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입학 당일_연회장의 뒤편에서 (1)
* * *
#1
대충 와줘서 고맙다는 형식의 인사말이 끝났다.
어차피 제대로 듣지도 못해서 잘 모르겠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으니 괜찮겠지.
얼마나 지났을까.
단상 위에 서 있던 학생회 선배가 문득 입을 연다.
— 지금부터 신입생분들을 위한 특별 초청 강연이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그건 또 뭐야. 입학식에 강연이 왜 있어요.
일단 하라니까 좌석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내 옆에 있는 가브리엘은 휘파람까지 불면서 신나게 박수를 쳐댔다. 잠깐 지켜본 결과, 아무래도 같이 놀면 기운 깨나 빨릴 타입 같다……
박수 소리가 멎어들 즈음.
학생회 선배가 옆을 돌아보았고, 단상 오른쪽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던 듯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터벅, 터벅……
잠시 뒤.
그 모습에 군중이 술렁거린다.
— 허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3년만인가?
— 그래도 아예 잠적하진 않은 모양이군. 10년 전보다 더 강인해진 느낌이야. 늙지를 않는 건가.
— 제국의 미래를 보러 왔더니, 이거 뜻하지 않게 귀한 구경을 하게 되었구만……
그녀를 알아본 귀빈들은 저마다 속닥거렸다.
뭐야. 저게 누군데 다들 난리야?
학생회 선배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단상 앞에 선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가브리엘은 턱을 쓰다듬으며 감탄사를 흘린다.
“와…저 누님, 장난 아닌데…? 몸에 무슨 빈틈이 없어. 같은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냐? 응? 나만 그렇게 생각해?”
실례인 말이겠지만 딱히 틀린 비유도 아닌 듯했다.
확실히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일대를 가득 메우는 위압감. 단상 위에 서 있는 건 그녀 혼자였지만, 지금 이 홀 내부에 자리한 모두를 육중한 존재감만으로 휘어잡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진 건강한 피부.
그 위를 덮은 근섬유의 단단한 덩어리.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 위로 검은색 탱크탑이 짝 달라붙어 있었다.
품 넓은 트레이닝 바지가 걸음을 따라 나풀거리고, 아무렇게나 묶은 검은 머리칼이 허공에서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날카로운 얼굴에 새겨진 잔흉터는 그녀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샛노란 눈동자가 한쪽은 검은 안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이 바로, 10년 전 남부 마계 대원정을 이끈 전쟁 영웅이시자, 명예 태양의 대신관이시며, 저희 에픽 클래스 제41기 졸업생이신 엘……
“엘레나 크라이모어다. 딴 건 필요없고 그냥 엘레나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돼. 뭘 그렇게 거창히 설명할 필요가 있나?”
피식하며 학생회 선배의 말을 끊어낸다.
하지만 그 찰나의 설명은 우리들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남부 마계 대원정.
태양의 대신관.
그리고 우리들의 아득한 대선배.
절로 예의 바른 자세가 잡힌다.
초청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말로만 듣던 세기의 영웅을, 위인을.
바로 다음 세대인 우리가 걷게 될 길을 직접 눈으로 보라는 뜻이 아닐까.
“흐음……”
주도권을 잡은 엘레나가 팔짱을 낀 채로 주위를 슥 훑어본다. 인간보다는 맹금류의 눈을 닮은 그것이 우리를 스캔하듯 데굴데굴 굴러가자, 잡념이 쏙 들어가고 대신 긴장감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흐른다.
뭔가 했더니 대선배였나.
과연 이루 말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지금의 내 수준으론, 아니,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저 엘레나라는 사람의 발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엘레나가 쌓아온 건 내가 무너뜨릴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순수한 육체의 힘. 재능을 위시한 성장이라곤 해도 저렇게 굳어버려 육체에 정착한 힘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딱딱히 굳은 분위기에 엘레나가 입을 연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너흴 잡아먹으러 온 게 아니니까. 다들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들어.”
분부대로 좌석에 하나둘씩 착석했다.
엘레나는 남들처럼 마력으로 목소리를 키울 필요도 못 느낀 듯, 쩌렁쩌렁한 육성으로 우리들을 둘러보면서 말한다.
“길게 하진 않겠다. 왜냐면, 입학식은 드럽게 지루하니까. 나도 그랬거든. 근데 꼭 해야 하는 애기는 하고, 빨리 끝내주겠다. 말하다 졸려 뒤질 만큼 지루한 역사 얘기긴 한데…… 그렇다고 진짜 졸지는 말고. 조는 새끼 있으면 내가 직접 대가리를 깨버리겠어. 알겠냐, 병아리들아?”
— 그, 에, 엘레나 님… 발언의 수위를 조금……
“뭐 이 자식아? 바빠 죽겠는데 니들이 오라가라 해놓고 이 정도도 허용 못 해줘? 나 그냥 돌아간다? 엉? 확 가버려?”
—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학생회 선배들이 식은땀을 흘린다. 초청한 건 좋은데 역시 보이는 것처럼 막무가내라 그런지,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엘레나가 다시금 씩 웃는다.
“좋아. 이제 좀 조용하군.”
그 뒤로는.
특별 초청 강연의 의미가 점차 퇴색될 정도의 괴이한 연설이었다.
“—나때는 말이야, 어? 그거 아냐? 후배들아. 지금 너희가 누리는 혜택 중 일부는 내가 본부에 지랄해서 겨우 올려준 거라는 거? 고마워해야 돼, 새끼들아. 선배들한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아, 이건 너무 꼰대 같은가? 어쩔 수 없어. 나이 먹으면 누구나 꼰대가 돼. 꼬우면 올라와라. 선배의 힘을 보여주지.”
……미친년인가?
아깐 빨리 끝내준다매.
저런 식으로 지금 벌써 10분째 하고 있다.
귀빈들도 좀 술렁인다. 엘레나의 성격을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만 명색이 제국의 위상 그 자체인 에픽 클래스 입학식이다.
결국 엘레나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 학생회 선배들에 의해, 겨우 진압된 꼰대 연설은 마침내 소강 상태를 맞았다.
“……큼. 잠깐 추억에 잠기다 보니 말이 많았군. 미안하다. 사실 안 미안한데, 일단 시작해야 하니까 잠깐 물 좀 마시겠다.”
역시 천재는 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생수통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엘레나가 입에서 뚜껑을 떼고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원래 해야 했을 이야기를 이제야 시작한다.
“우선, 에픽 클래스에 입학하게 된 걸 환영한다. 신입생들.”
가벼운 스타트를 끊는다.
“……그런데 말이야, 왜 여기가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인지 궁금하지 않나? 아카데미는 보통, 거, 하나의 교육 시설을 지칭하잖나. 근데 여긴 아카데미가 조온나 많잖아. 그냥 대도시잖아 여기. 왜 황실령이 아니고 지역명인 프론티어도 아니고, 하필 프론티어 아카데미인가?”
신입생들은 묵묵하게 말을 듣고 있다.
어차피 자문자답을 할 생각이었던 듯, 엘레나가 손가락 하나를 흔들면서 말한다.
“이유는 간단해. 초창기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는 딸랑 건물 하나였기 때문이지. 그 하나로 시작해서, 지금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어때. 좀 가슴이 웅장해지나? ……아님 말고.”
“아무튼, 그 초창기 역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제국의 유지가 바로, 우리. 그리고 너희. 에픽 클래스다.”
“정확히는…… 거, 자세한 시기는 나도 기억 안 나는데. 프론티어에서 지금 불세출의 영웅이니 뭐니 하는 녀석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프론티어는 점차 전문적인 특화 교육 체계를 갖추어 갔다. 부지가 점차 커지고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제국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걸출한 인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지.”
“거기서 시작된 창설 모토는 이거다. 세기를 호령한 영웅들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고 제국의 영원을 기리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는 예비 영웅들, 우리 사랑스러운 후배님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위해. 그들의 위대한 서사(epic)를 바로 너희가 원활히 뒤따를 수 있도록, 에픽 클래스가 창설된 거다.”
“말하자면 너희는 수많은 영웅과 위인들의 의지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셈이지. 실제로도 다르지 않아. 왜?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어서 여기에 온 거니까. 제국의 눈은 거짓을 볼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자랑스러운 예비 영웅들이다. 아직 새싹에 불과하지만, 뭐. 미래는 밝으니까.”
엘레나는 착실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좌중의 신경을 꽁꽁 묶은 채 가벼운 제스쳐를 섞어가며 에픽 클래스에 대한 역사를 줄줄 읊었다.
의외로 집중이 잘 되는 편이라, 나를 비롯한 신입생들은 엘레나의 말을 몰입하며 경청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짝.
짧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자, 이제 끝. 그래도 예의없이 조는 새끼는 없었군. 선배를 존중하는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도록 해. 알겠냐, 귀염둥이들?”
어느 정도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엘레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2층과 3층을 향해 가벼이 인사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귀빈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제국의 미래를 두 눈으로 보기 위해 친히 모여주셨지요. 부디 이 유망한 녀석들의 얼굴을 기억해 두십시오. 마음에 드는 학생이 있다면 따로 후원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만일 하게 되더라도 은밀히.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잠깐 숙였던 엘레나가 말을 잇는다.
“본 입학식이 끝난 뒤 신입생 여러분과 귀빈 여러분을 위한 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자유로운 교류의 장에서 뭐, 신입생들은 친구 만들어도 되고. 귀빈 여러분께서도 인사 한 번씩 나눠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상. 끝. 진짜 끝…… 아, 아니지.”
마무리인 줄 알고 슬슬 행사의 막을 내리려던 학생회 선배들이 다시금 멈칫했다.
“……”
엘레나가 우리를 슥 돌아본다.
왠지, 나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래도 난 연회장에 없을 거니까. 지금 후배 녀석들이 뭐하는 애들인지는 알아야겠지? 얼굴도 좀 보고. 이름도 좀 익히고. 금방 까먹겠지만, 뭐, 너희가 나한테 큰 인상을 줄 수 있다면 내가 평생이고 기억해주지. 그러니까 어디 보자……거기, 명단 좀 줘봐.”
엘레나의 손짓에 헐레벌떡 다가온 학생회 선배가 얇은 문서를 건넸다. 아마 신입생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일 것이었다.
한참 팔락이며 그걸 살펴보던 엘레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호오, 하며 눈썹을 들어 올리다가, 씩 웃곤 큰소리로 외친다.
“번호 1번부터 부를 테니까, 씩씩하게 대답해라. 자식들아!”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되었다.
첫 번째로 불린 사람은.
“자, 1번! 어……로르센 아카데미 중등부, 조기졸업? 오호라, 신기하네. 이름도 신기하고. ……아무튼, 손 들어라. 뮤.”
#2
번호가 차례차례 불려 나간다.
“2번! 아르티나 왕국의 귀하디 귀하신 왕녀! 유리 폰 아르티나, 어디 앉았냐? …아, 거기 있구만.”
“거, 3번! 펠트라인 공작가 공녀님, 스텔라 데 펠트라인!…목소리가 작다 임마! 더 크게!……아, 됐어. 됐어. 그냥 앉아.”
……
“5번! 로르센 아카데미 중등부 수석졸업 루비아! …어라, 너 쟤랑 아는 사이냐? 둘이 같은 아카데미 나왔네?”
“6번! 캄비온 백작가 장남, 알드리에 캄비온!……”
“7번! 사샤 엘네!……너 뭔데 졸업 기록이 초등부까지밖에 없냐?”
……
“14번, 가브리엘 라마니카! 오, 북방에서 왔네? 혹한기 훈련 좀 빡센데. 고생 좀 덜 하겠구만.”
“그리고, 마지막 15번. …뭐야, 너도야? 이 아카데미 뭐하는 곳이길래 에픽 클래스를 세 명이나 배출해? ……아, 너는 졸업 아니구나. 재학 중 자퇴. 아무튼, 에지오 크라닐! 손 들어라.”
힘찬 엘레나의 목소리가 울리고.
—쾅!
“히약— 아, 쒸발 깜짝이야. 뭐, 뭐 하는 거야, 임마! 너네 뭐야, 아오. 깜짝 놀랐네 진짜.”
내 앞에 있던 소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옆을 돌아보면,
루비아가 어느새 내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씨발.
학교생활, 좆됐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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