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진정한 해후 3
* * *
율은 싱글벙글거리는 표정으로 바위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각자의 무기를 쥔 캐릭터들이 노려보며 대치한다.
우리 중 가장 앞열에는 탱킹 능력이 뛰어난 레아와 진혜가 각자의 방패와 무기를 든 채 나서고 있었고, 그 뒤를 근거리 딜러인 레반과 레테라가 점하고 있었다.
나와 연성화는 중열에 있었으며, 원거리 딜러인 스콜과 지그문트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바로 양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뒷열에는 서포터인 하티가 섰다.
분명 서포터일진데 율을 바라보는 표정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직업을 광전사로 전향해 맨 앞열로 이동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율이 출현하자마자 캐릭터들은 아무런 합도 맞추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위치를 찾아 이동했다.
지금 캐릭터들은 이상적인 파티의 구도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레이드 파티.
대상은 율 하나였다.
“아! 아! 잠깐 스톱! 전투태세 풀어, 이 녀석들아!”
그것을 내가 소리 내어 외치며 멈췄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분위기에 내가 제지하자 캐릭터들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고, 바위 위에 서 있던 율은 아쉬운 듯 그 자리에서 쪼그리고 앉았다.
“뭐야, 안 덤비는 거냐? 이렇게 판 깔아줬는데도 몸을 사리다니, 실망인데?”
“지랄하지 마, 새꺄! 네가 내 부모냐?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게?!”
내가 율을 향해 삿대질하며 외쳤고, 연성화는 침착한 말투로 율과의 대립에 선을 그었다.
“우린 널 얕보지 않아. 그래서 지금조차 우리의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지. 이대로 덤벼도 그때처럼 네가 일방적으로 가지고 놀 뿐이잖아? 가뜩이나 스콜과 레아는 조금 전까지 격전을 치렀어. 우리나 이 녀석들이나 피곤해 죽겠으니까 더 힘들게 하지 말라고.”
“호오……. 둘 다 통찰력이 나쁘지 않네.”
모르는 아저씨가 맛있는 걸 사줄 테니 따라오라는 말에 따라가지 않은 아이들을 바라보듯, 율은 대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그저 장난을 치는 걸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놈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도발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칭찬하는 것도, 친절을 베푸는 것조차 모든 게 장난처럼 보인다.
“힘을 가진 인간은 거기에 휘둘리기 쉽지. 저기 딱 좋은 예시가 있잖아?”
율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한쪽에 얼굴이 찐빵처럼 부푼 상태로 땅 위에 널브러져 있는 석오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율은 바위 위에서 가볍게 날아올랐다.
우리를 무시하고 이동한 그의 발이 착지하는 곳은 바로 쓰러진 석오태의 옆이었다.
“나에게 대적할 캐릭터 일곱 마리를 모은 게 너희가 아니라 이놈이었다면 전개가 달랐을걸? 아마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나에게 이긴 것처럼 굴겠지. 상대에 전력과 자신의 전력을 냉정히 분석도 못 하는 오만방자한 놈. 난 그런 놈이 좋더라고.”
콰직.
율은 아슬아슬하게 형태만은 유지하고 있던 석오태의 코끝을 담뱃불 끄듯이 즈려밟았다.
기절한 석오태의 신체에서 떨림이 일어난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신체가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벌레가 발버둥치는 듯한 움직임이 즐겁다는 듯 율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자만에 빠져 콧대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놈을 잘근잘근 밟아주는 게 너무 재미있거든. 오만방자한 표정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당혹, 부정, 혼란의 순서로 변하는 거, 너희도 조금 전에 구경했지? 코미디가 따로 없지 않았어? 몸에 오싹오싹하는 쾌감이 들지 않았냐고?”
감상을 묻는 율에게 연성화는 질색하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들겠냐. 누굴 변태로 몰고 있어, 이 새디스트가.”
“변태라니! 싸움광 타입이라고 해줘. 원래 그런 놈들은 때리는 것과 맞는 것 둘 다 즐기거든.”
결국 또 다시 율이 즐기는 헛소리만 길어질 뿐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용건을 물었다.
“헛소리는 됐고, 결국 뭐 하러 온 거야?”
“칭찬, 위로, 그리고 선물을 하기 위해 왔지.”
셋 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목적이었다.
율이 하는 행위라니 단어 그대로의 뜻이 있을 거 같지도 않다.
우리가 의심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율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늘어 놓았다.
“우선 칭찬. 이야~ 아주 잘했어. 솔직히 이쪽 석오태와 너희 두 사람이 이길 확률은 거의 반반이었거든? 그쪽 레아와 스콜이라는 멍멍이가 싸움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며 부상을 쌓아갔다면 승률은 더 희박해졌겠지. 이건 두 사람이 서로를 믿는 마음이 일으킨 기적이야. 가슴 펴고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짝짝짝짝!
율은 환하게 웃으며 양 손바닥을 마주쳤다.
정말 비아냥 하나 없이 상대를 칭찬하는 마음이 가득한 미소와 박수였다.
하지만 우린 그걸 표면 그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러한 상황을 꾸민 게 율 본인이었다.
녀석은 나와 연성화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서로 만나게 하였고, 그 뒤 석오태를 난입시켰다.
아무런 목적성도 없다.
그저 아무나 죽고 아무나 이기라는 듯 율은 판을 짰을 뿐이다.
사로잡은 장수풍뎅이 세 마리를 같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런 주제에 저런 진심 어린 칭찬이라니, 솔직히 도발 이외의 의미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아버지. 저놈 원래 저런 놈이야? 어그로 끄는 실력이 나 이상인 거 같은데?”
그냥 이대로 달려들어 얼굴을 찍어버리고 싶은지 레아가 도끼를 꽉 쥐며 물어왔다.
내 키보드 배틀을 가장 많이 접했기 때문일까, 다른 캐릭터들보다 말로 하는 어그로에 일가견 있던 레아는 존재 자체가 어그로인 율의 존재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당연히 내가 말렸다.
“참아, 레아. 우리가 먼저 덤비지 않으면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을 놈이지만, 반대로 덤빈다면 엄청 기뻐하면서 가지고 놀듯 반격해 올 거야.”
“그래.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은 그쯤 해둬. 짜증밖에 안 나니까. 그럼 위로라는 건 뭐야?”
연성화의 물음에 율은 고장난 기계처럼 이어가던 박수를 멈추고, 정말로 안타까운 소식이라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너희에겐 정말 유감스러운 소식이겠지만 말이야…….”
허공을 휘젓던 율에 손가락이 갑자기 수직으로 아래를 향해 꺾였다.
그 손끝에 있는 건 역시나 석오태였다.
“이놈, 인벤토리 열지 못하는 거 맞아.”
“뭐?”
“왜냐하면 캐릭터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거든. 게임으로 치자면 로그아웃 상태. 그 상태에서 인벤토리를 열 수 있을 리 없잖아?”
인벤토리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던 석오태의 말은 거짓인 줄 알았다.
멸신검을 내놓으라는 소리에 미련을 못 버리고 땡깡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게임 마스터인 율이 보증하면 얘기는 다르다.
석오태는 정말 그때 인벤토리를 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 멸신검을 되돌려 받지 못한다는 소리냐?”
“물론이지. 로그인도 안 한 상태에서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가져갈 수 있다면 그건 정당한 거래가 아니라 해킹이잖아?”
“정당한 거래 좋아하시네! 애초에 그건 우리에게서 훔친 물건이었다고!”
“확실히 너희가 멸신검을 빼앗긴 건 ‘불행한 사고’였어. 하지만 반칙은 아니야. 그런 사고 따윈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인터넷으로 물건 주문했는데 그게 전혀 엉뚱한 주소로 배달됐던 경험 없어?”
“헛소리하고 앉았네! 그거랑 이거랑 같냐!”
“다를 건 뭔데?”
이런 간단한 걸 왜 이해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율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뒷목에 혈압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싸워봐?
저 망할 면상에 주먹 한 대만 꽂아도 이득일 거 같은데.
그런 내 심정을 눈치 챈 건지 연성화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여주었다.
그러곤 율을 째릿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같잖은 칭찬도, 허울뿐인 위로도 필요 없어. 네 얼굴도 그만 보고 싶으니 마지막 용건만 해결하고 사라져 줘. 선물이라니, 또 뭔 이상할 걸 꾸미는 거야?”
“그렇게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보지 말라고. 나야 채찍 휘두르는 걸 좋아하지만, 그 채찍이 제 효율을 내려면 당근도 함께 줘야한다는 것 정돈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한 율은 양손을 모아 수상한 동작을 시작했다.
딱 그거였다. 마술사가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무언가를 꺼낼 때의 준비 동작.
또 뭔 괴상한 짓을 하려는 걸까 하며, 나와 연성화 외에 일곱 캐릭터들이 도끼눈을 뜬 채 그를 주시할 때였다.
파앗!
“짜잔~!”
율의 손에서 나타난 물건을 본 순간 솔직한 심정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멸신검.
불과 전 조금 전에 석오태를 통해서 돌려받지 못할 거라고 확언당한 그것이 율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못 꺼낸다며? 무슨 짓을 한 거야?”
율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였다.
“관리자 권한.”
“…….”
이놈만 보고 있으면 우리가 가상 세계에 갇힌 통속의 뇌가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너희는 내가 마련해준 미팅 자리에서 과거 소중한 물건을 훔쳐간 도둑놈과 대면했어. 그런데 도둑놈을 때려잡았으면서 소중한 물건을 되찾지 못한다는 건 결말로서 조금 아쉽잖아? 그래서 이 특별 이벤트의 보상으로 내가 마련해준 거야. 물론, 너희가 밤잠을 줄이고 손가락에 굳은살 새기면서까지 만든 그 멸신검 맞아.”
율은 손가락 끝으로 멸신검을 휘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상당한 무게가 나갈 터인 대검이 액세서리처럼 휙휙 돌아간다.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가던 검이 율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며 땅에 박혔다.
콰각!
“그래서, 멸신검은 누가 가질 거야?”
거기에서 율은 눈빛을 호수처럼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모습을 그 두 눈동자에 나와 연성화의 모습을 담는다.
“참고로 말하건대, 이 멸신검은 귀속 아이템이야. 너희는 팔려고 만들었지만 사실은 파는 게 불가능한 물건이었던 거지. 석오태가 도난품이나 다름없던 검을 줄 곧 가지고 있던 이유도 그거야. 팔 수는 없는데 성능은 엄청 뛰어나거든. 그래서 자신이 소유하기로 한 거지. 캐릭터의 스탯을 멸신검에 맞게 성장시키느라 바로 휘두르진 못한 모양이지만.”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 영원히 꿍쳐둘 걸 그랬지? 라며 율은 기절한 석오태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그리고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자아. 다시 말한다. 누가 멸신검을 가질 거지? 거래는 할 수 없고, 넘겨줄 수도 없지만 그 자체의 가치는 엄청나.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게이머에게 있어선 무궁한 영광이 따라오지.”
멸신검은 단 한 개.
그것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인물은 두 명.
어쩔 거냐는 듯 율이 시선으로 재촉해온다.
거기에 나와 연성화는 어이없어 했다.
그딴 걸로 또 우리가 다툴 거라 생각하는 건가?
“멸신검을 두고 싸우긴 했지만, 그건 상대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멸신검 자체에 욕망이 있던 건 아니라고.”
“이제 멸신검을 둘러싼 싸움 따윈 지긋지긋해. 냉큼 주고 끝내.”
나와 연성화의 생각은 일치했고, 그 생각은 손가락으로 나타났다.
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래서, 누굴 주냐고?”
“뭐? 아까부터 가리키고 있잖아!”
“맞아! 빨리 넘겨…… 어?”
거기서 우리의 말끝이 흐려졌다.
멸신검를 소유할 인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그것이 서로를 향해 교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날 가리켜? 이거 처음부터 너희 어머니 수술비를 얻기 위해 만든 거잖아!”
“그 어머니는 옛날옛적에 수술 성공해서 쌩쌩해졌어! 애초에 이젠 거래 못하니 팔 수도 없잖아! 그럼 네가 가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필요 없어! 네가 나보다 더 열심히 재작 재료를 모은 거 다 아는데 내가 무슨 염치로 가져가!”
“무슨 소리야! 내가 접속 안 하는 새벽 시간 동안에도 너 혼자 몰래 재료 파밍 하고 있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번개를 쓰니 신앙, 마법 계열의 무기잖아! 네가 써!”
“대검의 형태라고! 근접 전투 계열인 네가 갖는 게 더 어울리잖아, 바보야!”
좀처럼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나보단 연성화가 멸신검을 갖는 게 더 낫다고 믿고 있지만, 상대로 마찬가지의 생각인 듯 양보하지 않는다.
결국 멸신검을 둘러싼 다툼이 또 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 이유와 양상이 이제까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하암~!”
나와 연성화의 다툼이 길어지고 있을 때 율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였다.
그는 땅에 박힌 멸신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내가 딴 건 다 참겠는데, 그런 유치한 사랑싸움은 못 참겠다. 너무 지루하거든.”
“누가 사랑싸움이라는 거야!?”
“축하해. 너희의 사랑은 어마어마한 재앙의 화신마저 물리쳤어. 이거야말로 사랑은 우주를 구한다는 거겠지? 패배한 악당은 이제 쿨하게 사라져 줄게.”
“사랑싸움 아니라니까!! 패배하긴 뭘 패배해?! 당장 이리 안 와!?”
멸신검은 땅에 꽂은 채 내버려두고 자기만 쏙 빠지려는 율을 나와 연성화가 붙잡았다.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느꼈는지 한 걸음 물러난 채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 서로 양보 하다가 날 샐 거라면 차라리 이렇게 하자.”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율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땅에 박힌 멸신검을 뽑으며 양손으로 쥐었다.
뽀각.
그리고 쪼갰다.
멸신검을.
좌우로.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그리고 그것을 각각 나와 연성화에게 내밀었다.
“사이좋게 나눠가져.”
““그걸 왜 쪼개, 미친 새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멸신검이 초○하임처럼 쪼개진 모습을 본 나와 연성화가 비명을 질렀다.
서로 소유하고픈 욕심만 없을 뿐, 심열을 기울어 만들어낸 아이템이 어이없게 망가지는 모습은 게이머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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