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추억이여 잘 있거라 (2)
* * *
#3
“저랑 사귀어 주세요.”
느닷없이 나타난 상대는.
흑단같이 어두운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른, 누가 보아도 감탄하며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을 미인이자 소녀였다.
동시에, 자기를 아카데미 도서관 사서라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사서 겸직 교수는 아니고 도서관리부원이다.
도서관리부에 이런 여자가 있었던가?
모르겠다.
책을 대출해주는 사서의 얼굴 따윈 굳이 기억할 필요성도 못 느꼈던 것 같다. 책 찾을 때도 도서관에 마련된 전산 시스템으로 알아서 찾았으니……
그렇지만 그녀는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사서라면 도서관에서만 나를 봤을 텐데. 정말 이상하게 나를 너무 잘 알았다.
“……”
본관 뒤뜰의 구석진 계단.
맨날 내가 숨어서 밥을 먹는 은밀한 장소에 불쑥 찾아와 고백할 정도로.
……어떻게 알았지? 스토커인가?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었다. 남자로서 항거할 수 없는 매력을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주위 시선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온몸에 깃든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여태 본 최고의 미인 중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아, 1순위는 당연히 소꿉친구다.
다만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는, 이 사람의 분위기가 소꿉친구와 전혀 정반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잘 관리되어 착 가라앉은 푸르디 검은 머리칼. 인상은 차분하고 이지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맹해보이기도 했다. 아마 진의를 알 수 없는 덤덤한 표정 탓이다.
햇빛을 전혀 받지 않고 살아왔다고 느낄 만큼 창백하리만치 새하얗고 티끌 없이 투명하며 맑은 피부는, 그녀의 신비한 자줏빛 눈동자와 어우러져 상서로운 고결함까지 드러내는 듯했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가녀린 체구의 라인을 아카데미 유니폼이 감싸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맨살이 드러난 두 다리는 시원스레 쭉 뻗어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런 동화 속 요정 같은 소녀가 한낱 고블린에 불과한 나에게 불쑥 고백해 온 것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았던 순간 1순위에 당당히 뽑혀도 좋을 만큼, 단순한 행운을 넘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
솔직히 말해서…아무 생각 없었다.
당연히 벌칙이겠거니.
내가 만만해 보여서 거는 장난이겠거니.
누군가의 협박을 받았겠거니.
뭘 가정하든 그녀가 내게 고백한 건에 강제성이 부여된 사실만큼은 틀림없었을 것이기에.
“……?”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였다. 그에 따라 머리카락 끝이 찰랑거렸다.
나는 우물거리던 베이컨을 씹어 목구멍 뒤로 삼킨 뒤 말했다.
“고백한 셈으로 치고, 친구들한테 돌아가요. 이 주위에 있으면 뭐… 예상한 반응 못 보여줘서 미안하게 됐네요. 원체 재미없는 사람이라.”
“……”
그렇게 말한 뒤 신경을 껐다.
좀 놀라긴 했는데 이성을 찾으니 차분해졌다. 곧 나한테 흥미가 떨어지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고개를 떨군 채 밥이나 계속 먹었다.
잠시 뒤.
앞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벌칙 같은 거 아닌데.”
“……”
내가 대답도 않자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거 진짠데.”
…말이 되는 소리를.
“나름 용기낸 건데.”
친구들 앞에서 벌칙을 수행하려면 부끄러움을 감내할 용기가 필요하긴 하지.
“…번거롭게 설명해도 못 믿으실 눈치네요.”
당연한 거 아닌가.
날 좋아할 여자가 있을 리 없잖아.
가정에 가정을 더해 만약 진짜라고 해도, 난 내 주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객관화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이때의 나는 뭘 하든 실패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어차피 새로운 뭔가를 시도한들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비단 어디 한 곳에 치중된 게 아니라 의식 전반에 걸쳐 이리저리 퍼져 있었다.
연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내게서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기대했던 상상 속 인물만큼의 만족감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
“알았으면 이제……”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응?”
쪼그려 앉았던 그녀가 무릎을 털고 일어나, 그 말을 남긴 뒤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불쑥 찾아왔을 때처럼 홀연한 뒷모습이었다.
“……허.”
뭐야, 쟤.
신령한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방금 만난 이상한 여학생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남은 점심 시간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도서관 안에서 보낸다.
반납하거나 새로 대출할 책은 없고, 기존에 읽던 역사책을 거의 다 읽었으므로.
오늘은 남은 페이지를 마저 읽을 참이었다.
그런데.
“……”
아카데미 도서관 내부, 얼마 없는 학생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집중적으로 꽂혀 있었다.
정확히는 책을 보거나 고르는 척하면서, 도서관 가장자리를 힐끔거리는 것이었다.
그곳엔 데스크 위에 책을 펼쳐놓은 채 턱을 괴고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푸르디 검은 머리칼의 여학생이 있었다.
눈길을 주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매력의 아름다운 소녀를, 남학생들은 멀리서나마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정도 관찰하다 보면, 문득 데스크 안 소녀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득하게 늘어지는, 아까부터 한시라도 움직이지 않은 채 더없이 끈끈하게 고정된 시선.
소녀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사람들의 눈길은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 어딘가를 보게 된다.
“……”
그렇게 해서, 도서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흠.”
살려줘.
집중이 안 돼.
고작 열 페이지 남았는데 마저 읽을 수가 없다.
나한테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몰라도.
아까 내게 장난 같은 고백을 해왔던 그녀가, 도서관 입성 때부터 계속 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대출해 줄 때만 빼고 계속.
계에에에에에속.
쭉.
저러다 눈에서 광선이라도 나오는 게 아닐지 싶을 정도로.
……여태 저런 강렬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건가?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랬으면 나도 진작에 눈치를 챘겠지.
작금의 이 압박적인 분위기는…… 내 성격상 선천적으로 버틸 수가 없다. 일정한 루트를 거치며 하나둘씩 내게 꽂히는 시선들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벼가 익듯 점점 고개가 아래로 숙여진다.
이러다 종이에 코라도 박을 기세였다.
내 무덤덤한 반응 때문에 벌칙 수행을 제대로 못 했다고 복수하는 걸까.
시시한 장난질이 실패한 까닭일까.
아니다.
저건 복수도 뭣도 아닌… 순수한 악의였다.
결국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고작 다섯 페이지를 더 읽고, 책을 덮은 뒤 끝까지 날 바라보는 그녀를 무시하며 도서관을 나왔다.
다음날.
점심 시간.
“저랑 사귀어 주세요.”
“…….”
진짜 왔다.
와서 또 고백한다.
아니, 협박인가.
나와 사귀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널 이렇게 꾸준히 괴롭히겠다, 같은 강렬한 의지가 눈빛으로부터 느껴졌다.
확실히 내게 있어서 매우 큰 정신적 타격이었다.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버리면 신경에 과부하가 걸려서 그만 터져버린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시발.
“점심 시간이랑, 외부 활동 시간, 그리고 방과후 시간 이후로 문 닫을 때까지 쭉. 이렇게 매일 도서관 관리를 제가 담당하고 있거든요. 근데 매일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매일 보고 있었어요.”
“……”
“저희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 같은데, 사귀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별로 안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 쳐다보겠단 말 아닌가. 어쩌면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수도 있겠지. 아니, 보는 걸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난 더 이상 그 도서관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다……
애초에 난 그녀가 누군지도 모른다.
단지, 유니폼에 달려 있는 명찰의 색깔을 통해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라는 사실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명찰 속 흰 글씨로 새겨진 이름이 꽤 특이하다는 건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저기, 그… 후배님.”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 에지오 선배.”
“사귀어 달라는 의미가 정확히 무슨 말이야?”
다소 실례스러운 생각이지만.
얘 좀 이상한 거 같다.
그래서 혹여나 남녀가 사귄다는 의미가 뭔지,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제대로 알까 싶어 물어봤다.
예상외로 정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음, 서로 좋아하는 연인이 되자는 거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넌 나를 좋아해서 사귀자고 하는 거야?”
“네? 그게 아니라면 고백을 왜 해요?”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표정 변화가 적어서 미간이 아주 살짝 좁혀진 것에 불과했지만.
“……”
날 좋아한다… 라.
그거 참, 신기한 일이다.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 정도로 예쁘고 어린 신입생 후배가, 반에서 겉돌기만 하는 외톨이 꼬마 선배를 좋아한다니.
이건 거의 기적이 아닐까.
신에게 개연성 좀 챙기라고 닦달하고 싶다.
구태여 날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진심이라면 미안하게 됐어.”
“……왜요?”
되물음이 돌아오는 게 약간 늦었다.
“과분할 정도로 고맙고 기쁜데, 난…… 잘 모르겠거든. 누굴 사귀고 싶지도 않고, 이렇게 지낸다고 해서 딱히 외롭지도 않아.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무엇보다…… 그럴 여유가 없어.”
난 더 높은 곳을 향해야 한다.
단련을 한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아카데미에서는 최선을 다해 수업을 듣고, 예습과 복습을 거듭하며 철저히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도서관을 다니고, 문이 닫히면 집에 돌아가 근력과 체력 운동을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한 뒤 잠에 든다. 일어나면 가벼운 새벽 운동을 마치고 아카데미에 등교한다.
이런 빡빡한 생활에 빈틈이 생기는 건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 정확히는 버틸 수가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빈틈이 생기면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자괴감이 하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 인생의 빈틈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너랑은 사귈 수 없어. 미안해.”
“……”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직도 못 믿겠지만, 정말 날 좋아하는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준 셈이겠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감정이 더 깊어지면 자꾸 그날의 기억이 오버랩 되는 바람에, 억지로 죄책감을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
고백을 거절당한 그녀는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까부터 난 그녀의 새하얀 다리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에지오 선배.”
내 머리 위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답했다.
“응.”
“제가…싫은 건 아니죠?”
싫어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응.”
“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구요.”
좋으냐 싫으냐를 따지면 전자에 더 가깝겠지만, 그건 언제의 누군가가 말했듯 사뭇 다른 감정일 것이었다. 귀엽고 예쁜 후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내 긍정에 그녀가 목소리를 낸다.
“그럼, 저를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네요?”
“……응?”
그게 그렇게 된다고?
할 말을 잃은 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란 아래 속눈썹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지도, 그렇다고 과거의 나처럼 애써 웃음 짓지도 않았다.
분홍빛 입술을 앙 다문 채로 무언가 결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배.”
“……어.”
왠지 모를 기백에 눌린 내가 쭈그러든 채 답했다.
“고백,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뭐?”
얘는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애원하는 투로 그녀가 내게 빌었다.
“한 번만 무르기. 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저는 오늘 선배한테 차인 적이 없는 걸로 하자구요.”
“아니,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없는 걸로……”
“선배만 허락해 주시면 할 수 있어요.”
그런가? 하고 나도 모르게 납득해버릴 만큼 호소력 짙은 표정이었다.
이쯤 되면 이러는 이유부터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해서 뭘 하려고 하는 건데? 이미 말했지만 네가 뭘 하든 나는 누굴 사귀고 자시고 그럴 여유가 없……”
내 말을 자르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살아요. 가끔은 휴식도 필요한 법이죠. 틈이 생길까봐 걱정하셔도 괜찮아요. 제가 채워드릴 테니까. 선배는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어요.”
“……”
“무엇보다 저는 선배를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선배는 저를 몰랐다는 게 괘씸해요. 이건…불공평해요. 눈도 몇 번 마주쳤는데 하나도 기억 못 하고……”
그 정도까지 괘씸한 일인가 싶었지만 괜스레 머쓱하며 말했다.
“…왠지 미안.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서.”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아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선배가 저를 의식하게 만들 거예요. 제가 도서관에 없으면 저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하루종일 걱정하게 만들 거예요.”
“……”
“그런 다음에, 선배한테 다시 고백할래요.”
뭐랄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쌓고 싶지 않은 인연을 억지로 만들려 한다.
비좁은 틈새라도 파고 들어가서 자기 존재를 내게 어필하려 한다.
그게 상대한테 해가 되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선배가…… 그때 절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진짜 연인이 될 수 있겠죠. 어느 한쪽이 불안해할 필요 따위 어디에도 없는 관계로 끈끈하게 맺어지는 거예요.”
결국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낼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서.
“분명… 선배나 저나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선배.”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과거의 나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멋대로 고백하고, 멋대로 고백을 철회했으며, 이젠 내 인생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겠노라고 선포했다.
전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거다. 당당한 어투에는 내가 자기를 반드시 받아줄 것이란 확신마저 깃든 것처럼 보였다.
이기적인 그녀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그녀가 제시한 것들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한데 나는 왜.
“……열심히 해봐. 아마 안 되겠지만.”
“……!”
자연스레 시선을 내리깔고, 미약한 두근거림을 감추고서 불확실한 거부감을 드러냈을까.
“……고마워요, 선배.”
그것만으로도 되었다는 듯 그녀가 기쁘게 웃었다.
차마 눈을 마주하진 못하고 애꿎은 베이컨만 우물거리며 그녀가 자리를 떠나길 기다렸다.
잠시 뒤.
“……!”
“맛있어 보이는데, 저도 하나 주세요.”
떠나기는커녕 이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어깨를 밀착한 채 바로 옆에서 조잘댄다.
처음 맡아 보는 종류의 향긋한 꽃내음. 시원하며 달싹지근한 풀잎 같은 향기가 훅 끼쳤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나는 또 쫓아내지 못했다.
“……네 거 먹어. 밥 안 먹었어?”
“다이어트 중이라서.”
“근데 내 건 왜 먹으려고 해.”
“조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요.”
“……안 돼. 1인분이야.”
“선배나 되는 사람이 쪼잔하게.”
“뭐?”
“그러지 말고 하나만 줘요. 아.”
눈을 감고 아기새처럼 입을 벌린 채 가만 있는다.
일단 어이가 없기도 했고, 음식을 한 점 집어 상대 입에 넣어준다는 그런 행위 자체가 턱없이 부끄러웠기에, 나는 말 없이 포크로 계속해서 밥을 먹었“……냠.”
실눈을 뜨고 있던 그녀가 머리를 움직여 내 손에 든 베이컨 말이를 잽싸게 채 갔다.
막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기에, 콧잔등을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간질였다.
“움, 맛있당.”
할 말을 잃은 내가 석상처럼 굳어 있자니 그녀가 여우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가만 받아먹는 것보다 직접 뺏어 먹는 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
잠시 뒤.
내가 도시락 통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녀는 잘못했다며 내 유니폼 끝자락을 질질 끌곤 결국 나를 다시 자기 옆에 앉혔다.
여기까지가, 전 여자친구와의 시작점.
이때 그녀를 단호히 거부하지 않았던 것을……나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