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폭풍전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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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르게 된 게 수건이랑 위생용품이란 말이지? 길게 고민한 것치곤 평범하네.”
“어쩔 수 없었다고. 두 바보 혼내느라 휘두른 후라이펜이 찌그러지는 바람에 생각 외의 지출이 생겼단 말이야.”
약속대로 연성화는 캐릭터들을 대동한 채 우리 집에 방문했다.
필요 없다고 했지만 굳이 집들이 선물을 들고 온 그녀의 옆에는 잔뜩 혼이 난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스콜, 하티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저쪽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건 마찬가지구나라고 생각했다.
“뭐, 그래도 고맙게 받을게. 아무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연성화에게서 받아 든 선물을 선반 위에 올려두고 다시 탁자로 돌아오며 말했다.
나, 레아, 레반, 레테라, 연성화, 스콜, 하티.
현대인 둘에 다른 세계로부터 온 이방인 다섯. 총 일곱 사람이 넓은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다.
“다들 알다시피 율 녀석이 두 번째 이벤트를 공지했어. 날짜는 12월 1일 정오. 오늘이 11월 17일이니까 딱 2주 남았네.”
미리 정한 건 아니지만 회의는 내가 주도해나갔다.
대략적인 개요를 확인해둔 뒤 논점으로 넘어간다.
“가장 큰 문제점은 두 개야. 이벤트의 ‘내용’과 ‘제한조건’.”
실제로 참여하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이벤트 내용.
데리고 갈 수 있는 캐릭터는 단 한 명뿐이라는 제한.
“일단 이벤트가 뭔지 예상이라도 해야 데리고 갈 캐릭터도 선택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다들 뭔가 짐작 가는 건 없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봐.”
“일단 가장 큰 힌트는 공지 직전에 있었던 오서연 씨의 내부 고발이겠지.”
가장 먼저 운을 뗀 건 연성화였다.
그녀는 탁자 위에 올려둔 팔 위에 턱을 괘며 말을 이어갔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차단당해버렸지만, 직전에 신경 쓰이는 말을 했었어. ‘캐릭터와 강함과 상관없이 플레이어가 위기에 노출된다’라고.”
“나도 제일 신경 쓰이던 부분이야. 왜 굳이 캐릭터의 강함을 언급한 걸까? 플레이어가 위험한 거야 첫 번째 이벤트였던 ‘몬스터 웨이브’에서도 마찬가지였잖아.”
연성화의 말을 받은 내가 의문을 표하자 레테라가 손을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땐 저희가 바로 곁에 있었어요. 몬스터들이 밀려오기도 하고, 그 중엔 손을 쓰기 힘들 정도의 강한 놈도 있었지만, 최소한 플레이어인 오라버니만큼은 보호할 수 있었죠. 그때 그건 확실히 ‘캐릭터가 강할수록 플레이어가 안전해지는 경우’였어요.”
분명 그랬다.
하지만 이번 이벤트는 그 강함이 무색해져버린다고 오서연은 언급했다.
그렇다는 소리는…….
“즉, 이번 이벤트에선 캐릭터가 플레이어를 보호할 수 없다?”
가장 두뇌회전이 느릴 듯한 레반마저 도달할 정도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눈치 챘다고 봐도 무방하다.
공기가 경직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특히 캐릭터들의 반응이 심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던가.
자신이 죽는 게 아니라, 목숨보다 소중한 플레이어가 피해를 입는 것이다.
스콜이 나올 만한 가능성을 상정하듯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딘가로 격리? 아니면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
“설마 이번엔 플레이어더러 직접 몬스터와 싸우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하티의 말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상대는 율이다.
그놈의 가장 순수한 목적은 사건에 휘말려든 우리들의 고통과 발버둥을 감상하는 것이다.
충분히 염두 해둘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다.
“아버지……. 이 이벤트, 불참하는 게 좋지 않겠어?”
심각하진 레아가 말했다.
그녀치곤 조심성 많은 발언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강함에 자신감이 있는 거지 그게 전능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눈앞에 있다면 모를까,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나를 지켜낼 능력은 없었다.
“결국 종합해보면 플레이어에게 위험을 강요하는 도박성 짙은 이벤트라는 거잖아. 아버지도 그렇겠지만 우린 운에 모든 걸 걸고 승부하는 타입이 아니야. 역경은 운이 아닌 힘으로 때려 부수는 타입이지.”
레아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레반과 레테라는 물론, 스콜과 하티까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보니 참 비슷한 성향들끼리 모인 듯싶다. 부모 되는 존재가 나와 연성화이니 어쩔 수 없는 건가.
“강함도, 약함도, 순수한 운 앞에서는 모두 평등해. 동전 뒤집기처럼 50% 확률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고.”
팔짱을 끼고 말하던 레아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 목숨이라면 모를까, 운에만 맡기는 도박에 아버지 목숨을 거는 건 사양하겠어.”
다른 캐릭터들은 별 말 하지 않았지만 눈빛을 보니 레아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거 잘만 하면 단체 보이콧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연성화와 시선을 교환하니 그녀는 나에게 맡기겠다는 듯 눈꺼풀을 닫았다.
귀찮은 일을 떠넘긴다는 감이 있지만, 문제아 숫자가 더 많은 내 쪽이 감당하는 게 확실히 나은 일이긴 했다.
나는 진중하게 고개를 돌리며 운을 떼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이 이벤트에 참가하고 싶어.”
“아버지.”
“위험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이 이벤트는 너희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야.”
질책하려는 레아의 말을 끊고 내 의견을 피력한다.
“내 목숨이 위험해지더라도 너희가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 어떤 불합리가 찾아와도 자신을 굽히지 않고 이겨낼 수 있도록.”
“그렇지. 인간의 법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힘뿐이니까.”
동의한다는 듯 연성화는 슬쩍 웃으며 말하였다.
너희도 새겨들으라는 듯 탁자 위에 턱을 괜 그녀가 자신의 캐릭터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간다.
“만약 이 위험을 피한다고 해도, 율이라는 존재가 언제까지고 플레이어들을 쥐고 흔드는 한 목숨이 어느 순간 날아갈지 알 수 없어. 장난감처럼 휘둘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따윈 사양이야.”
이미 캐릭터들과 만난 시점부터, 그 율과 엮인 시점부터 우리에게 더 이상 안전이란 없는 것이다.
나아가도 위험, 물러나도 위험이라면 선택은 당연히 전진이다.
그게 내 방식이었고, 연성화의 방식이기도 했다.
캐릭터들도 그 점을 절실히 이해하고 있는 듯, 더 이상 우리의 참가를 말리지 않았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운 요소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해주고 나니 그제야 캐릭터들의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된 모양이다.
잔뜩 굳어졌던 그들의 표정이 풀어지고, 대신 두 눈동자에 각오가 서린 빛이 자리 잡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를 지켜내겠다는 각오의 빛이.
자, 그럼 그들의 설득도 했고, 이벤트의 내용도 대략적인 것은 추리해냈으니…….
“다음 문제는 누굴 데려가느냐인데…….”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캐릭터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 아군 사이에서 오갈만한 기류는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의 선택에 집중하듯 각자 주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시선에서 부담을 느끼면서도 나와 연성화는 각자 생각해둔 캐릭터를 꼽았다.
그리고 역시 서로가 예상하고 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난 레아.”
“나는 스콜.”
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탁자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사실 부서질 뻔했지만 때린 사람이 힘 조절을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리고 탁자를 때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호명되지 못한 세 사람 전원이었다.
“이의 있습니다!!”
“옳소! 옳소!”
“납득이 가는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바예요!”
레반, 레테라, 하티 세 사람이 힘을 합쳐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선택받은 레아와 스콜은 저마다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부모를 따라 가지 못해 토라진 자식들을 달래는 건 형제가 아닌 부모 몫이다.
“너희가 못 미덥다는 게 아니야. 다만 이 일에 제격이라고 생각되는 게 이 둘이었던 것뿐이야.”
“까보기 전까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벤트잖아? 그래서 상황 대응 능력을 높게 쳤어.”
나와 연성화의 설명에도 레반, 레테라, 하티 세 사람은 납득해주지 않았다.
“저희의 힘이 이 녀석들보다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맞아요! 이번엔 흑룡이 아니라 백룡, 독룡, 심지어 광룡이 튀어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오라버니만큼은 목숨 걸고 지켜내고 말고요!”
“스콜은 마법사잖아요! 상황 맞춘 대응 능력은 역시 성직자인 제가 더 낫지 않겠어요!?”
제발 다시 한 번 결정을 재고해 달라는 듯 캐릭터들은 자신의 의지와 장점을 어필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아는 여유가 넘치는 듯 턱을 괘면서, 스콜은 팔짱을 끼면서 말하였다.
“거 애새끼마냥 되게 찡찡되네.”
“주인의 명령이다. 따라라.”
아마 입장이 반대였으면 저쪽에 섞여 항의하고 있을 녀석들은 그렇게 말하였다.
그건 더욱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자극하는 일이었고, 분노에 차오르는 시선이 그들을 향하던 때였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던 난 연성화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녀 또한 눈짓으로 화답한다.
짜악!
손뼉을 치는 것으로 캐릭터들의 주의를 한 번의 끌어 모은다.
“그렇게 납득할 수 없다면 너희들끼리 직접 해결해.”
“네?”
“판을 깔아주겠다고. 너희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이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캐릭터를 향해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
신체를 뒤덮을 정도의 대방패와 바위도 일격에 쪼개버릴 정도의 거대 도끼. 그리고 신체를 뒤덮는 중갑옷.
레아가 선호하고,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장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갑옷이지만 레아의 것보다 가벼워보이는 방어구, 일격 하나하나에 모든 걸 걸 듯 거대한 특대검은 레반의 무장이다.
그리고 속도와 움직임을 중시해서 세 사람 중 가장 가벼운 경장 갑옷을 입고, 양손엔 날카로운 쌍검을 쥐는 것은 레테라.
“정말 싸워도 되나요?”
습관처럼 착용한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던 레테라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소에 자시들끼리 싸우면 불 같이 화내며 혼내던 내가 무기까지 챙겨주며 싸움을 허락해준 게 어색한 모양이다.
“어차피 내가 납득하라고 말하면 겉으로는 따라도 속으로는 불만을 꾹꾹 눌러 담을 거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너희가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직접 확인해봐.”
“그래서 장소도 이동했잖아.”
연성화 말대로 우리가 있는 곳은 더 이상 도시 내부가 아니었다.
사람의 시선도, 발걸음도 닿지 않는 곳.
도시를 꽤 벗어난 산간.
이전 석오태 놈들과 싸웠던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 우리는 싸울 무대를 마련했다.
지난번 산이 무너지고 벼락이 수없이 떨어지는 둥에 난리가 있었으면서도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는 걸로 봐선 이 장소 또한 율에 영향이 미치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여기라면 격렬하게 싸워도 문제는 없겠지.
“이번엔 서로 부상을 입히는 것도 허용해주겠지만, 포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포션의 수량은 한정돼 있으니 아껴 써야지.”
“주인님, 제 힐이 있잖아요?”
“싸움이 끝난 뒤 힐을 시전 할 신성력을 남겨둘 만큼 힘 조절해서 싸울 거라면 나도 좋겠다만.”
신성마법을 보조해주는 예복과 장신구를 착용한 하티는 연성화의 말을 듣고 스콜을 돌아보았다.
마법 효과를 보조해주는 술식을 새겨 넣은 천옷을 갈아입고, 한 손에 쥔 완드를 살피고 있던 스콜이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스윽.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일단 이 싸움은 목숨을 껀 혈투가 아닌 대련이지만, 동시에 다음 이벤트 참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시험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선택해준 주인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네놈을 사정없이 때려눕혀 주겠다고 스콜의 몸짓은 말하고 있었다.
“……네. 아무래도 역시 포션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런 스콜의 선전포기에 하티는 투기를 한껏 끌어올린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힐 하나를 시전 할 여유도 남기지 않고 모든 신성력을 공격에 쏟아 부을 생각이었다.
서로 투기가 타오르는 건 레아, 레반, 레테라 쪽도 마찬가지였다.
팀은 두 팀으로 나뉘어진다.
선택 받은 레아, 스콜 팀.
선택 받지 못한 레반, 레테라, 하티 팀.
모든 준비를 마친 건지 황금 늑대, 회색 늑대 콤비와 갈색 사자, 은여우, 분홍 양 콤비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한다.
나는 싸움의 여파가 닿지 않을 적당한 구석을 찾아 이동했다.
그러다 쓰러진 나무 둥치 위에 미리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연성화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녀의 손엔 어째서인지 팝콘 과자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먹을래?”
“그건 언제 챙겨온 거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사왔지.”
와그작.
팝콘을 한껏 입에 문 그녀가 과자 봉투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저들이 사고 칠까 조마조마 하지 말고 스포츠 즐기는 기분으로 구경할 기회가 별로 없었잖아? 지금은 즐기자고.”
“뭐, 하긴 그렇긴 하네.”
연성화의 말에 동의한 나는 그녀 옆에 앉아 팝콘을 한 움큼 손에 쥐었다.
그 중 일부를 머리 위로 던져 입으로 받아내었고, 팝콘을 으깨며 이빨과 이빨이 부딪치는 걸 신호로 캐릭터들끼리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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