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추억이여 잘 있거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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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배웠다. 누구보다 아주 뼈저리게 통감한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겪으면서 그러한 진리를 체득했다. 때문에 이 격언은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값진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보통 쉽게 바뀌지 않지만, 달리 말해서 어떻게든 지지고 볶고 삶다 보면 바뀌긴 한단 소리였다.
내 경험에는 그랬다.
어찌저찌 하다 보니 바뀌더라.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이, 아예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하더라.
조금 옛날 얘기를 해볼까.
또래 남자애들보다 현저히 키가 작고 왜소했던 아카데미 중등부 1학년 시절.
나는 어릴 적부터 인연을 쌓아온 소꿉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이며, 동시에 내 첫사랑이었던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사실 그 용기라는 건 조바심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중등부로 진학하며 더 넓은 물에서 놀게 되니,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스펙을 가진 학생들이 지천에 널리고 널렸더라.
선천적 보유 마력량도, 각자의 재능도, 체질도, 심지어 얼굴도… 모든 부분에서 날 압도하는 동급생들 앞에서 나는 그저 어깨를 움츠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소꿉친구가 객관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지, 입학하면서부터 그녀를 보기 위해 달려온 선배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작고 하찮은 나에 비해 눈부실 정도로 찬란히 빛나는 소꿉친구를 보면서, 왠지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뺏길 것만 같은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그녀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는 남자 학생들은 거진 전교 남학생의 삼분지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만 하면 의자를 질질 끌고 와 소꿉친구의 자리 옆에서 말을 거는 모습이 빈번했다.
이런저런 개인적 취향을 묻기도 했고, 머리카락이며 얼굴이며 예쁘다는 칭찬은 말에 꼭 들어갔다.
다소 외곽이었던 지역에서 나라의 중심에 가까워짐에 따라,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녀를 위해 남자 선배들이 아카데미의 여기저기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그 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살살 아려왔지만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들을 말리겠는가. 곤란한 듯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는 소꿉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소꿉친구는 동급생, 선배들뿐만 아니라 교수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매사에 겸손하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나긋한 성품은 물론이고, 예법과는 거리가 먼 지역에서 살다 왔음에도 아주 깍듯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 마학(??)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점 찍은 교수들만 해도 대략 대여섯 명은 가뿐히 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학(??) 관련 교수진 전원이.
저렇게 착실하며 뛰어나기까지 한 학생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 마음은 십분 백분 이해하고 있다.
내가 교수였어도 분명 자필 추천장을 써주면서까지 황립 아카데미 마법학부에 지원토록 했을 것이다.
하면 그녀라는 걸출한 인재를 발굴해 낸 깊은 안목의 교수로도 인정받을 것이었고. 그녀가 훗날 최연소 대마법사에 등극하기라도 하면 위명을 널리 떨칠 수도 있었을 터.
아니,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론은 내 소꿉친구가 중등부 입학 시절부터 나와 비교도 안 될 위치에 있었다는 거다.
6년.
소꿉친구와 내가 쌓아온 인연의 시간이다.
초등부 입학 전부터 알고 지냈으니 중등부 입학 즈음엔 대충 그 정도 되었겠지.
당시 같은 반이었던 소꿉친구는 구태여 그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반 구석 창문 자리에서 조용히 책만 읽던 나에게 다가와 평소처럼 먼저 말을 걸어주기도 했다.
점심도 그녀의 부름에 따라 종종 같이 먹었다. 다른 친구들이 끼면 내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단둘이서.
어느샌가 소꿉친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혼자 밥을 먹게 되긴 했지만… 아무튼.
반에서 겉도는 내 모습이 소꿉친구는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굳이 신경 안 써도 된다는 나에게 여러 번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의외로 몇 번 어울리긴 했지만, 그들은 곧 내 주위에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수동적이고 재미 대신 잼을 가져올 만큼 재미없는 나와 친구가 되어 얻는 이점이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소꿉친구와 내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걸 알고 뭇 남자애들이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내가 사실 보잘것없는 남자라는 것을 꿰뚫어 본 이후에는 내 존재에 더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나도 안다. 이대로면 뺏길 거라는 것을.
수동적이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 지금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서, 내가 못난 만큼 더 열심히 해서, 소꿉친구와 동등하진 못하더라도 그녀 주위에서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걸.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인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내 경우엔 바뀔 수 없었다.
그래서, 빼앗기기 전에 먼저 고백했다.
중등부 1학년 2학기 말.
1년에 달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면서 점점 대화하는 횟수도 적어지고, 등하교를 같이 했던 초등부 때와 달리 서로 다른 곳에서 살기에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던 우리는, 뭐랄지 애매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 관계가 지속되던 도중에 내가 먼저 부른 것이 무척 의외인 것처럼 무슨 일이냐며 갸웃거리던 소꿉친구는, 곧 심상치 않은 내 분위기에 뭔가를 알아차린 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곤 가만히 있었다.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추억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쌓아온 시간은 녹아 없어지지 않으니까. 어떤 때보다 즐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마, 소꿉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렇게 믿는 편이 좋았다.
그래도 꾸준히 내게 관심을 보여주었던 소꿉친구다. 어릴 땐 부끄럽지만 장난스럽게 결혼 약속도 한 사이였다.
타이밍이 갑작스럽긴 해도 그녀가 내 고백을 받아준다면,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먼저 확실하게 그녀와 나의 관계를 묶어둔다면, 나는 그녀와 동등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실낱같이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어 섣부른 판단을 하고 돌이키지 못할 선택을 저질렀다.
한데 너무 늦어버린 걸까.
…아니.
그때가 아닌 언제라도, 이와 같은 대답이 나왔을 거다.
“…아하하. 나, 완전 깜짝 놀랐어. …으응, 그렇구나… 에지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살짝 충격을 받은 듯한 소꿉친구는 봄철 벚꽃잎의 색을 닮은 머리칼을 조심히 매만지며 애매하게 웃었다.
나는 인생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손에 바짝바짝 땀이 말라가고,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딘가 오줌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기에, 누가 보아도 우스운 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소꿉친구는 어릴 적과 같이 변함없는 순수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나도… 너를 좋아해, 에지오.”
좋은 흐름이다.
예상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다.
동시에.
떨구었던 고개를 간신히 들어 소꿉친구의 눈을 마주한 나는, 내가 차였음을 깨달았다.
그건 뭐랄지…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저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는 지금도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그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변함이 없어. 오늘만 해도 네가 날 먼저 불러줘서 무척 기뻤고, 가슴이 막 두근거렸어. 이제 나와 다시 얘기해주는 걸까? 내가 말을 걸어도 무시하지 않게 되는 걸까? 하고… 지금의 친구들도 엄청 좋은 아이들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에지오와 얘기하는 게… 제일 즐거웠으니까. 응.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야.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렇게나 너를 좋아하지만……”
말을 끊고 싶어도 입을 달싹이지 못했다.
그만.
그 이상 말하지 마.
소꿉친구는 스스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는 듯, 스카프 위에 손을 올리며 울 것 같은 슬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은 다른 것 같아. 미안해, 에지오.”
그 순간.
심장이 생채로 뜯어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다.
하지만 이렇게 아플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흥분으로 뜨겁게 들끓던 머리가 차게 식었고, 냉정한 이성이 돌아오자 나는 내가 평생 두고 후회할 선택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이성적으로 관찰해 보면 그녀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분명 그녀에게 있어 최고의 친구였지만.
가슴 풋풋한 연애 대상으로서, 매력 있는 이성으로서, 한 명의 남자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것만큼 슬픈 일이 없었다.
왜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뭐가 부족해서 나와 사귈 수 없는 거냐고. 네가 원하는 남성의 기준이 대체 뭐기에. 어떻게 하면 네가 날 이성으로서 봐줄 수 있는 거냐고……
그따위 질문을 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답이 나온다 한들 내가 그것을 실현시킬 능력 따위, 가능성조차 어디에도 없다는 걸 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하기사, 여자보다 키가 작은 남자를 대체 누가 이성으로 봐주겠는가.
무언가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으면 모른다.
얼굴마저 못나고, 가진 재능도 보잘것없으며 성격도 음침한 남자를, 소꿉친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절대로 연애감정 같은 게 솟아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6년의 인연으로도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알았어.”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꾹 쥔 나에게 소꿉친구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조심히 말을 꺼냈다.
“에지오한테는… 상처, 겠지? 정말 미안해… 나, 나… 에지오한테 상처를 주는 건 절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에지오… 하지만 나, 에지오랑 멀어지기 싫어… 계속, 계속 에지오가 내 소중한 친구로 남아줬으면 하는 건… 내 욕심이겠지? 나 완전 나쁜 사람 되는 거겠지? 그치? …흑, 흐엥…… 나 진짜 나쁜년이야…… 너무 미안해, 미안해… 흐아앙……”
소꿉친구는 이쯤 거의 울고 있었다.
은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평생 지워지지 못할 상처를 주었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더 아팠다.
생애 첫 고백을 거절당한 것도, 소꿉친구가 내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 첫사랑일 터인 사람과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 건지 상상하는 것도……
그중에서도 소꿉친구가 슬퍼하는 이유는 오로지 내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아려오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았으면.
그저 소꿉친구와 친구로 지내는 것에 만족했으면.
그녀에게 일방적인 연심을 품지 않았으면.
도대체 왜, 멍청한 나는 자기 혼자 멋대로 소꿉친구가 내게서 멀어질 거라 생각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려 서로 상처를 받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아직도 날 가장 소중한 친구로 생각했는데. 되도 않는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따지고 보면 전부 나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꿉친구를 탓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속죄할 방법은 하나였다.
적어도 소꿉친구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자.
처음부터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고, 앞으로 조금 힘들지 몰라도, 그녀가 여기서 더 상처받지 않도록 친구로 지내자……
“아냐, 나쁜 건 나였지. 잘 알았어. 네 말대로, 우리는 앞으로도 친한 친구일 거야.”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도를 넘어서니 오히려 차분해지고,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름 깨끗이 관리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옷소매로 소꿉친구의 눈물을 슥슥 닦아주자, 그녀가 큰 눈망울을 덜덜 떨며 물었다.
“…정말? 정말 나랑… 계속 친구로 지내주는 거야? 우리, 예전처럼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거야?”
미소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음, 글쎄.
아마 안 될 거야.
“그럼, 물론이지.”
“…흑, 흐잉, 흐에엥…… 에지오오오……”
한동안 미안하단 말과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해서 울먹이던 그녀는 이윽고 눈물을 멈추었고, 곧 점심 시간이 끝남에 따라 팅팅 부은 눈을 걱정하면서 세수를 하고 오겠다며 먼저 반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이, 이따 봐, 에지오!”
“응, 이따 보자.”
금세 쾌활해졌구나.
부끄러운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화장실로 쫄래쫄래 뛰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웃고만 있었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날, 나는 학교를 일찍 조퇴했다.
#2
여기까지가 소꿉친구와 내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
인생 좀 살아봤다 싶은 사람들은 전부 알겠지만, 남녀 사이에 진실된 친구는 존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처럼 서로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소꿉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당연하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여태 난 소꿉친구의 덕을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소꿉친구는 학생들의 지지를 많이 받는다. 그녀는 내가 도태되지 않기를 바랐고, 불시에 낯선 친구들이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어왔었다.
그때 난 전부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녀 이외에 다른 친구는 필요 없었으니까.
나에게는 소꿉친구만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그 마음도 이제 끝이었다.
나는 완벽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외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전부 자기 단련하는 시간으로 꽉꽉 채워버렸던 까닭이다.
쓸데없는 잡지식이 가득한 책 읽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기술 서적을 펼쳤다.
끔찍하게도 재능이 없는 내가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거라곤 끽해봐야 레시피가 제시되는 연금술 정도였나.
보고 따라 하면 짠, 하고 결과물이 연성되는 거다. 그닥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연금술에 입문하기 위한 과정이 그렇단 것이고.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연금술은 가장 입문이 쉬운 학문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학문으로 180도 돌변한다. 돌에서 금 만드는 새끼들 아니랄까봐 사기도 잘 친다.
안 되는 건 미리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몇 번 시도해 보고 유해물질만 주구장창 만들어내자 도구들을 싹 치워버린 뒤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기본적으로 배우는 검술은 볼 것도 없었다. 검이 무거워서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데 기술을 어떻게 배우겠는가.
마법은 소꿉친구의 전문분야였다.
반대로 내가 가장 취약한 분야이기도 했다.
세상에, 마력량이 쥐꼬리만큼 적어서 기초 마법조차 불발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반 아이들은 넌 왜 소꿉친구와 같은 학교를 다녔으면서 이렇게 차이가 나냐는 투로 날 비꼬기도 했다.
그때마다 소꿉친구가 그들을 노려보며 제재를 가하긴 했지만, 딱히 변하는 건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검술, 마학, 연금술, 창술, 야금술, 궁술, 학문, 격투술… 방대한 자료의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매일 대출하며 읽고, 또 읽어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중등부 1학년 과정이 끝났고, 마지막으로 훑어보지 않은 분야에 관련된 책을 펼친 뒤 그것을 직접 테스트 해봤다.
그렇게 나온 결론.
“놀라울 정도네.”
내겐 아무런 재능도 없다.
절망했나?
아니, 그렇지 않다.
세상은 나를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뭐.
없으면, 내가 만들어 내면 된다.
내가 존재할 이유를 내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마음을 좀먹기 시작한 좌절심을 희미하게나마 걷어냈다.
제아무리 이름뿐이라지만, 귀족 가문의 아들이었기에 이런 질 좋은 아카데미에도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내 수준이라면 꿈도 못 꾸었을 레벨의 교육 시설이다.
그런 내가 왜 여길 필사적으로 부모님을 설득하며 지원했냐면, 당연히 소꿉친구 때문이었다.
소꿉친구는 마법의 재능이 찬란했으니까.
그 아카데미에서 선뜻 장학금까지 지급하며 스카우트를 해간 것이었다.
반면 나는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녀를 쫓아가기 위해 내가 그곳을 다녀야 하는 이유 서른 가지를 부모님께 줄줄 늘어놓은 뒤 결국 아카데미 유니폼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소꿉친구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나는 기숙사 대신 인근 시설에 적당한 방을 잡아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아카데미 기숙사를 신청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거긴 룸메이트가 필수로 배정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비용 차이도 별로 없고, 물론 기숙사 시설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혼자라는 점에서 얻는 이점이 더 많았으므로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소꿉친구와 통학을 달리 하니 접점도 별로 없다. 학교에 가서도 그날 이후로 의도치 않게, 아니,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이가 지속되었으니 소꿉친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일이 극히 적어졌다.
무기질적인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흐른다.
시린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철이 찾아왔다.
중등부 2학년 1학기 초입.
소꿉친구가 마법부 진학을 선택함에 따라, 나는 그녀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모든 아카데미 중등부 학생들이 2학년 과정을 거치면서 특정 분야 학부로 진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부 선택받은 이들만 받을 수 있는 혜택 중 일부였다.
따라서, 나는 평범하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별다를 것 없이 지냈다.
달라진 거라곤 명찰의 색깔인가.
1학년 때가 파란색이었다면 지금은 하얀색이다. 3학년이 되면 황금색으로 바뀐다고 했었지.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가끔 명찰 색깔을 보고 내게 인사하는 파란 명찰의 신입생들이 있긴 했는데 아주 극소수였다. 그들이 언뜻 보기에도 난 딱히 존중할 가치가 없는 선배였던 듯하다. 거 눈썰미도 좋아라.
소꿉친구는 같은 마법부에 속한 학생들과 교수가 상주하는 별관에 입성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본관이었고.
사실, 본관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교수들은 물론이고 학장마저 본관보다 여러 개 설립된 별관에 훨씬 많은 자원과 인력을 투자했으니까.
같은 반에 친구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냥, 만들 필요도 못 느꼈다.
의외로 성적은 전보다 나아졌다.
물론 실기는 그대로였고, 필기만.
매일 도서관에 가서 주구장창 책만 읽어댄 효과가 나름 있었던 것 같다.
어째 하교하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근 6개월 동안 빌린 책의 권수만 아마 200권은 족히 넘지 않을까 싶다.
자세한 숫자는 잘 모르겠다. 사서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그래.
사서 하니까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중등부 2학년 1학기 말.
“저랑 사귀어주세요.”
누군가 내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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