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입학 당일_연회장의 뒤편에서 (3)
* * *
#5
물론, 처음부터 전부 끊어내는 것은 어렵다.
그녀들을 납득시킬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멋대로 붙잡으려 할 수도 있겠지. 다만,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다고 벌써 인간관계에 지치는지. 세상 풍파 자기 혼자 맞은 것처럼 궁상떠는 걸로 보일지도 모른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말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사람은 자연스레 고립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인연을 외치며 또다시 정착할 장소를 찾는 일 따위, 더는 두렵고 무서워서 못해먹겠는 것이었다.
앞으로 5년간 얼굴을 마주하게 될 사이다.
따라서 그녀들에게나 나에게나, 이런 복잡한 관계는 절대 이롭지 않다.
우리 사이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반 애들이 알기라도 하는 순간, 싱그럽고 활기차야 정상인 교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장례식장 한복판처럼 엄숙하게 변해버릴 것이었다……
뮤는 언제나 나를 선배라고 불렀다.
가끔 심술이 날 때 그냥 이름만 부르기도 했는데, 정말 극소수의 경우였다.
익숙하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는 이제부터 동등해져야 한다.
스윽.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다.
“……아.”
뮤는 어깨를 움찔 떨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런 뮤에게 내가 물었다.
“……너도 나한테 할 말 있어?”
“아… 그게, 선배”
“에지오라니까.”
“……에지오. 저… 아니, 나는……”
정말 익숙지 않은 모양인지 자꾸 말을 더듬는다.
나에게 그리 말하면서 뮤는 점차 목소리에 얕은 물기를 묻혀갔다.
……후우.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여기서 얘까지 울면 답이 없어진다.
“내가 너한테 할 말은 없어. 이미 그 편지로 다 했을 테니까.”
“……”
“……따로 할 말이 있다면, 나중에 하자. 연회장엔 참석해야지.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너희는 알아서 따로 들어오든가 해. 우리 셋이서 이런 분위기로 들어가면…… 좀 그렇잖아?”
화기애애한 연회장 파티 분위기가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버릴 것이다.
나는 괜찮겠지만, 얘네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테니 일단 여기서 좀 추스르고 난 뒤에 연회장으로 오는 게 맞을 터다.
“루비아도 그만 울고.”
“……히끅, 응…”
쪼그려 앉아 숨죽여 울던 루비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며 둘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가 산책로를 벗어나 연회장 건물이 있는 구석 모퉁이로 향할 때까지, 그녀들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6
이래저래 충격적인 하루의 시작이다.
앞으로 뭐가 어찌될런지.
프론티어에 들어오기 전 세워놓았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일단 쓸데없는 관심을 너무 끌어버린 것 같긴 한데. 나중에 우리 관계를 궁금해하는 애들한테 적당히 각색해서 설명을 해줘야 할 듯하다.
털레털레……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앞머리를 쓸면서 연회장 건물 모퉁이에 막 다다랐을 찰나였다.
“야.”
“……?”
뭐야.
누군가 그림자에 숨어 있었다.
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지 않아서 뭐지, 했더니.
시선을 아래로 한참 내리자 볼 수 있었다.
“너, 쟤네한테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좋지 못한 버릇을 가진 유리 폰 아르티나가 거기에 있었다. 뿔이 난 듯 팔짱을 낀 채로, 전보다 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전에도 말했지만 얘가 이러면 오히려 안 무섭다.
가소로운 녀석.
비웃어주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다.
“……내가 뭘?”
유리는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다 봤어. 루비아랑 뮤가 네 앞에서 서럽게 우는 거. 얼마나 나쁜 자식이면 숙녀를 막 울리고 다니는 거야? 하, 내가 제대로 보긴 봤나 보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 싶었더니, 역시 너는——”
“…….”
고개를 내려 유리와 시선을 맞춘다.
그런 순간에, 유리는 멍하니 말을 끊었다.
사아아아
태양 아래 우거진 나뭇잎의 그림자 속에서, 바람에 쓸리는 풀떼기 소리가 유리와 나 사이를 조용히 훑고 지나간다.
“…어, 어… 너……”
유리가 입을 벙긋거린다.
방금까지 미간을 팍 좁히면서 내게 뭔가 쏘아붙이려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하려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조각난 단어를 입속으로 삼킨다.
당황한 듯 멈칫거리는 동작이 썩 귀엽다.
녀석을 보자 답답한 과거에서 벗어난 듯한 개운함이 들어, 나도 모르게 유리의 조그만 정수리를 대견한 듯 손으로 덮어 헝클인다.
전보다 훨씬 느릿하고 힘없는 손길이다.
“히얏, 너, 또……!”
유리는 제 머리 위에 내 손이 올려진 순간 화를 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과연 척수반사적 반응이다. 입술을 질근 깨물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거 치워.”
탁.
열이 오른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아 떨쳐낸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그리 짧게 일갈하곤.
흥 하는 콧소리와 함께 등을 돌려 걸어간다.
#7
에지오가 떠나고 난 뒤.
꽃무늬 손수건으로 눈가를 두드리던 루비아의 옆에서, 잠시 머리가 새하얘졌던 뮤는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에지오 선배가.
번듯이 멀쩡해져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소식 한 통 없던 선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짧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몰라도, 자기만의 작고 귀엽기만 했던 소년 에지오 크라닐은 어디 가고, 건실해진 젊은 청년 에지오 크라닐이 뮤의 시야에 잡혔던 것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정말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변화여서…… 뮤는 한동안 자기 눈을 의심하고 지금 이것이 환상 속인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달라진 선배를 처음 봤던 순간은 분명, 프론티어의 어느 정거장이었을 터다.
계속해서 이쪽을 힐끔거리던 불쾌한 남자의 시선. 그 사람의 정체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에지오 선배라고 생각하니, 불쾌감은 사라지고 그 위에 희미한 두근거림이 자리잡는다.
방금 전 선배의 말은 너무나도 가슴이 욱씬거렸지만…… 선배는, 분명 자신을 잊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스스로도 변화했다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고, 혹시 자기가 아는 후배인지 의심하면서, 계속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있던 것이었다……
크나큰 실례였다. 감히 선배를 불쾌한 남자라고 생각하다니. 뮤는 그따위 생각을 했던 자신의 불경한 뇌를 헤집어 그 부분만 잘라버리고 싶었다.
선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당장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가 선배일 줄 전혀 몰랐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도 몰랐다.
……신에게, 감사해야 하나?
선배가 살아있음에.
그리고 선배가 본인의 꿈을 이루어 냈음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음에……
하지만, 이내 뮤는 고개를 젓는다.
자신은 선배를 사랑할 자격이 더 이상 없었다.
그를 다시 마주한 순간은 정말 굉장한 충격의 연속이었고, 곧바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으나 선배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끝낸 것만 같았다.
……뮤도 알고 있었다.
선배와 자신은 오래전에 끝난 관계였다.
멀어진 선배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은 감히 원하지도 못했다. 그저 실수를 만회할 기회라도 주길 바라는 마음에 면회를 요청했으나, 뮤에게 돌아온 것은 선배의 진심이 담긴 편지 한 통이었다.
그렇게 달라진 선배는……무척이나 멋진 남자가 되어 있었다.
뮤는 에지오와 재회한 순간, 자신이 아직도 그를 여전히, 진실되게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쁨도 슬픔도 전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앞에선 하염없이 예전의 행복했던 추억이 떠올라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금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동시에 뮤의 심장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진다.
저 모습이 되기 위해 선배는 얼마나 노력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날, 만신창이가 된 선배를 업고서 태양의 신전으로 부리나케 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선배는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선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사정을 묻기 전엔 아무것도 모른다. 선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던 뮤였기에, 미칠 듯 궁금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물어볼 자격 따위 어디에도 없다는 걸 인지한다.
……선배를 잃어버리고서, 용서받고자 생각했다.
혹여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엎드려 빌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이라도 전부 해주자.
남은 인생은 오로지 선배만을 위해 살아갈 자신이 있다. 선배에게 너무 큰 잘못을 저질러서, 평생 속죄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에지오는, 뮤가 본인을 찾지 않길 바랐다.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려버리고.
그 안에 숨어버렸다.
뮤는 그것이 너무 슬펐다.
머릿속에서 선배가 떠나가질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전을 방문했으나, 이미 떠나버린 선배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편지 한 통뿐이어서……그 뒤로 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미칠 듯이.
머리를 비우고자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책이란 물건에는 이미 너무 많은 추억이 스며들어 있었던 까닭이다.
끝내 뮤가 찾은 것은 검이었고, 오로지 본인의 인생을 검 하나에 담고자 노력한 결과……지금의 뮤가 되었다.가히 기적적인 천재가 노력하기 시작하자,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선배가 다시 나타난 이상 뮤는 이제 검을 잡지 않아도 되었다.
그 언젠가 선배에게 말했던 것처럼, 검보다는 선배와 함께 조용한 도서관에서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이제, 아마 안 되겠지만.
선배가 살아있다.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선배였다.
예컨대, 눈동자 색은 바뀌지 않았다. 조금 붉은 빛깔을 띠던 검은 머리카락은 칙칙한 잿빛이 되어버렸지만, 그 신비롭게 푸르던 눈동자는 여전했다.
그러나 제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귀여운 선배는 어디 가고, 이제 자신이 품을 파고 들어가 안겨야 할 정도로 부쩍 커버린 선배가 있었다.
어색해. 하지만 선배의 변화가 싫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뮤는 스스로가 선배를 더 이상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여겼으나 사랑하는 마음을 도저히 버릴 수는 없었다. 그건 선택의 영역을 이미 떠났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오롯이 선배만의 것이었다.
……그런 선배는, 자기를 더 이상 선배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 차가운 말은 뮤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서늘한 칼날이었다.
다만 선배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냐면……그게, 맞았으니까.
선배와 자신은 오늘부터 동급생이다.
하지만, 선배를 더 이상 선배라 부를 수 없다는 건, 우리를 이어주던 그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버리는 것 같아서. 뮤를 지탱해주던 거대한 기둥이 전부 무너져버리는 것 같아서.가슴이 터질 듯 욱씬거렸다. 메마른 눈물은 뾰족한 결정이 되어 뮤의 심장을 갈기갈기 헤집었다.
선배가 자신을 보는 눈은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일전의 그 귀찮은 듯 나른하지만, 그래도 상대를 똑바로 바라봐주고 있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언젠가 자신에게 슬며시 웃음 지어주며 살짝 눈물을 글썽거리던 선배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미래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뮤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뮤의 옆에서 훌쩍이던 루비아의 울음소리는 점점 사그라든다.
“……”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아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뮤는 루비아의 존재를 깨닫고, 얕게 이를 악물었다.
이 사람은. 루비아는. 선배의 소꿉친구는……
대체 무엇을 용서받고 싶다고 이리 울어대는 건지 모르겠다.
뮤는 루비아가 싫다.
착하고 예쁜 언니는 맞다.
하지만 선배를 차버린 소꿉친구였고, 선배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원인 중 하나였으며, 선배는 그날 이 빌어먹을 여자 하나 때문에…… 뮤는 이를 더 세게 악물었다.
루비아를 탓할 자격이 없다. 선배의 피폐해진 마음에 결정타를 꽂았던 건 뮤 자신이었다.
그래도, 뮤는 루비아가 여전히 싫다.
선배는 항상 자신과 있을 때보다 루비아 얘기를 할 때 더 행복해 보였다.
알고 있다. 선배는 은근 배려심이 대단한 남자라서, 본인이 조르고 졸라 소꿉친구 얘기를 해달라고 해야지만 곤란해하며 어쩔 수 없이 얘기를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얘기하기 귀찮다는 얼굴로 담담히 늘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숨길 수 없는 티가 난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것이다. 선배는.
그런데도, 루비아는 선배의 그런 마음을 냉정하게 내쳐버렸다. 도대체 선배의 뭐가 부족하다고.
만약 뮤가 선배로부터 그만한 사랑을 받았다면, 뮤는 선배에게 평생을 바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재차 말하지만.
뮤는 루비아가 싫다.
“……너. 에지오의, 후배였지?”
그건,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