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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73화 (173/173)

〈 173화 〉 그립지만 그립지 않은 ­ 2

* * *

연성화는 지금 신요현과 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황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늘을 뚫고 우주까지 닿을 듯 뻗은 세계수의 모습은 대륙 어느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띈 그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 못할 정도로 그녀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 여기가 정말 글레이그 대륙이라고?”

풀이 거의 자라나지 않고, 바위와 자갈만이 굴러다니는 황야 위에 연성화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현재의 처지를 이해시킬 만큼 유일하면서 결정적인 증거인 초거대 나무를 멀리서나마 바라보먀, 연성화는 닥쳐온 현실에 탈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게임 캐릭터들은 게임 속 세상에서 현실 세계로 넘어왔지 않던가.

그러한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면 그 반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 이벤트에서 도시의 모습과 완전히 빼닮은 다른 세계로 참가자들을 이동시킨 사례가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율이 참가자들을 이동시킨 것이다.

도시를 닮은 이공간에 그치지 않고 아예 다른 세상으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상황을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납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이곳은 현대인들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캐릭터들조차 일상적으로 죽어나가는 세계다.

온갖 몬스터들과 악의적인 함정, 세계에 만연한 죽음의 손길이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앗아가려 든다.

그야말로 마경(??).

이곳에 비한다면 온갖 독충과 맹수들이 득실대는 아마존 밀림 심층부도 유아용 놀이터가 되어버릴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1분 이상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인데, 하필이면 일행조차 보이지 않는다.

“스콜!!”

자신의 충직한 파트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언제 어디서든 부르면 달려오던 회색 머리의 마법사는 보이지 않는다.

“신요현! 레아!”

친구도, 그의 파트너도 마찬가지다.

황야에 부는 바람에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 시계가 그리 넓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할 만한 영역 내에 그들이 없다는 건 분명하다.

연성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현재의 처지와 맞물리니 도무지 희망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캐릭터가 있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세계에 홀로 표류된 것이다.

“뭐가 ‘캐릭터의 강함과 관계없이’야! 이러면 그냥 100% 죽으라는 거잖아!!”

억울한 심정을 토로 할 데가 없어 이곳에 없는 오서연에게라도 불만을 드러내 본다.

확실히 그녀 말대로 캐릭터가 얼마나 강하든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아예 도움을 받을 수 없이 홀로 방치된 이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캐릭터와 떨어지게 된다고 얘기하면 될 걸, 왜 캐릭터와의 상관관계에 중점을 두듯 말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후우……. 어떻게든 해 볼 수밖에 없나.”

오서연에게 불평해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어찌됐든 떨어진 일행들을 찾기 위해 무슨 수라도 써봐야 했다.

우선 현재 위치가 좋지 않다.

숨을 만한 엄폐물이 많지 않은 황야라면 몬스터의 눈에 띄어 습격받을 수 있다.

먼저 안전하게 몸을 지킬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쪽으로 연성화가 계획을 잡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그녀의 계획은 첫 발을 내딛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바닥이 쓸리는 듯한 작은 소리 하나에 등골에 한기가 감돌았다.

뭔가 근처에 있다.

주변을 둘러 봤지만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심장이 뛰어댈 리가 없었다.

위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립감이 위기감을 더욱 고조 시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오감을 포함해서, 각종 게임 지식을 동원해 주변의 이변을 파악한다.

그러자 조합되는 게 있었다.

황야라는 장소, 쓸리는 듯한 소리, 그리고 한순간 시야가 포착한 일그러지는 땅.

일정 영역의 땅이 마치 움직이는 듯이…….

“어스 스네이크?!”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연성화, 그녀는 이미 몬스터의 사냥 표적이 된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눈치 챘다는 걸 알았는지, 녀석도 땅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몸을 떼어내며 머리를 들었다.

그것은 황야의 갈라진 땅과 비슷한 피부를 가진 뱀이었다.

연성화의 가슴까지 올라오는 두께, 길이 5m는 족히 될 듯한 몸체가 어느새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어스 스네이크.

모래나 바위 같은 질감의 가죽을 보호색 삼아 모습을 숨기고 먹이를 사냥한다는 몬스터다.

틀렸다. 몸 두께만 해도 송아지에 맞먹는 녀석을 뿌리치고 달아날 방법은 없다.

심지어 토벌 권장 레벨이 80을 넘는 상급 몬스터다.

지난 2주간 신요현과 함께 했던 단련도 녀석 앞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샤아아앗!!”

어스 스네이크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덮쳐왔다.

확장되듯 다가오는 커다란 입을 보며 연성화는 이렇게 어이없게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구나 한탄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푸욱!!!

그 순간, 반짝이는 은빛 검 하나가 어스 스네이크의 입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검날은 윗턱을 관통한 것으로 모자라 아래턱까지 단번에 관통해 튀어나왔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어스 스네이크는 돌연 들어온 훼방과 고통에 눈을 부릅떴고, 꼼짝없이 잡아먹히는 줄 알았던 연성화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감히 누구에게 더러운 입을 들이대?”

연성화를 구해준 것은 바로 사라진 줄 알았던 레아였다.

바스타드 소드로 어스 스네이크의 입을 꿰뚫은 레아는 반대편 손의 중형 방패를 한껏 치켜든 뒤 내리쳤다.

신체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이 순간만큼은 무시무시한 둔기로 돌변하여 어스 스네이크의 미간을 찍어 눌렀다.

콰아아앙!!!

“샤아아아앗!!!”

이마과 함몰되는 충격과 함께 어스 스네이크는 몸을 뒤틀었다.

고통과 분노가 한되 섞인 몸부림에 레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녀석의 머리에서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금세 자세를 바로잡고, 두 발과 방패를 지지대로 삼으며 땅 위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칫. 고향에 돌아온 게 확실한 모양이네. 잘 죽지도 않잖아.”

완전히 죽일 요량으로 쳤는데 버티고 있는 어스 스네이크를 보면서 레아는 자신이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레아!”

“성화 씨. 만나자마자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혹시 우리 아버지 못 봤어?”

“신요현? 역시 너희도 서로 떨어져버린 거야?”

“눈을 뜨자마자 혼자였어.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서 냅다 달려와 본 거야.”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 고통에서부터 정신을 차린 어스 스네이크가 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아는 검과 방패를 고쳐 쥐며 말했다.

“우선 저놈부터 정리한 뒤에 얘기하자.”

타앗!

레아는 제자리에서 도약하는 것으로 정면에서 덮쳐드는 어스 스네이크의 입을 피해냈다.

바로 발밑을 지나는 뱀의 머리.

그곳으로 몸을 힘껏 회전하며 방향을 꺾은 레아가 떨어진다.

뻗은 검과 방패의 모서리를 송곳니처럼 빛내며.

퍼어억!!

“샤아앗!!”

땅과 같은 재질의 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검병기.

레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난타를 날리듯 두 팔을 교차로 휘둘렀다.

퍽!! 퍼벅!! 퍼억!! 퍽!!

선명한 혈액이 사방으로 튄다.

대부분은 레아의 몸에 묻어 그녀의 도축을 더욱 살벌하게 만들었고, 일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스 스네이크의 몸에, 일부는 바닥으로 튀었다.

“와아……. 역시 게임으로 보던 광경과 실제는 괴리감이 크구나.”

그 모습을 보던 연성화는 감탄 아닌 감탄을 흘렸다.

로망이 넘치는 판타지 싸움이라기보단 작은 짐승이 덩치 큰 짐승을 사냥하는 야생의 법칙 끝판왕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샤아아앗!!”

어스 스네이크는 이번에도 레아를 떼어내려고 몸을 뒤틀었다.

꼬리고 쳐보기도 하고, 몸을 뒤집어 레아가 매달린 부분을 땅에 갈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휘두른 꼬리는 칼날에 잘려나갔고, 땅에 문지른 행위는 방패로 몸을 지키던 레아를 더욱 송곳처럼 몸 안으로 파고들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어스 스네이크의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손상되었다.

콰직!!!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뼈와 근육이 절단 나며 뱀의 머리는 떨어져나갔다.

목이 떨어졌음에도 아직까지 숨이 붙어서 덮쳐오려던 뱀의 머리를 발로 차 날려버린 레아가 연성화에게 돌아왔다.

“다친 데는 없어?”

“난 괜찮아. 너는?”

“저런 잡몹한테 다칠 정도로 무르진 않아.”

잡몹…….

방금 전까지 연성화에게 주마등을 느끼게 할 정도의 괴물이 잡몹인 건가…….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식을 초월하는 강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결국 아버지도, 스콜도 근처엔 없는 건가.”

“이 정도의 소동이 일어났는데 나타나지 않는다면 근처엔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아예 우리와 다른 장소에 떨어졌다던가…….”

“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성화 씨 근처로 떨어진 것을 봐선 플레이어와 캐릭터를 짝지어 놓은 거 같아. 내가 여기에 있다면 스콜은 아버지에게 가 있겠지.”

신요현의 안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불안하지만, 스콜이 그의 곁에 있다면 안심할 수 있다는 듯 레아는 말하였다.

거기에 동의하려 입을 열던 연성화였지만, 문뜩 불길한 생각에 미쳐 입을 다물었다.

“잠깐…….”

“응?”

“이상하지 않아? 이벤트가 시작될 때, 나는 스콜과 붙어 있었고, 너는 신요현이랑 붙어 있었어. 그런데 스콜이 아닌 네가 내 근처로 떨어졌다고?”

그 말에 레아의 얼굴도 살짝 굳어졌다.

확실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 아니다.

그 플레이어의 파트너 캐릭터가 함께 떨어진 게 아니고, 거리상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함께 이동한 것도 아니라니.

그럼 기준이 뭐지?

“만약 ‘기준’이 없다면?”

“……내가 성화 씨 근처에 있던 게 우연이라는 거야?”

“그건 아닐 거야. 이 넓은 세상에서 레아 넌 의도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나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어. 덕분에 어스 스네이크에게 당하지 않았으니까. 플레이어와 캐릭터를 짝지어 놓는다, 여기까진 맞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플레이어에게 너무나 가혹한 이벤트가 된다.

아무리 율이라도 ‘플레이어의 몰살’을 바라는 게 아닌 이상 분명 캐릭터를 붙여두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네가 아닐 수 있었다면? 내 근처에 떨어진 게 너라는 부분이 순전히 우연이고, 다른 캐릭터도 가능하다면?”

“……!”

그렇다면 오서연이 왜 캐릭터와 연결지어 플레이어의 안위를 걱정했는지 설명이 된다.

만약 이 이벤트의 개요가 ‘무분별한 조난’이 아니라 ‘무분별한 만남’에 있다면?

마치 랜덤 채팅을 하듯 플레이어와 캐릭터를 마구잡이로 짝지어주고, 연성화가 운 좋게 자신에게 호의적인 레아와 만난 거라면…….

“그럼…… 지금 신요현은 누구와 함께 있지?”

레아의 표정이 심각하리 만큼 일그러졌다.

연성화는 운 좋게도 그녀에게 레아와 함께 떨어지게 되었다.

그럼 신현성 쪽은?

사실 이게 과장된 망상이고, 사실은 잠시 오류가 있어 스콜과 레아가 바뀌 채 떨어졌다면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율이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진 않고, 이 이벤트는 그리 친절성 넘치는 룰이 아닐 거란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벤트에 도사리고 랜덤성의 위험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랜덤성이 주체가 될 줄은 몰랐다.

그 확률의 문제는 캐릭터가 얼마나 강하든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지금 신요현은 누군지도 모를 캐릭터와 함께 글레이그 대륙 어디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고, 정황상 그편이 가장 가능성 높았다.

이곳은 초인들의 세상인 글레이그 대륙.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캐릭터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 캐릭터가 플레이어에게 협력적이지 않다면?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살의를 들어낼 성격이라면?

차라리 살인마와 함께 무인도에 표류되는 것보다 더한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율, 이 개새끼이이이이이이이!!!!!”

참지 못한 레아는 다른 장소에 있는 신요현과 똑같은 욕설을 내지르고 있었다.

***

정리해보자.

나는 지금 낯선 숲 속에 혼자 있다.

레아는 물론 연성화와 스콜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가 헛것이 아니라면 이곳은 분명 글레이그 대륙이다.

율 이 녀석은 우리를 다짜고짜 게임 속 세상에 떨어뜨려버렸다.

그것도 일행과 떨어뜨려 놓은 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 그냥 죽으라는 거야?”

캐릭터 없이 플레이어 혼자 생존물을 찍으라면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

율이 원하는 건 우리들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니었나? 갑자기 스너프 필름 쪽으로 눈을 돌린 거야, 뭐야?

‘아니, 그놈도 최소한 게임 개발자인 이상 일방적으로 불리한 게임을 마련했을 리 없어.’

첫 번째 이벤트 때도 그랬다.

답도 없이 죽으라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줄 알았지만, 거기서 활로는 존재했다. 단지 그 활로로 나아가는 게 죽도록 어려울 뿐이다.

이번에도 그냥 죽지는 말라는 듯 무언가 장치를 해놓았을 것이다.

그것을 찾고 이용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부스럭.

“……!”

수풀이 흔들리는 기척에 놀라 눈을 돌렸다.

무언가 숲 안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몬스터인가 하며 몸을 바짝 긴장 시켰지만, 이내 조금은 풀어내었다.

첫 번째 이벤트에서 지겹도록 겪었던 몬스터의 기척이 아니다.

그들처럼 육중한 발소리도, 짐승의 냄새도,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과 비슷한 체형의 무언가가 금속 갑옷의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레아? 너야?”

가장 먼저 자신의 파트너를 떠올리며 불러보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기척은 내 시야 내로 들어오기 직전에 잠시 멈췄다.

잠시 주춤한 것처럼.

“…….”

그 움직임에 나는 다시 신체를 긴장시켰다.

만약 저 수풀 너머에 있는 게 레아나 스콜이라면 거리낄 것 없이 앞으로 나올 것이다.

혹시 연성화 혼자 조심해서 움직인 거라고 해도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 없다.

그렇다면 저 일순 주춤한 반응은 뭔가?

마치 기척으로만 느끼던 나를 완전히 확인하고 살피는 듯한…….

절대 내 동료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누구야, 너?”

저건 아군이 아닌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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