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5화 (15/201)

〈 15화 〉 친해지길 바라 (3)

* * *

#5

가브리엘의 가호를 파훼하고 데미지를 입혔다.

그 기이한 짓거리가 가능했던 건.

입학 전 새로이 각성한 나의 재능 덕분이었다.

— 뭐야, 그거…… 개사기 아냐?

벙찐 가브리엘에게 내가 한 설명은 대충 이랬다.

내가 너의 고대 바이킹의 가호인지 뭐시긴지를 목검으로 후두려 팰 당시에 없애버린 건 맞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먼저 상대방이 타고난 재능 혹은 인지 외의 특별한 능력의 정체를 내 스스로가 정확히 인지해야 하면서, 동시에 한 번쯤은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 한다.

또한 타고난 재능을 기반으로 성장한 육체의 성능은, 일정 수준을 벗어나 버리면 아주 조금 낮추는 것이 한계다.

엘레나 같은 초인들이 대개 그런 예시였다.

단순히 말하자면 평범한 이들에겐 없는 특별한 능력. 태어날 적부터 육체와 정신에 스며든 신의 기적—— 천재성(???).

그것이 내 몸 어느 부위에든 닿고.

내가 없애고자 하면 없애버린다.

여기서 천재와 범재를 구분 짓는 경계선의 기준도 있어야겠지. 가브리엘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건 아마도 예전의 나 자신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무재능의 극치.

사실 범재보단 지극한 둔재에 가깝지 않나 싶다. 께름칙한 부분이긴 하다만…… 어째서인지 그저 그런 수준의 초짜 마법사들이 펼치는 마법은 죄다 무효화시켰으니 아마 맞을 거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지에 오른 천재 마법사의 마법이 내 몸에 닿으면, 주문의 위력이 열화된 상태로 피격되며.

검을 제 몸처럼 다루는 신검합일(???一)의 검사와 검을 맞대면, 그 사람은 일시적으로 열화된 검술을 펼치게 된다.

다만 일전의 승강기에서 유리 폰 아르티나가 나한테 휘둘렀던 그 무형의 기이한 초능력 같은 경우, 아마 소멸에 가까운 형태로 내 재능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유리가 아직 자기 능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 유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천적은 내가 아닐까 싶다. 왠지 기분 좋네.

대충 파악하기론 이랬다.

자세한 원리는 나도 모른다.

프론티어에서 내 몸에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긴 했는데, 정확한 기준이라든지 어디까지 작용할 수 있는지 같은 세밀한 분석까진 못 했다.

간추려 말하자면……

재능이란 것에 일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린다는 걸까.

뭔가 비참한 능력이다.

아무튼 여태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능력이고, 연구할 가치도 나름 있는 모양이고. 그런 의미에서 에픽 클래스 15번에 배정되지 않았나 싶다. 이거 빼면 난 그냥 평범한 프론티어 학생 A에 불과할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대충 그런 식의 설명이 끝나고.

“이건 불공평해. 너도 한 대 맞아야 돼.”

나한테 얻어맞은 부위가 아직도 아픈지, 가브리엘은 아예 잔디 위에 대자로 드러누워 옆구리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툭, 툭.

그 옆에 앉아서 목검으로 바닥을 두드리던 내가 말했다.

“맞아도 안 아프다며.”

“이건 반칙이지, 나쁜 새끼야!”

“내 차례라고 해서 내 능력을 보여준 것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네. 난 정­말 모르겠다.”

스윽.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훈련용 목검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난 슬슬 들어가 쉴란다. 피곤하네.”

가브리엘이 분한 목소리로 이를 바득 간다.

“도망치는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십새끼.”

나는 통쾌한 듯 크게 웃었고, 가브리엘은 좀만 누워 있다 가겠다며 날 잔뜩 욕한 뒤에 다시금 잔디 위로 몸을 드러눕혔다.

#6

기숙사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몸을 내던지듯 침대 위에 안착하자,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 안는 쿠션감이 극상의 행복감을 안겨준다.

진짜 이 상태에서 눈 감으면 10초 안에 잠들 자신 있다. 너무 푹신한 거 아니냐고 이거.

“……”

팔락, 팔락.

침대에 누워 강의실에서 타일러가 주었던 파일을 한 장씩 살펴본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수강 신청 관련 항목이다.

오직 에픽 클래스만을 위해 개설된 전문 강의 목록을 보고, 오늘 중으로 신청할 강의 리스트를 체크해서 로비에 제출해야 한다.

신입생 인원이 워낙 적어서 그런지 전산 처리가 일찍 되는 모양이다. 정원이 꽉 차는 경우는 절대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신청한 강의가 진행되는 강의실에 내일부터 바로 가면 된다.

우선.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전공 부분을 본다.

전공이라.

일단 나는 어디 한 군데 특화된 게 딱히 없으니, 검술과 마법은 병행하는 것이 좋다.

들어야 할 강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 중등부 시절 책으로 습득했던 지식들은 대부분 몸으로 체화한 상태다.

그러나 여긴 그 유명한 프론티어였고, 시중에서 흔히 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은 웬만해선 가르치지 않을 터였다.

스윽, 스윽.

개설된 강의 옆 간략한 설명 등을 보고서 몇 개의 전공 강의를 펜으로 체크했다.

“으음……”

그런 뒤에.

마지막 하나를 뭘로 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내 시야를 무언가 확 잡아끌었다.

[ (1학년) 초감각특론 — 석좌교수 나디엘리 할렌니아 ]

—본 강의는 인간의 오감을 뛰어넘어 발휘되는 초감각적 지각의 정의, 에스퍼의 고유 초능력 평가 및 분석에 관한 전문 커리큘럼을 다룬다.

—주요하게는 초감각적 지각의 개념 범위, 관련한 역사 및 전망, 초능력 분석에 관한 평가, 에스퍼의 고유 초능력 발휘 과정 및 관련 제반 에스퍼 이론들에 관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를 진행한다.

오호라.

설명이 좀 복잡하지만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능력들에 관련한 강의인 듯했다.

지금의 나한테 이보다 어울리는 강의가 있을까. 아무리 봐도 이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다.

체크.

그렇게 전공 부문 선택이 끝나고.

남은 것은 공통 교양 과목이다.

전공이랑은 다르게, 교양 과목은 다른 프론티어 학생들과 같이 강의를 듣는다.

즉 정해진 시간마다 트램을 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귀찮게 됐네.

종교 관련은 가급적 패스한 뒤에, 흥미 위주로 선택하면서 교양 과목까지 체크를 마쳤다.

신청한 과목이 정원을 이미 초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에픽 클래스는 그런 거 모른다.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정원 외 인원이란 특혜로 강의실에 입성이 가능하다.

꼬우면 에픽 클래스 하든가.

전체적인 수강 신청 목록을 구성하고 나서.

“……”

마지막으로 훑어본 건 기숙사 규칙이었다.

주요 항목만 짚어보자면 대충 이랬다.

통금 없음.

외출증은 필요함. 기록을 남겨야 하니까.

점호 없음. 알아서 자고 알아서 일어나야 하는데, 당연히 책임은 학생 본인이 져야 함.

상벌점 제도 없음. 과거에 있었는데 폐지됐다고 함.

가브리엘이 그렇게 말했던 규칙 하나. 상대방의 동의만 얻으면 상대 성별 기숙사 출입 가능. 이건 대체 왜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성 교제 허용. 그러나 이성 교제가 에픽 클래스 커리큘럼의 원활한 진행에 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제재가 가해질 것. 적당히 하란 의미인 것 같았다.

사실, 에픽 클래스는 가브리엘의 말처럼 연애를 장려하고 있는 편이다.

이유는 조금 간단하면서도 어이가 없다.

불세출의 천재와 천재 사이에 나온 자식은 얼마나 재능이 출중하겠는가? 대체로 그런 흐름이었다.

실제로 에픽 클래스 창설 이후 커플이 된 사람들 사이의 자식이 시간이 흘러 에픽 클래스에 입학하는 일도 꽤 많다고 한다.

어쩌면 내 동급생들 중에 부모가 과거 에픽 클래스 선배들이었던 녀석도 섞여 있을지 모른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

연애라, 연애……

하기사, 우리들은 아직 청춘의 한철이다.

굳이 5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몇 개월만 지나도 서로 눈이 맞아서 짝짜꿍하는 연인이 생길 수도 있겠지.

거기에 내가 있지 말란 법도 없고.

루비아나 뮤가 섞여 있지 말란 법도 없다.

“……”

뭔가, 이래저래 싱숭생숭해졌다.

나는 프론티어에 연애 따위를 하러 들어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브리엘 같은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에픽 클래스는 마냥 나 같은 애들이 모인 곳도 아니다. 다들 이성에 관한 관심은 마음 한켠에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가브리엘만 해도 뮤에게 꽤 관심을 보였잖는가.

잠시 눈을 감고 가브리엘과 뮤가 꿀 떨어지는 커플이 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음……

뭐랄지, 그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미 헤어진 마당에 내 쪽에서 신경 쓰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긴 하다. 오히려 응원을 해줘야 하는 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뮤도 여러모로 힘들었을 테니. 새로운 인연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한데.

“……”

눈을 감고 있으니.

기억 속 모습이 떠오르고 만다.

— 선배애애애! 저 오늘 완전 재밌는 일…… 꺄악!

— 에헤, 별걸로 다 부끄러워하신다, 선배. ……저는 선배한테라면 보여져도 딱히 상관없는데.

— 그게 말인데요. 있잖아요. 저 가끔 막 엄청 무서운 거 있죠? 선배가 절 두고 먼저 죽으면 어쩌나, 하고…… 그러니까 빨리 저 안아주세요. 귀여운 여자친구가 불안해하고 있다구요. 이히힛.

— 사랑해요, 선배. 진짜. 진심으로.

— 선배… 저, 저, 그게, 저예요……

“……으음.”

……모르겠다. 이러다간 좋지 못한 생각으로 점차 파고들 것 같아서, 상념을 거둔 채 머리를 털었다.

시간을 보니 슬슬 저녁 시간이다.

학생 전용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지, 기숙사 내부에 설치된 부엌 시설에 가서 재료를 가져다가 직접 해먹을지 고민했다.

물론 전직 외톨이라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예전에 이것저것 해보겠답시고 요리에도 도전해 본 적이 있었는데 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다.

다만 딱히 취미도 삼을 것도 아니었는지라, 귀찮기도 해서 그냥 식당 가서 먹기로 했다.

스윽.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침대를 나섰다.

커튼 밖은 어느덧 어둑해진 채였다.

#7

생각해 보니 오늘 친해진 사람은 가브리엘밖에 없었다. 알드리에인지 뭔지, 그 친구 계속 혼자 다니는 것 같던데. 말이라도 좀 걸어볼 걸 그랬나.

“뭐야, 어디 갔어?”

가브리엘은 기숙사에 없었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없으면 뭐 어쩔 수 없지. 혼자 밥 먹는 건 나에게 있어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유니폼이 아닌 적당한 회색 셔츠와 바지만 입고 나서서, 근처에 있는 학생 전용 식당으로 향했다.

끼이익—

“나는 한 번쯤 시골처럼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어! 사람들도 없구, 경치도 예쁘구. 되게 편안할 것 같아.”

“으응, 편하긴 했지. 그래도 뒷산에서 자꾸 징그러운 벌레들이 나오는 건 엄청 싫었……?”

큼지막한 건물의 문을 여는 순간.

그 앞 복도에 있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어……”

눈을 깜빡였다.

아직 유니폼 차림의 루비아와,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싱글벙글 웃음을 띄우고 있던 유리.

그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던 은발머리, 스텔라 데 펠트라인.

스텔라는 루비아가 챙겨줄 거라 생각했더니 예상 적중이다. 도태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이제 가브리엘과 내가 알드리에만 어떻게 잘 챙겨주면 될 것 같았다.

“왜 그래, 루비아……? 앗­”

루비아가 나를 보고 멈춰서자, 유리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다가 날 보고선 낮게 그르릉거린다.

방해 말고 꺼지라는 듯하다.

스텔라는 눈을 아래로 깔고서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있었다. 홍조는 왜 띄우고 있는 거야.

분위기가 묘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안녕, 다들 어디 가?”

“신경 끄……”

“우, 우리 지금 밥 먹으러 가고 있었어…”

유리의 말을 끊고 루비아가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날 바라보는 시선은 유난히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무래도 유리는 내게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루비아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입을 다물곤 싸늘한 눈빛으로 내게 여길 벗어나라 지시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나갈 거란다.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맛있게들 먹——”

“에, 에지오도……우리랑 같이 밥 먹을래?”

유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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