파니야를 바닥에 내팽개친 스콜은 엎어진 그녀의 등 위에 무릎을 올리고, 머리카락을 붙잡아 머리를 강제로 치켜세웠다.

그녀의 목에 마력검을 가져다 댄 뒤에야 스콜은 신요현과 연성화를 돌아보았다.

“상황 종료했습니다.”

스콜은 담담히 전투의 끝을 알렸다.

이로써 석오태가 믿던 두 개의 송곳니를 모조리 뽑혀나갔다.

***

“뭐야…….”

석오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그레토에 이어 너까지 뭐하는 거냐, 파니야……. 너까지 그러면 안 되잖아!”

“아…….”

석오태의 외침에 피투성이가 된 파니야의 입술이 움직이려 하였다.

그 순간 스콜의 마력검이 경고하듯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마법 영창이든 단순한 중얼거림이든 상관없이 소리를 낸 순간 목을 베겠다.”

“…….”

목에 닿은 살기는 진심이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죽는다면 정말로 석오태 혼자만 남게 된다.

지금은 분한 마음을 억눌러서라도 얌전히 있어야 했다.

살아만 있다면 그를 구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이든 감내할 의지가 파니야에겐 있었다.

“빨리 일어나!! 이 쓰레기들을 날려버리라고!!”

그러나 그런 파니야의 마음을 석오태는 알아주지 않았다.

그저 어린애가 떼를 쓰듯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을 강요할 뿐이었다.

“거 되게 시끄럽네.”

퍼어어억!!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레아가 석오태의 복부를 걷어 쳤다.

진심으로 찬 건 아니었다.

그랬다간 내장 파열 정도가 아니라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을 테니까.

“커억!!”

그러나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라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얻어맞은 복부를 움켜쥐며 몸을 웅크린 석오태를 벌레보듯 내려다보던 레아는 신요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놈 안 죽여? 혹시 손 더럽히는 게 싫으면 나에게 말해. 아주 그냥 다진 고기로 만들어줄게.”

“히, 히익!!”

가벼운 말투 하나하나에 선명히 묻어나는 살기에 놀란 석오태가 몸을 웅크린 자세로 어떻게든 레아와 멀어지려 발버둥을 쳤다.

신요현은 그런 그를 고민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진짜 죽여 버릴까 했지만, 이미 이빨 다 뽑힌 놈 죽여 봤자 뒷맛만 나쁠 거 같다.”

“아직 사람 죽이는 데엔 익숙하지 않구나? 이참에 이놈을 연습용으로 써도 괜찮지 않아?”

“난 그 익숙해지는 것에 싫다고.”

신요현이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자 연성화도 거들었다.

“지금은 그냥 놔둬. 우리에겐 받아내야 할 게 있잖아?”

“……아. 하긴 그렇죠.”

연성화에 말에 납득한 듯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럼 생명에 지장 없을 정도만 패도 돼?”

“……뭐, 그래라.”

묵힌 원한이 쌓인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레아도 원흉을 눈앞에 두고 마냥 참기는 어려웠다.

그 점을 이해한 신요현의 허가가 떨어지자, 레아는 강아지와 놀아도 된다고 부모에게 허락받은 아이처럼 표정을 상기시켰다.

솔직히 그동안 과격한 행보만 보여 온 레아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밝은 미소였지만, 석오태에겐 다가오는 사신의 미소에 불과했다.

달아날 공간은 없고 자신에게 남은 건 암울한 미래뿐이다.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지 석오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제길! 제길! 내가 왜 이 꼴을 당해야하는 거지!? 난 아무 잘못도 한 적 없는데!”

“허……. 뻔뻔함도 이쯤 되면 존경스러울 지경인데?”

양심 없는 것들에겐 매가 약이라고 했건만, 석오태의 철면피에는 그 약도 통하지 않았나 보다.

누구나 이쯤 되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반성을 하거나, 못해도 하는 척은 할 것이다.

그런데 이놈은 여전히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이 불합리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고 방식 자체가 틀려먹었다.

“다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만 똑바로 했다면 이러지도 않았어!!”

급기야 석오태는 이 일의 원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석오태의 분노와 원망은, 애꿎게도 가장 그를 위해 자신을 바쳐온 그레토와 파니야를 향해 있었다.

아무런 논리조차 없는 감정적인 말.

거기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었지만, 그의 말은 기어코 선마저 넘으려 하고 있었다.

“너희들처럼 약해빠진 놈들은 만드는 게 만드는 게 아니었……!!!”

퍼어억!!!

촤아아아악!!!!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천천히 석오태에게 다가가던 레아는 갑자기 감정적으로 변한 듯 달려들어 석오태를 후려쳤다.

그 위력은 그의 몸이 붕 떠오른 뒤 바닥에 떨어질 정도였다.

마치 달려오는 트럭에 치여서 나가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 정도면 의식이 날아가는 건 당연하고, 살아 있을지조차 걱정이 될 정도였다.

동시에 파니야를 제압하고 있던 레아가 스콜이 마력검을 힘껏 내리쳐 그녀의 목을 절단 내었다.

충격이 밀려나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 파니야의 눈은 마지막으로 석오태의 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애달프게 그를 바라보던 파니야의 눈은 곧 빛이 꺼져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연성화는 명력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문답무용으로 파니야의 목을 날려버린 스콜을 향해 물었다.

“어어……. 일단 이것부터 물어볼게. 왜 죽인 거야?”

그 말에 날려버린 석오태를 내려다보던 레아가 먼저 운을 떼었다.

“이놈들은 우리들의 적이고, 또한 우리의 사이를 틀어지게 한 개자식이야. 하지만…….”

“……그 쓰레기의 마지막 말만큼은 듣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마 플레이어들은 이해 수 없는, 캐릭터들만의 감정적인 영역이었을 것이다.

빛이 되어 사라지는 파니야의 시체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아와 스콜을 보며 신요현과 연성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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