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7화 (17/201)

〈 17화 〉 친해지길 바라 (5)

* * *

#9

노을이 저물고 달이 떠오른 시각.

내 생애 가장 호화로운 저녁 식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배 터지게 처먹고 기숙사로 숫제 기어가듯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으어어어……”

풀썩—

잘 준비를 겸하기 위해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고, 구석구석 빡빡 문지르고 나니 금세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이 상태에서 침대에 몸을 눕히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이대로 승천한다 하면 여한이 절대 없을 거라 자부한다. 사위를 물들이는 은은한 주홍빛 조명이 한층 나른한 분위기를 더해주니, 눈을 감았다 뜨면 내일 아침일 거란 생각에 겨우 맨정신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냥 처자면 되지 않냐, 싶은 사람도 많을 텐데 그렇지 않다. 가끔은 졸려도 자고 싶지 않은 날이 있는 법이다. 수시로 덮쳐오는 피곤을 무릅쓰며 충혈된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날 때가 이따금 있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오늘인 것이었고.

“……”

하루가 너무 길었다.

꼭두새벽부터 입학 준비를 위해 부랴부랴 짐을 챙긴 뒤 열차를 타고 수도로 향했고, 사람이 미어 터지는 프론티어 입구까지 와서 뮤를 마주쳐버렸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더니 루비아도 있더라.

그 둘만으로도 충분히 감당 불가능한데, 건방진 금발 꼬맹이… 유리까지 겹쳐버리니 정신이 남아나질 않겠더라.

입학식 당시 세기의 위인을 보게 된 것도 의외였고, 북방 출신 비열한 야만인 가브리엘과 친해진 것도 새삼 신기했다.

원래 내 성격이었다면 그런 타입의 친구는 두지 않았을 텐데. 곁에 두면 기가 빨리는 탓에 내 쪽에서 먼저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저녁 식사 당시 스텔라와 나름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게 수확이라면 수확인가.

맞아.

스텔라 그 친구, 되게 고상하고 곱게 생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행동거지도 딱 그 모양이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귀족적으로 기품 있는 분위기를 담고 있더라. 어렸을 때 보았던 뭇 제국의 귀족들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어 보였다. 푸른 피라는 것이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 스텔라를 통해 제대로 보게 된 듯한 기분이었달까……

침대에 누워 가만 생각한다.

저녁 식사 시간을 되돌아 보니, 이러저러 곱씹어 볼 만한 일들이 꽤 많았다.

일전의 그 귀여운 모습은 어디 가고 다시 싸가지 없는 꼬맹이로 돌아온 유리와 티격태격하던 순간은 그렇다 치고…… 내가 괜히 예민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루비아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맛이 없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

‘응? 아, 아니? 전혀? 나 그렇게 보였어? 요리사분들한테 실례네, 에헤헤… 완전 맛있어!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네. 응…’

각자 먹고 싶은 걸 퍼와서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표정이 살짝 좋지 않아 보였다. 루비아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맞대고 같은 밥을 먹은 지가 대략 삼 년이 넘게 다 되어가는 나였지만, 그간의 경험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루비아는 기분이 나쁜 상태라고.

미묘하게 내려간 입매.

늘 유순하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아주 살짝 위로 치솟은 눈꼬리.

하물며, 보석 같은 녹빛 눈동자 안에 담긴 건 희미한 불쾌감과 혼란스러움이었다.

자기도 자기의 상태가 이상한 걸 인지하고 있던 모양일까. 굳이 확인차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흐음……

왜 기분이 나빴던 걸까.

밥 먹기 전 복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가정이 그나마 맞지 않을까 싶었다.

루비아는 그때 날 감싸며 내 편을 들어 유리의 잘못된 행동을 질책했는데, 나는 되레 유리를 감싸고 든 모양새였으니. 서운한 감정이야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거랑은 조금 달랐다.

지금에 이르러 내가 루비아의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 루비아는 내게 서운한 게 있을 때 보통 티를 내는 편이었다.

물론 자기가 내고 싶어서 내는 게 아니라, 그냥 보면 자연스레 서운한 게 보인다.

어깨도 축 늘어지고, 나 너 때문에 서운하니까 위로해달란 티를 팍팍 낸다. 나와 함께 지내던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버릇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겠으나, 뭐랄지.

루비아는 내게 서운한 점이 있었을 때 대체로 그랬다는 점에서 보면, 루비아가 기분이 상한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그 사람한테 기분이 상해 있는 것 같았다.

……누구지? 스텔라? 유리?

나와 본인을 제외하면 둘 중에 한 명이다.

그런데 스텔라는 그 자리에서 뭘 한 게 없다.

기껏해야 마지막에 나서서 나와 같이 밥을 먹는 게 자기도 좋다, 라고 발언한 죄밖에 없다. 아니, 그건 죄도 아니지.

아무튼 스텔라는 아무 잘못도 없다.

그럼 유리인가?

맞는 거 같은데. 유리밖에 없잖아.

모르겠다.

루비아가 원래 그렇게까지 앙금을 많이 남겨두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하지만 유리가 내게 능력을 썼다고 해서 화도 꽤 많이 난 것 같았고, 그게 식사 때까지 쭉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얼추 가능성은 아예 없지 않다.

그래도 유리랑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자기 친구한테 그리 악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을 만한 위인이 아니다, 루비아는.

게다가 유리는 나한테 사과도 했지 않는가. 모기만한 목소리여서 잘 들리지 않긴 했어도 분명한 사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묵은 감정을 해소하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

생각은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든다.

내가 왜 루비아의 감정 상태를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참 미련한 짓도 달리 없구나 싶다.

루비아와 이어져 왔던 과거의 인연을 끊고자 했던 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잖는가.

이미 변해버린 내가 루비아의 전부를 알고자 할 이유도 없고, 루비아가 다른 사람한테 감정이 상했다면 그 둘이 원만하게 잘 풀길 바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뭘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자빠질 일인가…… 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냥, 좀, 이상했을 뿐이다.

단지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이렇듯 침대에 대자로 누워 곰곰이 돌이켜 보는 것이었다.

왜……

한껏 불안하디 침울해진 얼굴로 말없이 음식을 집어먹다가, 문득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베이컨 말이를 발견하자 슬며시 내 눈치를 보았던 건지.

그러면서 예전에 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냐며 조심스레 내게 물어보다가, 내 반응이 별로인 것 같자 그냥 그대로 입속에 포크를 집어 넣었던 건지.

그 뒤로 더욱 침울해진 루비아를 보면서, 유리가 우울해진 식탁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시골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자, 또 다시 내 눈치를 보면서 뭔가를 호소해 왔던 건지.

하는 수 없이 내 쪽에서 먼저 루비아와 있었던 얘기를 꺼내주자,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 지었던 건지……

여러 가지로 루비아의 상태가 이상했기에.

덩달아 나도 생각이 많아졌을 뿐이다.

‘루, 루비아 씨랑 에지오 씨가… 와아……’

‘뭐어­? 얘가? 얘애애애가­? 말도 안 돼! 진짜 구려! 이미지 전혀 안 맞아! 으엑…’

그때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해주었던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텔라는 우리 둘을 부러운 눈치로 바라보았고, 유리는 루비아의 말을 그냥 묵묵히 들으면서 때론 날 질투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거나, 그때의 내 행동이 지금의 나랑 매치업이 안 되는지 경악에 가까운 리액션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울러, 루비아와 내가 친구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리 오랜 인연이었던 건 아직 몰랐던 모양이다. 왜 이런 녀석이랑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냐며 루비아한테 물어볼 때는 이마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저런 대화 이후로 나를 보는 시선이 약간 바뀐 것 같긴 했지만, 뭐 아무튼.

루비아는 초등부 시절 나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이야기 할 때 정말 그리운 눈치를 보였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그저 그랬으니까. 적당히 맞장구 쳐줄 수밖에 없었다.

“……후우.”

괜히 한숨만 나온다.

밥을 막 먹기 시작할 때만 해도 상태가 영 별로였던 루비아가, 식사가 끝날 때쯤엔 나름 기운이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단은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내가 더 신경 쓸 부분은 이제 없었다.

마음이 착잡한 건 단지, 내 안에 있던 루비아와의 추억이 무언가 빛바랜 종이조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희미한 생각 때문이다.

즐거운 추억이었다면 웃음이 나와야 할 텐데.

나는 왜 그러질 못하고 있을까.

참 뭐같은 일이다.

……정말로.

“……”

커튼 밖이 완전하게 어둠에 잠겨버렸다.

건너편 기숙사 불빛이 아직 켜져 있으나, 잠시 뒤면 저것도 모두 꺼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건 부지 내 조명 몇 개와 구름 속 달빛만이 이곳을 밝히는 전부가 된다.

스윽.

테이블에 놓여 있던 파일을 집어들었다.

이걸 아직 로비에 제출하지 않았다.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일어나서, 가벼운 가디건을 걸치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올 채비를 마쳤다.

그런 뒤 조용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루가 많이 길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유독 더 길겠지.

#10

파일을 로비에 제출하고 난 뒤.

터벅, 터벅—

나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 문을 열어, 운치 있는 정원을 천천히 거닐며 어딘가로 향했다.

찌르르르……

풀벌레가 울고 있다.

일대에 누런 달빛이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싱그러운 초목들 사이로 만들어진 달빛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일전의 산책로 입구에 들었다.

“느낌 좋네.”

가벼운 밤산책이었다.

이대로 잠들면 뭔가 아쉬울 것 같아서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축축하고 시원한 산책로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입생들은 다들 피곤해서 먼저 뻗어버렸을 경우가 대다수일 터다.

선배들은, 글쎄다. 마주치면 인사라도 해야지.

생각을 비운 채 그저 걸었다.

이 구불구불한 길의 끝에는, 예전 소강당으로 사용되었던 조그마한 건물이 하나 있다.

이끼와 덩굴, 잎사귀로 뒤덮인 작은 오두막.

그곳에서 짧은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내부에 찻물을 우려내는 마공학 기계도 하나 있다고 하니, 따뜻한 차라도 홀짝이며 멍하니 달빛이 비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면 그것보다 운치 있는 힐링이 더 있겠는가.

달빛은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둑한 밤이란 환경 자체는 좋아한다. 나를 제외한 세상 모두가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만 눈을 감고 있으면, 그때야말로 내가 나를 위할 수 있는 진정한 시간이 찾아온 것만 같다.

따라서, 내가 밤산책을 나온 것은 그저 혼자 머리를 텅 비운 채 막연히 걸으며 마음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가급적 누구랑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

점점 더 깊어지는 밤.

산책로의 끝에서, 새하얀 네글리제를 따뜻한 빛깔로 물들인 채, 이끼 섞인 벤치 위에 웅크리고 앉은 누군가를 봤다.

내가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처연한 달빛을 그대로 내리받으며 하염없이 잔잔한 연못만 내려다보는, 벚꽃잎을 닮은 색의 머리칼을 가진 신비로운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아.”

그러던 어느 순간에.

하도 투명하고 맑은 탓에 호수의 면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비쳐 보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 맞은편에 서 있던 나를 다시금 속에 담는다.

다만 서로의 눈높이는 한참이나 어긋나 있어서, 소녀는 무릎 안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위로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부드러이 물결치던 머리카락은 반사광으로 매끈히 빛나는 어깨선을 따라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그리하여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무척이나 가녀린 손목을 힘없이 들고는, 루비아가 조심스레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에지오…안녕.”

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아갈까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단 예감이 갑작스레 들었다.

“……그러게. 여기서 뭐해?”

내가 그리 대답하자.

루비아는 연못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잠이 안 와서. 입학 첫날이라 너무 설렜나봐. …나 내일 아침 일찍 수업 있는데, 너무 늦게 자면 안 되는데 큰일 났다. 에헤헤……”

바보처럼 웃던 루비아가 문득 나를 돌아봤다.

언제나처럼 무구한 시선이었다.

“…에지오도 잠이 안 와?”

나는 고개를 느긋이 저었다.

“……아니, 사실 엄청 졸린데 자고 싶지가 않아서 잠깐 산책하러 나온 거야.”

“그렇구나… 억지로 안 자길 잘했네, 나.”

“응?”

“으응. 아냐.”

루비아는 옅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기억 나, 에지오?”

“뭐가?”

내 물음에 루비아가 손으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그게 있지, 여기 에지오가 살던 집이랑 엄청 비슷하게 생겼더라구.여기에 이런 장소가 있는 줄은 몰랐어. 처음엔 완전 깜짝 놀랐는데… 여기 오니까 되게 마음이 편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앞으로 종종 찾아올 것 같아, 이 산책로.”

“…그러냐.”

“응.”

대화가 잠시 끊겼다.

어릴 적 루비아가 자주 드나들었던 내 집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오두막의 작은 연못 앞에서, 나와 루비아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 마주하고 있었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진 않았다.

우리 바로 옆의 투명한 수면 위를 버릇처럼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고요한 공기 속에 루비아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일이 막 생각나고 그래.”

“……”

루비아는 잔잔히 노래하듯 이야기를 풀었다.

“에지오의 집 앞에는 없었지만, 가까운 곳에 이런 연못이 하나 있었지. 우리가 아홉 살 때였나? 내가 에지오랑 그 주변에서 놀다가 발을 헛디뎌서 연못에 빠졌었잖아. 그때 연못이 생각보다 깊었던 것도 있었구, 수영도 완전 못했었으니까…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무서워서 물에 빠진 채 에지오 이름 막 부르구.”

“…그랬었지.”

루비아가 쿡쿡 웃었다.

조금은, 힘없는 웃음이었다.

“근데 에지오도 수영 못했잖아. 그럼 어른을 불러야 했는데, 거긴 우리밖에 없었어서 마을까지 가려면 한참 걸어가야 했었어. 우릴 도와줄 어른을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거야.”

“위험했었지.”

루비아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지 잠시 몸을 장난스레 떨기도 했다가, 별안간 희미하게 웃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응, 정말로. 위험했었어. 그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에지오가 아니었다면.”

“……”

“정말 아무 고민도 없이 뛰어들었잖아. 자기도 수영 할 줄 모르면서. 물에 뜰 거 같은 나뭇가지 하나 들고 내가 있는 곳까지 어떻게든 헤엄치구… 아래로 잠수해서 자기 밟고 올라가라고, 나 위로 올려보내구. 그러고 막 내가 엄청 발버둥 치는데도 화 한번 안내고 침착하게 돌 있는 데까지 물속에서 나 끌고 갔잖아. 그때 에지오도 가끔 숨은 쉬어야 했으니까 날 지지대로 삼긴 했었지만. 에헤헤……”

…그러게 말이다.

연못이 생각보다 깊긴 했어도 엄청 깊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만약 그보다 조금 더 수심이 깊었더라면 아마 우리 둘 다 거기서 죽은 목숨이었을지도 몰랐다. 루비아의 말처럼 되게 위험하긴 했다.

루비아가 교차한 팔 위에 머리를 얹곤 리듬감 있게 찬찬히 흔들었다.

“그러고 우리 둘 다 겨우겨우 물가로 나와서 물 잔뜩 마신 거 다 토해내고, 추워서 벌벌 떨구… 그래도 마지막엔 뭔가 웃겨서, 흙바닥 위에 드러누워서 엄청 웃었구.”

“……”

루비아가 새하얀 발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그때가 갑자기 생각났어. 되게 재밌었구나, 근심 걱정 하나 없이 행복했었구나…… 하고.”

“……”

“나는 정말 그때보다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에지오랑 놀았던 초등부 시절의 기억이 나한테는, 정말 소중하고… 다시는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야.”

“……”

“…에지오도, 그렇게 생각해?”

연못을 바라보던 루비아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까보다 누그러져서, 구부러진 눈꼬리가 조금은 슬픈 감정을 담고 있는 듯했다.

입 안에서 말을 굴리던 내가 대답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긴 했지.”

“……”

루비아는 조용히 되묻는다.

“……그럼 만약, 잊을 수 있다면 잊어버렸을 거야?”

“……”

익숙한 침묵이 찾아왔다.

왜인지.

그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루비아는, 일렁이던 눈동자를 작게 깜빡였다.

“있잖아, 에지오.”

“……어.”

짤막한 말에 루비아는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힘겹게 그 말을 꺼냈다.

“내가…… 많이 싫어졌어?”

내게 그런 질문을 하면서.

루비아의 누그러진 눈가는, 어느샌가 바라보던 연못의 물을 그 안에 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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