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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71화 (171/173)

〈 171화 〉 폭풍전야 ­ 4

* * *

쿠웅!!

거칠고 투박한 검날이 땅에 박혔다.

본래 검이라기보단 둔기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한 검이었지만, 날이 다 빠진 모습은 이전 모습 이상으로 검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 같았다.

그런 대검을 지지대로 삼으며 레반은 몸을 일으켰다.

혈인(血人)에 가까워질 정도로 상처투성이의 모습.

그럼에도 눈빛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 입을수록 더욱 투기가 타오르는 듯 그의 두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아직 무너지기엔 한참 멀었다.

더 싸울 수 있다.

더욱 날뛸 수 있다.

그러나 그 육체와 정신의 강인함을 그가 쥔 대검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파킹!

“……!”

지지대로 쓰던 대검의 중간이 부러져 나갔다.

무기의 내구도가 한계에 달했다.

애초에 그리 좋은 무기는 아니긴 했다.

잡몹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일정 확률로 드랍하는 아이템인 만큼 별다른 효과는 없고 내구성도 기본적으로 낮았다.

신요현은 그렇기에 이러한 무기를 레반에게 쥐어준 것이리라.

내버려두면 죽기 직전까지 싸워댈 그들을 위해 일부러 리미트를 만들어 둔 것이다.

무기가 부러진 것이 타임 리미트의 신호.

이 이상의 싸움은 신요현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후우…….”

레반은 한숨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레테라 쪽도 자신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휘두르던 쌍검 중 한쪽은 진즉에 부러져 나갔다.

지지 않고 달라진 양쪽 무기의 리치 차이를 이용해 더욱 다채로운 연격을 만들어내어 상대를 압박했지만, 결국 멀쩡한 쪽의 검마저 부러져 나가게 되었다.

레반의 힘과 레테라의 기술, 어느 쪽도 부족하지 않았다.

단지 저쪽이 좀 더 견고 했을 뿐이다.

쿠우웅!!

거대한 방패와 도끼가 땅에 박힌다.

레반, 레테라의 무기와 다를 바 없는 내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조금 균열이 생겼을 뿐 파손되진 못했다.

“승부는 난 거 같은데? 이 이상 나아갔다간 늬들이나 나나 자제하지 못 할 거다.”

레아는 머리를 덮고 있던 투구를 벗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개과 동물이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것처럼 머리에 맺혀 있던 땀방울들이 반짝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후, 후후후! 고작 이 정도로 제 신앙심이 다할 거 같나요…… 쿨럭!!”

멀쩡하다는 듯 웃고 있던 하티 또한 핏물 한 사발을 입에서 뿜어내었다.

이미 신체에 쌓아두었던 신성력을 모조리 소모하고 제 생명력까지 끌어다 쓰던 중이었다. 그조차도 이젠 한계에 달했고.

그에 반에 아직 여유가 있던 스콜은 하티를 겨냥하고 있던 마력탄을 회수했다.

레아의 말대로 더 이상의 진행은 무의미했으며, 손해밖에 남지 않는다.

짝짝짝!

축제에 종료를 알리는 듯 작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자신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신요현과 연성화가 가볍게 박수를 쳐주며 다가오고 있었다.

“수고 했어.”

“나이스 파이트.”

주인들은 각자의 캐릭터들에게 격려의 인사를 건넸지만, 그것을 고개를 들고 받아드릴 수 있는 건 승자 측뿐이었다.

패자 측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함께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늬들이 왜 사과하는 건데?”

“그렇게 항의해 놓고는 오라버니를 지킬 만한 힘이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 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레반과 레테라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플레이어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자신들이 져서는 안 되는데 지고 말았다는 사실이 분한 듯.

그 모습을 잠시 어이없게 바라보던 신요현은 작은 한숨과 함께 말하였다.

“그렇게 분하면 내일 다시 도전하면 되잖아?”

“응?”

“네?”

“뭐? 무슨 소리야, 아버지?”

레반과 레테라는 물론, 싸움의 여운을 즐기고 있던 레아가 당황하며 물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고 쉰 뒤에 내일 다시 대련하라고. 다음 이벤트까지 남은 시간은 2주. 그 동안 서로 원 없도록 싸워봐.”

“하지만……!”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자뿐이라며?”

불만 있는 듯 이의를 제기하려던 레아였지만, 언젠가 이 세 사람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할 말이 없어졌다.

반면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레반과 레테라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연성화 측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하티가 두 팔을 하늘로 내지르며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지? 이것은 대표 선발전임과 동시에 너희들을 위한 수련이야. 앞으로의 일을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더 스스로를 갈고 닦아줘.”

무슨 일이 일어나도 후회하지 않도록……라는 뒷말은 굳이 담지 않았다.

““넵!!””

“칫. 알았어.”

다시 의욕이 차오른 레반과 레테라는 힘차게 대답했고, 아직 챔피언 방어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레아는 투덜거리며 받아들였다.

신요현은 그들을 뒤로 하고 떨어져 나왔다.

당장 다시 싸우지는 않겠지만, 조금 전의 대련을 되돌아보며 자신에게 부족했던 점이나 필요한 점 등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은 2주간 상당히 소란스럽겠네.”

마찬가지로 스콜과 하티를 두고 온 연성화가 말하였다.

“폭풍전야가 반드시 고요해야 하는 법 있어?”

어깨를 으쓱인 신요현은 캐릭터들을 돌아보았다.

저마다 휴식을 취하며 눈을 감고 상념에 빠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심상 속에서 오늘의 전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학습하겠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끝내면 다시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세상 떠나갈 정도의 소란을 피우며.

“폭풍에 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준비하는 자가 폭풍을 견뎌낼 수 있는 거야.”

“그거 확실히 동감이야.”

“그리고 저쪽만 준비하게 할 순 없지. 그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이벤트를 대비하자고.”

“뭘 할 건데?”

“…….”

신요현은 아무 말 없이 입꼬리만 씨익 올렸다.

“너 가끔 이상한 얘기 꺼낸 직후에 찾아오는 침묵이 무서운 거 알아?”

과거 악명이 자자한 타이탄 길드를 쳐부수고자 했을 때도 딱 이러한 흐름으로 진행되었었다.

신요현이 생각하는 게 뭔지 몰라도 결코 조용한 방법은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

2주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캐릭터들끼리의 대련이 이어졌다.

하지만 승자는 언제나 레아와 스콜의 팀으로, 레반, 레테라, 하티의 팀은 단 한 번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성장하지 않은 게 아니다.

레벨업만 없을 뿐, 그들의 전투는 나날이 체계적이고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더 나아지는 건 레아, 스콜 측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의 경우엔 회귀에 가깝다.

서로 등을 맡기며 날뛰던 전성기 시절의 콤비네이션이 차츰 되살아나 신체에 적응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당 순수 전투력 수치는 각자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연계시키는 실력이 레아와 스콜 측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렇게 찾아온 12월 1일.

공기가 싸늘해지는 이벤트 당일이 되어서야 레반, 레테라, 하티는 레아와 스콜의 동행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럼,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집 잘 보고 있어.”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고쳐 신으며 대기하게 된 캐릭터들에게 말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벤트인 이상 그들은 우리집에서 대기하도록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레반과 레테라, 그리고 잠시 신세지게 된 하티는 고개를 고개를 끄덕인 뒤 레아와 스콜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2주 동안 서로 전력으로 부딪친 덕분인가. 이전보단 서로 간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진 듯…….

“오라버니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만 해봐.”

“그땐 네년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리겠다.”

“내가 무슨 일이 생기도록 놔둘 거 같아?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놈은 죄다 쓸어버릴 거다.”

“늬들은 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눌 수 없는 거냐?”

아직도 사이좋게 지내려면 한참 멀었구나.

사정은 연성화 쪽도 비슷한 모양이다.

“스콜 씨. 반드시 돌아와 주세요. 아니, 설령 댁이 못 돌아오더라도 주인님만은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았다간 당신은 평생 저주하며 살아갈 거예요.”

“설령 주인은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나도 돌아올 생각 없다. 아예 그곳에서 뼈를 묻을 거다.”

“잠시만요, 주인님과 같이 뼈를 묻겠다고요? 그런 부러운 짓을 제가 용납할 거 같나요?”

“잡담은 그만해. 슬슬 가야 한다고.”

연성화는 낯부끄러워질 것 같은 대화를 끊어내며 스콜의 등을 문 밖으로 내밀었다.

신발을 단단히 맨 나는 레아를 돌아보았고, 그녀 또한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망할 놈이 얼마나 엿 같은 이벤트를 만들었는지 확인하러 가볼까.”

그렇게 나와 연성화, 레아, 스콜 네 사람은 이벤트가 벌어진 무재시를 향해 출발했다.

***

“오오~! 몰려든다, 몰려들어. 불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부나방들이.”

위드 소프트웨어 본사 건물.

언제나처럼 황량한 사장실 한가운데 커다란 의자를 침대 삼은 율이 다리를 꼰 채 누워 있었다.

발끝을 리듬 있게 까딱거리는 모습이 그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그러던 중 율은 옆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사장실 한구석에 놓인 방석 위에는 그의 비서인 오서연이 앉아 있었다.

편안 모습인 율과 달리 무겁고도 긴장된 자세로 그녀는 눈앞에 대형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까만 TV 화면을.

그건 전에 율이 오서연에게 이벤트의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던 TV였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어도 아무것도 안 나와~. 이벤트 시작까진 아직 1시간이나 남았다고.”

“……됐어요. 이대로 기다릴래요.”

“오호? 웬일이야? 그렇게 이번 이벤트를 싫어했으면서 꽤나 흥미를 보이고 있네?”

“어차피 지난 2주 동안 언론 통제 당한 독재국가에 갇힌 것처럼 주변과의 소통을 차단당했어요. 더 이상 이벤트의 위험을 알리려 해봤자 무의미하겠죠.”

꾸욱.

어딘가 해탈한 듯한 오서연이었지만, 무릎 위에서 꽉 쥔 두 주먹은 작은 방항의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봐야겠어요.”

TV의 검은 화면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쓰는 오서연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율은 아까보다 깊어진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말해주세요.”

“뭔데?”

“……몇 명이나 살아 돌아올까요?”

“글쎄? 현재 참가하기로 결심한 플레이어는 총 12명. 난 완벽한 미래예지는 싫으니 대충 어림잡아 계산해보자면…….”

손에 든 태블릿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율은 곧 너무나도 가벼운 말투로 대답을 내놓았다.

“절반은 죽지 않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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