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61화 (161/173)

〈 161화 〉 외전 –괴상한 수집가­

* * *

오서연의 일과는 언제나 같다.

매일 아침 9시까지 회사에 출근.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사장실에서 혼자 키득거리고 딴 짓을 하는 이상한 생물체에게 커피 몇 번 타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취업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사장으로 둔 채 한 공간 안에서 지낸다는 건 만만치 않은 부담감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 짓도 몇 년 하고 나니 이젠 담담하게 출근할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유리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사장실 앞까지 당도한다.

덜컥.

“……어?”

사장실 문을 열자 오서연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오늘도 한가함이랑 싸우는 정신적 노동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장실 내부는 한가함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전과 같은 황량한 사장실은 그곳에 없었다.

있는 거라곤 수수께끼의 잡동사니들.

벼룩시장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용도를 알 수 없는 다양한 물건들이 사장실 바닥에 정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잡동사니의 군세 한가운데엔 언제나 얼굴을 마주하는 사장, 율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손에 든 기하학적인 모형을 이리저리 만져대고 있었다.

“으음~. 이건 안 되겠군.”

휘익!

모형을 살펴보던 율은 불량품 판정을 내린 듯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모형이 날아간 그곳엔 마찬가지로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물건들이 쓰레기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언제나 공허하기만 했던 사장실이 갑자기 출현한 물건들로 채워진 것에 놀란 오서연이 물었다.

“보면 몰라? 수집품이잖아.”

“……수집품이라고요? 이게 다?”

거기서 오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율이 모은 물건이라는 사실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게 첫 번째 이유고, 수집품이라기엔 다루는 방식이 너무 거칠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물건을 살피다가 한쪽에 던져버리는 모습이 장난감을 던지며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그가 모은 수집품이라면 분명 무언가 가치를 느껴서 모은 거겠지?’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어떠한 심미안을 가졌는지 알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 오서연은 근처에 있는 물건을 집어보았다.

돼지 저금통이었다.

무슨 물건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가장 안전해 보이는 물건을 집은 것이다.

“아, 그거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게 좋아.”

“네? 왜요?”

“폭탄이거든. 돼지코를 누르면 폭발해.”

“뭘 수집하는 거야, 이 양반아!!!”

역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일 줄 알았다.

오서연은 기겁하며 들어 올렸던 돼지 저금통을 내려놓았다.

“걱정 말라고.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 때엔 터져봤자 작은 폭죽 정도니까. 안에 담긴 돈이 늘어날수록 위력이 커지는 구조야.”

“세상에 그런 돼지 저금통이 있다는 소린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당연하지. 존재하지 않으니까.”

“네?”

“다른 세상에서 가져온 거거든, 그거.”

“다른 세상……?”

그 말에 오서연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컴퓨터로 연결되던 실존하는 판타지 세상이었다.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의 무대, 글레이그 대륙.

설마 이 돼지 저금통은 그 세상에서 만들어진 아이템이란 말인가?

“어? 하지만 SoR에서 이런 아이템이 있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요?”

“그쪽 아이템이겠냐, 멍청아. 너희가 모르는 세계가 그쪽 하나만 있을 리 없잖아.”

“예? 그럼 또 있다고요?”

“있긴 있지. 근미래적인 SF 세계가.”

율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였지만 오서연으로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글레이그 대륙이라는 판타지 세계와 별개로 과학 문명이 발달한 SF 세계도 어딘가에 정말로 있는 것일까.

뭐, 확실히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튀어나오고, 정체불명의 존재가 그들을 데리고 노는 세상이다.

이보다 더 특별한 일도 안 일어나겠냐마는…….

“그럼 이 돼지 저금통도 SF세계에서 만든 건가요?”

“그런 거지. 요즘 환율 기준으로 9달러 정도만 모으면 이 건물은 물론 도시 일대가 일순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위력을 낼 수 있지.”

“9달러짜리 초저가 핵폭탄?!”

모든 세상의 독재자들이 보면 군침 흘리며 연구할만한 아이템이었다.

대체 율이 말한 SF적 세계는 얼마나 막장이란 말인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너희들의 이야기와 겹칠 일도 없고, 지금으로선 하등 상관도 없는 얘기니까.”

“그런데 이런 물건은 왜 꺼내는 거예요?”

“두 번째 이벤트를 구상하긴 했는데 아직 참가자에게 줄 보상 상품은 준비 안 해뒀거든. 뭐, 지난 번 1등 상품은 인플레이션 일으키기 직전인 금화로 짬처리를 시켰지만, 이번엔 다른 걸 준비해야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대놓고 짬처리라고 했어, 이 양반…….”

대량의 금화 덕분에 돈 부족에 시달릴 걱정은 없어진 신요현이었지만, 이 얘기를 직접 듣게 된다면 상당히 불쾌해 했을 것이다.

게다가 다음 이벤트 보상 상품이라니…….

설마 저 돼지 저금통 핵폭탄이 실제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한 오서연이었다.

게다가 핵폭탄이 자연스럽게 수집품 사이에 끼어 있다.

다른 물건이 멀쩡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저기, 무슨 물건들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오서연은 이 일의 깊이 관여하기로 했다.

어떻게 해서든 초위험 물품이 일반 플레이어에게 넘어가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오, 알고 싶어? 그럼 가르쳐 주지.”

방해 말라며 쫓아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율은 순순히 요구에 응해주었다.

정말로 이것이 수집품이기 때문인지, 율 또한 수집가처럼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구 정도는 있던 모양이다.

오서연은 비서실에 있던 방석을 가져와 근처에 깔고 앉았고, 율은 물건 파는 잡상인처럼 아무 물건을 집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우선 이거. 아까 돼지 저금통과 다르게 판타지 쪽 물건이야.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발모제’지.”

“발모제요?”

뭔가 굉장한 아이템이 나오지 않을까 긴장했던 오서연은 맥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발모제 정도라면 현대 사회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물건 아니던가.

“효과가 긴가민가한 그런 발모제와 똑같이 보지 말라고. 이건 어떠한 악성 탈모는 물론, 가슴털이나 수염 같은, 지역에 따라선 매력 어필이 될 수 있는 부위까지 확실하게 털을 자라나게 하는 발모제니까.”

탈모의 고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왔다.

그건 판타지 쪽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한 탈모는 놀랍게도 이세계의 마법도 고치지 못했다.

거기서 한 연금술사는 생각했다.

인류는 먼 옛날 털 많은 유인원에서 지금의 인간으로 진화해왔고, 그에 따라 털 또한 자연히 줄어들었다.

탈모를 진화의 결과라고 본다면 의학적으로 ‘고친다’는 전제는 잘못된 것이며 통할 리도 없다.

그렇기에 그 연금술사는 인류의 진화를 부분적으로 퇴화시키는 약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털 하나 없이 메마른 피부라 할지라도 이 발모제를 바르는 순간 털이 풍성하게 자라난다.

“그거 굉장하잖아요!”

오서연은 손뼉을 마주치며 놀라워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심한 탈모로 고생을 했었기에 탈모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율이 꺼낸 발모제는 그야말로 구원.

인생이 꽃필지 모르는 최고의 아이템이 분명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어.”

“……예?”

“말했잖아. 진화를 부분적으로 퇴화시킨다고.”

그렇게 말한 율은 히죽 웃으며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발모제를 머리에 바르는 순간, 머릿속까지 퇴화하기 때문에 지능이 유인원 수준으로 돌아가 버리거든. 이걸 만들어낸 연금술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사용했다가 발가벗은 채 거리를 질주하다 체포되었지.”

“끔찍한 부작용이잖아요!!”

오서연은 나중에 하나 받아서 아버지에게 선물로 드리려는 생각을 철회했다.

아버지가 유인원 흉내를 내며 알몸으로 동네를 돌아다닌다면 그녀의 가족은 심각한 파탄을 겪게 될 것이다.

“괜찮아. 그 상태를 되돌리기 위한 중화제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율은 반대쪽 손으로 또 다른 통을 집어 들었다.

“이것을 되돌리기 위해선 중화제를 써야 해. 대신 머리카락도 탈모 상태로 돌아와 버리지. 오히려 그나마 연명하고 있던 모근에 심한 부담이 가기 때문에 발모제를 바르기 전보다 탈모가 심해져.”

“극약이잖아요, 그거!?”

“탈모에 서러움을 느끼는 자, 의식이 퇴화하기 전 마지막 한 꿈이라도 꾸고 싶다면 이것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장점에 비해 단점이 압도적으로 크다구요!! 다른 기능은 없는 거예요!?”

“있어. 머리 이외의 부위에 바르면 피부가 짐승에 것에 가깝게 두꺼워지기 때문에 방어력이 미약하게 올라가. 칼빵을 넣어도 잘 안 들어갈 정도지.”

그러다 율은 손가락을 세우면서 강조하듯 말하였다.

“단! 이 경우 외모가 인간과 유인원에 중간쯤 되는 이상한 형상이 되어버려. 몬스터로 오해받아 사냥당하고 싶지 않으면 취급에 주의해야 해.”

“또 다시 플러스 보다 마이너스가 압도적인데요?”

“게다가 유인원의 성기 크기가 평균 4cm이거든? 머리와 마찬가지로 이 발모제는 남성의 성기마저 유인원 수준으로 되돌려서 말이야. 심지어 이 부위는 중화제를 써도 되돌리지 못한…….”

“생물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남성가치관적으로 죽이는 맹독이잖아요?! 그런 걸 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야 재미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훈훈한 미소와 함께 말하는 율을 보며 진짜 악마도 그의 앞에선 무릎을 꿇을 거라고 오서연은 생각했다.

“그런 괴상한 것 말고 다른 건 없어요?”

“으음. 이게 마음에 안 들면 할 수 없지. 그럼 이건 어때?”

발모제와 중화제를 아무렇게나 쓰레기 산 쪽으로 던져버린 율은 이번엔 다른 물건을 집었다.

그것은 옛날 방식으로 만든 듯한 종이다발이었다.

한 대마도사의 꿈나무는 고민에 빠졌다.

이번 마탑에서 출제되는 시험을 위해 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마법에 대해 큰 재능은 없었지만, 대신 제약(?藥) 분야에선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그는 이내 영구기억 아이템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이 ‘기억고정 양피지’. 수십 개의 재료를 합성한 액체에 푹 고인 마법의 양피지지. 여기에 기억해야 할 것을 적은 뒤 먹으면 그 내용은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어.”

“오오!”

오서연은 놀라 소리를 내었다.

옛날에 사전의 내용을 읽은 뒤 그 페이지를 먹으면 내용을 기억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잠깐 떠돈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로 형상화 한 듯한 아이템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저거라면 이 세상 모든 수험생들이 탐낼 만한 아이템이 아닐까?

“그럼 그 대마도사 꿈나무는 이걸 통해서 진짜 대마도사가 되었겠네요?”

“아니. 목매달고 죽었어.”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오서연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말했잖아. ‘평생 기억하게 된다’고. 그 말 그대로야. 뇌를 강제로 활동시켜 오로지 한 정보만을 계속 뇌리에 상기시키는 거지. 그것은 깨어있는 동안에도, 자고 있는 동안에도 이어진다. 뇌가 쉴 수 없는 거야.”

“………….”

충격적인 뒷이야기에 오서연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애송이는 이 사실을 깨닫고, 곧 후회하며 치료제를 만들려고 했어. 하지만 불가능했지. 이미 기록된 정보를 실시간으로 상기하는데 뇌기능을 소모하고 있었거든. 그 탓에 다른 뇌기능이 떨어져서 도저히 치료제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어. 끝나지 않는 굴레에서 달아나기 위해 녀석이 택한 게 죽음이었지. 어때? 참으로 비극적이면서 멋진 아이템 아니냐?”

“……저기, 왠지 메스꺼워졌으니까 그 종이 치워주세요. 제 시야 안에 두지 말아주세요. 아니, 아예 불태워주세요.”

“한 인간의 꿈과 재능과 오만과 후회가 담긴 걸작품을 이해 못한다니 서글프구만.”

세상은 그걸 걸작품이라 부르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과오라 부를 뿐이지.

아무튼 오서연의 요청대로 종이뭉치를 쓰레기 산으로 던져버린 율은 다른 물건을 집었다.

“그럼 이건? ‘에인하르스의 마지막 눈’. 전설적인 발명가 에인하르스의 마지막 작품이지.”

“효과는요?”

더 이상 율의 말재간을 신뢰하지 않는 오서연이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투시. 유치한 것 같지만 남자들의 로망을 잘 실현한 도구 아니냐?”

투시안경이라니…….

확실히 제작자의 응큼한 성격을 알 수 있을 만큼 사용 용도가 뻔히 보이는 도구였지만, 그저 그뿐이라면 도특한 아이템 하나로 넘길 수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다면 말이다.

“부작용은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묻는 오서연을 향해 율은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투시를 위해 이용하는 게 방사선이야. 행복한 경험도 잠시, 방사선을 다이렉트로 쬔 눈은 아작 난다.”

“저주 아이템이잖아요! 그걸 어디다 써먹으라고요!?”

“저주 아이템도 써먹기 나름이지. 눈멀게 하고 싶은 놈에게 써먹어. 눈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알몸이 자신에게 안경 씌운 놈이라는 것도 제법 우스운 일일 거다.”

“댁한테만 우스운 일이겠지!”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왜 이 양반이 수집하는 물건은 하나 같이 있으나마나 한 리턴과 압도적인 하이 리스크를 겸비하고 있단 말인가?

“제발 평범한 거요!! 누가 죽었다고나 죽음으로 몰고 갈만한 그런 게 아니라, 위험 하나 없이 일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도구는 없어요!?”

“판타지 쪽은 취향에 맞지 않는 것 같군. 그럼 이건 어때? ‘여자친구 in 저축통장’~.”

어딘가의 고양이 로봇 흉내 내듯 말끝을 늘리던 율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율이 평소 가지고 다니는 테블릿 PC인가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디자인이 다르고 크기도 훨씬 작았다.

“뭐예요, 이건?”

“겉보기엔 평범한 테블릿 PC지만 은행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자 통장 겸 지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짜잔!”

율이 화면을 키자 나타나는 건 3D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여성 캐릭터였다.

머리는 분홍색에 눈동자는 똘망똘망 하고, 가슴은 큰 것이 서브컬쳐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기기에 탑재된 AI(인공지능)야. SF세계에도 있는 오타쿠를 겨냥한 상품인데, 이 AI가 미연시 캐릭터처럼 상호작용을 하며 돈을 관리해준다고.”

서브컬쳐 계열의 상품이라고 얕보면 안 된다.

이 기기의 AI는 웬만한 AI보다 정밀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런 AI로 사용자의 여자친구 역할을 수행한다. 동시에 본연의 통장 관리 업무도 충실히 해낸다.

돈을 많이 저축하면 칭찬해주고, 많이 소비하면 귀엽게 토라지거나 혼을 낸다.

여자친구에게 용돈을 주는 것으로 소소한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이때 준 용돈은 소비되지 않고 별개의 통장으로 따로 저축된다.

남자친구가 힘들 때, 혹은 헤어지려고 할 때, 당신의 미래를 위해 써달라며 여자친구는 그간 모은 용돈을 모두 남자친구에게 돌려준다.

이성의 따듯한 애정과 인연이 없는 이세계의 오타쿠들은 이런 여자친구(AI지만)의 헌신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호오……. 확실히 다른 것들에 비해선 압도적으로 안전하고 실용적으로 보이긴 하네요. ……그런데 이건 남성 타겟팅이 아닌가요? 플레이어 중엔 여성도 있을 텐데요?”

오서연이 전에 만났던 연성화가 그러했다.

SoR가 워낙 마초적인 게임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마음에 들어 플레이 하는 여성 플레이어도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이 연성화처럼 현실 게임에 휘말려들었을 것이다.

그런 여성의 입장에선 이런 인공지능 통장이 신기하긴 해도 그다지 끌리진 않았다.

하지만 율은 걱정 말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성별 구분 할 것 없이 다양한 버전이 있어. 굳이 여자친구 버전이 아니더라도, 남자친구 버전, 댄디한 집사 버전, 섹시 메이드 버전,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 여동생 버전, 어리광을 잘 받아줄 것 같은 이웃집 누나버전, 친절한 대학교 훈남 선배 버전 기타등등, 바리에이션이 다양해.”

“오오……!”

이 정도면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사람 한정이라도 여성에게 충분히 먹힐만했다.

“실제로 이 AI 애인과 함께 모은 돈을 결혼자금으로 써서 결혼식을 열었다는 전설적인 오타쿠도 존재한다고.”

“와아……. 확실히 이 정도라면 오타쿠들에게 불티나게 팔렸겠는데요?”

“아, 그건 아니야. 회사는 망했어.”

“네? 어째서죠?”

“어떤 해커가 전산망에 바이러스를 퍼트렸거든. 헌신적인 여자친구가 갑자기 난입한 금방 태닝 양아치에게 혹해서 남자친구 통장의 있는 돈을 빼돌리고 헌납하는, 통칭 ‘NTR(남친 통장 대방출(Release))사태’가 벌어졌지. NTR에 흥분하는 몇몇 특이취향만 제외하곤 전부 멘탈이 붕괴되어 다신 쓰지 않게 되었고, 이어지는 환불 러시에 회사는 파산. 인간의 악의에 묻혀버린 비운의 상품이었지.”

“아니, 이런 미친?”

거기서 NTR이라고?

바이러스의 당한 통장 구매자들의 멘탈은 괜찮은 건가?

“게다가 다른 세계의 물품인 만큼 전자 화폐가 이쪽 세계와 호환이 안 돼. 그래도 정말 살아 있는 듯한 여자친구를 구현해놨기 때문에 미연시 용도로 사용할만하지. 사회적 시선을 견딜 수 있다면 말이야.”

결국 이것 또한 무쓸모와 마찬가지란 소리다.

허탈감을 느낀 오서연히 물었다.

“……저기, 사장님. 대체 왜 수집품에 이런 나사 빠진 물건들밖에 없는 거예요?”

“말했잖아? 재미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오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 뭘까, 이 양반은…….

한 시라도 인간을 골려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악신이라도 되는 걸까?

존재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북유럽 신화의 로키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율의 취향에 오서연은 깊은 피로감을 느꼈고, 그런 그녀를 자극하듯 율의 물음이 들려왔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에게 줄 상품으론 어떤 게 좋을까?”

“전부 다 갖다 버려요!!!”

결국 참아왔던 오서연은 폭발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플레이어에게 줄 보상은 율의 수집품 이외의 것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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