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추억이여 잘 있거라 (3)
* * *
#4
중등부 2학년 1학기가 끝을 고했다.
날씨는 갈수록 더워졌고, 태양빛이 한층 강렬해짐에 따라 학생들은 옷을 얇게 입기 시작했다. 기존의 하얀 바탕 금빛 자수 유니폼을 집어던지고 가벼운 셔츠 정도만 입고 다녔다.
과연 그 비싸디 비싼 입학 비용에 여름철 냉각비까지 포함되어 있던 것인지, 아카데미 내부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쾌적하고 시원했다.
대신 경계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는 순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진다.
“쟤네는 지치지도 않나?”
“어우, 땀 흘리는 거 봐…”
“야, 야야, 쟤 웃통 깠는데? 옆 반에 쥬드 아냐?”
“……와우.”
이 살인적인 더위를 뚫고 굳이 운동장까지 나가서 공을 뻥뻥 차는 남학생들을,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넓은 강의실에서 끝나지 않는 수다를 떨었다.
시험이 끝난 직후 대부분의 커리큘럼이 자습을 가장한 자유 시간으로 변함에 따라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뛰어 나갔고, 성실한 학생들은 학생 전용 연무장에서 검을 맞대거나 아직 배우지 않은 마법을 예습했다.
1차 정기고사에 이어 2차 정기고사까지.
중간과 기말로 줄여 부르는 그 시험들을 당연히 나도 치렀다.
검술을 비롯한 대부분의 실전 과목들은 필기보다 실기 위주로 평가한다.
비율로 따지면 대략 2:8 정도.
검술 이론과, 실전 검술.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뉘는 종합 검술 과목은 사실 그리 높은 수준까지 요구하진 않았다.
1학년 때 이미 재능을 발휘한 학생들은 따로 검술부에 진학했을 것이었기에,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제 몸 지킬 검술 정도만 구사하면 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면 되는데.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난 못 했다.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몸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다.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 간단한 걸 해내지 못했다.
내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있었지만 검술 교본을 하도 읽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량이 워낙 방대했던 탓에, 정해진 검로를 그려야 할 때 가지고 있는 지식과 충돌하여 삐끗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거야 예삿일이고. 친구들이랑 교수 보는 앞에서 말로 설명하지 못할 기예를 펼쳤다. 의도적으로 따라 하라고 해도 못할 수준.
무거운 진검을 들고서 손을 덜덜 떨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가히 장족의 발전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결국, 실기는 낙제점을 받았다.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아까도 말했듯 대부분의 실전 과목은 실기 위주다. 평가 비율도 검술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말인즉, 나는 교양과 일부 역사 과목 등을 제외하고 전부 낙제점 가까이 받았다는 소리였다.
필기 만점을 받았다고 으스댈 수도 없다.
나만 빡세게 공부한 게 아니다. 여긴 나름 명문 아카데미였고, 학생들은 대체로 우수했다.
그렇게 받은 점수들을 종합해 보자면.
우리 반 총원 30명 중에 28위.
종합 순위는 480명 중에 471위.
……꼴찌는 면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뒤의 두 명은 필기 시험을 시작하자마자 퍼질러 잤던 놈들이다.
추측하건대 아카데미 졸업장만 따러 온 것 같다.
어차피 부유한 귀족가의 자제인 만큼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까닭일까.
성적에 관해서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렴풋이 예상했던 결과였고, 사실 눈앞의 성적 따위보다 나는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했기에.
오늘도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
#5
초여름을 지나 한여름에 접어드는 시기.
방학이 시작되기 조금 전부터 내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시험이 끝난 후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동안 도서관에 눌러붙다시피 했다.
선천적 재능을 요구하는 분야를 제외하고, 꾸준히 시간과 노력만 투자한다면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일을 탐색했다.
어른의 지혜를 빌리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래서 담임 교수에게 시도해봤다.
몸 쓰는 일을 전부 제외하고, 고지식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을 배우면 좋지 않겠느냐는 답을 받았다.
그러나, 교수의 말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연구실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 아카데미에서 인간 수면제라 불리우는 그 교양 과목 교수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줍잖은 욕심이라고 봐도 좋았다. 아직 일 년도 안 지났다. 중등부 졸업 전까지만 내 숨겨진 재능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발견하지 못 한다면……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드르륵. 탁.
도서관 내부는 한적했다.
다들 노는 데 바쁜 까닭이다.
그 때문인지 유독 의자를 끄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슥.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인기척이 났다.
“……”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내 옆에 앉게 된 누군가로부터, 산뜻한 체취가 풍겨왔다.
팔락. 팔락.
저명한 교수가 집필한 마학 이론 서적을 펼친 나와 달리, 그녀는 평범한 문학집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직접 건드리지 않았다.
데스크에서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할 일이 없어지면 자기가 읽을 책을 들고선 내 옆에 앉았다.
물결치며 흐르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주변의 의문스러운 시선에도 꿈쩍 않고 페이지를 넘겨 나가는 것이었다.
…드르륵.
반면, 나는 흡사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들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는데.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그녀가 책을 덮곤 날 졸졸 따라왔다.
“……”
우릴 향한 시선들이 더 진해져서 다음부턴 그냥 가만 있기로 했다.
평소보다 유난히 집중 안 되었던 일주일이 지나고.
하루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 소설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나는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이 책을 집필한 작가는 더욱 좋아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어느 남녀의 이야기. 여운 깊은 엔딩으로 독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 읽는 참이었다.
그래서 테이블에 앉아 소설에 한참 몰입하던 찰나.
“…어, 저도 그 책 좋아하는데.”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있던 그녀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빙긋.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미소를 마주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방학이 선언된 이후로, 그녀는 도서관 내외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엔 날 따라 뒤뜰 계단에서 쉴새없이 조잘거리고, 방과후 도서관 안에선 종이에 펜을 끄적여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건네왔다.
몇 번 건성으로 대답하다 보니 대화라는 게 가끔 이루어졌고, 그 빈도가 점차 높아졌다.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렸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인연이 차츰 쌓여갔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작가나 최근 관심 가는 책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끝날 즈음엔 오늘 집에 돌아가서 할 일 따위를 늘어놓게 되었다.
한낮의 정오부터 태양이 저물어 갈 때까지.
주변에 민폐가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춘 채, 우리는 서로 속삭이듯 말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천에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알고 보니 신입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예쁜 얼굴은 둘째 치고, 내 소꿉친구처럼 평민 일가에서 태어나 전액 장학금을 받고 스카우트 된 케이스였다.
사실 학장의 손녀라느니 하는 괴소문도 있었는데, 본인은 부정했다.자기 할아버지는 변두리 영지에서 밭이나 갈고 있더랬다.
성격이 특이한 걸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쉽게 말해 괴짜.
세상 만사가 자기 중심적 사고로 돌아가서 그런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주변 친구들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나.
이 역시 본인은 부정했지만 내 생각엔 딱히 와전된 소문 같진 않았다.
검은 머리색은 아버지 쪽.
자줏빛 눈동자 색은 어머니 쪽 유전이다.
어릴 때 지병을 앓아서 밖에 잘 나가지 못했다 보니 피부가 새하얗다.
책은 주로 추리 소설과 연애 소설을 좋아한다. 이론 서적 같은 건 지루해서 잘 안 읽는다.
목덜미 왼쪽에 작은 점이 있다.
더위를 잘 탄다.
도서관리부에 들어간 이유는 자기가 읽고 싶은 신간 도서를 신청해 넣기 위해서.
기숙사에 산다. 룸메이트가 잠잘 때 코를 많이 골아서 집게로 막았다가 대판 싸웠다고 한다.
2학년이 되면 검술부에 진학하게 될 모양이지만 사실 몸 쓰는 일 싫어한다. 도서관처럼 시원하고 조용한 곳에서 음료나 마시며 책 읽는 게 더 좋다고.
입학 초기부터 꾸준히 고백을 받았다.
거의 정기행사였단다.
그중 계속 거절해도 끈질지게 고백해 오는 검술부 남자 선배가 있어서 곤란했다.
자세한 행적을 듣다 보니 지금 얘가 나한테 하는 짓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과연 몰래 스토킹 하고 있을 수준이었다는…… 뭐야, 진짜 다를 거 없잖아.
아무튼 그 남자 선배를 떨쳐낸 방법은 이거였다.
결투.
그 선배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조건을 내걸었다.
본인이 이기면 앞으로 치근덕거리지 말고 꺼져라.
대신 본인이 지면 소원대로 사귀어 주겠다. 이렇게.
두 합 정도에 검을 쳐내고 낭심을 짓밟으려던 그녀를 선배의 친구들이 겨우 잡아 뜯어가며 말렸다.
그 아찔한 사건 이후 남자 선배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고백해 오는 횟수가 전체적으로 적어졌단다.
제멋대로인 고양이는 싫어한다.
반면 강아지는 순종적이어서 좋아한단다.
그녀처럼 정말 제멋대로인 취향이었다.
나와 반대로 필기는 영 자신이 없다. 머리는 나쁜 것 같진 않으나 그냥 공부가 싫은 모양이다.
교수들은 그녀를 두고 훗날 제국의 검이 될 인재라 말하는데, 정작 자기 꿈은 현모양처를 가장한 무직 백수랬다.
유능한 남편을 만나서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싶댔다.
그러니까 더 노력하라고, 나를 보며 말했다.
방학이 끝난 이후에도 만남은 계속되었다.
어느샌가부터 나 혼자만의 장소였던 뒤뜰 계단은 그녀와 내가 함께 점심을 먹는 장소가 되었다.
도서관은 물론이고, 이따금 인적이 드문 기숙사 주변의 벤치에서 만남을 갖기도 했다.
원래 데스크를 맡는 건 매일 자기였는데, 사람이 많은 날엔 나와 대화할 기회가 적어서 부원 한 명을 로테이션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본관 계단에서 가끔 마주칠 때면 손을 흔들며 발랄히 인사를 해오는 탓에 황급히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녀와 함께 있던 후배들이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 자연스레 회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삐져서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언제 삐졌냐는 듯 방긋 웃으며 전보다 더 조잘거리게 되었다.
여름을 지나 단풍이 지는 가을까지.
그리고 곧 겨울이 다가온다.
빈틈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내 일상에 작은 금을 냈던 그녀는 조금씩 공간을 넓혀가며 아예 기둥을 세워버렸다.
이제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내 일부가 폭삭 무너지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아마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사실상 그녀를 제외하면 아카데미 내부에 친구라 할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셈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특별했으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했다.
내게 있어서 특별함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듯, 나 역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므로.
막연한 고마움은 느끼고 있다. 그녀가 내 곁에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거란 생각도 했다.
그렇기에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나는 분명 누구보다 좋아하고 있었지만.
사랑하지는 못했다.
첫눈이 내리고.
보드라운 눈송이가 풀풀 내리던 어느 겨울날.
누군가와 함께 있는 소꿉친구를 봤다.
마법부 학생임을 드러내는 남색 로브를 걸쳐 입고, 일 년 전과 비교해 하나도 변함없는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외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지 코 끝과 양 볼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 정수리 위에 내려앉은 눈.
“머리에 묻었다.”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것을 손으로 털어 치워주자 고맙다며 지어주는 그 포근한 미소마저도 여전했다.
단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
마법부 별관에 향한 건 담임 교수의 심부름 때문이었다. 물건을 간단히 전해주고 오면 될 일이라서 마주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찰나의 순간.
우연히 맞닿은 눈동자에 희미한 놀라움이 깃든다.
파삭.
상자를 내던지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멀리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않았다. 느릿하게 내리는 눈 사이를 내달리며 온몸에 눈송이가 덕지덕지 붙을 때까지 도망쳤다.
미련하고 꼴사납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기 더 있었다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간신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노력한 의미도 없이 우연한 마주침 한 번에 거짓말처럼 전부 되살아났다.
눈은 피부에 닿으면 녹아 흐른다. 그러니 물이 되어 흐른다. 하지만 눈은 차가워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녹아 흐르는 물은 뜨겁기만 했다.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지쳐 쓰러졌을 터.
내가 어디쯤 왔는지도 모를 만큼 달렸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엎어졌다.
“……”
눈이 쌓여 있던 덕분에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푹신하고 좋네. 쓰라린 콧잔등을 부비다가 그냥 그대로 몸을 돌려 누워버렸다.
하얗게 물든 하늘에 새하얀 눈이 내린다.
혹시나 따라오지는 않았을까.
기대 아닌 두려움으로 고개를 들어본다.
……눈 덮인 나무들만 울창하게 늘어서 있을 뿐, 그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
생각해 보니 내 알 바 아니었다.
소꿉친구가 누구와 연애하든, 더 이상 내가 신경 쓰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게 좋겠지.
아까만 해도 터질 듯 쿵쿵거리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다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진정됐다. 잘 됐네.
이성이 돌아오니 문득 부끄러워졌다.
소설도 아니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나.
헛웃음을 짓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니폼에 묻은 눈을 탈탈 털었다.
“여기도 묻었어요, 선배.”
“어, 그래? 고맙……”
말을 끊은 순간과 등을 돌린 건 거의 동시였다.
“……너.”
“죄송해요. 선배를 보면 몰래 따라가는 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헤히.”
나만큼이나 온몸을 눈송이로 뒤덮은 그녀가.
베이지색 머플러를 유니폼 위로 두른 채 차가운 입김을 호호 불고 있었다.
…왜 여기에 있나 했더니, 또 스토킹을 한 건가.
정말 좋지 못한 버릇이다.
“그나저나 진짜 춥네요. 후우. 요즘 들어 가장 추운 날인 거 같아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 선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울어요?”
곧 눈꼬리가 아래로 누그러진다.
“…울지 마요. 제가 나쁜 짓 한 것 같잖아요.”
스토킹은 나쁜 짓이 맞단다.
그리고 안 울어.
목소리만 안 나올 뿐이다.
“으, 으음, 으으으음……”
한참 내 앞에서 우물쭈물 하던 그녀는.
“…제 생각엔 이거 찬스 같아요. 그쵸?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에라, 모르겠다. 에잇.”
혼자 뭐라뭐라 하더니 날 확 잡아 끌었다.
전신에 힘이 없다.
애당초 나보다 그녀가 힘이 세다.
내 키보다 아주 조금 작은 그녀에게 폭 안긴 모양새가 되어, 내 등허리를 감싸는 가녀린 팔의 포근함을 느낀다.
차갑지만 따스하다.
지금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거리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살며시 두드린다.
“……있잖아요, 선배.”
“……”
“……저, 엄청 참고 기다렸어요. 근데 도저히 기회가 안 보이더라구요. 선배 눈 완전 높은 거 알아요?”
“……”
“……그래도 뭐, 이해해요. 그 언니 때문이겠죠. 분하지만 인정할게요.”
눈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녀의 왼쪽 어깨, 내 오른 어깨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대신 그 위에 있는 서로의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눈을 맞는다.
눈 묻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질였다.
이미 익숙해진 체취 속에 독특한 라임향이 섞여 풍겨온다.
파들파들.
별안간 나를 꼭 끌어안은 그녀의 몸이 살살 떨리는 걸 느꼈다.
추워서 그랬을까.
아마 그랬을 수도 있다.
“…저 아직 선배 손도 못 잡아봤는데. 안아버렸네요. 부끄러워 죽겠어요.”
그럼 슬슬 놓지 그래.
“…그래도 선배 몸, 따뜻해서 기분 좋아요. 계속 이러고 싶네. 진짜.”
그러면서 날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답답하다고 탭을 칠까 하다가 말았다.
…오히려, 편안하다.
“…선배.”
“……”
“…이거 완전 나쁜 짓인 거 아는데. 이래서야 외로운 사람 마음 막 이용하고 그러는 나쁜년 된 기분이긴 한데……”
자기가 말해놓고 우스운지 피식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요.”
“……”
“선배가 절 필요로 해주신다면…… 전 언제든지 선배의 힘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지금처럼.”
“……”
“…전 아직도 선배 좋아하고 있는 거 아세요? 심지어 예전보다 더 좋아졌어요. 하루마다 막 늘어나더라구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제 잘못은 아닌 것 같아요.”
“……”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말할게요.”
이제는 안다. 거짓말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전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어떤 대답을 했든 간에, 절대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라면.
굳이 더 수고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패배를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중등부 2학년 2학기 말.
나의 가장 씁쓸한 추억이 되어버린, 뮤와 그렇게 연인이 되었던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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